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35화 (35/186)

격류의 장(1)

1.

손끝이 움직인다.

다리에 감각이 돌아왔다.

사방에 꿈틀거리는 기척이 느껴지고, 썩어문드러진 치즈 같은 역한 향취가 느껴졌다.

어떤 속삭임이 귓가를 맴돈다.

그것은 내 무의식과, 나의 목소리를 빌려 끝없이 지껄여댔다.

깨어나지 마.

우리는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어.

너의 감미로운 절망이 필요하다.

양보해주지.

너의 자아는 가능한 온존시켜 주겠다.

대가로 언제까지고 머물 수 있는 낙원을 제공하지.

그러니 계속 눈을 감고 있어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줄 터이니···.

과거를 돌이키고 싶은가?

죽은 아내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딸아이가 이대로 성장했다면,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 궁금하지도 않단 말인가?

수많은 가능성을 떠올려 보아라.

그리고 스스로의 양심에 물어봐.

지금껏 한 번도 망상해본 적이 없단 말인가?

만에 하나, 그레이스가 아닌 다른 여자를 선택한 미래를 말이다.

그 붉은 머리 여자와 함께하는 선택지는 어떤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낙후된 마을 따위에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여행하는 것이다.

신비를 파헤치며, 네가 원하던 이치를 쫓는 것이다.

새로운 경험을 원하지 않나?

주교나 사제 따위가 말하는 포장된 진리를 넘어선 우주 만물의 법칙에 다가가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다.

너의 세계에서 클라리스는 여전히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다정할 것이다.

현실에서 그녀가 사악한 마녀였단 사실은 아무래도 좋지 않나?

괴롭기만 한 진실은 그대로 묻어버리고, 너는 행복한 이상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다.

너의 바람은 모두 이루어져서 어떤 슬픔도 없는 세상을 구축할 수 있다.

원한다면, 행복한 망각에 빠지게 해주마.

무엇도 떠올리지 못하게 사고를 막아주겠다.

고통에서 달아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건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지극히 당연한 본능이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에게 바치거라.

어서···!

‘웃기지··· 마라!’

내 머릿속에서 나가!

그 같잖은 유혹도 집어 치워라!

그딴 건 필요없다.

나의 가족은 이미 죽었어, 고향은 사라졌다.

나 때문이다.

나로 인해서 모든 것이 망가졌다.

그러니 도망쳐선 안 돼.

여기서 고개를 돌리면, 나는 정말로 모두를 배신하는 것이 되고 만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을 기려야만 한다.

나만은 죽어간 마을 사람들과 가족을 위해 울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난 기억을 떠올리며, 아직도 내 정신에 빌붙으려는 것들을 떨쳐내려 했다.

‘빅터, 자네의 장래가 기대되는군.’

그런 나에게 대스승은 기회를 주었다.

‘아무튼 고집불통이야, 어리석은 사내.’

레이 사저는 내 무모함조차 믿어주었다.

‘애꿎은 일이다.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참 묘한 기분이군. 빌어먹을···.’

꼼짝없이 당했겠지.

어쩌면 반항조차 무리였을 거다.

아마 대스승과 레이를 만나기 전의, 마을이 제물로 바쳐진 그 당시의 나였다면···.

모든 것에서 도망쳐서 몽마들이 만들어준 거짓된 낙원에 빠져들었을 지도 모른다.

놈들에겐 안됐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견뎌냈다.

매력적인 유혹보다도, 모든 걸 내다버릴 뿐인 고통뿐인 복수를 택하고 말았지.

그만큼 내 정신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합리적인 사고나 이성적인 판단 따윈 개나 줘라. 나는 더는 행복을 바라지 않아,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죄다.

그레이스를 떠나고, 아델을 지켜주지 못한 어리석은 놈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대스승, 저는 당신의 기대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레이, 나는 겨우 너의 등뒤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었다.’

두 명의 마녀 사냥꾼···.

그들과 지낸 기간은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여정은, 어느새 나의 새로운 유산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모든 시련을 견뎌낼 수 있게끔 만들었다.

“좋은 꿈 꾸셨나요?”

고개를 들어 올린 나에게, 현실 세계의 도리스가 묻는다.

그 순간, 나는 몽롱한 의식을 찢어 발기고 몽마들이 파놓은 덫에서 빠져나갔다.

이어서 나는 입을 놀린다.

도리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더럽게, 엿 같은 악몽이었다.”

