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29화 (29/186)

각인의 장(2)

3.

아스트랄Astral.

그것은 입으로 발음하기엔 너무도 생소하면서 끔찍하게 불길한 울림이었다.

“빅터, 너는 잠깐이나마 보았을 것이다. 광산의 마녀와 계약했던 그 놈을.”

“그게 아스트랄이란 말입니까?”

“정확히는 그마저도 존재의 일면에 불과하지.”

“일면이라고요?”

“다행으로 여기도록. 그게 본체였다면 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스승은 나를 살짝 나무라는 투로 말했다.

“경솔했어. 너무나 조심성 없이 기억을 받아들였다. 그 마녀가 너에게 악의를 품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 하지만 만에 하나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생기다면··· 명심해라. 절대로 놈을 관측해서는 안 돼. 인간의 뇌는 눈을 통해 그것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타버리고 만다.”

말도 안 된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부정하려고 해도, 나는 지금껏 너무도 많은 것을 보아왔다.

마을의 재앙과 클라리스의 본성.

해가 지면 도래하는 밤의 세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마물들을···.

“너무 깊게 생각하진 말거라. 어차피 쉽게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일이다. 놈들을 이해한다는 건, 다시 말해 혼을 바친단 의미와 다르지 않으니.”

“하지만 대스승!”

“더 궁금한 것이 있나?”

“아까부터 대스승께선··· 계속 ‘놈들’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큭큭, 하필 그 부분을 새겨 들었군.”

“가르쳐주십시오. 아스트랄이란 자식들은··· 하나가 아니란 의미입니까?”

“자네는 은연 중 눈치 채고 있었을 터이다.”

“그래도 확답이 필요합니다.”

멍청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묻기도 전부터 그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마음 한편에서 대스승이 그걸 부정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절대 허튼 소리를 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 빅터. 마녀들 각자 다른 존재를 섬기지. 아스트랄은 저 너머의 존재를 총칭하는 이름일 뿐이다. 놈들은 무수히 많아. 우리가 아무리 마녀를 찾아내서 죽인다 해도 끝이 없는 이유기도 하지.”

“끝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 말 그대로다. 우리는 지금껏 놈들과 결판을 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무슨···.”

“빅터여, 우리는 항상 패배해왔다. 수 세기 넘게 절망적인 소모전만을 이어왔지. 어쩌면···.”

그것은 천년 이상 반복되어 왔는지도 모른다, 라고 대스승은 모호하게 덧붙였다.

“아스트랄은 쓰러뜨릴 수 없네. 과거 그 어떤 전승에서도 그런 기록은 못 찾았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른 차원에 머무는 존재를 무슨 수로 죽일 수 있겠는가?”

“그 말 인즉, 마녀를 모두 죽인다 해도 소용없단 말입니까?”

“아스트랄은 항상 새로운 권속을 찾아낸다. 어차피 세상을 증오하는 여인네들은 충분히 넘치니 말일세.”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뒤늦게 여행의 피로가 몰려오는 건가?

몸이 지쳤으니 정신도 몽롱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럴 거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어찌 보면 다행인 부분도 있다네. 신기하게도 놈들도 우리 세계에 함부로 개입하진 못하는 모양이니까.”

“정말입니까?”

“아무렴. 차원과 차원 사이에는 놈들 조차 넘을 수 없는 어떤 법칙이 존재하나 보더군. 그래서 직접 개입해오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지.”

적어도 숨을 돌릴 틈은 있다는 걸까?

당장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경악스런 진실에 도달하고 말았다.

직접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설마!”

“눈치 챈 모양이군. 마녀가 생기는 이유를.”

나는 대스승이 지금껏 모든 전말을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더는 내 정신이 버텨내질 못한다.

이것은 한 번에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가혹한···.

“지쳤는가, 빅터?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이렇게 단 시간에 사역마와 싸울 능력을 기른 것만도 특별한데, 마녀의 정신과 접촉해 아스트랄의 존재를 인지한 제자는 지금껏 없었으니.”

“···.”

“허나, 여기까지 들었다면, 차라리 끝까지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걸세.”

