용병의 장(1)
1.
경유지 마을의 비극이 일어난 직후···.
클라르테의 마음은 따로 ‘정신감응’를 통해 확인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엑조틱은 사람의 목숨에 값어치를 매겼다.
그것은 마물 놈이 떠들었던 말처럼, 정말로 우리 인간이 스스로 가른 기준이기도 했다.
불길이 한 바탕 훑고 지나갔음에도, 빈민가 너머··· 상인들의 숙소는 그을린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부유한 자들은 단 한 명도 피해를 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날이 밝자마자 클라르테는 그 앞에서 소란을 벌였다.
경비단장을 불러내 괴물들의 진상과 빈민가에서 일어난 화재에 대해서 토로했었지.
그러나 어둠의 진실을 직접 경험한 우리나 그녀와는 달리, 경비대나 졸부들이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눈에 보이는 사실은 한밤 중, 허름한 뒷골목에 불이 났다는 것뿐이다.
헌데, 그 소동에도 불구하고 목격자는 없었다.
새벽엔 어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심지어 경계근무를 서고 있던 병사들마저 뭔가에 홀린 듯이 졸았다고 한다.
누구도 관측할 수 없는 다섯 시간 사이, 새벽이 찾아올 무렵엔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불행을 몰고 오는 도깨비의 장난과도 같이, 불길은 가지지 못한 자들의 거리를 태워버렸다.
‘그리고 그 전말을 알고 있는 건, 오직 우리뿐이었어.’
나는 클라르테의 노력을 안다.
그녀의 설명에 딱히 오류는 없었다.
조리 있고 훌륭하게 경비단장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통하지 않는다.
상대가 진상을 아는 것을 노골적으로 피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은 지저분한 빈민가가 저절로 사라져준 것을 환영하는 눈치였다.
그 정도로 사태를 가볍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경비단장은 그 의도를 숨기지도 않았다.
‘잘 됐지 않나? 마침 눈엣가시 같은 밥버러지들이 없으니까 속이 다 시원하구만. 이제 상단이 말과 화물을 새울 공터가 생겼잖나? 그럼 이제 이 마을도 제대로 번창하지 않겠냐고.’
나는 그 순간, 클라르테가 살의를 품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당장에 주변에 있던 병사의 칼집에서 장검을 뽑아들어, 경비단장의 목에 겨누었다.
물론, 전문적인 검술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던 그녀로서는··· 당장에 제압될 수밖에 없었지.
다행히 아직 클라르테를 좋게 보던 상단의 주인이 바로 중재를 해서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우리가 나서기도 전에 그녀는 처분당할 뻔 했다.
그 동안 환자를 가리지 않았던가?
귀족이든 부자든 자신을 찾던 사람들을 전부 공평히 최선을 다해 진료했던 것이 행운으로 돌아왔다.
단, 그 시점부터 주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대화의 요점에는··· 클라르테가 미쳐버렸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제 그녀는 신용마저 잃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이것이 5년간 그녀의 선의가 만들어낸 결과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독한 운명이다.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나았을 지도 모른다.
오래도록 돌본 환자들, 그리고 약자들에게 행한 애정의 결과가 고작 무수한 시체와 모멸뿐이라면···.
‘차라리 그 모습은 보지 않는 편이 나았을 것을···.’
수 시간 뒤, 우리가 마을을 떠나기 직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고집을 부렸다.
가장 친하게 지냈던 시튼의 주검을 두 눈으로 확인하려 한 것이었다.
그때, 나는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정황상 시튼은 최후의 순간까지 병상의 아내를 화마에서 지키기 위해 몸을 감쌌던 모양이었다.
우리가 허물어진 시튼의 집에서 본 것이 그걸 증명했다.
까맣게 타버린 두 구의 시신이 그런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파편을 등으로 꿋꿋이 막아낸 덩치가 큰 시커먼 숯덩이 아래에,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한 중년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클라르테는 자신의 옷이 검게 더럽혀지는 와중에도 그걸 품에 끌어안았다.
한 동안의 오열이 이어졌다.
허나, 그녀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클라르테가 다시 한 번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과정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는 말없이 우리의 뒤를 따라왔다.
2.
집결지로 돌아가는 며칠 동안, 우리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유는 역시 클라르테가 함께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마차에 함께 올랐기에 거의 항상 얼굴을 마주했지만, 그다지 살가운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우선 그녀의 피폐해진 심경이 제자리로 돌아오기에··· 사흘이란 시간은 너무도 부족한 것이었다.