성대가 회복되었다.

삐걱거리던 전신에 힘이 돌아온다.

정신이 또렷해지고, 앞이 훤히 보였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멋져요. 이걸로 당신은···.”

내 착각인가?

나의 부활이 진심으로 기쁜 듯 보였다.

반면에 나는 기분이 더럽다.

지금까지 받은 수모를 생각하면, 나는 그 누구보다 저 여자에게 갚아줄 것이 많았기에.

하지만 당장 내가 상대해야 할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빅···터, 빅터빅터빅터빅터빅터!”

기괴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그것은 수 십 개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놈들의 정체를 알아챘다.

“저것들이 몽마인가?”

“네. 조금 전까지 당신의 뇌를 빨아들이려 붙어 있었던 아이들이죠.”

···앞으론 잠을 잘 때마다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놈들의 모습은 평생토록 모르는 게 나았을 테니까.

하지만 완벽히 신경과 이어진 나의 정안은··· 이제 이븐 가지의 분말이 없이도 어둠 속에 암약해 있던 세계를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많이도 몰려왔군. 열 댓 마리 이상인가?’

겉모습만 봐서는, 그저 부정형의 투명한 뭔가 같다.

마치 돼지기름이 굳어 뭉친 것처럼 생겼지.

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게 얼마나 역겨운 지를 깨닫게 된다.

우선은 얼굴이다.

몸통에 사람의 것을 닮은 구멍이 무수히 뚫려있는 것이다.

도리스는 그걸 보더니, 흥미롭다는 듯 웃어보였다.

“어머나, 앙증맞은 데스마스크네요?”

“데스··· 뭐?”

“몽마들은 자기가 잡아먹은 희생자들의 얼굴가죽을 그대로 몸에 새긴답니다. 보세요.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죠?”

다시 말해, 이건 망자에 대한 조롱이란 의미였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것들이란 말인가?

사람의 골을 파먹는 정도로도 부족한 거냐?

희생자의 기억을 왜곡하고 망가뜨리는 것만으론 만족할 수 없나?

구역질이 난다, 이 빌어먹을 괴물 놈들.

저 수 많은 얼굴을 보라···.

그렇다면 지금껏 얼마나 많은 인간의 마음을 유린해온 거지?

“빅터빅터빅터, 빅터어어어···!”

“후후, 당신의 절망이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 본데요? 이 정도로 몽마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도 드문데.”

“···같잖다.”

하지만 지금 끌어 오르는 이 울분은··· 결코 가볍지 않지.

“굉장한 회복력이에요. 거기다 가공할 증오의 농도···.”

“농도? 그건 또 무슨 소리지?”

“아, 실언을 했네요. 이건 못 들었다고 생각해주세요. 아직 그것까지 알기엔 너무 이르니까.”

“까불지 마. 날 언제까지 가지고 놀 생각이냐?”

“놀리다뇨? 당치도 않아요. 저는 항상 당신을 응원했던 걸요?”

도리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무엇하나 과장되고 어색한 얼굴이었다.

아직도 날 놀리는 건가?

아니··· 그녀는 감탄하고, 기뻐하며 나의 변화를 하나하나 즐기고 있었다.

“젠장, 상종을 못하겠군.”

나는 도리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마물의 처리였다.

‘용서 못한다. 제 아무리 환상에 불과할 지라도, 너희는··· 감히 이 손으로 내 가장 소중한 가족을 죽이도록 만들었다!’

저 놈들은 존재해선 안 된다.

편린만 남은 과거였을지언정, 사람의 추억을 이용하는 것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나는 오른팔에 쇠사슬을 휘감았다.

그리고 도끼를 회수해 집어 들었다.

“빅빅빅, 빅터빅터!”

“닥쳐!”

몽마들의 표면이 들썩인 것과, 내가 놈들에게 달려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괴물 놈들··· 몸에서 팔과 손 비슷한 것을 길게 뻗어 오는군.

머리 위로 투명한 손아귀가 무수히 휘감겨온다.

그것은 흡사 그물처럼 나를 덮쳤다.

‘비켜, 나를 방해하지 마라!’

부웅!

나는 왼팔로 하늘을 갈랐다.

양손으로 겨우 쥐어야 들어 올렸을 도끼가, 너무도 손쉽게 궤적을 그렸다.

단지 그것만으로 양옆으로 절단된 괴물의 팔이 떨어졌다.

“하압···!”

어어서 도약.

