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류의 장(3)
4.
아침 해가 바다 너머에서 떠오른다.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던 닷새간의 동행 끝에, 나는 겨우 아이라의 술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동안 도리스는 자신의 약속을 지켰지.
나에게 어떤 해코지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만큼, 허락 없이 손가락하나 대지 않았다.
문제는 물리적인 위해 대신, 부담스러운 눈길로 쭉 날 관찰했다는 것에 있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여자다.
의심암귀를 품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무신경한 성격이라 해도, 눈에 단검을 박아 넣는 여자를 곁에 둘만큼 어리석은 놈은 아니니까.
결국 배에서 머무는 내내, 나는 그녀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그 긴장은 항구에 내릴 때까지 쭉 이어졌다.
겨우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 땅을 밞고 나서부터였다.
“이제 좀 마음이 놓이시나요?”
“뭐?”
“표정에 안도감이 그대로 느껴져서요.”
그러나 도리스는 알고 있었다.
내가 그간 어떤 기분으로 선내에 틀어박혀 지냈는지를.
그 여자는 며칠간 내가 불편해하는 걸 지켜보며 즐겼던 것이다.
“저랑 마주칠 때마다 흠칫 놀라던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후후, 남들이 봤을 땐 무뚝뚝하고 굳은 표정으로 보였겠지만.”
사람의 시선이 이렇게까지 끔찍하게 느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거의 도망치듯 집결지로 돌아갔지.
적어도 존경의 대상인 대스승 앞에서라면, 그녀의 기행도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대스승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새삼 돌아갈 장소가 있다는 게 얼마나 벅찬 일인지··· 나는 고향을 잃고서야 겨우 깨달았으니까.
“허름한 술집이네요. 여기가 크로이 가문의 장인이 머무는 곳인가요?”
“크로이?”
“어머, 모르셨나요? 그들은 지난 세기에 마녀 사냥꾼들을 지원해주며 함께 싸웠던 귀족가랍니다.”
그랬던가?
분명 아이라를 소개받을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뭐, 현재는 몰락했지만요. 이름이 알려진 만큼 마녀들의 저주를 전부 받아낸 나머지··· 새로운 가주가 나타날 때마다 단명했죠. 어떻게든 살아남은 일족이 세계 각지에서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곤 들었어요.”
“아이라의 가문에 그런 사정이 있었군.”
“놀랍지 않나요? 명예도, 권력도 남지 않았는데 아직 마녀 사냥꾼들을 지원해주고 있다는 게?”
어지간히도 마녀에게 원한이 깊은 가문이었나?
그 전말을 알고 있냐고 도리스에게 묻자, 그녀는 심드렁하게 말을 내뱉었다.
“거기까진 모르겠네요. 저는 역사엔 별 흥미가 없어서.”
의외로 모든 면에서 박식한 건 아닌 듯했다.
어디까지나 자기 관심사에만 집중하는 부류인 모양이다.
“먼저 실례하지.”
나는 하품을 하는 도리스를 뒤로 한 채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영업을 할 리도 만무하건만, 홀에는 아이라가 잔을 닦고 있었다.
“앗, 빅터 씨?”
그녀는 나를 알아보자마자 선반에서 나오더니, 내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정말··· 정말로 다행이에요!”
묘한 기분이다.
예전이라면 이 여자가 지나치게 유난을 떤다고 여겼을 텐데, 지금은 이쪽이 오히려 사람다운 반응이란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어, 그동안 나를 염려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아이라를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녀는 유별난 게 아니라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걱정시켜 미안하군.”
“아니에요. 충분히 고생하셨단 걸아는 걸요. 세상에, 머리칼 좀 봐. 완전히 백발이 되셨어.”
거울을 볼 수 없어서 몰랐지만, 아무래도 육체를 재구성할 때 새치투성이가 된 모양이다.
결국 대스승이나 레이의 머리색이 그랬던 것도 모두 이유가 있었군.
“힘드셨죠? 괴로우셨죠? 저희 오빠도 마녀 사냥꾼이 되기 위해 훈련하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봐서··· 누구보다 그 심정을 잘 알아요. 끝내 그 노력이 보답을 받진 못했지만···.”
오라비가 있었나?
그것도 마녀 사냥꾼을 지원했다고?
하지만 이 반응을 보면, 그녀의 오빠가 무사히 돌아왔을 리는 없어보였다.
“그래도 빅터 씨는 최종 선별까지 마치셨으니까··· 오늘은 실력 발휘 좀 해야겠네요. 마침 어제 장도 봐놨답니다! 경사스러운 날엔 맛난 요리가 있어야··· 어, 그런데 그 쪽 분은?”
“후후, 이제야 제가 있다는 걸 알아채셨군요.”
