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만의 장(1)
1.
마차 여행은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느긋하게 풍경을 즐기고, 동행한 이들의 시덥잖은 대화로도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해가 떨어지면 말을 휴식시키고, 육포나 굳은 빵 따위를 씹으며 빌헬미나와 로이드의 익살극을 보는 것에도 슬슬 적응되었지.
덕분에 내 주제에 안맞는 사색도 실컷 할 수 있었고 말이다.
‘왜 나는 지금껏 이런 여유를 느낄 틈도 없었던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세상은 넓다는 것을.
나는 최근 들어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보았다.
숲 너머의 세계란 모험의 연속이었지.
내가 속한 나라의 국경 바깥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라가 관리하는 집결지만 해도 그랬다.
멀리서 보았을 땐 단순한 항구 도시, 그러나 상인들이 오가는 것만으로도 그곳에는 생기가 넘쳤다.
어린 시절에 떠올린 유치한 상상이 현실이 된 것만 같았지.
하루하루가 축제인 동네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마을의 활력이 눈에 보일 정도야,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느껴졌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울타리 안에도 어떤 자연스러운 이치가 존재하는 것 마냥.
‘그래, 어쩌면 그마저도 지극히 당연한 섭리일지도 모른다.’
무리를 이루는 건 사람만 아니다.
늑대들도 그렇다.
한낱 짐승에 불과해 보이는 놈들에게조차 각각의 역할이 있다.
사냥을 하는 개체, 육아 담당, 정찰과 경계를 서는 임무를 나눠서 분담하지.
녀석들은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산다.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단, 우리 인간이 늑대 놈들과 다른 점은 환경을 극복하는데 있다고 했던가···.’
언젠가 클라리스는 말했다.
대스승도 출발 전에 비슷한 언급을 했었지.
사람은 어디에서나 살아간다고.
인간은 상상이상으로 끈질기고 강인한 동물이라 했다.
‘혹한의 세계에서도 얼음을 파내고 집을 만들어 살아가는 민족이 있다.’
또한 내리쬐는 땡볕 아래의 모래천지 사막에서마저 사람은 보금자리를 틀어 생명을 이어간다고 하지.
우리 마을의 사례가 그렇다.
아무리 척박한 땅도 수십 년에 걸쳐서 개간해버린다.
지리가 좋다면 더욱 비옥하게 가꾸어 나가지.
하지만 이 모든 걸 혼자서 하긴 힘들다.
많은 이들의 단결과 노력이 필수부가결하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희생자도 나오지.
그럼에도··· 인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지.
그건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해서 쌓아올려졌다.
‘알겠어, 빅터? 우리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든 여기저기를 방랑하든 간에, 결과적으론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게 되어있어.’
그게 인간의 본성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래서 고립된 인간의 삶은 괴롭다.
제 아무리 강한 신념과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해도, 우리는 혼자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
사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뻔한 소리지.
동시에 애꿎은 이야기다.
왜냐하면 나에게 이 말을 가르쳐준 것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멀리하고, 홀로 살아야만 했던 클라리스 였으니까.
그녀는 고독을 알았다.
당연히 변방 마을에서 고립 당한다는 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 지도 잘 이해하고 있었을 테지.
나는 그런 그녀를 어떻게든 마을 사람들과 같은 공통체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선생이나 의사로서 모두의 곁에 머물러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클라리스는 끝내 우리와 어울리지 못했어.
끝내 사람들이 클라리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불길하다고 전해지는 붉은 머리 탓이었을까?
아니면 지나치게 지혜롭고 영특한 머리가 미신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고깝게 느껴졌던 것일까?
어쩌면 양쪽 모두일 수도 있다.
그것이 그녀를 더욱 은둔하도록 만들었지.
클라리스가 나를 제외한 타인을 은연중에 피하려던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지 모른다.’
열흘간의 여정 끝에 도달한 장소는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독특한 지형이었다.
대스승이 폐쇄나 고립이란 단어를 써서 표현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군.
드문드문 집으로 보이는 구조물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그 중심에 개척이 불가능해 보이는 높은 바위산이 하나 우뚝 서있다.
사방은 숲이 교묘하게 둘러싸고 있어서 멀리서는 물론, 높은 곳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어지간히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할 정도야, 어찌 보면 마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요새에 가까운 구조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천연의 성이란 말인가?
“참 특이한 곳이네요, 누님.”
“그러게. 아예 외부랑 교류를 할 생각이 없는 걸까? 아주 대놓고 자기네들끼리만 살 거라고 광고하는 것 같네.”
“같은 산골마을 출신으로서 넌 어떻게 생각 하냐, 후배?”
기도 안차는 비교에 나는 고개부터 저었다.
“내 고향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최소한 이웃 마을과 물물교환 정도는 했으니까.”