몽마의 무리와 떨어져있던 거리를 순식간에 좁혔다.

나는 공중에서 도끼 자루를 고쳐 잡았다.

두 손으로···.

젖 먹던 힘까지 끌어와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내 예상을 훨씬 넘어선 반동이, 원심력의 무게중심이 한 곳으로 기울었다.

콰아아앙!

전력을 다한 내려찍기, 힘 조절에 실패한 참격이 지면을 갈랐다.

매끈하던 대리석의 바닥에 폭발이 일어나, 사방에 파편과 흙먼지를 튀겼다.

그리고 그 위력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괴물은 도끼날에 반으로 쪼개지다 못해, 아주 뭉개진 아교 덩어리처럼 터져버렸다.

“빅···터터, 빅터··· 우리에게, 빅터··· 안식의 세계로, 하나가 되어···라.”

놈들은 아직도 나를 회유할 셈이었다.

촉수처럼 기다란 기관을 뻗어서 내 머리와 이어지려고 발악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 답해주려 했다.

몸을 통해서···.

명백한 적의로 확실히 의사표명을 했다.

놈들의 대가리를 갈라, 몸통을 찢고··· 조각조각 내는 것으로!

‘뒈져, 전부 죽어버려라! 한 놈도 남김없이···!’

휘두른 풍압만으로도 마의 존재들이 으깨진다.

쇠사슬에 스친 정도로 몽마가 우스꽝스런 비명을 질렀다.

어느 놈 하나, 내 분노가 담긴 도끼의 일격을 견뎌내지 못했다.

나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에 몸을 맡겼다.

이건 가루를 통한 광분과도 다르다.

엇나가지 않고 제어할 수 있는··· 내 육체의 온전하고도 순수한 힘이었다.

그것에 이븐 가지의 분말은 불필요해, 나는 스스로가 절제할 수 없을만큼 격노를 불태웠다.

내가 움직임을 멈춘 것은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몽마를 쳐 죽인 다음이었다.

사방이 창백한 점액으로 더럽혀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겨우 도끼를 손아귀에서 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싸워도, 숨조차 거칠어지지 않는 건가?’

나는 겨우 자각했다.

이 몸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내가 기어이 사람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그러나 후회는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 과거에 대한 무력감만이 뒤늦게 몰려올 뿐이었다.

‘이 힘··· 진즉 이 힘이 있었더라면!’

불길한 예감이 든다.

그러면서도 절대 피하지 못할 확신이 내 뇌리를 잠식해왔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 빌어먹을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더 강해질수록, 더 많은 마물을 쓰러뜨린다고 해도···.

나는 항상 지키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갈 곳을 잃은 울분을 끌어안게 될 것이다.

대스승이 옳았다.

그 말의 무게를 실감한다.

이것은 정말 죽는 것보다 못한 길이다.

하지만 싸울 수 없는 무력함은 그보다 끔찍하지.

이것은 절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다.

죽음을 기약하며 끝없이 소금물을 퍼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끝없는 가시밭을 나아갈 것이다.

결코 멈추지 않겠지.

클라리스를···.

자색의 마녀를 내 손으로 죽이는 그 날까지···.

“당신께 경의를 표하도록 하죠. 그대, 새로운 마녀 사냥꾼이여.”

어울리지 않게, 도리스는 공손한 말투를 건넸다.

무슨 바람이 분 거지?

내가 완전히 회복된 것을 보고 자기가 한 일이 뒤늦게 걱정이라도 된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지.

이 여자는 여전히 나에게 시커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흉흉하고, 꺼림칙하며··· 굉장히 불쾌한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리고 환영해요. 우리들의 세계에 온 걸···.”

섬뜩한 미소였다.

예의를 차리면서도 연신 위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이 표정을 안다.

예전에 드물게 그레이스가 침대에 누운 나를 향하던 그 눈빛이었다.

동시에 먹음직스런 음식을 앞에 두고 견딜 수 없다는 얼굴···.

그것은 묘한 소유욕과 집착, 그리고 노골적인 정욕이 뒤섞인 무언가였다.

“···아아, 역시 참을 수 없어! 고리타분한 임무나 사명 따위, 이젠 아무래도 좋아!”

이어서 도리스는 선언했다.

그 일방적인 의사 표명에, 나는 그만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냐하면···.

“빅터, 당신을 따라가겠어요.”

누구도 원치 않던 최악의 동행자가 생기고 말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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