아뿔싸, 아이라의 환대에 잠깐 도리스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아이라는 뒤늦게 도리스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인사가 늦었네요. 이쪽 지부에는 맨날 뵙는 분들만 오셔서 그런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처음 뵙겠어요. 아이라 크로이 양.”
“어머나, 절 아시나요? 심지어 잊혀진 가문의 성씨까지···.”
“그럼요. 선대부터 신세를 많이 졌다고 아버님에게 어린 시절부터 전해들은 걸요. 저는 도리스라고 해요.”
“도리스··· 설마 그 대스승 알베르트 님의?”
“네, 딸이랍니다.”
나는 두 가지 사실에서 놀랐다.
하나는 도리스가 평범하고 화기애애하게 상대를 대할 수 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스승의 딸이라고?’
크레이그 외에도 5인의 대스승이 더 존재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도리스가 그 자식일 줄은 몰랐다.
“후후, 물어본 적도 없잖아요?”
또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내 생각을 읽는다.
이 여자에겐 무슨 마음까지 들여다보는 능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 그건 아무래도 좋다.
“아이라, 대스승과 레이 사저는?”
“아! 내 정신 좀 봐요! 대스승 크레이그께선 잠깐 외출하셨어요. 누굴 마중나간다고 하시길래, 저는 당연히 빅터 씨일 줄 알았는데 엇갈렸나 봐요. 레이는 지금 지하에서 단련 중이에요. 바로 불러드릴까요?”
“···그럴 필요 없어, 아이라 언니. 난 여기 있으니까.”
뒤를 돌아보니 레이가 팔짱을 긴 채 문에 기대고 있었다.
여전히 새침한 얼굴, 하지만 입가는 웃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왼손의 검지로 가리키더니, 자기 쪽으로 까딱였다.
선배 노릇은 여전하군.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가 보고하라 그거지?
예전이라면 나이도 어린 게 기세만 등등하다고 속으로 씹었겠지만···.
“레이 사저.”
“그래. 해냈구나, 덩치.”
지금은 레이의 회색머리칼이 가진 의미를 안다.
그녀도 내가 겪었던 모든 고통을 넘어서 살아남은 이였기에.
돌이켜보면 내가 이식을 받는 걸 반대했던 이유도 짐작이 간다.
단순한 텃세가 아니라 진지하게 날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사제라면 당연한 일이지만, 일단 수고했다고 해둘게.”
그래도 아직 이상한 자존심은 못 버린 모양이군.
모르는 척 넘어가려니,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라가 슬쩍 끼어들었다.
“레이가 이렇게 말은 해도, 사실 빅터 씨가 떠난 뒤부터 식음을 전폐했거든요?”
“언니?!”
“재활이랍시고 검을 휘두르다가 천장에 꽂아버리기도 하고··· 하여간 난리도 아니었···.”
“언니가 잘못 본 거야!”
“어, 그래? 그럼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이야기해줄까?”
“그런 일은 없었어, 아무튼 없었던 거야!”
강제로 아이라의 입을 막으려 달려드는 모습이 가관이다.
레이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로울 지경이군.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다.
간만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이렇게 마음이 편할 줄이야.
그러나···.
“후후, 그쪽도 여전하네요. 레이 엔쯔이.”
조금 전까지 내숭을 부리고 있던 도리스가 입을 열었다.
레이와 아는 사이였던가?
하지만 이어진 도리스의 말은 그다지 좋은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솔직하지 못하네요. 철도 덜 들었고.”
노골적인 도발이다.
그녀는 레이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큰 키로 은근히 내려다보기까지 했다.
“···너, 도리스냐?”
“알아보시네요? 다행히 기억력만큼은 멀쩡한가봐?”
“어떻게 잊겠어? 너처럼 재수 없는 말투로 지껄이는 년은 내 짧은 인생에서도 드물거든.”
“어머나, 그거 나랑 같은 의견인데요. 저도 당신만큼 인상에 깊게 남은 바보는 유일하니까. 그래도 당신은 좋아해요. 낙제생, 이식을 두 번이나 실패한 주제에 근성으로 합격하는 건 정말 인상에 깊었어요.”
“대체 언제 적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대스승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던 건가요? 정말 대단해요. 난 죽었다 깨어나도 절대 그렇겐 못할 거야. ···아, 어차피 전 한 번에 성공했으니까 그럴 필욘 없었지만.”
레이는 내 눈치를 살폈다.
낙제생, 실패가 두 번이 어쩌고 라는 부분이 신경 쓰였나 보군.
하지만 나는 오히려 놀랐다.
그 고통을··· 죽을 수도 있을 정도의 생고문을 무려 두 번 이상이나 견뎌냈다니.
레이 녀석은, 대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감내해왔던 걸까?
