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류의 장(4)
5.
레이가 그렇게 화가 난 모습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자잘하게 성질을 부린 적은 있었어도, 그 분노가 직접적으로 사람을 향하는 경우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앞에 대스승이 버티고 있는 한, 스스로도 필요 이상의 과격한 행동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레이 사저, 휘둘리지 마라.”
나는 아이라의 작업실로 들어서는 레이를 막아섰다.
“저 여자는 사람 신경을 거스르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단지 너를 놀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곤 도리스 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이러려고 저 녀석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이 아니야, 더 상황이 나빠지기 전에 수습해야만 했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너도 그쯤 해둬. 이건 누가 봐도 네 잘못이니까. 나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까진 괜찮다. 하지만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마라.”
“어머, 저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네요.”
“뭐?”
“저는 레이를 싫어하거나 미워해서 이러는 게 아니거든요.”
“아니, 누가 봐도 사저에게 시비를 걸고 있지 않나?”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안절부절 못할 때마다 도리스의 입가가 벌어지는 걸 보아, 절대 좋은 의도일 리는 없었다.
그러나 도리스는 고개를 젓는다.
사실은 그보다 악독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제가 원하는 건 언제나 사람의 진심이랍니다.”
여기서 도리스는 살며시 웃었다.
그리곤 레이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레이는 항상 절제해요. 스스로에게 엄격하죠. 마음을 숨기고 대스승에게 잘 보이려 노력해요. 오래된 전통을 중시하려는 면도 고리타분해,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려고 끝없이 단련하더군요. 멋져요. 아주 훌륭해요.”
이것은 칭찬인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지금 도리스가 말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향상심에 불과하다.
스스로가 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터인데···.
“저는 그래서 레이가 참 좋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극하는 말들로 레이의 흉을 봤던 거지?”
“모르겠나요? 그건 제가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와도 같답니다.”
“···.”
“후후,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토다르드 씨도 비슷한 말을 하셨죠. 아아,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들 날 미워하는 걸까요?”
알아듣지 못하겠다.
대화를 통해서 속내를 파악해보려 해도 무리였다.
“됐어, 덩치. 네가 책임감 느낄 필요 없어. 이건 이제 나와 도리스의 문제니까. 우리 둘은 예전부터 악연이 깊거든.”
듣다못해 레이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녀는 앞을 막은 나를 밀치더니.
“도리스, 네 궤변은 이제 지긋지긋해. 내 본심을 보고 싶다고? 그럼 지금부터 확인해봐.”
“레이···.”
“방해하지 마. 이것도 필요한 일이니까.”
“아니, 내가 보기엔 쓸데없이 피 흘릴 일만 만든 것 같다. 대스승께서 이 일을 안다면 어쩔 것 같나?”
“···덩치, 늑대 무리에 대해 알고 있어?”
“그건 갑자기 왜?”
“무리 내에 사이 나쁜 두 마리의 늑대를 방치하면 반드시 싸움이 나. 하지만 그걸 무조건 막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 서열이 정해지지 않으면 더 큰일이 생겨. 마주할 때마다 시비를 걸고, 작은 다툼이 끝나지 않지. 아무것도 해결되는 일 없이 서로 감정만 상하는 거야. 그러니까 누가 위인지 확실하게 겨뤄야 할 때도 있어.”
허나 우리는 인간이다.
짐승의 논리를 붙여서 싸움을 합리화 시킬 수는 없다.
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래요. 그게 레이의 본심이라면 어쩔 수 없죠.”
짐승은 있었다.
기쁘게 도전을 받아들이는 도리스의 얼굴을 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여자는 이 상황을 처음부터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고.
6.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싸움에도 룰은 있었다.
레이가 말하기론··· 길고 긴 마녀 사냥꾼의 역사에서도 이런 경우를 대비한 규칙이 존재한다 했다.
바로 대련을 통해서.
“무기는 쓰지 않아. 이븐 가지의 분말도 당연히 금지. 맨손으로 겨루고 한 쪽에서 항복을 선언하면 즉시 끝낸다. 더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
“후후, 그 정도로 괜찮으시다면 얼마든지.”
술집 지하에는 단련을 위한 공간이 존재한다.
여러 개의 횃불을 벽에 걸어둬야 할 정도로 넓은 방···.
어떻게 만든 것인지 수수께끼투성이지만,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도 여러 번 신새를 졌었지.
레이는 지금 그곳에서 몸을 풀고 있다.
모자와 사냥용 코트를 벗은 채 셔츠의 소매를 걷는 걸 보니, 본격적으로 해볼 셈이었다.
반면에 도리스는 따로 준비 운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코트 안에 숨겨둔 여러 흉기들을 하나씩 정돈하고 있을 뿐이었다.