“뭐, 네 마을이나 여기나 둘 다 즐길 거리 없는 깡촌이란 점은 같지 않겠냐?”
“···.”
“어, 어어? 너 표정이 왜 그래? 농담 조금 했다고 지금 선배한테 대드는 거냐? 그래, 나보다 나이가 조금 많으니까 반말까진 이해한다고 치자고. 그런데 나는 너보다 2년이나 먼저 누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어둠에 암약하는 진실을 마주했다고. 그럼 마땅히 존경해야지? 안 그래?”
요 며칠간, 로이드는 나를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떠버리와 무뚝뚝한 놈만큼 잘 맞는 조합은 없겠지.
나는 의외로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재주가 있는 지도 몰랐다.
물론 놈이 지껄이는 말이 모두 영양가가 없다는 건 괴로웠다.
헛소릴 해도 대꾸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지만, 녀석은 누구의 눈치를 볼 정도로 섬세한 성격은 아닌 듯 했다.
입담 자체는 그럭저럭 재미있어서 어디까지 지껄일 수 있을까 내버려뒀지.
심하게 선을 넘으면 빌헬미나가 알아서 주먹을 써서 조용하게 만들 테니 내가 상관할 필요도 없었고.
딱히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이상할 정도로 자기 과시욕이 있는 게 문제지.
특히, 며칠 전부터 그런 낌새가 더욱 강해졌다.
“네가 좀 특별하기로서니, 날 깔볼 정도로 잘난 건 아니란 말이야, 임마! ”
레이와 함께 광산마을에서 마녀를 하나 죽였다는 이야기를 한 이후부터 쭉 이런 식이다.
내가 이식도 안한 몸으로 수 십 마리의 사역마를 도륙하고 토벌에 성공한 것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반면 로이드는 그 동안 빌헬미나의 보조나 수발을 드는 정도로 시간을 보냈다나?
녀석은 마음을 일찍 먹었다면 훨씬 빨리 다음 단계로 나아갔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빌헬미나의 말에 따르면, 로이드에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했다.
“누님도 한 마디 해주십셔! 이 자식,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다고요!”
“푸하하! 네가 선배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있어야지?”
“아니, 누님까지 그러시깁니까?”
보다시피 진중한 면이 없다.
말이 많은 놈은 그만큼 본심을 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화를 해도 제대로 요점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중요한 건 뭘 말하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말하지 않느냐에 달렸지.
장사치나 사기꾼들의 자주 쓰는 수법이 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절대 언급하지 않아, 상대가 먼저 말해주기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이드는 달변가였다.
적어도 상대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도록 유도하며, 그 자신이 무엇 원하는 지 궁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으니까.
나는 녀석이 그런 바탕을 깔고 나에게 장난을 치는 걸 일주일 정도 지나서야 겨우 눈치 챌 수 있었지.
그리고 빌헬미나는 이미 그의 속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작작 좀 해라, 로이드. 네가 저 덩치 큰 놈이랑 친해지고 싶다면 말이야. 그냥 솔직하게 칭찬이나 하면 되. 뭐 하러 굳이 인내심을 실험해서 면상에 한 대 맞을 짓을 자처 하냐고.”
“아, 아니··· 그걸 또 장본인 앞에서 말할 건 뭐랍니까?”
“너는 이렇게 엉덩이를 차주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말을 질질 끌 거잖아? 전에도 그래. 내가 추천하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이식을 미루고 있었을 거다.”
“아니, 그건 모르는 일이죠.”
“십중팔구 그랬을 걸?”
“저는 하나의 가능성에 모든 걸 거는 남자입니다?”
“죽는다, 너! 몇 번이나 말해? 난 네가 말꼬리 잡을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을 거 같다고.”
하지만 지루하진 않다.
상대를 화나게 만들기는 해도, 로이드의 입담엔 순간을 잊게끔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느새 마차는 바위산 마을에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좋아. 꺽다리, 말을 새워. 이쯤에서 내리자.”
“기왕이면 안에 들어가서 마구간을 찾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누님?”
“멍청아, 분위기 파악부터 해라. 여긴 상업지구가 아냐. 이렇게 꽁꽁 싸매고 사는 마을 사람들이 우리 같은 수상한 놈들을 좋다고 받아주겠어?”
하긴, 대끔 하나같이 백색 눈깔을 가진 사냥꾼 복장의 삼인조가 들어선다면···.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경계를 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결국 로이드는 빌헬미나의 지시에 따라 나무 사이에 말을 묶어두었다.
“우선은 내가 먼저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도록 할게.”
“혼자서 괜찮겠습니까?”
“이럴 땐 차라리 여자 혼자가 나아. 사내들에게 얕보일 순 있어도 최소한 밉보이진 않거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난 미모에 썩 자신이 있거든.”
