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류의 장(6)
9.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니···.
그런 해괴한 병은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도리스의 반응을 보면 그것도 마냥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야, 실제로 레이에게 받은 공격에 조금도 아픈 기색이 없었다.
대스승은 말했지.
레이의 파쇄권은 결코 얕볼 것이 아니라고.
“빅터, 자네도 직접 봤겠지만 레이의 장타는 강하다네. 나무나 바위조차 부숴버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지. 물론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니 강도는 적당히 줄였을 게야. 적당히 내장 하나가 작살나는 선에서. 레이도 같은 동지를 죽일 정도로 분별없는 아이는 아닐 테니 말일세. 하지만 그럼에도···.”
도리스는 멀쩡했다.
아니, 적어도 겉으로는 그래보였다.
뱃속이 뭉개지는 걸 의연하게 참을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렇다.
그렇다면, 그녀의 몸이 아픔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건 사실일 지도···.
‘그냥 이상한 여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기이한 전말이 있었단 말인가?’
대스승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도리스는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알베르트라는 작자와 어떤 여자 사냥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
고통이 결여된 채로 세상에 나와, 철이 들기도 전에 마녀를 죽이는 방법을 교육받았다지.
내가 아버지에게 산에서 잡은 동물에게 필요 이상의 고통을 주지 말라는 가르침을 받는 동안···.
그녀는 마녀들의 뼈와 살을 바르며 토막 내는 방법부터 익혔을 거라고 했다.
그런 아이가 멀쩡한 상식과 윤리관을 가진 채 자라 날리는 만무하다.
가뜩이나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인간은 남의 몸도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걸 부모를 통해서 교정 받게 되지.
하지만 대스승 알베르트는 방임주의였다고 한다.
어머니 쪽도 그녀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고···.
‘빌어먹을, 또 나쁜 버릇이 나오는군.’
나는 가능한 도리스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했다.
그녀에 대해 동정을 품고 싶지 않아, 그런 정신병자를 편들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도리스는 내 사저인 레이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으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제대로 보복해줄 생각이었다.
동방의 문화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적어도 이 사태를 조용히 넘어가는 게 문제라는 건 안다.
거기다 나는 개인적으로 도리스에게 원한이 있지.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할 것도 있다.
“대스승,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얼마든지 물어보게나.”
“본래 이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겁니까?”
“이제 와서 무슨 말인가? 그건 자네도 이미 경험해봤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리스가 저한테 한 일들이 평범한 과정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말입니다.
나는 대스승에게 펜릴의 둥지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설명했다.
아무리 가혹한 이식이라해도 만나자마자 눈에 단검이 꽂히는 경험이 보통일린 없겠지.
그러자 대스승은 내 의문에 답을 해주었다.
또 다시 상상도 못한 설명을 통해서···.
“확실히 알베르트가 하던 것과는 다르군. 하지만 빅터, 자네는 그 덕분에 살아난 것인지도 모르네.”
“대스승,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도리스의 방식은 거칠지만··· 사실 대스승 알베르트가 하던 수법도 그다지 신사적이진 않았지. 어떤 의미에서 그건 더 가혹하네. 차라리 단검을 박아 넣는 쪽이 마음은 더 편할 지도 모른다.”
대스승은 내가 납득하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최소한 이해는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바라, 나는 다시금 되물었다.
“대스승 알베르트는 더욱 잔인한 짓을 했단 말인가요?”
“그렇지. 단, 흉기는 사용하지 않았네. 대신 정신을 몰아 붙였지. 마녀 사냥꾼이 되려는 각오가 무너질 만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식으로.”
대스승의 말은 이러했다.
이식을 받기위해 나선 지원자의 과거를 나열하면서 왜곡하고, 결과적으론 죄책감을 끄집어내서 인신공격을 하는 것이다.
대스승 알베르트는 그렇게 자신을 악역으로 포장했다고 한다.
“그게 정통적인 이식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왜··· 굳이 그럴 필요가?”
“그래야만 견딘다네. 그렇게까지 해야 한 사람이라도 살아날 가능성이 더 높아지니까. 빅터, 자네도 알 걸세. 육체가 변해가는 그 아픔 사이에서 자네는 무얼 생각했나? 옆에서 바라보며 조소하는 도리스를 어떻게 여겼지?”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노림수였네.”
“예?”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바로 그 분노와 증오이다. 아무리 강대한 아픔이라도, 끝없는 미움만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지. 때론 신념이 허물어진다. 제아무리 굳은 각오라 해도 막막한 절망 앞에선 매우 무력해진다네. 그 어떤 초인도 견디지 못해, 그래서 계기를 주는 것이다. 자네가 시련을 견딜 수 있었던 건 구체적인 미움의 대상이 있었기 때문일세. 바로 도리스가 말이야. 전 세대의 선배 마녀 사냥꾼들에게 그 역할은 알베르트가 도맡아 했었지. 알겠는가? 이식자란 그만큼 가혹한 임무야.”
