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56화 (56/186)

재회의 장(7)

12.

이븐 가지의 분말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그것의 사용처는 무궁무진하지.

때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끔 만들고, 쓰기 나름에 따라 그림자와 일체화되기도 한다.

마치 마법과 같은 작용이다.

마녀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다량의 불순물이 뒤섞여 있다.

다시 말해, 마기에 담긴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이다.

원리는 모른다.

그것을 설명하기에 나는 지식이 너무도 부족하다.

그렇기에, 이식도 받지 않은 그녀가 어째서 이븐 가지의 분말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인간의 고양된 감정이 만들어내는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라는 사실뿐이었다.

“···하지 마, 그러지 말아요! 제발··· 제발요!”

클라르테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한다.

그 울음 섞인 간청에는 지옥에서 건너온 존재가 부여한 저주의 주박을 깨부술 정도의 숭고한 정신이 담겨있었다.

그녀의 필사적인 감정이 전해져온다.

가슴이 아릴 정도의 가공할 슬픔과 걱정이다.

클라르테는 자신이 수 년 간 돌봐오던 이들을 하나하나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어찌나 강렬한 지, 기억이 단막의 장면으로 눈앞에 그려질 정도였다.

5년간···.

그녀는 수 없이 많은 봉사를 이어갔다.

약자를 돕는다.

가난한 이에게 베푼다.

병마를 이겨내도록 치료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를 주는 것이다.

거룩하다.

신앙 따위가 없어도 인간은 이처럼 타인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또 한 번, 그녀에게서 과거의 클라리스의 모습을 엿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조금이라도 손을 됐담 봐,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해서든 당신을!”

같잖은 협박, 헛웃음이 다 나올 정도의 엄포다.

하지만 거기엔 나나 로이드에게도지지 않을 기백이 담겨있었다.

이 방안이 가득 찰 정도의 이븐 가지의 분말은··· 바로 그녀의 순수한 분노가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이런이런이런,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 오히려 기뻐하셔야지요? 당신이 돌보던 낙오자들은 우리의 훌륭한 과실이 되었으니까요.”

“그만해요!”

“뭘 말입니까?”

“사람을, 인간을 그런 식으로···.!”

“아니, 댁들도 가축의 고기 정도는 취할 것 아닙니까? 뭐, 우리는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유희를 위해서지만. ···그런데, 조금 불쾌한 소리를 하는 군요. 한낱 피와 살을 가진 존재에 불과한 당신 따위가, 저를 용서하지 않으면 뭘 어쩔 거죠? 예?”

클라르테의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감정을 끌어올려 목소리를 내어도, 주박에서 풀려난 몸뚱이로 두 주먹이 으스러질 만큼 쥐어봤자···.

그녀는 눈앞에 있는 존재에 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록 위축되지 않는다고 해도, 물러섬 없이 꼿꼿이 맞선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육신은 놈의 말대로 보잘 것 없어, 마물을 죽이기는커녕 상처조차 입히지 못한다.

의지는 있으나 무력하다.

그래서 노신사, 자신을 엑조틱이라 지칭한 저 너머의 정신 생물체는··· 조금의 위기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실로 어리석게도 말이다.

“그래그래그래그래, 좋습니다. 잘 하고 있군요. 얌전히 있으면 됩니다. 그게 최고의 예우이자, 주제를 아는 것이죠. 그렇게 모호한 공포를 품은 채, 쭉 우리를 두려워하며 떨면 충분합니다. 하찮은 당신들 인간에겐 그 편이 어울리···.”

“닥쳐!”

“아?”

콰지직!

노신사의 고개가 돌아감과 동시에, 도끼날이 놈의 오른쪽 어깨 속으로 파고든다.

말라붙은 승모근을 가르고, 견갑을 부러뜨려 갈비뼈 뭉텅이까지 토막내주었다.

마물은 눈을 크게 뜨며 탄성을 질렀다.

“오, 오오··· 당신도 풀 수 있었던 겁니까?”

클라르테 덕분이었다.

그녀가 속박에서 벗어난 직후, 나는 이븐가지의 분말을 깊은 호흡으로 빨아들였다.

‘직접 흘려 넣는 건 오랜만이군. 제길, 머리가 깨질 것 같다. 하지만 집중해라. 이건 정신을 조금만 놓쳐도 발광하게 되니까···.’

과거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 이 신비의 가루는 타인에게서도 취할 수 있는 것이니까.

공간을 일그러뜨린다느니, 우리는 모르는 원리의 법칙을 써서 몸을 막아선다고 해도···.

결국 인간의 의지 그 자체까지 꺾을 순 없는 것이다.

