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32화 (32/186)

각인의 장(5)

9.

어린 시절에 눈을 다친 적이 있다.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 날아온 먼지 속에 미세한 알갱이 같은 게 섞였던 모양이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점막에 위험한 것이 닿자마자 반사적으로 ‘악’ 소리가 나오고 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게 딱히 깊은 상처도 아니었단 것이다.

그럼에도 며칠 정도 이물감을 느껴야했지.

그 정도로 눈은 민감한 기관이다.

그런데 그런 안구에 날붙이를 찔러 넣는다면?

심지어 그게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의 길이까지 푹 들어간다면?

“···크아아아악!”

고통에는 시간차가 있는 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몸은 너무 지독한 아픔에는 무의식적으로 원인파악을 우선하는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고 나서야 겨우 반응했다.

그리고 이해했다.

저 여자가 나를··· 내 오른쪽 눈을 찔렀다는 것을.

“미친,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바로 도끼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휘두를 기력은 없다.

단지 최대한 상대를 위협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아무리 한쪽 눈이 상했다고 해도 덩치차가 있으니, 이 이상 접근하진 못하겠지.

보통 이 방법은 통한다.

나는 체구가 큰 편이고, 얼굴도 험상 굳으니까.

상처를 입은 짐승이 더 위험하다는 편견도 있는 만큼, 나는 여자가 겁을 먹고 물러서길 기대했다.

조금이면 된다.

그러면 이 극렬한 통증을 견뎌내고, 재정비 한 다음, 어떻게든 눈에 상처를 낸 보복을···.

“아, 당신 화난 목소리가 좋네요.”

“뭐라고?”

“그 반응도 마음에 들어.”

이 여자는 지금 뭔 소릴 하는 거지?

왜 좋아 죽겠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자빠진 걸까?

“표정에서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져요. 그런데도 애써 숨까지 고르면서 화가 난 척을 하시네요? 재미있는 남자···.”

간파 당했다.

저 여자는 내가 무기를 들어 올린 게 허세라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넌 대체···.”

“음, 혹시 기억력이 나쁘신가요? 방금 소개 드렸을 텐데. 제 이름은 도리스라고···.”

“그딴 걸 물은 게 아니다!”

“아하? 그럼 이거 말이군요?”

여자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러면서 자기 손의 물건을 들어보였다.

단검···.

그런데 모양이 특이했다.

날 자체가 굉장히 짧은 것은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깊이 찌를 수 없도록 손잡이 양옆에서 길게 뻗어 나온 장식물은 대체···.

“저는 아버지처럼 세밀한 작업엔 자신이 없어서··· 가끔 손이 미끄러지거나 하면 문제잖아요? 그래서 이걸 달아두면 안심이에요. 언제나 고른 깊이로 찌를 수 있답니다. 보세요, 이거 조절도 가능하거든요.”

뭐지?

분명 발음도 또렷하고, 목소리까지 고운데다 말도 조리 있게 잘 하는 것 같은데 정작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게 지금 막 사람의 눈깔에 칼을 박아 넣은 인간이 할 말이란 말인가?

심지어 태도도 이상하다.

잔뜩 들뜬 얼굴로 왜 흉기를 소개하고 자빠진 거지?

저 순진무구한 표정···.

마치 장난감을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다.

“나에게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 눈의 상처에 익숙해질 여유가 필요했다.

다행이 저 여자는 말이 많은 듯 해, 잘만 대화를 걸면 반격할 기회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는 내 물음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상한 걸 물으시네요. 오히려 반문 드리죠. 빅터, 당신은 왜 여기에 오셨죠?”

“이식···을 위해서다.”

“그렇죠? 그래서 한 거예요.”

“개소리! 그게 정말이라면 제대로 준비를 한 다음에···!”

“준비? 저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소독이라던가, 마취라던가··· 아무튼 그런 게 필요할 거 아니냐고!”

“그거라면 아무 문제없어요. 마침 당신이 이곳에 방문하기 직전에 칼날을 불에 달구고, 독한 술로 헹궈냈거든요. 그리고 마취? 농담하시는 거죠?”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 같아 보이나?”

“시술을 하려면 당신의 신경을 온전하게 유지해야 해요. 그게 가장 중요하죠. 그러니 감각을 둔하게 만드는 마취 따윈 할 수 없어요. 해서도 안 되죠.”

“그렇다면 그걸 먼저 이야기하란 말이다! 설마, 기습한 것도 필요하다는 개소릴 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 그건 제 취미에요.”

“취···미?”

나는 어이를 상실했다.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미리 각오한 사람의 반응은 재미없어요. 참을 수 있다고 자신에게 암시를 걸면, 어지간한 아픔은 다 견뎌내니까요. 왜라고 생각해요? 그건 이미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머리로 어렴풋이 그걸 떠올리면서 준비해보거든요.”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냐!?”