용케 이만큼이나 챙겨왔군.
투척용 나이프가 16개 이상에다 결투용 패링대거Parring Dagger까지···.
그 외에 몇 개는 수술 도구처럼 보였지만, 나머지는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괘··· 괜찮을까요, 빅터 씨?”
“음.”
“지금이라도 그만두라고 하면 안 돼요?”
아이라의 염려에 나는 이마를 짚어야만 했다.
당연히··· 이게 괜찮을 리가 없다.
명목은 ‘서로의 실력을 보다 향상시키기 위해 이뤄지는 연습’이라곤 하지만, 누가 보아도 사적인 결투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나는 끝내 두 사람을 말릴 수 없었다.
눈앞에서 사저의 모욕을 내뱉는 도리스를 후려갈겨주고 싶은 게 내 진심이었지만, 정작 레이가 그걸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직접 나서 처리할 셈이었다.
거기에는 내가 모르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감정의 골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어디보자, 우리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2년 전이었던가요?”
준비를 마친 도리스가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을까 기대되네요.”
곧 맨 주먹을 휘두를 상대를 대하는 것치곤 지나치게 살가운 목소리였다.
레이는 이젠 지겨운 듯이 대꾸하며, 긴 머리를 뒤로 묶었다.
“몰라. 난 너랑 마주칠 때마다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그래요? 이 언니는 레이를 만나는 게 매번 기뻤는데.”
“···누가 언니야? 나한테 있어서 넌 마녀보다 끔찍한 년이거든?”
도리스는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들더니, 그것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동전이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진 그 순간···.
두 마녀 사냥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팟.
의외로 먼저 달려든 쪽은 도리스였다.
저돌적인 맹공···.
그러면서도 기묘한 움직임이다.
도리스 또한 동방의 권법을 배운 것일까?
그녀는 날카롭게 세운 수도를 마치 단검처럼 휘둘렀다.
얼핏 빠르기만한 손장난··· 그러나 그것은 가공할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손끝에 닿은 레이의 왼쪽 어깨가 찢겨지고, 뺨을 스친 것만으로 칼로 베인 것 같은 자국이 나타났다.
허나 더 놀라운 것은 레이의 반응속도와 배짱이었다.
정면에서 도리스의 손날을 쳐내고 피하면서도, 단 한 걸음조차 물러서지 않는 것이다.
“제법이네요, 레이!”
오히려 도리스 쪽이 초조해진 것일까?
그녀는 작정하고 레이의 배를 노렸다.
하지만 움직임이 너무 커, 몸을 가볍게 튼 것만으로도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레이는 그것을 기회로 만들었다.
회피와 동시에 레이가 자신의 특기인 발차기로 대응한 것이다.
턱을 노리며 사선에서 내리 박히는 그 움직임은 마치 채찍과도 같았다.
이 궤도는 사각에서 날아와, 절대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도리스에게 방법은 없어보였다.
“후후···.”
눈이 뒤통수에라도 달리기라도 했나?
아니면 이미 그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던 걸까?
도리스는 레이의 뒤꿈치가 날아오는 절묘한 각도에 이미 손바닥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발차기를 막는 것을 넘어, 아예 그녀의 다리를 낚아채 버린다.
그리곤 일전에 날 날려버렸던 그 괴력을 이용해 레이의 몸을 바닥에 내팽겨 치려했다.
부웅!
하지만 레이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의 유연성은 상상을 초월해, 다리가 잡힌 상태에서도 허리를 틀 수 있을 정도였다.
공중에서 레이가 다른 쪽 발에 무게를 싣자, 도리스의 옆머리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제대로 명중했어, 그건 레이가 진심으로 먹였을 때 나는 타격음이었다.
뇌가 제대로 흔들렸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도리스는 몸을 비틀거리며 거리를 벌렸다.
역시 레이다.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최소한의 일격만으로 끝을 낸 것이다.
나는 여기서 레이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큿!”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쓰러진 것은 도리스가 아니라 레이 쪽이었던 것이다.
레이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제대로 두 다리를 지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처음 도리스에게 잡혔던 다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기 때문에···.
“어때요? 계속 할래요?”
도리스는 여유롭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살짝 옆머리가 찢어진 듯 했지만, 레이가 입은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상처였다.
‘젠장, 실력이나 기량은 레이 쪽이 훨씬 높았는데도···.’
분하지만 승패는 났다.
내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라도 양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먹고 있었다.
이 이상 붙어봐야 얻는 것보단 잃는 게 더 많겠어, 나는 둘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레이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비켜, 덩치! 끼어들면 너부터 죽여 버린다!”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눈에서 오른발이 반대로 꺾인 상태임에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다.