“놀랍군요! 이 시간대에서 유독 특이 현상이 많이 관측된다고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 줄이야! 과연과연과연과연,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인가! 혹시 당신 같은 자들이 이 세계에 넘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현 시대의 당신 종을 보다 고평가할 수밖에···.”

“네 수다는 이제 신물이 난다!”

또 한 번, 나는 땅을 박찼다.

그리고 양손에 실은 힘의 무게를, 도끼 자루로 흘려보냈다.

그대로 놈의 왼쪽 위 사선을 노린다.

퍼석!

이번에야말로 놈의 몸을 양단했다.

꼴좋게도, 노신사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거이거이거이거, 거칠게 다뤄주시는 군요.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던 소체인데 말입니다. 아무리 제가 본체가 따로 있다 해도, 손상이 크면 이 몸도 죽어버린 다고요.”

제기랄, 역시 목부터 노렸어야 했나?

“눈빛이 건방집니다. 하지만 이젠 화도 안 나는군요. 불쌍하게도, 당신은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인 저와 나누는 소통이 즐겁지 않은 모양이군요.”

“헛소리, 너는 네가 무슨 신적인 존재인 줄 아나?”

“고대엔 우리 동족들이 그렇게 불린 적도 있었다고 하죠? 인간들이야 그렇지요. 댁들은 언제나 절대자를 원하는 불완전한 생물이니.”

“다물어라. 너희 같은 괴물을 섬기다니, 끔찍하기만 할 뿐이다.”

“도통 모르겠군요. 정신의 수양이 될 수도 있는 이 좋은 기회보다, 의미 없는 육체의 충돌이 더 좋습니까? ···음, 그런데 체액이 급속도로 떨어지니 움직이는 게 좀 힘들군요. 당신들은 이런 걸 어떻게 감내하고 살아가는 거죠? 역시 형태를 갖춘 육신은 적응하기가 영···.”

그렇다면 아픈 척이라도 하란 말이다.

애초에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이, 양팔을 잃은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내게로 걸음을 옮겼다.

무방비하군.

나는 이것을 노렸다.

“로이드, 지금이다!”

“알고 있어!”

노신사의 바로 뒤에서 로이드의 은색 실이 허공에 빛을 발한다.

녀석도 내가 이븐 가지의 가루를 다루는 것을 보고서, 바로 행동에 옮겼던 것이다.

“오호, 유성의 동소체를 압축한 실입니까? 이건 꽤나···.”

감탄을 하긴 이르다.

로이드가 다루는 실의 위력은 지켜보는 사람이 다 오싹할 정도니까.

거기다··· 이 좁은 방안에선 피할 공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끝이다, 망할 괴물놈아!”

녀석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악기를 다루듯 세련된 움직임을 선보였다.

그러자 방안에 배치된 의자와 테이블에 균열이 인다.

소리도 없이, 죽음의 덫이 한 점을 향해 가속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증스런 마물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순식간에 덮쳐오는 예리한 은사가 놈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후두둑!

사방으로 신체의 일부가 나뒹군다.

이어서 벽면으로 핏물이 튄다.

놈이 위장하고 있던 육체는 사람을 완벽히 복제해낸 것이었을까?

그것은 우리의 것과 같은 선명한 진홍빛이었다.

“더 떠들지도 못하겠냐? 싱거운 새끼였잖아?”

말 그대로, 노신사는 온갖 허세를 부리던 것치곤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오히려 사람의 모습을 가진 것을 처참하게 훼손해서 뒤끝이 나쁠 정도로.

“개자식!”

로이드는 바닥에 떨어진 노신사의 반쪽짜리 얼굴을 구둣발로 짓뭉개더니.

“결국 사람 흉내 내는 것 말곤 마땅한 재주도 없는 놈이···!”

혐오를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친 행동은 단순히 상대에 대한 적개심 때문만이 아니었다.

로이드는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쳇, 너랑 다니니까 별 경험을 다 한다. ···으윽. 뇌에, 뭔가 중요한 걸 관장하는 부위에 벌레라도 들어간 기분이야.”

“선배라고 유세부리고 싶다면, 괜히 징징거리지 마라. 금방 괜찮아져.”

“넌 언제나 행동이 지나쳐, 임마! 망설이지도 않고 가루를 직접 머릿속에 흘려보내다니··· 두 번은 못할 짓이야.”

“유난 떨고 있군.”

“너 설마, 가루를 직통으로 처마신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 거야? 이 자식아, 너 그건 금기라고! 대체 이븐 가지의 분말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뭘 놀라고 있는 건지, 로이드는 갑자기 잔소리를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하여간 성가신 자식이다.

