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의 장(2)
4.
솔직히 말해 방심하고 있었다.
그것과의 만남은 보다 극적으로 이뤄질 거라 막연히 생각했었지.
하지만 인생은 바로 앞조차 예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착각이 아니길, 부디 내 엇나간 바람이 환각을 만들어 낸 게 아니길!’
저 생김새,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목소리마저 예전 그대로다.
클라리스다.
틀림없이 그녀가 있다.
그러나 그 또렷한 형상에 나는 그만 의심하고 만다.
꿈에 바라마지않던 복수의 기회일 터였음에도 도무지 믿겨지지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제 아무리 냉정을 잃었다 해도, 무의식이, 뼈에 사무친 원한이 몸을 저절로 움직이게끔 만들었다.
눈이 뒤집어져도 그녀만이 보인다.
북받치는 감정은 오직 클라리스에게로 집중되었다.
어느새 내 다리는 그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자식, 아직도 볼일이 남았··· 끄아아악!”
“데이빗! 커헉!”
내 앞을 막지 마라.
나에겐 그렇게 경고할 여유조차 없었다.
이전 임무에서 도끼가 박살난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서 사망자가 나왔을 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갑자기 무슨 짓··· 쿨럭!”
“이봐요?!”
하나같이 방해꾼들뿐이다.
빌어먹을···.
몇 녀석을 날려버린 걸 그 사이에 클라리스가 눈치 챘는지 뜀박질을 시작했다.
놓칠까보냐?
이제 행인이든 뭐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왜 클라리스가 이곳에 머물고 있는 지도 아무래도 좋다.
어째서 나를 모르는 척, 같잖은 시치미를 떼고 있는 지도 신경쓰지 않겠다.
복수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웃기지 마라!
도끼가 없다면 쇠사슬로 목 졸라 죽인다.
아니, 그건 내 양손으로도 충분하겠지.
만약 두 팔이 뭉개졌다면 이로 목의 경동맥이라도 물어뜯으리라.
이건 하늘이 내려준 기회다.
‘죽여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어!’
자색의 마녀, 클라리스.
육망성의 일원이자, 500년 이상을 살아온 최흉최악의 마녀.
그리고 나의 원수···.
‘여기서··· 내 손으로 끝내는 거다!’
이대로 녀석을 놓치면 또 다시 비극이 일어난다.
이 이상 고향 사람들··· 내 가족과 같은 피해자가 생기게 둘 수는 없다.
그래, 오랜 친구여···.
너의 목숨을 회수할 권리는 이 몸에게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에게!
네가 찌꺼기라 내려다본 이 변방 마을의 사냥꾼에게 죽는 것이다!
“클라리스···!”
여자치곤 걸음이 빠르다.
교묘하게 인파가 몰리는 곳만 골라서 길을 헤쳐 나가고 있어.
괘나 성가신 움직임을 보인다.
영리한 사냥감이다.
이대로 나를 끌어들일 작정인가?
마침 교차로를 지나 건물 사이의 골목으로 들어갔군.
그런데 저 구조를 보아하니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을 텐데?
그렇다면···.
‘함정이냐?’
사역마가 있을 지도 모른다.
중합체···.
아니, 500년 이상 묵은 마녀인 이상··· 그 이상의 대비를 해놓았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이 경유지 마을 자체도 그녀의 노림수일 수도 있다.
뭔진 몰라도 어떤···.
‘···젠장, 전부 쓸데없는 생각이다!’
뭘 망설이는 거지?
아직 혼란이 남아있나?
그녀를 만나는 게 두려운 것은 아니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까지 충분히 놀랐어, 더 기괴한 세상의 모습을 몸으로 직접 체험해왔다.
더 이상 마녀를 죽이는 것에 망설임은 없다.
이미 둘 이나 죽였다.
큰 원한이 없음에도, 양쪽 다 처절할 정도의 사연을 가진 슬픈 운명의 소유자였음에도!
