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36화 (36/186)

격류의 장(2)

2.

여명.

펜릴의 둥지를 나선 나에게 새벽의 광휘가 비추었다.

햇살이 보이자, 겨우 마음에 안정이 찾아온다.

그래, 인간은 빛이 머무는 동안에 비로소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끔찍한 악몽은 드디어 종말을 고했다.

“후후, 아주 긴 밤이었죠?”

등 뒤에서 오싹한 웃음소리와 함께 도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내게 이상할 정도로 친한 척을 해댔다.

“있죠, 당신의 몸을 조사해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

“육체를 재구성했는데 이렇게 회복이 빠른 경우는 처음 봤거든요. 저만 해도 나흘 정도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을 정도니까요. 아, 혹시 이전에도 가루를 받아들인 경험이 있나요?”

저 여자는 내가 자기 말을 듣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실컷 지껄이라지.

나는 돌아보지 않을 셈이었다.

이 여자와는 상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기력이 떨어질 테니까.

토드가 도리스와 자신이 상극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이젠 뼈저리게 알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토드는 어디로 간 거지? 설마 진짜 안내만 하고 바로 떠난 건가?’

내가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자, 눈치 빠른 도리스가 입을 열었다.

“토다르드 씨를 찾으시는 거라면 괜한 짓이에요. 그 분은 지금쯤 산을 몇 개 정도 넘고 있을 테니까··· 아마 내륙 쪽에서 찾아낸 다른 후보를 데리러 갔을 걸요.”

그만큼 인솔자라는 일이 힘든 것인가?

하지만 이어서 도리스가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그것도 아닌 듯 했다.

“토드 씨도 참, 이럴 때만 쓸데없이 바쁜 척을 하고··· 제 얼굴은 보고 싶지도 않은 모양이에요. 기왕 여기까지 온 거 함께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쉬다갔음 좋았을 걸. 빅터 씨를 축하해줄 사람이 나 혼자만이라니, 너무 아쉽네요.”

그것만은 동감이다.

가능하면 토드에게 내가 시련을 통과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룻밤이지만 술자리를 통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건 나만의 일방적인 착각일까?

이렇게 보니 묘하게 섭섭하군.

하지만 도리스는 여기서 내 예상을 또 한 번 깨부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세요. 토드 씨는 털털하고 경박해 보이긴 해도, 실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거든요. 아마 당신의 죽은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걸 거예요. 만에 하나 실패했을 때조차도 감내하기 싫었던 거죠.”

“···.”

“예전에도 그랬어요. 자기가 인솔해온 사람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버리니, 어린 애처럼 밤새도록 울더군요. 그 사람은 괜히 쓸데 없는 일에 자책을 하고 죄책감을 쌓곤 하죠. 비이성적이지 않나요?”

그런가?

어쩌면 정말일지도 모른다.

집결지에서 떠나기 전날 밤, 그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며 몰래 눈시울을 붉히기 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무신경하게 함부로 말을 내뱉는 모습은 여린 마음을 숨기려던 건가?

여행길 내내 묵묵히 지냈던 것도, 자신의 인도로 인해 죽어버릴 지도 모르는 나와 너무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였던 게 아닐까?

‘하지만 난 아직 살아있다.’

토드의 인솔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서둘러 이 기쁜 소식을 알려야만 하겠지.

나는 당장 달리기 시작했다.

저 여자와 동행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어.

도리스를 떼어놓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거리를 벌릴 생각이었다.

“···어딜 가시는 거죠?”

그야 당연히 대스승과 레이의 곁이다.

달리 내가 돌아갈 곳은 거기뿐이니까.

먼 여정이었지만 길은 대충 기억한다.

내가 지나온 발자국을 역으로 추적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런 교육을 받았다.

숲을 타는 사냥꾼이라면, 아무리 초행길이라도 지리를 파악하는 능력은 필수니까.

하지만···.

“기다려요.”

파팟.

뭔가가 뺨을 스쳤다.

내가 내딛은 부츠 바로 앞에 단검이 내리 박혔다.

아슬아슬한 거리 조절··· 이걸 노리고 던졌다면 정말 놀라운 솜씨다.

“다음엔 맞출 거예요. 살짝 화가 나네요. 노골적으로 무시 받으면, 아무리 저라도 상처 받거든요?”

“···.”

“계속 대화를 피하면 당신만 손해랍니다.”

그럴 것 같다.

허나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무리겠지.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건 내키지 않고···.

‘아니, 애초에 내가 육박전으로 저 정신 나간 년을 이길 수나 있을까?’

이 여자는 강하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와는 실력이 비교도 안 될 것이다.

