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의 장(3)
재회의 장(3)
5.
클라르테.
나는 그 이름에서 불길한 기억을 떠올렸다.
잊을 수 없다.
어떻게 까먹겠는가?
그것은 클라리스가 나를 조롱하면서 내뱉었던 수 많은 이름 중 하나였으니···.
‘이 몸은 오래 전엔 클라르테. 때론 클레르··. 어느 시점에선 클로제라고도 불렸지. ···대륙을 넘어 온 이후부턴 비슷비슷한 이름을 댔어. 대충 클라리아, 클라리사··· 그리고 네가 아는 클라리스까지.’
클라르테와 클라리스···.
마치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이름같다.
그러나 이 둘은 분명 다른 사람이다.
뼛속까지 은둔자이며, 북적이는 것을 싫어하며 사람을 피하는 클라리스와는 달리··· 클라르테는 사람을 거느리고 다니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거기다 나는 대스승과 레이에게서 마녀는 결코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배웠지.’
그런데 클라르테 쪽이 훨씬 어리다.
시간을 역행하는 마법 같은 것이 없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이처럼 연령이나 성격부터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지.
그리고 5년간이나 이 마을에서 살아왔다는 걸 증언하는 이들까지···.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 서로 다른 인간이 이토록 닮을 수 있단 말인가?’
연관이 없을 리 없다.
하다못해 같은 후손··· 개 같은 우연이라도 먼 시간에 걸쳐 태어난 클라리스의 핏줄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있음직한 추론보다는, 어째 꺼림칙한 의구심이 든다.
무시무시한 가능성이 다 떠올라, 어쩌면 자색의 마녀란 것들은 동시에 여럿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것은 운명의 교묘한 장난인가?
아니면 단지 마녀의 분신인가?
어째서일까?
나와 로이드 사이에서 팔짱은 낀 채 앞장서는 이 여자는, 왜 이토록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거지?
6.
···클라르테란 여자는 예상 이상으로 막무가내였다.
마치 나와 로이드가 부려먹기 좋은 인부라도 되는 마냥 질질 끌고 다녔지.
물론 일 자체가 힘들다기 보다는, 상상 이상으로 활달한 그녀의 성격 탓에 피곤함이 컸다.
“좋아요, 할머니. 이틀 전보다 상처가 많이 아물었네요. 하지만 언제든 곪을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하도록 하세요.”
“아아, 고마우이. 처자가 있어서 내가 명줄을 조금 더 연명하는구만.”
“그런 말씀 마세요. 이 정도 병은 돈만 있으면 누구라도 치료할 수 있는 걸요. 무슨 일이 생기시면 바로 연락하시고··· 그럼, 다음 환자 분!”
허리가 굽은 할망구가 나가자, 그녀가 손짓한다.
곧장 다른 사람이 들어와, 이번엔 다리를 저는 지저분한 어린 애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두 시간 넘게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아직 뜨거운 물이 부족해요. 좀 더 준비해주시겠어요?”
“아니, 또? 나는 방금 전에 다녀왔다고, 이 아가씨야. 좀 쉴 틈은 주고···.”
“아야야, 저 덩치 큰 사람한테 졸린 목이 갑자기···.”
“아, 예! 초면인데도 참 징하게 부려먹네.”
“어머, 다 들리는데요?”
“네 동행이 저지른 잘못이니까 불평하지 말고 일하라고!”
“쳇,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 나중에 보자, 이 썩을 후배 놈아.”
그러면서도 꽤나 성실하게 움직인다.
투덜거리면서도 양동이를 두 개나 챙기는군.
누군가를 돕는 것이, 그렇게까지 싫지만은 않은 듯 보였다.
“덩치, 너도 쉬고 있지 마라. 장작이 모자라잖아! 불이 꺼지면 네 잘못이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클라르테와 동행해온 잡일꾼들이 내게 성을 낸다.
아무래도 지금 나는 제대로 미움 받는 입장인 모양이다.
하기야··· 대놓고 은인이라 불러대는 여인의 목을 조르려 했던 내가 곱게 보이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장작을 패라고?
좋지.
덕분에 이제야 제대로 된 도끼를 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클라르테는 몰라도 주변 사람들은 아직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다.
자루를 잡자마자 분위기가 가라앉은 게 새삼스레 느껴질 정도다.
소동을 벌이기엔 방해꾼이 많다.
나는 마지못해 그들이 요구하는 장작을 쪼개야만 했다.
‘그런데 이 변두리에 야외 진료소라···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조악하군.’
의사란 직종은 부유하다고 알고 있다.
생명을 주관하는 지식을 가진 자들이니, 어딜 가든 그만한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저하게 의술의 길만을 탐구하는 인간은 개중에서도 극소수다.
보통은 어느 시점에서 졸부의 주치의나, 귀족의 작위를 얻기 위해 알랑방귀를 뀌는 작자들로 변화하지.
거들먹대고 자기 잘난 맛으로 사는 재수 없는 작자들···.