“흥, 재능의 차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는 당시에 고작 12살이었거든. 이미 성인식을 마친 아가씨인 너랑은 다르게 말이야.”
다행히 레이는 기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비꼬면서 맞받아쳤다.
“너야말로 머리가 나빠진 거 아냐? 내가 전에 분명히 말했을 텐데? 나를 ‘엔쯔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그건 대스승과 같은 문하의 일부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이름이다. 그 쓰레기 같은 발음은··· 침략 당한 내 모국의 사정 탓에 어쩔 수 없이 붙여진 굴욕적인 명칭에 불과해.”
모국?
침략이라고?
레이의 얼굴에 진심어린 분노가 드러났다.
나는 좀처럼 그녀를 ‘엔쯔이’라고 부를 일이 없었기에 잘 몰랐지만···.
아무래도 레이에겐 깊은 사정이 있는 듯 했다.
하지만 도리스는 코웃음쳤다.
비웃을 빈틈이 생겼다고 판단했는지, 상대의 상처를 더욱 후벼 파려했다.
“아아, 그렇죠. 물론 알아요. 그러니까 굳이 이렇게 말하는 거랍니다. 레이 엔쯔이.”
“···마지막 경고야. 한 번 만 더 나를 그딴 식으로 불러 봐.”
“부른다면 어쩌시게요?”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그 예쁜 얼굴에 평생 사라지지 않을 흠집을 내줄게.”
“그거 영광인데요? 후후, 어디 한 번 해보시죠. 할 수 있다면···.”
“그만! 둘 다 거기까지 해요! 이 안에선 싸움 금지야! 대체 타지에서 온 마녀 사냥꾼들끼리 마주칠 때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람?”
둘 사이에서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구면인 건 둘째 치고, 대체 이 살벌한 분위기는 뭐란 말인가?
뒤늦게 아이라가 사이에 끼어들어 말리지 않았다면, 피바람이 불었을 지도 모른다.
레이는 급격하게 기분이 상했는지, 나까지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 말이야, 무사히 돌아온 것까진 좋은데··· 하필이면 개 같은 걸 달고 왔네?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니, 그건 나야말로 궁금하다. 내 눈을 이식해준 게 하필 저 여자라···.”
“하? 뭔데? 그럼 저 계집이 결국 이식자로···.”
“아버지께서 은퇴하셨거든요. 그 분은 이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무덤 자리나 찾아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 거죠.”
이건 농담인가?
자기 친부에 대해 하는 말치곤 좀 심한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레이 쪽도 나와 같은 의견이었다.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는 건 어디서 배운 싸가지냐?”
“어머, 실례··· 가정 사정이 좀 복잡하거든요.”
“거기다 그 분은 위대한 5인의 대스승 중 한 분이시다. 감히 네가 우습게 부를 만큼 가벼운 업적이 아니야.”
“그렇긴 하죠. 학자 출신 아니랄까봐, 교육열이 장난 아니었답니다. 어릴 때부터 친딸을 괴물이랑 싸우게 만들고, 사람을 난도질 하는 지식을 가르치고··· 정말 보통 아버지완 거리가 멀었죠.”
“그건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적어도 널 보호해주고 제대로 길러 주셨잖아? 나와는 다르게···.”
“하긴 우리 레이 엔쯔이 양에겐 부모가 없었죠? 제가 신경을 못 쓰고 그만!”
콰직.
순간 도리스가 선 바로 뒤의 테이블이 쪼개졌다.
신속의 검술, 어느새 레이의 오른손에는 칼이 들려져 있었다.
“···충분히 봐줬어. 지금까지 날 모욕한 만큼 대가를 치르게 해주지.”
다행히도, 레이는 다시 검을 칼집에 넣었다.
그녀의 옆에서 얼어붙은 아이라를 보고 겨우 냉정을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화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잊어버린 것 같으니 다시 알려주지. 내 이름은 ‘레이 엔쯔이’ 따위가 아니다. 날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은혜로운 대스승 뿐이야. 내 진짜 이름은··· !”
레이는 도리스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갔다.
이어서 면전에서 선언하듯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연희··· 려연희다!”
“음? 뭐가 다른가요? 레에, 엔후이?”
“후, 어차피 기대도 안했어. 너희 금발 코쟁이들의 짧은 혀론 영영 제대로 부르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거 당신이 그렇게 존경하는 대스승도 포함되는 거 아닌가요?”
“달라, 그 분만은 특별하다. 대스승께선 내 모든 걸 이해해주신, 아버지같은 분이시니까!”
레이는 손을 뻗어서 도리스의 멱살을 잡았다.
“지하로 따라와라.”
그리곤 강제로 시선을 맞춘 채, 한껏 감정을 담아 상대에게 전했다.
“아무래도 너와는 제대로 결판을 내야 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