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의 장(3)
4.
숙면.
정말 오랜만에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행의 후유증이 컸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가루로 부하가 걸린 몸이 강제로 휴식에 들어간 것인가?
어느 쪽이든 나는 방으로 돌아간 직후 하루 종일 곯아떨어졌다고 한다.
깨어났을 무렵엔 이미 해가 떨어져 한밤중이었지.
스스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레이의 무자비한 뒤꿈치 내려찍기가 이마를 강타했기에, 억지로 몸을 일으킨 것뿐이었다.
“얼른 일어나. 언제까지 누워있을 건데?”
낸들 아는가?
나라고 이렇게까지 피로가 쌓였을 진 몰랐단 말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좀 곱게 깨워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나?
그렇게 말하니, 레이는 도끼눈을 뜨고 입을 꾹 닫았다.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난 모양이군.
“무슨 볼일이지? 대스승께서 부르셨나?”
설마하니 평소처럼 의미 없는 텃세를 부리려고 깨운 것은 아니겠고.
아마 대스승의 지시가 따로 있었을 테지.
그리고 그 예상은 일부 맞았다.
“손님이 왔거든.”
이 집결지엔 방문자가 거의 없다.
술집은 간판뿐이라 오래도록 영업을 하지 않았다.
드물게 아이라에게 잡동사니 수리를 부탁하는 이웃주민을 제외하면, 그 외에는 모두 지하에 볼일이 있다.
즉, 손님이라 불릴만한 사람은 전부 마녀 사냥꾼의 관계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오기 전에 거울 한 번 보는 게 좋을 거야. 복장도 추스르고. 지저분한 털북숭이 놈을 소개하면 우리 입장이 부끄러워지니까.”
이 계집애는 악담을 해도 꼭 이런 식이다.
방금 전에 일어난 사람에게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대체 누가 찾아 왔기에 이런 법석을 떠는 건지···.
하지만 첫 대면에서 인상이 중요하다는 의견엔 동의한다.
마침 수염도 엉망진창이니 면도 정도는 하는 게 좋겠지.
“별로 유쾌한 손님은 아니지만, 오래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서둘러.”
“알았다. 슬슬 옷을 갈아입어야 하니 나가 주겠나?”
“왜? 이제 와서 부끄럽기 라도 하셔?”
“···.”
“어차피 너의 못 볼 꼴이라면 그 마을에서 질릴 만큼 봤거든.”
분명 레이에겐 예전에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시덥잖은 농담과 장난질을 싫어한다고.
녀석에게 베개를 집어 던지자, 레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낚아챘다.
어림없지, 라며 의기양양한 얼굴로 반격해온다.
아무리 가벼운 침구라도 얼굴에 정통으로 맞으면 기분이 나쁘다.
버릇을 확실히 고쳐줄 필요가 있겠군.
하지만 늦었다.
레이는 이미 방에서 나간 뒤였다.
내 사저가 사람을 열 받게 만드는데 도가 튼 녀석이란 걸 새삼 다시 느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몰랐다.
이런 심술을 부리는 것이, 그나마 레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우애의 표현이었음을.
그녀는 내가 곧 맞이하게 될 경험을 애처롭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5.
어울리지도 않는 꾸밈을 마치고 계단을 오르자, 웬일로 주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술을 퍼마시는 세 명의 손님들이 보인다.
대스승과 레이,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는 곡주로 가득 채운 잔을 기울이다 내 쪽을 바라보았다.
“···오, 자네가 바로!”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거 편지에 쓰인 것보다 훨씬 더 듬직하지 않은가?”
덩치는 작다.
레이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다.
나이도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대스승이나 레이와 같이, 그도 회색의 머리칼과 백화 된 오른쪽 눈동자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묘하게 미덥지가 못하다.
더벅머리에 윗입술을 덮을 정도의 수북한 콧수염···.
심지어 말투는 능글맞고 얼굴도 살짝 가벼운 인상이었다.
나보다 연상임은 확실하나, 겉모습만 봐선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잘 부탁하지. 나는 토다르드라고 한다. 아. 이쪽 지방 사람들은 발음하기 힘 들겠지? 편하게 토드라 불러주게.”
선뜻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는 게 놀랍다.
나는 아직 이런 당당한 소개 방식에 적응하지 못했다.
생긴 것처럼 별 생각 없이 가볍게 털어놓는 것인가?
하지만 내게로 손을 내밀어 보이자, 나는 상대를 가볍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손가락이 온통 굳은살이다.
마디마다 부풀고 문드러진 흔적이 남아있어, 이건 평생 농기구를 잡아온 농부의 손아귀보다 심했다.