맙소사.
대스승은 지금 내가 시련을 통과한 것이 도리스를 향한 증오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 그것은 틀렸다.
내가 미웠던 것은 클라리스다.
달리 증오할 대상이 그 외에 있을 리 없다.
도리스의 헛짓거리는 단지···.
“빅터, 항상 마녀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만이 우리에게 합류하는 건 아니라네. 때론 다른 사정을 가진 이도 나타났었다. 누군가는 책임감을, 또 누군가는 마녀를 구원하기 위해 자처한 부류도 있었지.”
“우리는 복수를 위해서만 모인 게 아닙니까?”
“물론이다. 그리고 개중에서 자네는 근래 보기 드문 순수한 복수자이지. 그렇기에 강하다.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 증오가 향할 대상을 제대로 보거라.”
빙 둘러서 말했지만, 결국 도리스를 용서하라는 거군.
“그녀는 우리가 이뤄낸 유산이자, 동시에 죄의 상징이다. 평시에 도리스는 다루기 힘들지만, 마녀를 상대할 때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이야. 결국은 이용하기 나름이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아니, 하지만 내 사견까지 일일이 자네에게 말해주고 싶지는 않네.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약함과 마주보기 싫어서이지. 이래서 늙는 건 무서운 일이야.”
내 착각이었을까?
순간, 그의 얼굴에서 레이를 대할 때와 같은 측은함이 떠올랐다.
대스승은 도리스를 향해 동정심 비슷한 것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보다··· 빅터여. 레이와 도리스의 일 때문에 말하는 게 늦었다만.”
“예.”
“실은 자네에게 소개할 사람이 있어.”
그러고 보니, 대스승의 외출이 누군가를 마중하기 위해서라고 아이라가 말했었다.
“일이 꼬였군. 원래대로라면 레이에게 그 두 사람의 인솔을 맡기려 했는데···.”
“두 사람?”
“그건 직접 만나보는 게 좋겠지.”
대스승은 슬쩍 웃어보였다.
“그들 중 하나는 자네보다 한 달 전에 마녀 사냥꾼이 된 선배라네.”
10.
임무가 있다고 했다.
대스승은 내가 오늘 내일 사이에 도착하는 것을 상정하고 미리 계획을 짜두었다.
그것은 내가 이식을 통과할 것을 믿고 있었기에 가능한 조치였다.
“말을 타고 북서쪽으로 열흘 정도가 걸리는 오지에 기묘한 마을이 하나 나온다지.”
대스승은 지상으로 향하는 층계를 오르면서 내게 설명을 이었다.
“매우 폐쇄적이고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마을은 워낙 고립된 지형에 위치해서 영토를 늘리는데 혈안인 지방 영주조차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군.”
“그런 곳이 요즘에도 있습니까?”
“물론이다.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고 어디에든 살고 있지. 하지만 그만큼이나 다양한 문화권이 존재하는 법이지. 모든 마을이 서로 교류하는 것은 아닐세. 국가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를 감추는 촌락도 아직 여럿 있지.”
그리고 마녀는 그 빈틈을 파고 든다고 했다.
외부에 소식이 잘 퍼지지 않는 마을을 노리고 서서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해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공동체를 여럿 보아왔다.”
“제 마을처럼 말이죠.”
“우리는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래서 각지의 정보원들에게 아무리 사소한 소식이라도 전부 검토하고 있지.”
“하지만 저번 광산마을은···.”
그땐 너무 늦었었다.
마녀가 각성한 채, 마을 사람들을 충분히 유린하고 몰살시킨 다음이었다.
어느 누구도 구하지 못했지.
나는 또 같은 경험을 해야만 하는가?
힘을 손에 넣었다고 해도, 시체 무더기 앞에선 무기력해질 뿐인 것을···.
“빅터여, 이번엔 사정이 좋다. 어쩌면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기현상을 해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정말 입니까?”
“이런, 희망적인 이야기만 들으면 눈에 생기가 돌아오나? 조금 진정하게. 우리도 매번 허탕을 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면 서둘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그 마을에 파견된 동지가 있네. 그는 10년 이상 싸워온 베테랑이지. 지금쯤 자신의 제자와 함께 마녀의 흔적을 탐문 중일 게야.”
“말로 열흘이나 걸리는 곳에서 어떻게 그런 소식을?”
“다 아는 수가 있다. 조만간 자네도 ‘지령Befehlsgewalt’을 받게 될 테니 이해하게 될 거야. 우리에겐 거리를 의미 없게 만드는 신기한 수단이 있으니까.”
지령이라, 이식을 받았다곤 해도 아직 모르는 것투성이군.
결국 하나하나 경험해가면서 익히는 수밖에 없나···.
“크레이그 씨, 빅터 씨!”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이라가 양손에 술병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당장 레이의 안부부터 묻는다.
“레이는 좀 어떤가요?”
