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31화 (31/186)

각인의 장(4)

6.

나는 오래도록 토드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인간들을 제물로 바친 자색의 마녀에 대해서.

‘클라리스, 너는 대체···.’

소재지는 불명.

그녀의 유래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남아있는 기록마저도 불확실해, 어떤 아스트랄과 계약을 맺었는지 조차 밝혀진 게 없다.

일각에선 그녀를 동화나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뭔가로 생각한다고 한다.

긴 세월을 살아온 만큼 다수의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데는 도가 텄다지.

한 촌락 단위는 단 며칠 만에 쓸어버리고, 규모가 클 경우에는 일국의 수도마저 지도에서 지워버린다고 했다.

토드의 묘사만 듣는다면, 그녀는 재앙이었다.

마치 천재지변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알 수가 없다.

더욱 더 그녀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녀석이 처음부터 마녀였다면···.

클라리스는 애초에 날 속일 생각으로 마을까지 흘러들어왔단 말인가?

그 뒤로도 토드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러나 중요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동방에서 장시간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나도 알고 있다.

심지어 그녀에게서 직접 들었지.

오히려 토드가 아는 사실보다 내가 겪은 몇 년간이 훨씬 자세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반대로 내가 설명하게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자색의 마녀’가 아닌 ‘클라리스’의 이야기였지만.’

다정했던 클라리스.

다식하던 클라리스.

남을 위해 희생하던 클라리스.

자신을 경계하고 매몰차게 따돌리던 마을 사람들조차도 보듬었던 클라리스.

내 딸을 구해주었던 은인으로서의 클라리스.

돌변해서 스스로의 눈을 파내어 내게로 던진 클라리스.

아스트랄에게 내 고향을 먹이로 넘겼던 클라리스.

나는 그간의 모든 과정을 떠올리며 정신없이 털어놓았다.

“···자네도 힘들었겠어.”

토드는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 자신도 마녀 사냥꾼이기에 말 못할 사연이 있다며 충분히 나를 이해한다고 했다.

반면에 나는 토드를 오해하고 있었다.

대스승이나 레이와 다르게 태도에 긴장감이 너무 없어서, 그만 그를 진중하지 못한 사내라 생각해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들은 것은 아니나, 술을 마시면서 드물게 보이는 애수의 눈빛에는··· 분명 깊은 슬픔의 그림자가 스며있었다.

그 또한 나와 같았다.

분위기가 왁자지껄할수록 과거가 떠올라 잊으려 발악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나도 모르게 취기가 돌았나?

어느새 우리는 사소하고 금방 잊혀 질 잡담까지 이어갔다.

우리는 밤새 떠들어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테이블에 엎드려 있더군.

마녀 사냥꾼이라는 놈들은 숙취도 없는 모양이었다.

7.

다음날, 나는 토드를 따라 나섰다.

그는 인솔자로서 이곳을 방문한 것이라고 했다.

“빅터, 자네가 이식을 받을 곳은 저 바다 건너에 있다네.”

“배를 타본 적은 없지? 시골 촌놈이니 별 수 없겠어. 멀미에 고생 좀 해야 할 걸.”

대스승과 레이는 선착장까지 배웅만 해주었다.

동행하지는 않는다며, 어제의 술판은 잠깐의 축배에 불과하다나?

‘그런데 상선이란 게 이렇게 큰 거였나? 용케도 물 위에 뜨는군.’

그뿐만이 아니다.

사방이 장관이었다.

두어 명이 겨우 탈법한 나룻배부터, 돛이 네 개 넘게 달린 큼지막한 범선까지···.

과연 물류의 중심지답게 항구에는 각양각색의 선박이 눈에 들어왔다.

“야, 덩치.”

배에 올라타기 직전, 레이 녀석이 신경 쓰이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게 작별이 아니길 빌게. 살아있는 얼굴로 보자.”

“무슨 소리냐?”

“시끄러. 잔말 말고 무조건 돌아와. 그래야 내가 네 녀석한테 제대로 된 파쇄권을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그건 생각해보도록 하지.”

“기왕 배운 거, 끝까지 익히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잖아?”

그러면서 가볍게 내 가슴을 툭하고 때린다.

상당히 힘을 뺀, 격려가 담긴 주먹이었다.

“견뎌 내거라, 빅터. 이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지니.”

대스승은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평소처럼 직접 보고 경험하라는 의미겠지.

그의 진짜 가르침을 일단 한 번은 굴러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니까.

“자, 가자고. 이 배편을 놓치면 꼬박 일주일은 넘게 기다려야 하니까.”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육지에서 벗어났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조금 들떠있었다.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모르는 세상에 발을 디딘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묘한 고양감에 심취했지.

그러나 나는 너무 어리석었다.

그 너머에 무슨 운명이 기다리는 지도 모른 채, 그저 거대한 파도의 흐름에 모든 걸 맡기고 만 것이다.

8.

도착에는 이틀이 걸렸다.

풍란을 걱정한 것과는 달리, 다행히도 나는 별다른 울렁증이 없었다.

물길이 안정적이었던 것도 운이 좋았으리라.

땅을 밞으니 안정이 된다고 막 생각할 쯤···.

이어서 나는 토드의 안내를 따라 말을 빌렸다.

“탈 줄은 아나?”

“제가 못 탈 것 같습니까?”

“아니, 혹시나 해서 말이지.”

“우리 마을에도 마구간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어릴 적부터 고삐를 잡았죠.”

“그럼 괜찮겠군. 하지만 꽤 고될 거야.”

그는 말했다.

탈 것의 도움을 빌려도 이 앞까지 삼일은 더 걸릴 것이라고.

그리고 정말로 그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여로가 멀쩡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상단이 다니는 길을 이용하다가도, 어느 시점에선 숲을 가로질렀다.