나는 끝내 대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그녀들의 숨통을 끊었던 것이다.
하물며 저주스런 클라리스라면?
내가 직접적으로 원망하고 있는 그 녀석이라면···.
“···.”
철컹.
나는 오른손에 휘감긴 쇠사슬을 풀었다.
그리고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그것을 집어던질 셈으로 고리 끝을 부여잡았다.
“멈춰요!”
하지만 내가 걸음을 옮긴 그 순간, 나는 손을 휘두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도망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사람들한테 해코지는 그만 두세요.”
막다른 골목을 등진 채, 클라리스가 양팔을 벌리고 나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당신은 날 쫓아온 거죠?”
그녀의 당당한 눈동자가 나를 비춘다.
하얀 얼굴에 굳게 닫힌 입술, 거기다 저 올곧은 녹안은··· 클라리스 그 자체였다.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충분하잖아요? 저한테 볼일이 있다면 저한테만 풀라고요!”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행인들을 밀치고, 저를 따라온 분들한테 폭력을 휘둘렀잖아요?”
“그걸 묻는 게 아니다!”
“이 이상의 행패는 용납하지 않겠어요. 저 때문에 괜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본다면···.”
“클라리스!”
“꺄악!”
왜냐?
왜 모른 척을 하는 거지?
이렇게 마주보고 있음에도, 어째서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이···.
“다, 당신은··· 대체 뭘 하려는 거죠?”
나는 목을 조르려했다.
그때처럼.
언덕 위에서 마을이 이형의 벌레들에게 쑥대밭이 되던 그 시기처럼.
이번에는 회복하지 못하도록 목을 제대로 떨어뜨려줄 셈이었다.
그런데···.
“야, 이 정신 나간 자식이···!”
뭔가가 내 오른팔을 휘감는다.
투명한 은빛의 실··· 로이드의 것이었다.
“로이드, 무슨 짓이지?”
“뭐, 임마?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너 지금 민간인을 건드리려고···.”
“아니, 이건 마녀다.”
“뭐?”
“당장 설명할 시간 없다.”
“아니, 아무리 봐도 보통 여자잖아?”
나는 억지로 어깨를 당겼다.
하지만 로이드 녀석은 아직 나를 풀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리하는군.
아직 손가락이 다 회복되지도 않았으면서···.
“진정 좀 해라! 너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처럼 보인다!”
그 말 그대로다.
나는 당장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다.
지금 이 와중에도 녀석을··· 클라리스를!
“아가씨, 어서 달아나! 여기 있으면 죽도 밥도 못된다고!”
“놔라, 로이드! 안 그러면 아무리 너라도···.”
시간이 없다.
몸이 성하지 않은 로이드를 날려버리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이 틈에 클라리스가 몸을 피해서 행인들 사이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클라리스는 그 틈을 노리지 않았다.
아니, 도망치기는커녕··· 오히려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말했죠? 저는 도망치지 않는다고요.”
당찬 목소리다.
살기등등한 나를 앞에 두고서도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설마하니 정말로 길을 나도는 이들을 염려하고 있기라도 한 것인가?
마녀가?
인간 세상을 증오한 나머지 영혼을 저 편의 존재에게 바친 마의 권속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걱정한다고?
“웃기지···마라!”
“윽!”
마침 다가와준다면 환영이다.
이대로 죽여주마.
그리고 모든 비극을 끝내겠다.
나의··· 악몽도 이것으로 비로소!
“정신 차려, 후배! 대체 뭐에 미친 거냐고! 당장 멈춰, 안 그러면 내 은사가 네 손을 산산조각 낼 거다!”
“상관없다.”
앞으로 조금만이다.
전처럼 실수하지 않는다.
목뼈를 부러뜨린 다음 이대로···.
“선생!”
“망할 불한당 놈, 감히 네놈이!”
그때였다.
로이드의 포박 말고도 다른 힘이 내 몸에 들러붙은 것은.