가뜩이나 머리 아픈 소리만 하는 괴물 놈과 한참을 떠들었는데, 이번엔 로이드 놈까지···.

“저기, 두 사람··· 잠시만요!”

그때, 클라르테가 끼어 들었다.

그녀는 아직도 불안한 지,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우리에게 물어왔다.

“전부··· 끝난 건가요? 당신들이 그 자를 쓰러뜨렸으니, 이제 모두 무사한 거죠?”

“그래, 아가씨. 아마 그럴 거야. 아무래도 이 떠벌이 괴물 놈이 마물들의 대장 같았으니까.”

“정말··· 정말인거죠?”

“그건 저 치한테 물어봐.”

로이드는 내 쪽을 향해 턱을 가리켰다.

나더러 확답을 해주라는 눈치였다.

나는 도끼를 회수하며, 어떨 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행, 이다.”

···라고 그녀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군.

아무리 봐도 황당한 마음씨를 가진 여자다.

정체모를 마의 존재와 대면하면서도, 정작 다른 사람의 신변을 쭉 염려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런이런이런이런···.”

다시금 꺼림칙한 악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저를 앞에 두고서도 아주 여유만만이시군요.”

이럴 수가!

이건 누구를 탓해야 하는가?

부주의하게 주저앉고만 클라르테를?

아니면 수다를 떨면서 긴장을 푼 로이드를?

아니, 이건 상황이 끝났다고 멋대로 착각하던 나도 포함이다.

마물은 아직 죽지 않았다.

심지어는 일말의 타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거죠? 잊었습니까? 지금까지 설명했을 텐데요. 저에게 육체 같은 건 단지 여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주변을 더럽힌 피 웅덩이가 역류한다.

토막 난 살점과 가죽이 흐물흐물하게 녹더니, 점토처럼 뭉쳐졌다.

그것이 다시 사지가 달린 형상을 만들고···.

수초도 지나지 않아, 말끔한 노신사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아셨겠지요? 물리적으로 이 육체를 아무리 파괴해봐야, 아무 것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제가 아주 조금 성가셔질 뿐이죠.”

눈동자가 없는 안구가 넋이 나간 우리의 모습을 비춘다.

놈은 흡족하게, 그러면서도 끔찍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안심하시지요. 우리는 약속을 잘 지킵니다. 한 번 꺼낸 말은 결코 어기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만큼은 죽이지 않을 겁니다. 그 목숨은 보장해드리죠.”

“웃기지 마라!”

멋대로 하게 내버려둘 성 싶으냐?

몸을 토막 낸 정도로는 죽일 수 없다?

그게 뭐가 어쨌단 거지?

힘의 차이든, 존재의 격이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을 문제다.

그렇다면 날이 밝을 때까지 몇 번이고 찢어주마.

미지의 두려움 따윈 분노로 덮어서 맞설 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나와 로이드는 그럴 각오로 다시금 놈을 덮칠 생각이었다.

결코, 이 마물이 우리 외의 사람들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이런이런이런이런, 이제야 알겠습니다. 다들 착각을 해도 아주 크게 하고 계시구만. 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압도적인 폭력으로 댁들을 죽지 않을 정도로만 곤죽을 내주는 것쯤, 식은 죽 먹기지만··· 이 싸움은 무의미하죠.”

“뭐라고?”

“늦었습니다. 당신들에겐 이미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놈은 우리를 무시하고 클라르테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아까 당신은 나에게 빈민들에게 손을 대기만 해도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고 했었지요?”

“아···?”

“듣지 마! 그건 놈의 헛소리···.”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이거이거이거이거, 제아무리 미물의 원한이라 해도 마음이 좋지 않군요.”

“무슨 말이에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요!?”

“제가 당신들과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모든 건 끝나 있었단 소리죠.”

“···네?”

“이해가 느리군요. 아니면 받아들이는 걸 거부하는 겁니까? 다 죽었답니다. 한참 전에, 우리 동족들이 바깥에서 피의 축제를 끝마쳤습니다. 이미 열 댓 시간이 지났죠. 아마 지금쯤 바깥은 해가 뜨고 있을 겁니다. 아주 잠깐 처럼 느껴졌나요? 그럴 수 밖에! 제가 이 공간에서 시간을 일부 조정해두었으니 말입니다!”

놈은 또 한 번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것은 상대가 무너지는 것을 순수하게 즐기는, 그야말로 악마의 미소였다.

“붉은 머리칼의 그대여! 저는 이 업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모쪼록, 부디! 이 몸을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주시길!”