클라르테는 가뜩이나 새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해져선, 한 동안 산송장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건 로이드조차도 가벼운 농담을 건네지 못할 정도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채였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그녀가 조금이나마 기력을 회복하고 나서 다시 입을 열었을 지도 몰랐다.
문제는 따로 있었지.
‘또 하나는 내가 그녀를 어색하게 대한 탓이었다.’
그것은 순전히 내 잘못이었다.
그 비극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클라르테를 볼 때마다 클라리스가 떠올라, 은근히 말을 섞는 것을 피했다.
그녀를 알면 알수록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걸 깨달으면서도···
내 뇌리 속의 기억이, 자꾸만 편견의 안개를 드리우고 마는 것이다.
이건 대스승이 말해준 합리적인 의심과는 사뭇 달랐다.
그저 내 독단이 섞인 의심암귀에 가까운 것이었지.
거의 바람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설마, 나는 아직도 그녀가 클라리스이길 바라고 있는 건가?’
단언할 순 없다.
나조차도 내 마음을 모르겠으니까.
허나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희망을 기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길 원한다.
그녀가 약자를 돕는 좋은 의사이며,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순진한 학자로 남아주었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그 본질이 위선에 가까운 것이어도 상관없다.
아직 사람들의 더러움을 알지 못한 여인의 유치한 자기만족이라 해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잿가루와 같은 혼탁한 세상에서 지켜야 할 가치를 또 하나 찾아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또 그것을 부정한다.
미워할 대상을 찾으라고, 내 본능이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클라리스도 그랬었다. 대가 없이 우리 마을을 구해주었지. 적어도 그렇게 보였었다. 어쩌면 그것도 속임수인가? 제물로 바치기 직전까지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한 위장이 아닐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클라르테의 뻔히 보이는 자기희생도···.’
아니, 아니다!
빅터, 너는 알고 있지 않은가?
최근 들어 더욱 강해진, 이 감정을 공유하는 빌어먹을 능력을 통해서 충분히 봤을 터이다.
그것에 거짓은 없다.
클라르테의 아픔은 적나라할 정도로 드러나, 마치 과거의 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온전하게 클라르테를 대할 수 없었다.
그녀를 측은하게 여기면서 동시에 속내를 파고드는 건··· 그 상반된 모순이 나의 내면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혼란을 자아냈다.
‘그러나 내가 클라르테와 틀어진 사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음은 그녀가 바라는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기 때문이었지.
클라르테가 지켜온 신념이 무너졌던 그 날, 그녀는 나를 무슨 구세주처럼 의지하며 간청했었지.
자신을 사냥꾼으로 만들어 달라고···.
나는 그것을 외면했다.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장 클라르테가 되물었던 것 같지만, 그 당시의 일을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필사적이었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왜냐하면, 상상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것들이 자꾸만 떠올랐기에.
‘그간 내가 겪었던 모든 걸, 클라르테가 다시 경험해야 한다고···?’
그녀는 밤새 마물과 싸워야하는 세계를 모른다.
그 과정이 얼마나 참혹한지, 또한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알지 못한다.
더욱이 이식···.
생 눈알을 도려낸 다음, 그녀가 그토록 증오해마지 않는 마물의 기관과 육체를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고통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다.
나는 클라르테가 그런 상황에 처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때 로이드 자식이 방해만 하지 않았어도···.’
그랬다.
클라르테의 요청을 독하게 쳐내려고 했던 나를, 로이드는 극구 말리며 쓸데없는 소릴 늘어놨었지.
그건 내가 마음대로 결정한 사안이 아니라면서.
‘후배, 빌헬미나 누님의 말을 벌써 잊은 거냐? 우린 단 한 명이라도 새로운 동지가 필요한 입장이라고!’
안다.
잘 알고 있지.
그만큼 마녀와 싸우는 자들이 마주하는 세계가 지옥 같다는 것도 말이다!
그걸 클라르테에게 굳이 보여 주겠다?
그녀는 의사다.
분명 실력도 있을 것이다.
더욱이 좋은 아가씨이기도 하지.
평소처럼 사회에서 병자들을 돌보는 편이 훨씬 이롭다.
그 재능을 외면한 채, 오직 살육뿐인 비인간적인 길로 접어들라는 건 너무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미래를 버리라고?
모든 가능성을 내치고 냅다 등을 떠밀란 말인가?
웃기지 마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로이드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내 생각 이상으로, 녀석의 의지는 강고한 것이었다.
‘그건 그냥 네 하찮은 잣대를 밀어붙일 뿐이잖아, 이 꽉막힌 새끼야! 상대 입장을 좀 생각해봐라. 그러면 너는 어떻지? 내가 듣기론, 넌 대스승이 직접 주워왔다며? 너는 지금 그 분을 원망하고 있냐? 이 길로 들어선 게 그렇게 후회되더냐?’