심지어는 숨 쉬기 힘든 고원마저 지나야만 했지.

직접 걷는 게 아니라 다리는 편했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여야 했다.

슬슬 허리와 목에 부담이 컸지.

그런 의미에서 토드는 굉장한 남자였다.

그 동안 단 한 번의 불평도 없이 묵묵히 나를 안내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고되고 힘든 삼 일이 지났다.

결국 우리가 도달한 곳은, 사방이 온통 돌과 바위뿐인 황량한 장소였다.

“토드 씨, 여긴 어딥니까?”

“우리의 고향이야. 모든 마녀 사냥꾼은 여기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지.”

“이름은 없습니까?”

“드물기는 하지만··· 그레이그 노인네는 이곳을 펜리르의 둥지Fenrir's Nest라 부르더군.”

“둥지?”

“나도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더라.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일단 들어가지.”

그로부터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나와 토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멀리서 봤을 땐 이곳도 저곳도 새하얀 모래 천지라 구분이 안 갔지만··· 가까이서보니 인공적으로 만든 통로 같은 것이 있었다.

대리석 위에 돌가루를 뿌려 위장을 해둔 것이다.

토드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이번에는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왔다.

매우 깊어보여서 짐에서 횃불과 부싯돌을 꺼내려 하자, 도트가 만류해왔다.

입구는 어두워 보이지만 곧 필요 없어질 것이라 단언한다.

“이 밑에는 자광석이라는 수정들로 가득해. 신기하게 스스로 빛을 내지.”

“그런 돌이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입니다.”

“그렇겠지. 고대엔 신성한 장소로 불렸다고 하는군. 일단 날 믿어보게.”

나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우리는 입구를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황당무계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럴 수가? 황혼이 진 지상보다, 지하가 더 밝을 수가 있다니?“

토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서른 걸음 정도를 딛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은은한 푸른 광채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조금 더 내려가 보니, 엄청난 규모의 지하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당하군.

이 모든 걸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너무나 넓다.

바닥까지 닿는 층계의 길이도 장난이 아냐, 칸이 천 개는 가볍게 넘을 정도로 보였다.

거기다··· 이건 자연의 신비인가?

천장과 측면에 광채를 내는 투명한 수정이 가득 차 있다니?

“저게 바로 자광석自光石이지. 대스승이 뭐라고 그랬더라? 발광하는 성질을 가진 작은 미생물들의 유해가 오랜 시간 동안 싸여 석화된 결정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 덕분에 햇볕이 없어도 육안으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을 만큼 밝은 거지. 아름답지 않나?”

수시로 굴절과 반사를 반복하며 빛의 일렁인다.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군.

내가 주변의 모습에 넋이 나가있던 사이, 토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자, 여기서부턴 알아서 내려갈 수 있을 거다.”

“저 혼자서?”

“내 역할은 끝났어. 다음은 안내자가 알아서 해주겠지.”

안내자라···.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단 말인가?

새삼 그런 인간이 누군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토드는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이었다.

“왠지 내가 도망치는 것 같아서 영 마음이 안 좋네. 하지만 이해해라. 이 밑엔 상종하고 싶지 않는 녀석이 있거든.”

“그 안내자 말입니까?”

“나랑은 상성이 정반대인··· 아니다. 괜히 지금 말해봐야 너만 불안하지. 하여튼 조심해라. 그 녀석은 어떤 의미에서 마녀보다 더 마녀 같은 년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토드는 돌아갔다.

아무래도 그는 나 말고도 다른 사냥꾼을 이곳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가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인솔자인가?

아니, 그보다 토드가 방금 한 말이 신경 쓰인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지.’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자광석의 빛이 닿지 않는 그늘 속에서 어떤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물인가?

아니, 그것은 사람이었다.

레이의 것과 같은 사냥용 코트를 입은 여자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흐릿한 어둠 속에서 옅은 금발이 번쩍였다.

그것은 마녀 사냥꾼 특유의 새치가 섞여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회색빛보다 은은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어서 내 눈에 청조한 미모가 들어온다.

목선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내는 단발, 오른쪽 눈을 비스듬히 가리는 앞머리···.

남은 왼눈은 사파이어를 닮은 하늘색이었다.

“···어서 오세요. 펜릴의 둥지에.”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맑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마치 요정이 속삭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저는 도리스라고 해요.”

이런, 나는 살짝 겁을 먹었다.

믿겨지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란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상대는 내가 어떤 기분으로 자신을 바라보든 아랑곳없이, 지그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당신을 환영합니다, 빅터.”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물론이죠. 대스승의 편지는 이미 오래 전에 받았답니다.”

“그럼 내 볼일도 알고 있겠군.”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바로 손짓하며 나를 끌어들였다.

“그럼 바로 이쪽으로···.”

잘은 몰라도 이미 준비가 된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인도를 받아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바닥은··· 대리석인가? 굉장히 정교한 타일이 깔려있어, 꽤나 공을 들여 만든 것 같군.’

새삼스럽게 내부를 만들어낸 자에게 존경심이 들었다.

아무리봐도 질릴 것 같지가 않군.

하지만 사방의 빛이 너무 강렬해 산만한데, 이런 곳에서 잠을 잘 수 있을까?

“당신은 여기서 살고 있는 건가?”

“그렇죠.”

“얼마나 오래 있었지?”

“대충 1년 정도 된 것 같네요.”

“맙소사, 나라면 절대···.”

그때였다.

차갑고 날카로운 뭔가가 날아온 것은.

그리고 동시에 내 오른쪽 눈에 뜨거운 통각이 퍼졌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곳에는, 한 손에 나이프를 든 여자가 서있었다.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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