“또 뭐가 있단 말입니까?”

“일전에 마법의 정체가 궁금하다고 했었지 않나?”

“잠깐···.”

“놈들은 혼자만의 힘으론 이쪽 차원에 영향을 줄 수 없지. 그래서 매개체를 필요로 한다. 간접적으로, 미약하게나마 개입할 수 있는 꼭두각시를 원하지. 그게 바로 마녀다. 그리고 그녀들이 저 너머에서 빌려온 지식과 현상이 우리가 마법이라 부르는 것의 본질이지.”

무력감이 엄습해온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불행한 이에게 마수를 뻗는 저 너머의 존재···.

나는 그것에게서 바닥이 보이지 않는 사악함을 느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령 거려, 그런 끔찍한 게 세상에 있어서 안 된다고 본능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스승은 내가 어떤 기분인지조차 이미 아는 눈치였다.

“그게 두려움이다. 인간이 아는 것 이상의 미지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미지의 공포이지. 그건 자연스러운 감정일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하지만 빅터, 우리는 다르다. 마녀 사냥꾼인 자는 그것에 절대 굴해서는 안 된다.”

대스승은 나를 몰아붙인다.

불경한 지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까지 굳이 말해가며.

“대스승, 말씀 도중 죄송하지만···.”

그때였다.

내가 혼란을 느끼는 사이, 레이가 끼어들었다.

“평소보다 짓궂으신 게 아닌지요?”

“레이, 내 방침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게냐?”

“아닙니다. 대스승의 뜻을 의심하는 건 결코···.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란다, 레이여. 그러니 신경 쓰지 말거라. 하지만 네가 손을 다친 원인을 제공한 남자에게 조금 심술 맞게 대하는 정도는 눈감아 주렴.”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감내하지 못하는 힘을 바랐고, 그 성급함으로 사저를 상처 입히고 말았으니.

“빅터, 아직 자네에겐 기대가 크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 주게나.”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스승, 저한테 뭘 바라는 겁니까?”

“확신이 필요하네.”

“어떻게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간단해. 언제든 말만하게. 다음 단계로 진행하고 싶다고 말이야.”

“예?”

“나는 자네가 얼마나 힘을 갈망했는지 잘 알고 있네. 항상 초조하며 독기에 차 있었지. 미숙하지만, 그런 스스로를 또 몰아붙이더군. 아주 인상 깊었네. 마치 과거의 날 보는 것만 같았지.”

“하지만 지금까지 대스승께선 제가 준비가 덜 되었다고···.”

“그건 지금도 같은 견해일세. 허나, 빅터.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는 너무 일찍 사역마를 쓰러뜨릴 힘을 길렀다. 거기다 너무 이르게 마녀를 죽였지. 심지어 한참 뒤에 인지했어야 할 아스트랄과 작게나마 접촉까지 했다. 그 짧은 시간에, 보통은 감내할 수 없는 어둠의 지식을 체험해버린 것이지.”

“제가 너무 이르단 말입니까?”

“원래대로라면 최소 반년, 길게는 일 년 이상의 여유을 두고 찬찬히 깨달아야 했을 것이야. 인간의 정신력은 생각보다 연약하다네. 자칫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면 미쳐버리고 만다. 거대한 적에게 지레 겁먹고 포기해버리지. 그런데 너는 경험이 지나치게 빠르다. 마치 운명이 자네를 한시라도 마녀 사냥꾼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는 뭔가를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판단이 서지 않는다.

대스승은 재촉하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내가 물러나주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대스승, 그쪽이 보기에 아직도 저는 그 ‘다음 단계’에 미치지 못하는 겁니까?”

내 질문에 대스승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내게로 다가왔다.

“자네는 끔찍한 경험을 했음에도 이 장소로 돌아왔네. 그리고 아직도 우리의 앞에 서있다. 그것 외에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하겠는가?”

대스승은 기뻐하며 나를 치켜세워주었다.

내 의지를 인정해준 것일까?

조금이지만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그때,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슬픔의 빛을 엿보았다.

