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류의 장(5)
7.
“대스승··· 이십니까?”
나는 그만 그림자에게 그렇게 묻고 말았다.
평상시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네가 이 기술을 보는 건 처음이겠군. 뒤늦게 이변을 눈치 채서 서둘러 그림자를 둘렀지.”
그림자를 두른다?
이건 일전에 도리스가 말해주었던 그것인가?
어떻게 했는지, 곧 그림자는 가루처럼 흩뿌려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아이라, 미안하지만 침실에 따뜻한 물을 좀 준비해줄 수 있겠나?”
“네, 네에!”
대스승의 지시에 아이라가 곧장 움직였다.
이어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온 대스승은 매서운 눈길로 도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보다, 왜 네가 여기 있지? 대스승 알베르트의 딸이여. 너는 분명 그 친구의 뒤를 이어 이식자로서의 사명을 맡았을 터.”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스승 크레이그. 저는 시술한 환자의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이곳까지 동행한 것입니다. 이렇게 통보 없이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되어 죄송···.”
“이제 와서 인사는 됐다. 이게 무슨 소동인지 설명부터 해보거라.”
“면목이 없습니다. 대련 도중에 힘 조절에 약간 실패했어요.”
도리스는 고개를 숙이며 예우를 차렸다.
레이와 사투를 벌였던 흉포함은 찾아볼 수 없어, 어느새 얌전한 숙녀의 모습만이 남았다.
위장할 생각인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 실수였다고 얼버무릴 셈이냐?
내 사저를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놓고서?
아니, 도리스는 그렇게까지 뻔뻔하지 않았다.
그건 시치미를 땔 악의를 가진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지.
도리스에게 그런 관념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 여자에게 있어서 레이와의 승부는 그저 놀이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대스승은 그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내가 만만해 보이느냐, 도리스여?”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언제까지고 어린애처럼 대해줄 거라 생각지마라. 장난이 지나치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잘못에 대한 처분이라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인 채로 도리스는 웃어 보였다.
어째서 기뻐 보이는 거지?
대스승은 그 불경한 태도를 놓치지 않았다.
“···너에겐 버릇을 고쳐줄 필요가 있겠군.”
그림자의 형상을 한 대스승은 살짝 오른손을 뻗었다.
눈앞의 날벌레를 쫓는 것만 같은 단순한 동작처럼 보이는데?
심지어 그것은 닿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효과는 도리스에게 곧바로 나타났다.
“네가 어긴 규율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격 있는 중재자도 없이 멋대로 대련을 벌인 점. 둘은 상대에게 필요 이상의 부상을 입힌 점이다. 덧붙여, 내가 있는 지부에서 이런 일을 벌이다니 매우 불쾌하구나. 내 제자에게 손을 대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나, 앞으론 그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거라.”
파직.
순간 도리스의 왼쪽 얼굴에서 피가 튀었다.
이어서 바닥 아래로 작은 살점 하나가 떨어졌다.
작고 하얀,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크기의 넓적한 뭔가···.
그걸 보고서 나는 등골 오싹해졌다.
그 찰나의 순간, 대스승의 도리스의 귀를 잘라 내버린 것이다.
도리스는 잠깐 자신의 왼뺨을 만지작거리더니, 이윽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다.
“부족한가? 그렇다면 이 늙은이가 네 몸이 어디까지 조각나야 만족하는 지를 시험해주도록 하마.”
“아뇨, 이걸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 별다른 반응은 없다.
심지어 미소마저도 거둬들이지 않았다.
“자비로운 처우에 감사드려요.”
“끝난 게 아니다. 아직 네가 제대로 마무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지 않으냐?”
“네, 물론···.”
대스승의 엄포에 도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빅터 씨, 잠깐 비켜주세요.”
아니, 도리스가 볼일이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주저앉은 레이 쪽이었다.
나는 어떨 결에 도리스의 접근을 허용해버렸다.
그래도 은연중에 더 큰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까와 같은 맹렬한 살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아, 더욱이 막 대스승에게 귀까지 잘린 그녀가 더 이상 날뛸 리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레이는 달랐다.
“저리, 꺼져!”
퍼억!
도리스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하자, 레이는 멀쩡한 쪽의 다리로 도리스의 얼굴을 걷어 차버렸다.
코가 뭉개진 모양인지, 피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허나, 그럼에도 도리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진료 중엔 얌전히 계셔야지요?”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레이의 무릎과 발목을 확인한다.
뭘 할 셈이지?
자기가 부러뜨려놓고 자기가 고쳐주기라도 할 생각이냐?
그게 사실이라면 대체 어떻게 되먹은 신경이란 말인가?
나는 어이를 상실했다.
레이 쪽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하필 이럴 때 귀중한 인재가 둘이나 다치다니, 책임지고 고쳐놓도록 해라.”
“네, 대스승 크레이그. 제가 저지른 일이니,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누가 네 년 따위한테, 이제 와서 이딴···!”