그럴 리 없지.
이 길은 나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책임은 내가 진다.
그리고 그건 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 논리가 클라르테에게도 통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대스승도 같은 기분이었을지 모르지.
애송이인 우릴 바라보던 빌헬미나의 심정 또한 그랬을 수도 있다.
‘너는 클라르테 아가씨의 각오를 얕보고 있는 거 아니냐?’
나의 침묵은 인정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하나하나 설명하기에 참을성이 부족했지.
무엇보다 나는 그 시점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내 근거 없는 고집이, 로이드가 가진 마녀 사냥꾼으로서의 긍지를 부정할 정도의 가치가 없었다는 걸.
‘역시 대스승께서 했던 것처럼은 안 되는군.’
언제나 그렇듯, 설득은 어려운 것이었다.
새삼 내가 말주변이 없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치게 느껴진다.
단, 이것은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이다.
단순히 오해라기엔 내 독단이 지나치긴 했으니까.
덕분에···.
그 뒤로 클라르테는 나에게 따로 말을 붙이지 않게 되었지.
결국 가장 큰 까닭은, 내가 그녀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탓이었다.
3.
“빅터 씨!”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우리가 마주한 것은 집결지 관리자의 열렬한 환영했다.
오랜만에 보는 아이라의 얼굴은 특히 반가웠다.
그녀의 해맑은 미소는, 고된 여행에 지친 우리를 보듬어주는 어떤 힘이 있었다.
사실, 내 관심사는 그녀가 꺼내온 오래 묵힌 곡주에 더 가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겨우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어,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유일하게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장소란 걸 새삼 느끼게 했다.
“잘 돌아왔구나, 둘 다.”
대스승은 모서리의 구석진 테이블에서 나와 로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슬픈 표정이었다.
돌아온 것이 우리뿐이란 사실에서 그는 이미 사태를 파악한 듯 보였다.
“보, 보고 드립니다!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로이드는 뻣뻣한 태도로 어울리지 않게 대스승의 앞에 섰다.
기본적으로 경박한 놈이지만, 역시 존경하는 대상에게 예의를 보일 줄은 아는 놈이었다.
“저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선배 사냥꾼 제리온이 목숨을 잃은 채였고, 그와 동행한 제자의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제공받은 정보와는 달리, 그곳은 마녀의 영토였기 때문에··· 상황을 파악한 시점에서 목표를 마녀 섬멸로 전환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색 과정에서 빌헬미나 누님이···.”
“됐다. 사정이 짐작되니, 거기까지만 하고 진정하거라. 그 이야기는 천천히 풀어보자꾸나. 그보다··· 그녀는 잘 보내주었느냐?”
그 물음에, 로이드는 울컥하며 입술을 질끈 물었다.
“예, 저희가···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래. 장하도다. 그녀도 저 세상에서 너흴 자랑스럽게 여길게야.”
“크흑! 으··· 죄송합니다, 대스승! 이런 흉한 꼴을 보여서.”
“괜찮다, 로이드여. 그 아이는 자네에게 특별한 사람이었을 테니. 여기서 까지 울음을 참을 것 없다. 이곳이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 맘 놓고 애도를 하겠느냐?”
“대스승···!”
“나도 마음 같아서는 함께 터놓고 울고 싶구나. 오히려 그래주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주려무나.”
어째서일까?
감정을 터놓는 로이드보다도···.
오래 알고 지낸 제자의 죽음에 무덤덤한 태도를 보이는 그가 더 괴로워 보이는 까닭은?
“그리고, 빅터여.”
대스승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다정함을 숨긴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수고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마치 나와 로이드의 고생을 전부 꿰뚫어보고 있는 것 마냥···.
그의 얼굴을 마주하자, 그제야 길었던 임무에서 비로소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감정을 억누른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예, 대스승.”
“보다 강해진 것이 느껴지는구나. ···다소 경솔한 수단을 쓴 모양이지만, 분명 그래야만 했을 이유가 있겠지. 지금은 그걸 탓하지 않으마.”
놀랍군.
내가 주제 모르고 이븐 가지의 분말을 남용했던 것을 들킨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질책을 각오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당장 대스승의 관심사는 다른 상대에게 향해 있었다.
바로 우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클라르테에게로.
“그런데 저 아름다운 적발의 여성분은 누구지? 이 늙은이에겐 언제 소개시켜 줄 텐가?”
대스승은 가볍게 던지듯 말했지만.
그의 정안은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외부인을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