“누님, 주책 아닙니까? 변방엔 이런 속담도 있지요. 꽃잎이 말라붙기 시작한 꽃은 오히려 흉하다, 라고. 혹시 안 들어보셨음까?”
“···지금 니 새끼가 내 앞에서 지껄이고 있잖아!”
빌헬미나는 모자를 벗어 로이드에게 집어던졌다.
그러자 앞머리와 귀의 머리칼을 땋아서 뒤로 깔끔하게 묶은 모양새가 드러났다.
마치 땋은 머리로 만든 왕관 같군.
“후, 저런 놈을 제자랍시고 데리고 다니는 내가 바보지. 아무튼 다녀올 테니까 너희 둘은 말이나 돌보고 있어.”
“예, 뭐··· 누님이라면 괜찮겠죠. 사냥모 여기 있습니다.”
“흥.”
빌헬미나는 거의 낚아채듯 그것을 빼앗아들더니.
“너희한텐 좋은 소식일지도 모르겠다.”
“빌헬미나,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니, 제대로 여물지 못한 병아리에겐 안전한 여행이 제격이지. 하지만 난 이게 헛걸음이 아니길 빌었는데.”
살짝 묘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다.
심각한 표정은 아냐, 오히려 긴장이 풀린 것같이 나른해보였다.
“주변에 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결계의 흔적조차 없어. 하아. 제리온 이 자식, 또 쓸데없는 일에 인력을···. 찾아내면 볼기짝을 때려줘야겠어.”
“오. 그거··· 참.”
“뭐냐, 로이드?”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누님이 그 제리온이라는 양반 이름을 막 부르시길래 혹시나 싶어서요.”
“···뭐가 혹시나 인데?”
“그 사람이 누님의 이거 아닌가, 하고?”
로이드는 음흉한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저 머저리 자식, 굳이 한 대 더 얻어맞게 생겼구만.
하지만 빌헬미나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저 살짝 왼눈을 찌푸리는 것뿐이었다.
“···뭐, 그런 시절도 있긴 했지.”
“세상에! 그거 정말 입니까?”
“나한테도 젊은 시절은 있었거든. 당시에 선배들은 전부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었고. 하필 가까이에 있던 제리온 그 자식도 생긴 건 멀쩡했으니.”
“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군요. 아주 흥미롭습니···.”
“시끄러워. 그냥 옛날이야기야. 지금은 떠올리기도 싫어. 그러니까 더 물어보지 마라. 내 주먹이 얼마나 더 매워질 수 있는 지 궁금한 게 아니라면.”
“아, 물론 저는 괜찮습니다.”
“앙?”
“누님에게 옛 남자가 있을 수 있죠. 나이를 먹은 만큼이나 사연이 있지 않겠습니까?”
“야, 이···.”
“하지만 전 마음이 넓은 사내입니다. 과거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일정 변경이다. 일단 네놈의 입을 좀 찢어준 다음에 생각해보도록 하지.”
변방의 속담엔 이런 것도 있다.
입에서 나온 재앙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드물다고.
덕분에 로이드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지.
멱살을 잡힌 채 꼼짝없이 얻어맞고 있는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이 둘의 헛짓거리를 지켜보는 것도 이제 슬슬 지겹군.’
두 사람은 내버려두자.
우선 마차에서 짐을 좀 내려두는 게 났겠지.
마을에서 숙박할 수 없다면 바깥에다 모닥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만들어두는 게···.
“···아니?”
그때였다.
말들의 반응이 이상해, 코를 벌름 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진 빌헬미나와 로이드의 소란 때문에 안정하지 못한 것인 줄 알았는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말의 후각은 인간보다 뛰어나다.
이 녀석들이 뭔가를 감지한 게 틀림 없었다.
나는 두 마리의 말들이 주시하고 있는 어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나는 높이 솟아오른 나무들 사이에서 꺼림칙한 뭔가를 보고 말았다.
“빌헬미나!”
“응? 왜 그러는데? 이젠 너까지 시시한 일로··· 앗?”
내가 그곳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빌헬미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럴 수밖에.
지금 우리가 올려다보고 있는 나무 위에는, 심각하게 훼손된 한구의 시체가 매달려 있었으니.
나체.
하지만 머리가 없는 남자였다.
심지어 양 팔도 보이지 않았다.
갈고리 같은 것이 가슴 정중앙을 관통하고 있어, 로프에 감긴 채 높은 고목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것은 경고인가?
마을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이 앞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위협을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대로 진입하는 건 무리겠군.
나는 빌헬미나에게 조언을 구하고자 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빌헬미나가 눈에 띌 정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째서··· 이렇게?”
그리고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겨우 한 단어를 토해냈다.
“제, 리온···.”
그것은 우리들을 이 자리까지 호출한 장본인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