그것은 기대와 걱정이 공존하는 감정이었다.

아직 그는 나를 확실하게 믿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거기다···.

“저는 반대에요.”

잠자코 있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뭔가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 애송이는 아직 일러요. 보통이 아니란 건 동의해요. 몸은 잘 단련되어 있어요. 어쩌면 정신도 본디 거쳐야할 과정이 필요 없을 만큼 강할지 모르죠. 하지만 대스승도 아시잖아요? 이식과 각인에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단 걸···.”

“의외로구나, 레이 엔쯔이여. 오늘의 너야말로 평소와는 다르구나. 네가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할 줄은 몰랐다. 설마하니 그 동행하던 며칠 사이, 무슨 감정의 변화라도 있었던 거냐?”

“아닙니다! 저는 단지!”

레이는 내 쪽을 바라보더니.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진행시킬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허나 이 상태라면 다음엔 손가락만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는 이제 같은 실수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는 저 덩치가 가루를 마실 기회 자첼 만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 반응··· 저는 지금껏 본 적이 없습니다. 미량의 가루로 광분하는 경우는 전에도 있었지만, 증폭의 크기가 차원이 달랐어요.”

“그릇이 이전보다 더 커진 모양이군.”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두 사람은 내가 알아들지 못할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대스승, 저는 걱정됩니다. 제 안위보다도, 저 애송이가 잘못된 길을 들어서 혹여 게슈펜스트Gespenst가 될까봐···.”

“레이, 그건 지나친 걱정이다.”

그쯤에서 대스승은 레이를 토닥였다.

“그건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막을 테니까. 아니, 예상을 위해서라도 빅터의 성장은 필요한 것이지.”

“대스승···.”

“걱정 말거라. 나를 믿도록 해라. 너도 말했지 않느냐? 너의 첫 사제는 강하다고.”

“···.”

그러나 레이는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다.

녀석은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덩치, 별 말은 안 할게. 너라면 언젠가 나와··· 아니, 적어도 내 뒤를 따라올 수준까진 성장할거야. 이대로 대스승과 나를 쫒아오면 반드시 그렇게 되겠지. 파쇄권도, 검을 제대로 쓰는 방법도 알려줄 수 있어. 오래도록, 단계를 거친다면 말이야. 하지만 위험한 지름길을 향한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 자칫하면 죽어. 어느 쪽이 현명한 선택인지는 누가 봐도 뻔하잖아?”

레이는 나름대로 나를 설득할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심을 굳혔다.

“사저,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그러니까 그건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게 더 좋은 방법이라고 몇 번을 말해?”

“미안하군. 나는 성질이 급해.”

“죽을 수도 있다니까?”

“상관없다. 나는 당장 강해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났다.”

“이···!”

결국 그녀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이전과 같이, 절묘한 발놀림으로 내 정강이를 걷어 차버린다.

빌어먹을 계집애 같으니···.

레이는 웅크린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아무래도 제대로 삐진 듯했다.

“큭큭, 레이 녀석. 이제 내 앞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린 모양이로군.”

그러고 보니, 어지간해선 대스승과 있을 땐 심술을 부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런 레이의 모습은 오랜만이야. 자네와 함께 지내며 많이 친해진 것 같아 다행일세.”

“···아닙니다.”

“괜찮네. 그건 쓸데없는 겸손이야. 가슴을 펴게나. 자부심을 가져도 좋으니. 그녀는 아무에게나 마음을 열지 않아. 보기보다 낯가림이 심하고 수줍음도 많이 탄다네.”

도저히 그렇게는 안보이지만 말이다.

대스승은 이어서 나에게 레이를 달래주러 쫒아가라며 등을 떠밀었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조금 전, 두 사람에게 각오를 보여주었다.

다음 단계.

이식.

각인.

그게 무엇이든 내 몸으로 받아낼 것이라 선언했지.

나는 그게 신경 쓰여서, 그만 레이가 해준 중요한 몇 마디를 놓치고 말았다.

‘죽을 지도 몰라.’

그건 거짓말도, 과장도 아니었다.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 나는 그것을 몸소 실감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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