“모르기 때문에, 불시의 고통이야말로 진짜 모습인거니까요! 꾸며내지 않은 참된 본성인 거예요!”

“···.”

“아버지께서 은퇴하셔서 다행이에요. 겨우 나만의 시술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뻐요. 아직 겨우 세 명 뿐이지만, 저는 젊으니까 앞으로도 기회는 많겠죠? 아아, 당분간 그녀들과 놀 수 없는 건 슬픈 일이지만요.”

이 여자는 정상이 아니다.

완전히 미쳐있다.

이건 대스승 크레이그가 보여주던 광기와도 다른 무언가다.

나는 조금 전 토드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어떤 의미에서 마녀보다 더 마녀 같은 년이니까.’

격하게 동의한다.

이 여자가 마녀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을 마녀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너··· 정말 마녀 사냥꾼이냐?”

“어머, 그럼 뭐로 보이시나요? 마녀? 후후후···.”

뭘 농담처럼 말하고 있는 거지?

설마 자기가 이상하단 자각조차 없단 말인가?

그 태도가 열 받아, 나는 그만 가장 모욕적인 말을 뱉어냈다.

“네가 마녀랑 다를 게 뭐지?”

그러나 이 여자··· 도리스에겐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빅터 씨, 당신은 마녀가 어째서 마녀인지 아시나요?”

“그딴 거에 이유가 있을까보냐?”

“있답니다. 그리고 그게 저와 마녀의 결정적인 차이인거죠. 그건 바로···.”

여자는 단언했지만, 선뜻 묻기가 겁이 난다.

허나 내가 궁금해 하든지 말든지, 여자는 말을 꺼낼 셈이었다.

여자는 양손을 포개어 박수를 치더니.

“사랑, 이에요!”

“나를··· 놀리는 거냐?”

“아뇨, 그럴 리가. 왜냐면 사실이거든요.”

여자는 멋대로 설명을 이어갔다.

“모르시나요? 마녀가 되는 조건은 명백해요. 인간을 증오하고 세계를 저주해야하죠. 모든 것이 파멸했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람, 그리고 자신마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깊은 절망이 차원 너머의 존재를 부른 답니다. 어때요? 저랑은 정반대죠?”

“뭐가 반대란 거냐?”

“그야 저는 세상을 증오하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사랑해마지 않는답니다. 왜냐면 이 세계엔 항상 고통이 넘치거든요.”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당신은 미소에서 진심을 어디까지 볼 수 있나요? 상대가 웃는다고 기쁨이 온전하게 전해지던가요?”

“하?”

“하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어요. 저라도 거울을 보고 연습하면, 누구나 속일 수 있는 훌륭한 표정을 보여줄 수 있답니다. 그러면 눈물은 어떨까요? 그건 슬픔의 증거라 할 수 있나요?”

“가짜 눈물을 이야기하고 싶은 거냐?”

“아뇨. 그저 그건 생리현상에 불과하단 거죠. 안구의 체액 따위, 그 정도는 하품을 해도 나와요. 알겠어요? 이것엔 순수한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거예요. 하지만 고통은 다르죠.”

“웃기지 마라! 다르기는 개뿔···.”

“아뇨, 들어보세요! 고통은 무뎌지지 않아요. 절대 순응이 없죠. 아무리 강인하고 완고한 의지라 할지라도, 신경이 정상적으로 이어져 있다면 반드시 반응해요. 거기엔··· 그 무엇보다 온전한 진심이 담겨있는 거예요!”

빌어먹을, 아무리 시간을 끌기 위해서라지만 궤변도 이딴 식이면 들어주는데도 한계가 있다.

이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지친다.

그러나 저 여자는 내 입장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는 그 순수함을 그 무엇보다 사랑해요. 그래서 그녀들과 놀 때, 저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지죠. 마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존재들이니까. 거기다 얼마든지 뭉개고, 잘라내도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의 반응을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어. 후후후, 상상만 해도 너무 좋아요.”

왜냐?

어째서 이런 인간이 있는 거지?

이렇게 마주보고 서로 같은 언어로 말을 하고 있는데도, 상대가 도저히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아참, 내 정신 좀 봐요! 설명은 충분히 해드린 것 같죠? 그럼 이제 슬슬···.”

여자가 다가온다.

나는 도끼를 들어올렸다.

맞출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내가 건제하다는 걸 보여야만 했다.

그러나 상대는 주저하지 않았다.

약간이라도 겁을 먹은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이 없는 건가?

내가 자길 헤칠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나?

아니, 겁을 먹은 것은 오히려 나였다.

당당하게 거리를 좁혀오는 여자에게, 나는 정체모를 공포를 느꼈다.

‘이년은 위험하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당한다.

그 확신이 든 순간, 나는 도끼를 휘둘렀다.

최대한 앞으로 달려들며, 피할 수 없게 횡으로 넓게 베어냈다.