“가만히 있거라, 레이여. 네가 탐탁지 않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리스는 일단 일류 의사이기도 하니, 지금 당장 조치가 가능한 적임자는 이 아이 뿐이다. 그리고 너도 알잖느냐? 도리스가 너를 작정하고 재기불능으로 만들려 한 건 아니었을 거다. 항상 그렇듯이···.”
맙소사, 대스승은 너무 이 사태를 가볍게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재기불능까진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안다.
도리스가 얼마나 살벌하게 레이를 공격했는지를 눈여겨봤기 때문에!
“대스승, 저 여자는 레이 사저의 눈까지 노렸단 말입니다!”
“곤란하구나, 빅터여. 나도 어디서부터 설명해줘야 할지···.”
그런 나에게 대스승은 한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건 모두 도리스의 장난질이다.”
“예?”
“손가락으로 안구를 노리면 레이가 어떻게 대처할 지도 이미 예측하고 있었던 게야. 아마 고개를 낮춰 이마로 받아냈겠지. 충분히 그런 반응을 하도록 자세를 유도해서···.”
“아닙니다, 대스승! 저 여자의 손가락을 보시란 말입니다!”
나는 거의 화를 냈다.
있을 수 없어, 누가 장난을 위해 자기 손가락이 부러지는 걸 감수 하겠는가?
그런데 이어진 대스승의 반응은 더 황당한 것이었다.
“이 아이는 한다네. 자기 몸 따윈 어찌되든 상관없이, 그런 정신 나간 장난을···.”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럴 테지. 그게 당연하다. 하지만 설명은 레이의 치료가 끝난 다음에 계속하마.”
그러더니 대스승은 쓰러진 레이를 양 안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레이는 두 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레이? 대스승, 어떻게 한 겁니까?”
“가루를 써서 감각을 차단했다. 이처럼 이븐 가지의 분말에는 인간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것도, 육체와 정신의 경계를 조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이걸로 반나절 정도는 얌전히 잠들어 있을 게야.”
안심해야하는가?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지 않는다.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서 레이를 때려눕히더니, 이번엔 그녀를 직접 응급조치를 한다고?
그러더니 이 모든 게 장난이다?
웃기는 소리, 나는 도리스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귀를 잘랐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이번만큼은 대스승이 너무 물렀다고 생각한다.
이딴 식으로 미적지근하게 끝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도리스여, 만에 하나라도 레이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다른 문제가 생긴다면···.”
레이를 안아 든 상태로, 대스승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대스승을 오해했다.
그는 무르지도, 미적지근하지도 않았다.
“내 몸소 네 아비에게 잘린 네년의 모가지를 전해주마.”
그 말에는 도리스조차 꼼짝 못하게 만들 정도의 무게가 담겨있었다.
8.
잠시 후, 레이의 경과를 지켜보던 대스승이 겨우 나를 불렀다.
“오래 기다렸구나.”
“레이는, 레이 사저는 무사합니까?”
“괜찮다. 방금 접골도 끝냈으니. 경과는 좀 더 기다려야겠지만 큰일은 생기지 않을 게야.”
“그녀의 다리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걱정되느냐?”
내 착잡한 얼굴을 내밀자, 대스승은 혀를 찼다.
“왼쪽 갈비뼈가 두 군대 나갔고, 오른쪽 다리의 비골과 경골이 부러졌지. 당분간 제대로 걷는 건 힘들 게야.”
“그럴 수가···.”
“끝까지 듣거라, 빅터. 그 정도면 금방 회복할 수 있으니까.”
“예?”
“놀라울 정도로 깔끔하게 부러뜨렸더군. 오히려 뼈가 붙고 나면 더 튼튼해질 정도로.”
“그게 무슨···.”
“노린 거지. 내 입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다만, 도리스는 자기 장난감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아이야.”
“그 말은, 레이가 장난감이란 말씀입니까?”
“적어도 도리스는 그렇게 여기고 있지. 예전부터 레이를 귀엽게 여기다 못해 위험한 놀이에 끌어들이곤 했다. 하지만 이번은 정도가 지나쳤어.”
대스승은 지금 대체 뭔 소릴 하는 걸까?
도리스란 여자는 단순히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변호라도 할 셈인가?
“그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뭡니까?”
“도리스는 내 친구의 딸일세. 대스승 알베르트의 자녀지. 한때, 나는 그녀의 대부를 자청하기도 했었지.”
대스승은 오래된 기억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잠깐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가 오랜 침묵 끝에 꺼낸 이야기는 다른 주제였다.
“빅터, 사실 오늘은 자네와 우리에게 모두 기쁜 날이 되었어야 했지. 이제야 늦게 하는 이야기지만··· 진심으로 시련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이렇게 빠른 시기에, 용케도 가혹한 성장을 견뎌주었어. 자네가 자랑스럽네. 고마운 한편, 미안한 마음이 더 크군.”
“대스승,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알고 있네. 도리스에 대해 물었는데 갑자기 딴 소릴 하니까 놀랐겠지. 하지만 이건 필요한 것이네. 겨우 마녀 사냥꾼으로 첫걸음을 내딛은 자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이야기니까.”