그것이 내가 아는 의사란 놈들이었다.
그런데 세상에는 드물게 예외도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단순히 저 여자가 지독한 괴짜인 것인지도.
‘여태 아무런 품삯도 받지 않는 것 같은데.’
이곳은 하필 낙후된 지역이다.
지금까지 클라르테가 상대한 이들은 하나같이 너무 늙었거나, 너무 어린 자들··· 모두가 몸이 성치 않는 이들 뿐이었다.
그 자체론 이상하지 않다.
상인들이 드나드는 경유지에 있는 마을이라 할지라도, 이처럼 도태된 사람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허나, 그런 것치곤 일절 대가가 없다.
의사도 인간인 이상 먹고 살아야 뭐라도 할 것을···.
그녀는 마치, 환자들의 입 발린 감사 인사만으로 배를 채우는 듯 보였다.
‘주제에 맞지 않는 짓거리다. 성인의 흉내라도 내볼 셈인가? 옆에서 돕는 사람들도 그래, 알게 모르게 부채질을 하는군. 저래서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겠나?’
서민, 그것도 이런 마을 외곽에 사는 병자들이 돈이 될 리 없지.
열성적이라 해야 할지, 어찌 보면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진료다.
같잖은 헛짓, 이런다고 대체 누가 노고를 알아준단 말인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마음에 들지 않아, 내 눈에는 그녀가 하는 행동 모두가 위선처럼 비춰졌다.
‘제기랄···.’
아니, 사실은 내가 초조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안다.
고작 몇 시간 지켜본 것에 불과하지만, 클라르테의 행동은 훌륭하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사의 귀감이다.
위선을 논하기 이전에, 머리로 안다고 해도 쉽사리 실행할 수 있는 게 아닐 터였다.
가공할 이타주의, 보통 사람의 것을 훨씬 뛰어넘는 희생정신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아갈수록, 나는 그것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연중에 클라르테가 속이 검은 면모가 있길 바라고 있었을 정도로···.
그랬다면 적어도 이 어설픈 호의만은 품지 않았을 텐데.
가슴 속의 응어리만 남긴 채, 나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장작을 필요 이상으로 토막냈다.
7.
예정에 없던 봉사 시간은 그로부터 서넛 시간 정도 더 이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저물기 직전이었다.
그 동안 거동을 할 수 없는 환자를 들것으로 옮기고, 오물에 절여진 아이를 몇 명이나 목욕시켰지.
어차피 하루 동안은 말들을 쉬게 하려고 생각했지만···.
이래선 그저 시간낭비··· 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수고했네. 자네, 체력이 장난 아니더군. 그 많은 일을 혼자서 마무리하다니. 솔직히 골탕 좀 먹어보라고 시킨거였는데 말이야.”
클라리스의 옆에 붙어서 보조를 하던 중년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이름은 분명, 시튼이라고 했던가?
그는 내게로 다가오더니 내 가슴을 가볍게 주먹으로 치더니.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화는 다 풀렸으니까. 시킨 일을 묵묵히 하는 놈은 대게 좋은 자식이지.”
어째서인지 남자는 내가 마음에 든 듯 했다.
장작은 창고 가득 쌓으면서 그가 기분 좋게 웃었던 게 기억난다.
“뭐, 클라르테에게 한 짓을 아직 용서할 수 없지만 말이야.”
“그건···.”
“됐네. 이제 와서 정신이 나간 외지인 따위엔 관심 없어. 뭐, 선생의 말로도 뭔가 사정이나 착오가 있었단 모양이니 봐주라고 했으니까. 그녀에게 감사하게. 끝끝내 자네를 손봐주자던 혈기 왕성한 자식들을 말린 게 클라르테 선생이야.”
험상 굳게 생긴 것치곤 꽤나 호인인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어지간히도 그 여자에게 깊은 신뢰를 가졌나보군.
“···기특한 아가씨이지 않나?”
어느새 그의 시선은 잠깐 휴식을 취하는 클라르테에게로 향해있었다.
“요즘 시대에 저런 참한 여인은 없지. 거짓말처럼 실속을 모른다네. 대단하지 않나? 그녀는 보통 장정이라도 질겁할 일을,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하고 있지.”
“삼일이라···.”
“그마저도 주머니 사정 때문이야. 그것만 아니었다면 매일이라도 진료를 했을 지도 몰라. 사정이 좋지가 않아. 다행히 일전에 선생에게 신세를 진 상인이 있거든? 그 놈이 약간 지원해주긴 하지만, 그걸론 약초를 사는 것만도 버거우니까 말일세.”
역시 수지가 맞는 일은 아닌가 보군.
“생각해봐. 노파나 애들이 무슨 돈이 되겠나? 전부 선생이 자기 몫까지 바쳐서 돕고 있는 거지. 크으··· 아깝구만! 저렇게 좋은 여자라면,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온갖 추파를 다 보냈을 텐데.”