날 상대할 때 보여준 놀라운 전법, 힘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관절을 비트는 숙련된 무술을 생각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새삼 마녀 사냥꾼의 힘이 두려워졌다.

나의 경우, 단순히 오래도록 육체를 단련해왔을 뿐인 평범한 사내에 불과했지.

그 외엔 최근 한 달간 무리하게 몸을 혹사시킨 게 전부다.

그럼에도, 나는 이식을 통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완력만 두고 본다면 이제 곰과 맞붙어도 지지 않을지 모른단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건 저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는 능력···.

그림자를 두른다고 했나?

그건 대스승의 노련함이나 레이의 절제된 검술과도 다른 기술이었다.

가능하면 배우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뭘 그렇게 거리를 두시죠? 이젠 저와 당신은 같은 동료인 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당신에게 이 이상 손을 대진 않을 거예요.”

그랬었다.

분명 도리스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지.

펜릴의 둥지, 그러니까 지하에서 나오기 직전···.

그녀는 나를 위험한 눈길로 바라보았었다.

목적이 뭔지는 몰라도 살의가 충분한 얼굴이었다.

빈틈이 생기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았지.

그런데, 의외로 도리스는 금방 자신을 제어해냈다.

황당하게도 갑자기 심호흡을 하더니, 끝내는 육성으로 숫자를 열까지 세어 보였다.

그리곤 잠시 후, 겨우 안정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하는 것이다.

‘괜찮아요. 지금 막 진정했으니까. 저는 자제심이 아주 뛰어나답니다. 가지고 놀 장난감 정도는 알아서 구분할 수 있어요. 그게 제 장점이죠.’

그걸 자랑이라고 하고 자빠졌던 것일까?

당연히 전혀 안심이 되질 않았다.

오히려 화약더미에 놓인 성냥처럼, 곁이 절대로 둬선 안 될 것만 같은 느낌만 강해졌다.

하지만 도리스는 끝내 나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몇 마디 언질을 주었지만 그래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너는 이식자··· 라는 직책이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 건 시시해요. 저는 당신에게 더 흥미가 생겼답니다.’

‘그렇게 간단히 내팽겨 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후후, 어디까지나 이 일은 아버지의 대리에 불과해요. 제가 사라지면, 결국 다시 돌아오실 수밖에 없겠지요.’

‘무책임하군.’

‘어쩔 수 있나요? 금방 질려버린 걸. 저는 사실 마녀들과 놀 때가 더 즐거운 걸요. 시술을 돕는 건 일종의 유배 기간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것도 이젠 충분해요.’

여기서 나는 그녀의 진의가 의심되었다.

내가 이 장소를 방문하기 전, 앞서 지원자들이 셋 이나 있었다고 했었지.

둘은 눈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죽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물음에 도리스는 가볍게 말했다.

‘아, 그 사람 말이죠? 살아남긴 했죠. 최종단계를 통과하긴 했어요. 하지만 그런 거, 난 인정 못해. 당신이랑은 전혀 달랐거든요.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거짓뿐이었어요. 심지어 고통에 조차 진정성을 드러내지 않았죠. 필요 없어요, 그딴 건.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릴··· 아, 물론 농담이랍니다.’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 이상 캐물었다간 쓸데없이 자극만할 것 같아, 나는 그대로 입을 닫았다.

그리곤 서둘러 바깥으로 나섰지.

미친 여자와 폐쇄된 공간에 단 둘이 함께 있는 게 끔찍이 싫었으니까.

덧붙여 또 한 가지···.

잠시 동안만이라도 이 펜릴의 둥지에 머물고 싶지 않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은 도리스의 말처럼 성소 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새로운 오른쪽 눈인 정안精眼을 동해 숨겨진 세계의 진짜 모습을···.

지금이라도 잊을 수 있다면 기억 속에서 전부 지워버리고 싶다.

그 정도로 펜릴의 둥지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흉흉한 장소였다.

어둠을 간파하는 눈을 통해 바라본 자광석의 정체는 그야말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빌어먹을, 나는 지금껏 이런 걸 아름답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푸른 조명 따위가 아니다.

이것은 광선 주제에 명백한 악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사악한 빛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빛의 형태를 띤 마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눈을 부릅뜨자, 이질적인 형상이 보인다.

나선의 궤적이 흘러간다.

사방에 빼곡한 화살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 수는 수천, 아니 수만···.

어쩌면 그보다 많이, 내가 셀 수 있는 단위조차 아득히 넘어갈 정도였다.

대리석 바닥을 꿰뚫는 것이 있는가 하면, 반사되어 튕겨 나오는 것도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사정없이 내 몸속을 관통한다.