아주 오래도록 무기를 다뤄온 자가 틀림없었다.
과연, 이 남자 또한 마녀 사냥꾼의 일원이다.
거기다 무심결에 악수를 받아들이고 보니, 악력도 보통 수준은 아니야.
한순간이나마 그를 얕본 내 자신이 부끄럽군.
나는 가능한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빅터입니다.”
“마침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우리 사이에 소문이 자자해. 그 대스승 크레이그가 주목하는 새 제자라고.”
“예?”
자신을 토드라 밝힌 남자는 갑자기 쿡쿡 웃기 시작하더니.
“사실은 저 영감탱이, 대스승의 칭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자를 들이지 않기로 유명하걸랑? 거의 이십 년 넘게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작자라고. 그러다 어디서 성질 나쁜 계집애 하나를 주워 애지중지하더니 지금은 이렇게···.”
경박한 말투로 뜬금없이 친한 척이다.
그런 것치곤 내용이 저급하다.
아니, 그런데 뒷담을 할 거라면 적어도 다른 상대가 듣지 못하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토다르드, 다 들린다.”
“아이고. 역시 대스승이십니다. 여전히 귀가 좋으시군요, 이 망할 영감탱이.”
“그게 오랜만에 만나는 스승을 대하는 태도냐?”
“이거 실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실언을 했습니다. 사실은 아직도 정정한 것 같아서 심히 유감입니다. 다음에 뵐 때는 틀림없이 장례식이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쯧, 하필이면 인솔자가 네놈이라니. 이 지부에선 그리도 인재가 없단 말인가?”
“아니, 옛 제자를 좀 자랑스러워 해주시면 안 됩니까? 이 썩을 노인네야!”
무슨 생각이지?
이 남자는 연장자에게일말의 예의조차 갖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뭔가 쌓인 게 많은 듯하다.
“그보다, 뒤늦게 제자를 들였다기에 걱정했습니다. 아직까진 멀쩡하신 것 같군요. 그런데 제가 선물한 지팡이는 언제쯤 쓰실 생각이신지? 노망날 때 꺼내면 너무 늦습니다.”
“네놈이야말로 입이 고약한 건 여전하구나. 누가 그 썩을 목구멍에 바늘이라도 쑤셔 박아주면 좋으련만.”
“···대스승, 그건 저에게 맡겨주시지요.”
세상에, 이번엔 레이 녀석까지 끼어들었다.
“내 앞에서 감히 대스승을 모욕하다니, 어지간히도 이 성질 나쁜 계집에게 처리당하고 싶은 모양이네?”
“아이고, 그거 기대 되는군. 하지만 말이다. 비록 내가 파문당한 놈이어도 네 사형이다. 말은 좀 가려서 해주시지?”
“아하, 이제와서 대우를 받고 싶으시다? 그런데 이거 어쩌지? 파문이란 문하에서 쫓겨나는 걸 뜻하거든. 댁한테 듣기 좋은 말을 해줄 의리는 없어.”
“캬, 말하는 솜씨는 확실히 늘었구만. 어디 칼 솜씨도 그만큼 숙련되었길 빈다, 레이 꼬맹이.”
분위기가 묘하다.
이 양반들 대체 무슨 농담을 이따위로 살벌하게 주고받는 거지?
아예 불꽃이 튀는 것만 같다.
어쩌면 이븐 가지의 분말을 통해서 정말로 그들의 기 싸움을 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상황을 정리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유, 진짜! 댁들은 만날 때마다 왜 이러는 거죠?”
아이라였다.
그녀는 창고에서 막 술병을 들고 나온 상태였다.
“굳이 싸워야겠다면 나가서 해요. 이 가게에선 주먹질도, 칼부림도 금지니까.”
“야아, 아이라 아가씨. 걱정할 필요 없어. 이건 우리들끼리의 장난이니까. 좀처럼 만날 일이 없는 마녀 사냥꾼들이 우애를 다지는 것뿐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대스승?”
“음, 기왕이면 나가 뒈져줬으면 좋겠군.”
“···썩을 노인네, 맞장구 한 번 더럽게 못 치네.”
“당신은 진중함이 부족하고 말이지, 토드 사형.”
“지금 그만하라는 이야기 못 들었어요?!”
결국 아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가지고 나온 술을 다시 품에 챙기더니 뒤돌아서 버린다.
그 모습에 점잖은 대스승마저도 난색을 표했다.
“이런! 우리 모두 반성하도록 하지. 여기서 주인을 더 자극했다간, 이 좋은 날에 술맛조차 볼 수 없게 될 테니.”
“옛 제자가 실례했습니다, 대스승. 내 무례를 용서해주겠나, 레이?”