듣는 쪽이 다 주책이라고 느껴질 만큼 저급한 농담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곤 흡사 딸아이를 바라보는 아버지와 같아, 흑심 대신 안타까움을 품은 그윽한 눈빛이었다.
“그야말로 천사지. 수도까지 외면한 이 역한 시대에도 언제나 구원의 여지는 있음이야. 어떤 인간에게도 가호를 내리는 여신의 재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이쯤 되면 종교적 찬양에 가깝군.
대체 얼마나 제대로 씐 건지···.
“당신도 그녀에게 빚이 있나?”
“아무렴. 내 얼굴을 보게. 이런 몰골의 사내가 소싯적에 뭘 하고 먹고 살았을 것 같은가?”
“모르겠군.”
“지금은 좋은 사람인 척 선생을 돕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산적이었네. 꽤 잔혹한 놈이었지. 이 인근에선 ‘난도질장이 키튼’이라고 하면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로.”
그랬던가?
어쩐지 내가 클라르테를 건들었을 때, 그의 태도에 묘한 살기가 섞인 것 같았다.
“나뿐만이 아니야. 여기 모여서 애써 그녀를 돕는 놈들 전부가, 한때는 나름 한 주먹 하던 불량배들이지. 하지만 우린 모두가 그녀에게 크던 작던 도움을 받았네.”
그래서 인망이 깊었던 모양이군.
“그녀는 5년 전 홀연히 이 마을에 나타났지. 그 날을 절대 있을 수 없어. 다짜고짜 내 집에 쳐들어와선 말이야, 병석에 누워서 앓기만 하던 아내에게 다가가더니 갑자기 비는 거야. ‘제발 이 사람을 제가 살릴 수 있게 해주세요!’ 라고 말이지.”
“···.”
“선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꼼짝없이 마누라를 잃고 말았을 거야. 아, 그렇지. 내 뒤에서 뒷정리하는 저 뚱뚱한 자식 보이나? 일전에 턱이 작살난 적이 있어. 선생 덕에 겨우 이로 고기를 씹을 수 있게 됐지. 바로 앞에 있는 저 친구는 아들이 죽을 뻔 했었어. 그리고 또···.”
“···.”
알만하다.
내가 클라리스에게 은인의 감정을 느낀 계기도 비슷한 것이었으니까.
아델라이드를 구해준 그 날을 기점으로, 그녀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 수법인가?
아니,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란다.
“자, 어때? 내가 왜 굳이 자네에게 이런 예전 일을 말하고 있는지 알겠나?”
“협박인가? 더 이상 그녀를 건드리지 말라는 엄포 같군.”
“허허, 물론 그것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클라르테 선생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하는 이야기일세.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원한을 살리는 없어. 그만큼 나는 선생을 진심으로 믿고 있지.”
“그런가?”
“그 무뚝뚝한 얼굴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다시 한 번 보라고, 저 어여쁜 아가씨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말이야.”
다짜고짜 어깨동무를 해온다.
그리곤 살짝 졸면서 의자에 기댄 클라르테를 가리킨다.
“사람의 지혜란, 의술이란 놀랍지? 저 아가씨가 있기에 이 빈민굴이 그나마 사람이 사는 곳이 됐어. 선생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병이나 상처를 치료한 녀석이 겨우 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아주 흥분해서 떠들어댄다.
누가 보면 술이라도 거하게 한 잔 마신 줄 알겠군.
거칠고 고압적인 성격···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어머니에게 물려받고, 탄광의 마녀를 통해 개화된 ‘감정을 공유하는 힘’이 그가 얼마나 순수한 호의를 가졌는지 전해주었으니까.
이것은 내가 과거에 클라리스에게 품었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나는 확신이 서질 않는다.
‘죽여야 하는가? 자신을 희생해가면서까지 불우한 자들을 돕는 그녀를?’
클라리스와 연관이 없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유부단한 망설임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내버려둬도 좋지 않은가?’
그녀가 마녀란 증거도 없다면, 이처럼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도록 그저 방치하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클라르테 선생!”
상황은 내가 클라르테의 처우에 대해서 고뇌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상의를 입지 않은 젊은 놈팽이 하나가 서둘러 달려오더니.
“선생,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젠장, 제기랄!”
그 부름에 의자에서 잠깐 졸고 있던 클라르테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다.
상대의 심각한 목소리에 잠이 다 깼는지, 그녀는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되물었다.
“브라이언? 갑자기 무슨 일이죠?
“버, 번화가에 사람이 다쳤어! 선생이 얼른 가봐야 해!”
“알겠어요. 바로 움직이죠. 키튼 씨, 도구를 좀 부탁드려요. 자, 브라이언··· 당신도 좀 진정하고”
“진정은 무슨?! 난 그걸 눈앞에서 봤단 말이야!”
“네?”
“그게 나왔다고!”
어째서인지 사내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눈에 핏발마저 보여,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양손을 바들바들 떨 지경이었다.
그는 몰려든 주변 사람들은 아랑곳 없이, 자신이 보았다는 그것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 요물이··· 도플갱어doppelgänger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