등 뒤에서 굵은 팔뚝이 내 목을 감싸온다.
이어서 누군가가 내 어깨에 매달려 무게를 실어온다.
장정들이다.
꽤 여러 놈이 몰려와서 나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장애는 로이드 자식이었다.
놈은 내 팔에서 은사를 푸는 대신, 내 무릎을 측면에서 냅다 차버렸다.
아뿔싸!
자세가 뒤틀려, 나는 그만 클라리스를 풀어주고 말았다.
“콜록! 켈록켈록!”
안 된다.
아직 숨을 쉬고 있어.
저 마귀가 살아있다니, 이럴 수는 없다.
나는 다시 쇠사슬을 쥐었다.
이걸로 뭉개버린 다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그만해! 대체 우리들의 은인에게 뭘 할 셈이야?!”
은인?
그런가?
너희도 속고 있구나.
이 여자의 정체를 모른 채, 맹목적으로 은혜를 입은 상태로···.
그걸 홀렸다고 하는 거다.
그거야말로 마녀의 흉계다!
다신 속지 않으리.
나는··· 나는!
“이, 이 새끼··· 힘이 장난이 아냐!”
“아니, 우린 다섯이라고! 한 놈에게 밀린다는 게 말이나 되?!”
사내들은 내 양 다리를 잡은 채 질질 끌려왔다.
필사의 결의를 가지고 날 막아낼 셈인 모양이다.
어째서지?
왜 저 마녀를 이렇게까지 보호하려는 거냐?
“켁··· 후, 하아··· 됐어요. 그만···.”
“하, 하지만 선생?!”
“풀어주세요. 저 남자··· 뭔가 오해를 하고··· 콜록!”
나는 그제야 상대를 보았다.
역시 클라리스다.
내가 그녀를 착각할 리 없어.
저 목소리,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울림도 마찬가지.
하지만··· 어리다.
이것은 내가 아는 클라리스보다도 댓살 정도는 훨씬 젊어보였다.
이십대 초반··· 아니, 그보다 어릴 지도 몰랐다.
“너는···.”
“켈록, 켈록··· 그래요. 저한테 뭘 묻고 싶은 거죠?”
“대체 누구···지?”
이럴 수가.
나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눈앞의 상대가 한 없이 클라리스와 닮은 또 다른 인간이라는 걸 그제야 깨닫고 만 것이다.
“아니···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런 거친 짓을 한 거예요?”
클라리스···.
아니, 그녀를 닮은 여자는 자신의 목 언저리를 더듬으며 혀를 찼다.
“하, 죽는 줄 알았네···. 하마터면 이런 무서운 사람한테 걸릴 게 뭐람.”
“···.”
“그래요. 이제 좀 진정했어요?”
“아니. 역시 있을 수 없어.”
“네?”
“모르겠다. 이게 어찌된··· 너는 클라리스가 아니란···.”
“···저, 이 사람 평소에도 이런 가요?”
여자는 로이드 쪽을 바라보더니 나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어, 아가씨. 평소엔 점잖다 못해서 지나치게 조용한 친구인데···.”
“야, 새치 대가리 자식들아. 이런 짓을 해놓고 사과로 넘어갈 것 같냐?”
“그만 하시래도요!”
“선생! 잘못했으면 당신, 큰일 날 수도 있었다고!”
“무사하니 된 거잖아요. 저 덩치 큰 사람도 이제 좀 마음을 추스린 거 같고.”
“···.”
똑같다.
하나같이 모든 모습이 클라리스와 판박이다.
하지만 아니다.
저것은 클라리스와 빼닮았을 뿐인 전혀 다른 사람이다.
어째서인지 그걸 깨달을 수밖에 없다.
“누구랑 절 착각하신 모양인데요.”
여자는 다시금 나에게로 온다.
그리곤 조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조르던 내 손아귀를 양손으로 쥐어보였다.
“우선 말씀드릴게요. 방금 저를 클라리스··· 라는 이름으로 불렀었죠?”