“흥, 늦게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네.”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한쪽 눈만 번뜩이는 광인들 사이에 끼인 입장에선 결코 웃을 수 없다.
“하여간, 당신들은 노는 방식이 너무 과격해요. 이쯤하고 오늘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게 어때요?”
그러더니, 네 사람이 모두 내 쪽으로 고개를 향했다.
이어서 대스승이 손짓한다.
“그러지. 이리 와서 앉게나.”
“대스승, 이게 다 무슨 소동입니까?”
“축하할 일이 있다.”
축하?
레이를 보자, 그녀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내가 온 이유가 그거거든.”
반면, 토드란 남자는 서글서글한 표정을 하고 말을 걸어왔다.
“자네의 이식이 결정됐어.”
기뻐해야하는 건가?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왜 그러지? 소문의 신인치곤 너무 무뚝뚝하군.”
“큭큭, 원래 저런 친구라네. 항상 감정을 담아두지. 그래서 한 번에 내놓을 때 터무니없는 폭발력을 가진 거고.”
“흥미롭군요. 역시 주목받을만한 인재야. 게다가 그 ‘자색의 마녀’에게서 살아남은 생존자라! 이건 거의 전례도 없으니.”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클라리··· 아니, ‘자색의 마녀’에 대해 아십니까?”
지금껏 대스승과 레이는 클라리스에 대한 정보를 일체 주지 않았다.
물어봐도 때가 아니라며 일축할 뿐···.
시기가 오면 싫어도 알게 될 거라며 미루기만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겠지.
이식이니, 다음 단계 어쩌고 하는 것이 확정되었다면··· 나는 인정받았을 테니까.
“어허, 이 친구 보게? 갑자기 눈빛이 변했는데요?”
“그런 사내지.”
“진정해.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지 않아도 내가 아는 정도는 말해줄 테니. 그 전에 한 잔 받지?”
토드는 어느새 술병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빼앗아들었다.
그리곤 단숨에 내용물을 비웠다.
“워우, 이 자식. 저돌적인 게 아주 마음에 드는군.”
“···이제 말해주시죠.”
“따지고 보면 별로 들려줄 것도 없지만. 나도 딱 남들만큼 알거든. 워낙 악명 높은 마녀라서.”
“그렇게 유명하단 말입니까? ‘자색의 마녀’가?”
“그렇다마다. 아니, 대스승. 설마 이 친구한테 여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은 겁니까?”
“그렇네.”
“여전하구만, 음험한 늙은이 같으니··· . 아무리 그래도 자기 원수인데 언질 정도는 해주지 그랬습니까?”
“나의 교육 방침에 불만이 있나? 파문당한 놈이 이래라 저래라 할 처지는 아닐텐데?”
“아니, 그거야 뭐··· 다 생각이야 다 있으셨겠지. 하지만 괜찮습니까? 제가 말을 꺼내도?”
“상관없네, 토드. 빅터는 이제 자격을 얻었으니.”
“그럼 사양 않도록 하지요.”
토드는 술병을 뒤집어 몇 방울 남지도 않은 것을 잔에 담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건질 게 없단 걸 깨닫고 나서야, 그는 겨우 설명을 시작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자색’은 최악의 마녀다.”
“최···악?”
“과장이 아니야. 녀석은 명실상부한 신화 속 존재지. 혹시 육망성hexagram이라는 이름을 들어봤나?”
“육각의 별 말입니까?”
“아는 게 없군. 아, 이건 자네를 무시하는 게 아니야. 하기야, 어쩔 수 없지. 고리타분한 대스승 크레이그는 꼭 일이 닥쳤을 때만 지식을 전수해주니까. 그럼 이번 기회에 내가 알려주지.”
마침 아이라가 그 사이 새 술을 가져왔다.
토드는 그걸 한 모금을 마시더니, 약간 날카로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엔 가장 오래된 마녀가 여섯이 있다.”
여섯···.
그래서 육망성hexagram이라고 부르는 건가?
“마녀는 별 너머의 존재에게 혼을 판 순간부터 늙지 않게 되지. 그래서 내버려두면 한도 끝도 없이 장수를 누려. 하지만 나이를 먹은 마녀일수록 교활하고 강력하지. 전승에 다르면 오백 년 이상 살아온 녀석도 있다고 한다. 알겠나? 질릴 정도로 긴 인생이란 말이지.”
“저로선 짐작도 안갑니다. 그보다는 ‘자색’에 대해서···.”
내가 조바심을 부리자, 토드는 웃었다.
아이의 투정을 지켜보는 어른 같은 표정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 말하고 있잖아? 바로 그게 ‘자색’이다. 우리가 가진 고문서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마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