그러나 닿지 않는다.

내가 가른 것은 그림자뿐이었다.

“아니···?”

사라졌다.

주변을 둘러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건 대체 무슨 요술이지?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리자, 이번엔 뒤에서 고요한 목소리가 울렸다.

“···가만히 계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저는 가끔 손이 미끄러지니까.”

부웅.

다시금 도끼로 측면을 갈긴다.

하지만 이번에도 빗나갔다.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내 눈을 찔렀을 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순간, 여자는 분명 내 뒤에서 오고 있었지.

하지만 단검이 날아온 건 정면이었다.

아무 조짐도 없이, 갑자기 박혀 든 것이다.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다···.

혹시 이 여자는 그런 식의 기이한 재주를 가진 것인가?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은 채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적지 않게 놀란 눈치시네요. 설마 이 기술은 처음 보시나요?”

“기술이라고? 그런 사악한 마술 같은 건 모른다!”

“사악해요? 후후,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요. 대스승 크레이그께서 아무 말도 안하셨던가요?”

“뭐?”

“이븐 가지의 분말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안다. 그 정도는 나도···.”

또다.

여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우리들이 흩뿌리는 이븐 가지의 가루는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뜨려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해주고, 만질 수 없는 것에 손을 댈 수 있게끔 하죠. 직접 들이마시면 육체가 허락하는 최대의 힘을, 그리고 정신을 한계까지 고양시킬 수도 있답니다. 그리고 또···.”

그때였다.

여자는 자신의 가슴 언저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렇게 직접 몸에 흩뿌리는 것으로 이런 장난도 칠 수 있죠. 다른 사냥꾼들은 이걸 이렇게 표현한답니다.”

그리고 뭔가를 쥐어 보이는 동작···.

나는 이전에 저 모습을 대스승에게서 본 기억이 있다.

“그림자를 두른다, 라고요.”

뒤에서 하얀 손이 나타났다.

그리고 내가 잡은 도끼 자루를 잡는 것이 아닌가?

“그 위험한 건 내려두세요.”

“큭?!”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강력한 힘이 손잡이를 끌어당겨, 나는 그것에 일방적으로 끌려갔다.

이게 여자의 완력이란 말인가?

“끝까지 안 놓으실 건가요? 후후, 정말 고집이 쌔시네요?”

놓을까보냐?

나는 그렇게 대꾸해줄 셈이었다.

그러나 말을 하기도 전에, 나는 그대로 대리석 바닥에 내팽겨 쳐졌다.

자광석의 천장이 보인다.

이어서 수직으로 칼날이 내려 꽂혔다.

“부디 얌전하게···.”

다행히도, 이번에 찍힌 것은 내 몸이 아니었다.

여자의 단검은 내 옆머리 아래의 바닥을 박혀 있었다.

“후후, 이래 봐도 저 지금 되게 참고 있거든요? 자꾸 날뛰시면 어떻게 할지 몰라요. 찢고, 베고, 녹여서··· 당장이라도 당신의 모든 고통을 음미하고 싶어. 하지만 당신은 미래에 우리의 동료가 될 몸이니까, 저번처럼 너무 심하게 대하면 아버지에게 혼이 날 거에요. 그럼 서로 곤란하잖아요?”

그리곤 내 몸 위에 올라탄다.

한 손으론 가공할 힘으로 내 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언제 꺼낸 것인지도 모를 뭔가를···.

“실은 좀 더 즐기고 싶지만, 어디까지나 일은 일이니까요.”

그것은 악마의 도구처럼 보였다.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손잡이는 언뜻 보면 가위를 닮았지만, 날붙이 대신 위 아래로 열리는 주걱 같은 게 기울어진 형태로 달려 있었다.

여자는 그걸 피가 흐르는 내 오른쪽 눈에 들이밀었다.

이어서 그녀가 손잡이를 펼치자 강제로 눈꺼풀이 올라갔다.

젠장, 이제야 알겠다.

이건 내가 눈을 감지 못하도록 만드는 물건이다.

그 증거로 일단 한 번 억지로 안구를 드러내면, 자력으론 감을 수 없게 고정하는 장치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자, 다음은···.”

여자는 코트 안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번엔 한 눈에도 집개처럼 보이는 물건을 꺼내든다.

그렇다면 그 용도는 당연히···.

“아아, 역시 너무 좋아요! 그 얼굴···.”

콰직.

전에 없었던 감촉과 함께, 그 무엇보다 가까이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평생을 함께해왔던 소중한 기관을 눈구멍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만일 이때의 나에게, 과거의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면···.

나는 한 가지를 당부하리라.

대스승이 배에 타기 전에 해주었던 그 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라고.

그랬다.

이것은 정말로 시작에 불과했다.

맨 정신으로 눈이 뽑히는 고통조차도··· 이후 벌어질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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