무모하기 짝이 없어, 나는 여기서 그녀를 억지로라도 막았어야 했다.
“역시 좋아, 그래야 우리 레이답죠!”
하지만 내가 말리기도 전에, 도리스는 이미 달려들고 있었다.
눈빛이 평소보다 혼탁해,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일부러 레이의 다친 다리 쪽을 봉쇄한 채, 도리스는 사악한 찌르기를 내질렀다.
‘미친년이, 이래선 맨손으로 맞붙는다는 규칙에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도리스의 손가락 끝이 향하는 방향엔, 바로 레이의 두 눈이 있었기 때문에.
“칫!”
이어서 레이가 내뱉은 신음과 더불어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콰직.
아니면 우득···.
대충 그런 울림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눈이 망가졌을 때 날 법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 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눈알을 파내기 위해 뻗은 도리스의 손가락이 닿은 것은, 고개를 숙인 레이의 이마였다.
그것만으로 도리스의 손가락 마디는 흉하게 부러져버렸다.
그 잠깐 사이, 레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후우우···.”
한 번의 들이쉼.
그리고 한 발자국이면 충분했다.
레이는 어느새 주먹을 도리스의 가슴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일연의 움직임이 무엇으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었다.
쿠과아아아앙!
그야말로 회심의 일격이었다.
도리스의 등 너머로 파쇄권破碎拳의 충격파가 폭발했다.
코트의 뒷자락이 찢겨지며, 도리스는 입에서 피거품을 토해냈다.
“어때?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이래도 내가 좋아?”
비꼬는 마무리까지 일품이었다.
나는 감탄했다.
고작 한쪽 다리 정도로는 레이의 전의를 꺾지 못해, 오히려 반격의 기회로까지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레이를 사저라 부르기에 충분한 승부였다.
시원하고도, 깔끔한 결말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벌어질 예상 밖의 사태만 없었다면.
“후후, 그야 물론이랍니다.”
“아윽!”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도리스의 무릎이 레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갈비뼈가 무사할 리 없어, 그렇지만 레이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번엔 팔꿈치로 도리스의 얼굴을 후려갈겨 앙갚음 한다.
목이 틀어질 정도의 충격··· 허나 그럼에도 도리스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도 아직 항복할 생각이 없나요?”
“웃기···지마.”
“역시 레이랑 노는 건 즐겁네요.”
싸움을 마무리 지은 것은 다음 일격이었다.
도리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의 부러진 다리를 걷어찼다.
레이의 자세가 무너지자, 도리스는 본능적으로 숨통을 끊으려 했다.
그 시점에서 나는 이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가까스로 레이를 감싸고, 도리스의 손날을 아슬아슬하게 막아낼 수 있었다.
빌어먹을, 등가죽이 칼로 베인 것만 같다.
“이게 무슨 짓인가요, 빅터 씨?”
“작작해라. 대련이라면 이걸로 충분하잖아?”
“크으, 물러···서, 덩치! 난 아직 안 졌···.”
“이기고 지고가 문제가 아니다. 네 꼴을 보라고!”
좀 더 일찍 말렸어야 했다.
이건 내 잘못이다.
레이는 충분히 강했지만, 도리스의 이상성을 너무 얕보고 말았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두는 게 아니었어.
“후후, 왜 그러시죠? 다음은 당신이 상대해주기라도 할 건가요?”
“그래, 원한다면 내가 놀아주마.”
도리스가 이상하다는 건 익히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을 못했다.
지금까지 만난 마녀 사냥꾼들과는 다르다.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말 못할 슬픔이나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눈앞의 이 여자는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남을 상처 입히는 데 망설임이 없어, 도저히 소통이 불가능하다.
이건 괴물이다.
기품 있는 목소리와 가녀린 몸으로 위장한 마물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사역마 이상··· 마녀보다도 위험할 지도 몰랐다.
‘또 다른 대스승의 딸인지 뭔지는 상관없다. 이 녀석은 여기서 내가···.’
맨손인 상태라면 승산은 있어, 레이의 파쇄권을 정통으로 맞은 이상 저 여자도 멀쩡할 린 없겠지.
나는 도끼를 꺼내들려 했다.
하지만 그걸 마음을 먹고 움직이기 직전···.
“난리도 아니로구나. 내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눈앞에서 갑자기 형체를 가진 어둠이 나타났다.
얼굴이 없다.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전신이 시커멓게 일렁이고 있어, 마치 그림자로 된 코트를 껴입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쩐지 익숙한 실루엣이다.
그것은 내 앞을 가로막더니, 슬쩍 뒤를 돌아봤다.
“잘 왔구나, 빅터여. 그 사이에 표정이 많이 늠름해졌군.”
큰 키의 가지같이 마른 체형, 그것은 분명 대스승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