“아, 아아아, 아아아아아!”

클라르테의 비명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와 로이드는 거의 동시에 튀어나갔을 것이다.

그 순간, 우리의 생각은 일치했다.

내가 놈의 목을 베고, 로이드가 또 한 번 사지를 찢었다.

하지만 이번엔 놓치고 말았다.

노신사의, 아니··· 엑조틱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연기가 되어 홀연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도망치지··· 마라!”

“도망? 하하하, 멋대로 생각하시길. 언젠가 저와 마주했음에도 살아난 걸 행운으로 여기는 날이 올 것입니다.”

나의 외침에 놈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일방적인 작별이었다.

“역시역시역시역시, 이 시간대는 흥미롭습니다. 당분간은 더 유희를 즐길 수 있겠군요. 이 좌표는 기억했습니다. 언제든 댁들이랑 놀 수 있도록! ···자, 그러면, 당신들의 언어를 빌려 운치 있게 인사드리죠. 인연이 닿는다면, 또 뵙겠습니다. 저에게 사소한 감격을 준 지적생명체들이여.”

그것이 끝이었다.

정말로 놈은 그 말만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상처는··· 없다. 나나 로이드, 클라르테 모두 다치지 않았어.’

그러나 패배했다.

이토록 발악했는데도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이지 못했다.

뒤늦게 분노가 차올랐다.

그것은 적을 앞에 두고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경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때, 뭔가를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

처참한 무력감을 느낀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걸.

“잠깐, 아가씨!?”

클라르테가 방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선다.

로이드는 그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녀의 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절망의 실체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말았다.

“···제길.”

로이드가 내 대신 감정을 드러내주었다.

나는 정신감응을 하지 않았음에도, 녀석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있었다.

그 정도로 바깥의 풍경은 끔찍했다.

피비린내가 섞인 탄내가 난다.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저 먼 곳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올라, 이미 한참 전에 전소가 된 모양이었다.

누군가 살아있길 바라지만, 그것마저도 욕심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껏 이 소동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설마하니 올비우스··· 엑조틱이라던 마물이 정말 우리가 있는 공간만을 보호해주고 목숨을 부지시켜 주었기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놈의 말이 맞았다.

정말로 전부 옳았던 것이다.

우리는 너무 늦었고, 아무도 구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로이드와 나는 비극을 막지 못한 것에 깊은 탄식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클라르테는 달랐다.

“···빅터 씨, 로이드 씨.”

그녀는 울부짖거나 발광하지 않았다.

그저 타들어간 마을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우리의 이름을 읊조릴 뿐이었다.

“이건, 당신들 탓이 아니에요.”

얼핏, 그것은 매우 무미건조하고 냉정하게 보였다.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가?

아니면 그간 사람들을 돕고 지내던 5년이, 그녀에게 있어서 의외로 크게 와닿지 않았던가?

아니, 내게로 전해져오는 그녀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끓어오를 수분조차 남지 않은 철판을 상상해보라.

아궁이게 달궈진 쇳덩이는 그 자체만 보아선 단순히 벌겋게만 보인다.

고요하게 열을 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뭔가가 닿는 순간, 이내 미친 듯이 끓어오르지.

그리고 이내 녹여버리거나 태워버린다.

결코 가벼이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정도로 클라르테는 격하게 증오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괴물들과 싸우는 전문가들이죠?”

“클라르테···.”

“그러면, 그것을 죽이는 법을 알고 있나요?”

“아가씨, 이럴 때일수록 진정해야···.”

“대답해줘요!”

말을 돌려봐야 이 상태론 그녀를 놀리는 것밖에 안 된다.

나는 클라르테에게 솔직히 답했다.

“모른다.”

“그래···요?”

“하지만 우리의 스승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스승?”

“약속하지. 복수는 우리가 하겠다. 놈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너에게 맹세하···.”

“···필요 없어요.”

“뭐?”

“내가 직접 할 거니까.”

그 순간, 클라르테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오싹한 표정을 지었다.

순수한 선의일수록 더욱 폭발적인 분노를 만들어내는가?

대스승이 나에게서 엿보았던 가능성은 바로 이런 것이었나?

그녀는 잠시 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선언을 내뱉었다.

“빅터 씨, 저를··· 데려가세요. 그 스승이라는 사람에게! 그리고··· 저를!”

그것은 과거의 나였다.

모든 걸 잃은 직후의 내 모습이었다.

클라리스는 필사적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을 참았다.

그리곤 가슴을 쥐어짜듯 목소리를 토해냈다.

“저를, 당신과 같은 사냥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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