“그래···.”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
“···.”
“아니, 되게 간절하게 부르시던 걸 보니··· 어쩌면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을 지도.”
아직도 혼란스럽다.
나는 지금도 클라리스가 나를 놀릴 작정으로 사악한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뭘까?
저 슬픈 눈빛은?
나를 그 무엇보다 안쓰럽게 여기는 이 태도는 대체?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하지만, 제 이름은 조금 달라요.”
“뭐?”
“클라리스가 아니에요. 저는 클라르테. 비슷하지만 잘못 짚으셨어요.”
“그럴 리가 없어. 너는···.”
“그리고 자꾸만 아는 척 아는 척하시는데··· 저는 이 마을에서 의사로 살아온 지 5년이 넘었어요. 물론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당신과는 어디까지나 초면인 걸요.”
나는 말문을 잃었다.
5년이라고?
나와는 전혀 일면식도 없다고?
“나 참, 이 무식해빠진 놈은 그래서 뭐였던 건데?”
“난 또 선생의 옛 남자인 줄 알았지.”
“아이, 시튼 씨도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그럴 리가 있나요? 저한테 그런 형편 좋은 사람이 있었다면 진작 이 마을을 떠났겠죠!”
“아, 그러셔? 지금까지 청혼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전부 차버렸던 콧대 높은 클라르테 선생께서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꾸 그러시면 저 화낼 거예요. 무료 진료도 오늘까지만···.”
“아, 내가 잘못 했구만! 아무튼 저 나쁜 덩치 놈에게 내가 한 마디 더 해두도록 하지!”
이상한 분위기다.
정말로 수년 째 알고 지낸, 서로를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걸 수 있는 장난을 친다.
마치 오래도록 이 마을에서 살아온 것만 같은···.
“무슨 사정이 있으셨던 거죠? 아까 제 목을 잡을 때도 떨고 계시던데데···.”
자신을 클라르테라 소개한 그녀는, 내가 대답을 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 이제 돌고 돌아서 저한테까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나는 순간 의아했다.
그녀는 지금 뭔가 짐작이 간다는 듯 읊조렸다.
내가 관심을 보이자, 여자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곤 자신의 목에 든 멍을 가리키더니.
“이제 아셨죠? 다음에도 잘못 봐주시면 곤란해요. 지금 바라보고 계시는 제가 진짜랍니다. 당신이 낸 상처를 잊어버리진 않겠죠? 다음에 혹시나 도플갱어doppelgänger랑 마주치신다면···.”
“도플··· 뭐라고?”
“어? 모르세요? 도플갱어라고요. 그··· 요즘 마을에서 한창 소란스러운 그 사건요.”
“그게 뭐지?”
“아니, 잠깐만요. 그럼 당신은 대체 왜 나한테···.”
로이드 쪽을 바라보자, 녀석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듯 양손을 바깥으로 펼쳐보였다.
그런 우리를 흘겨보더니, 여자는 내 앞에서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기가 막혀. 저는 그럼 괜히 잘못 걸린 것뿐이란 건가요?”
하지만 나는 이 모습까지도 기억한다.
이건 내가 성가신 문제나 질문을 했을 때 이따금씩 보여주던 클라리스의 버릇과 그대로 닮아 있었으니까.
“···좋아요. 이렇게 된 거 손해 입은 만큼 제대로 뜯어내주겠어요. 당신 둘, 덩치랑 멀대!”
“···.”
“아니, 멀대? 야, 후배··· 이거 설마 나까지 포함해서 말이야?”
“그래요. 지금부터 회진을 가야하니까. 오늘 하루, 나를 도와요!”
그러면서 그녀는 나와 로이드의 팔을 낚아챘다.
‘아니···.’
한 가지만큼은 달랐다.
나는 이걸로 그녀가 클라리스가 아니란 확신이 들었다.
클라리스라면, 절대로 이런 살가운 짓을 할 리가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