“아이라, 네가 걱정할 필욘 없단다. 심하게 다친 듯 보여도 우리는 보통 인간보다 열 배는 튼튼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다친 게 덜 아픈 것도 아니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하여간 댁들에겐 아주 질려버리겠어요. 선대 가주님은 대체 마녀 사냥꾼들을 어떻게 보좌하셨는지···.”
면목이 없다.
그녀 입장이 아니더라도, 그 일원이 된 나조차 매번 놀라고 있으니까.
“그런데 도리스 양은요?”
“독방에 가둬두었다. 당분간은 음식을 따로 준비해야 할게야.”
“나중에 제가 따로 한 소리 해줘야겠네요.”
“그건 부탁하마.”
“굳이 이 집에서 머물러야 하겠다면 한 달 내내 청소랑 빨래를 시키겠어요. 아, 하지만 그 부러진 손가락으론 좀 힘들겠죠?”
의외로 아이라에겐 매서운 면이 있다.
평소엔 온화한 그녀이지만, 접시를 치우지 않거나 방을 어질러놓으면 자비 없이 집주인의 권리를 앞세워 잔소리를 늘어놓지.
그 대상은 덩치가 큰 나는 물론, 대스승까지 포함된다.
드센 성격의 레이도 그녀의 앞에선 꼼짝 못하지.
하기야 방문객에게 냅다 총을 들이 밀 만큼 기세 좋은 여자다.
그 정도는 되어야 마녀 사냥꾼들의 집결지를 관리할 수 있겠지.
“아, 그렇지! 크레이그 씨, 홀에 계신 손님들이 아까부터 찾으시던데···.”
“음. 마침 그 둘을 보러 가는 길이다.”
“또··· 싸우시거나 할 건 아니죠?”
“내가 그걸 용납할 거 같으냐?”
“부디 부탁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아이라는 지하로 내려갔다.
대체 창고에 얼마나 많은 술이 저장되어 있을까 궁금해졌지만, 당장은 볼일이 있으니 다음 기회에···.
“두 사람 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위로 올라가자 낯선 얼굴이 둘 보였다.
살짝 피곤한 인상의 젊은 여자가 한 명.
그리고 나와 거의 비슷한 키의 홀쭉한 남자가 있었다.
역시 이들도 마녀 사냥꾼인가?
두 사람 모두 사냥복과 챙 넓은 모자를 쓴 채였다.
“대스승, 너무 지루해서 잠이 다 들 뻔 했네요.”
여자 쪽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묘하게 음험한 얼굴이야, 나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 대이면서도 인생의 쓴 맛을 다 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하게 됐구나, 빌헬미나. 제자들 사이에 문제가 좀 생겼거든.”
“됐네요. 그건 아무래도 좋고요. 그런데 옆에 선 저 몸집 큰 놈이 바로 그 소문의 신입인가요?”
“그래. 이 친구가 바로 빅터지.”
여자는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가 겨우 가슴까지 오면서, 고개까지 치켜들고 날 관찬하는군,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외모는 다른 마녀 사냥꾼들과는 사뭇 다른 면이 있었다.
머리카락의 색깔이 특이하게도 앞머리만 탈색되어 있어, 나머지는 윤기가 흐르는 흑발이었다.
사람에 따라선 이런 변화도 있는 건가?
“흠. 답답하게 생긴 게 영 써먹기 힘들 거 같은데.”
“고지식한 면이 없진 않지.”
“그래도 반갑다. 나는 빌헬미나. 팔자가 사나워서 이 개 같은 마녀 사냥을 벌써 10년 가까이 하고 있지. 네 사저인 레이와는 동문이다. 그러니 편하게 누님이라 불러. 하지만 실수로라도 미나라고 부르면 죽여줄 테니 알아둬,”
그러면서 악수를 청한다.
초면에 자기가 얼마나 성격파탄자인지 어필하는군.
어찌된 게 이 조직에 속한 여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일까 싶었다.
나는 마지못해 내민 손을 잡았다.
“잘 부탁합니다.”
“그래. 열심히 배우라고. 저기 네 선배랑 같이 말이야.”
빌헬미나라는 여자는 턱으로 건너편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엔 아직 소개를 받지 못한 사내가 멀뚱히 서있었다.
“야, 꺽다리. 와서 인사해라.”
그러자 어설픈 걸음으로 슬그머니 다가온다.
그는 모자를 벗더니,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대스승 크레이그.”
남자치곤 의외로 목소리가 정돈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외모와 어울리지 않았다.
사냥모 아래로 드러난 그의 두상은 체형만큼이나 가늘어, 찢겨진 눈과 큰 입술은 흡사 뱀을 닮았다.
“저는 로이드라고 합니다.”
그때였다.
짝.
남자는 자신의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 그가 쥐고 있던 챙이 긴 모자가 홀연히 사라진 것이다.
“2년 전, 마녀 사냥꾼에 합류하기 전까진 전국을 떠돌며 곡예로 먹고 살았지요. 사람들은 저를 가리켜···.”
이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마술사 로이, 라고 불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