미세하게 작지만, 자세히 보면 파장이 톱날을 닮아 있었다.

도리스의 설명에 의하면, 그 광체는 피부로 스며들어 내장을 파내고 육체를 이루는 생명의 최소 단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나의 몸은 마물의 인자와 뒤섞인 이후로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게 변한 모양이지만···.

이런 꼴이니 여기 노출된 이가 병자가 되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거기다 그 천장···.

푸르스름한 마광을 뿜어내는 그 보석의 주위로 어떤 모습이 엿보였다.

그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찼다.

수많은 인간의 두상, 해골을 닮은 마귀가 지박령처럼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바라보며, 도리스가 읊조린 말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저건 실패한 자들이에요. 마녀를 향한 증오나 분노가 충분하지 못했던 이들이지요. 이곳에서 죽으면, 영혼이라 부를 수 있는 정신의 일부가 저렇게 구속되고 만답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 많다.

지나칠 정도로 많아서 부조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오래도록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1단계 이식을 견뎌내는 비율을 열 명 중에서 셋이에요. 이것만 보면 의외로 많죠? 사람은 그만큼 강하답니다. 누구나 어지간해선 육체적 고통쯤은 어떻게든 견뎌낼 수 있단 반증이지요. 하지만 최종 단계까지 통과할 수 있는 이는 드물어요. 그렇게 고통을 참아낸 후보들을 백 명 정도 모아놓는다 해도, 그 중 살아남는 건 많아봐야 서넛 명 정도이니까요.’

‘나는 운이 좋았던 거군.’

‘아뇨. 그저 당신이 적합했기 때문이에요. 이건 확률 놀음이 아니에요. 멀리서보면 아주 작은 기회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걸 성공으로 만드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의지가 있어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도리스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멋져요, 빅터. 훌륭하게 통과했으니까요. 당신은 감정을 속이지 않아, 나에게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보여줬어요. 당신의 증오는 진짜에요. 순도가 높은 그 감정에··· 저는 그만 소녀처럼 가슴이 다 뛰었답니다.’

분명 칭찬을 하는 것처럼 같았지만, 내 입장에선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저 여자는 내가 돌아선 사이, 계속해서 자신의 엄지 손톱을 씹어대고 있었다.

손끝에 피가 날 정도로 깊게 물어 뜯는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어, 어떤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상기된 얼굴로 교성을 참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애써 모른 척을 해주는 것마저도 곤혹이었다,

알 수 있었던 건 이 여자가 희대의 미치광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리고 이 이후로, 나는 그녀에게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지.

“이제 슬슬 입을 열어주세요. 따라가는 입장에서 행선지도 모르는 건 너무 하지 않을까요?”

“···배를 탄다.”

“그리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거지.”

“아하, 올도슈타트에서 도르프하임 쪽인가요? 그러고 보니 그쯤에 장인의 은거지가 있다고 했었죠. 그럼··· 대스승은 지금 거기 머물고 있다고 생각해도 무방하겠네요.”

눈치가 빠르군.

나는 지명을 밝힌 적이 없는 걸로 아는데.

“선박을 탄다는 건 바다를 건넌단 이야기겠죠. 가장 가까운 항구에서 넘어가는 건너편 육지라면 어차피 뻔해요. 토다르드 씨가 오가는 길 정도는 저도 알고 있거든요.”

작은 정보만으로 여기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건가?

클라리스와는 다른 형태의 영리함이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왔다.

차라리 계속 입을 닥치고 있었으면 좋았을 걸···.

도리스는 일부러 나를 놀리듯 요염한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이젠 절 뿌리치고 도망쳐도 소용없답니다. 당신이 어디로 갈지 알아냈으니까.”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여자에 비하면, 레이의 텃세나 그레이스의 질투 따윈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3.

···뒤늦게 핑계를 말하자면, 무리하게 도리스를 떼어놓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결국 집결지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끔찍한 동행인 덕에 단 하룻밤도 숙면을 취하지 못했지.

그리고 도착하고 나서도, 나는 내내 깊은 후회를 해야만 했다.

나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마녀 사냥꾼들끼리라 할지라도 모두가 친한 사이가 아니란 걸.

나는 물론, 토드조차 질겁시킨 도리스를··· 대스승은 몰라도 다른 한 명이 쉽사리 받아들일 리가 없다는 것을.

레이 엔쯔이···.

기가 드센 거라면 그녀 또한 만만치 않지.

과할 정도로 예우를 중요시하는 레이와, 윤리 따위는 내다버린 제멋대로의 도리스···.

상상해보라.

사나운 두 마리의 맹수를 한 우리에 집어넣어 대면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를···.

그리고 그 원흉은 바로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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