“저는 들을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 자네는 항상 준비가 되었었지. 어느 때든···.”
대스승은 모자를 눌러쓰며 자신의 눈을 가렸다.
그것은 마치 나와 시선을 맞추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는 듯이 보였다.
“우선 자네에게 용서부터 빌어야 할 것이야. 몸소 겪어봤을 테지만, 우리 마녀 사냥꾼들은 죄가 많은 조직이지. 기본적으로 미쳐있다. 광인의 모임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야. 그 운명에 자네를 끌어들인 것은, 아무리 사죄해도 모자라지. 자넨 그때, 죽거나 다른 마을에서 새출발을 했어야 했다.”
“아닙니다, 대스승. 저는 지금에서야 겨우···.”
“그냥 들어주게. 바라던 힘을 손에 넣었기에 들뜬 자네의 기분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그건 아직 자네가 우리의 본 모습을 모르기 때문이네.”
“본 모습···?”
“그래. 이제야 겨우 자네도 알 자격이 생긴 거야. 그러니 숨김없이 말해주겠네.”
“바라는 바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마녀를 죽이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지. 독이 발린 단검으로 암습하고, 기름과 흑색화약을 사방에 뿌린 뒤 불을 붙인다. 납으로 만든 사슬로 마녀들의 목을 매달지. 이처럼 마녀 사냥꾼들은 수 세기 넘도록 마술에 대항하는 법을 연구하고 익혀왔다. 허나··· 그것도 어느 시점에서 한계에 도달했어.”
대스승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어떤 끔찍한 기억을 떠올린 듯 했다.
“저 너머의 마물의 육체까지 받아들여가면서까지 단련했어도, 어차피 우리는 인간이었다. 아무리 기술을 연마해도 백 년도 살지 못하고, 단련된 육체는 언젠가 반드시 노쇠하지. 그래서 우리는 보다 강한 마녀 사냥꾼을 배출해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빅터, 자네는 말의 품종이 어떤 과정을 통해 선별되는지 아나?”
“품종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알아두게. 개량을 한다는 건, 결국 좋은 혈통을 가진 씨를 구해서 보다 우수한 새끼가 태어나도록 교접시키는 거지. 그 과정을 몇 세대나 반복해.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말이야.”
나는 이 시점까지도 대스승이 왜 이런 말을 늘어놓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설명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거북한 상상을 하고 말았다.
“30년 전, 우리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네. 한 강대한 마녀를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작전을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전사들을 잃고 말았어. 개중엔 알베르트의 세 제자도, 10년 이상 수련한 인재들이 다수 희생됐지. 싸울 수 있는 자가 부족해, 아무리 끌어 모아도 대부분은 선별 과정에서 탈락하고 만다. 아스트랄에게 영혼을 바친 마녀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반해, 우리는 항상 인력이 모자랐지. 그래서···.”
개량.
교접.
나는 겨우 대스승의 요지를 이해했다.
“나와 알베르트, 그리고 몇몇 베테랑 마녀 사냥꾼들이 그런 작당을 했네. 돌이켜보면 황당한 계획이었어. 원하는 인재의 마녀 사냥꾼이 없다면, 우리가 직접 만들어내면 된다고.”
“설마···.”
“맞네. 그 결과물이 바로 도리스였지.”
“그런 게 가능했단 말입니까?”
“대스승 알베르트는 당대에 손에 꼽히는 여 사냥꾼과 맺어졌지. 둘 다 우수한 전사였다. 알베르트는 강인하고, 그의 반려는 우수하고 총명한 머리를 가졌었지. 하지만 빅터, 우리는 본디 망가진 자들이다. 몸을 이루는 인자가 자광석의 빛에 망가져버렸어. 동시에 마물의 피와 살이 일부 섞여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이들이 아이를 만든다면, 대체 무엇이 태어날지 알 수나 있겠는가?”
“하지만 도리스, 그 여자는···.”
멀쩡하지 않다.
정상이 아니다.
대스승이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결핍된 채 태어났다네. 분명 도리스는 이상자다. 하지만 자네 생각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야. 그녀에게도 마음은 있고, 남을 좋아한다는 감정도 존재하지. 그럼에도 타인에게 공감을 못해. 왜일 것 같나?”
“저는 전혀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내가 듣기로, 도리스는 레이의 파쇄권에 직격했다고 하던데.”
“예. 그랬었죠.”
“뭔가 이상하지 않았나?”
“그걸 버텨내는 게 정상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리곤 팔꿈치로 얼굴을 강타 당했더군. 광대뼈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예. 레이 사저도 그냥 당하고 있진 않았습니다. 분명 도리스도 몸 여기저기가···.”
아뿔싸.
나는 그 순간 겨우 알아차렸다.
이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야 눈치 챈 거지?
대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리스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네.”
그리고 내가 도달한 결론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녀는 선천적인 무통증으로 태어났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