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의 장(1)
1.
골절의 통증은 무시무시하다.
가만히 있어도 근육이 당겨오고, 한 걸음을 떼기라도 하면 환부에서 고통이 전신으로 퍼진다.
처음에는 비명,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어떻게 해야 아픔을 줄일 수 있을까 궁리만 한다.
그 결과 꽤나 좋은 요령을 찾아냈다.
짚더미에 등을 뉘이고 가슴의 지끈거림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면, 순간을 버틸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덕분에 그 동안만큼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지.
그러나 그것도 곧 익숙해진다.
제 아무리 아프다 해도 계속 반복되면 어느새 인간은 달관하고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이다.
고통마저도 이내 적응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곤란하다.
원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그것이 계속 이어지기만을 바랐다.
그러면··· 적어도 가슴을 도려내고 싶을 만큼 아려오는 감정만큼은 참을 수 있으니까.
‘보다 뚜렷해진다. 이 지옥에서 나만 살아남았다는 현실이···.’
매일이 지날 때마다 이 마음의 격통은 강도를 더해온다.
몸의 아픔 따위, 가벼이 넘어설 정도다.
이는 어떤 징조인가?
아주 조금씩이지만 상처가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허나 역시 며칠 만에 부러진 뼈가 붙는 기적 따윈 기대할 수 없다.
그만큼 내 몸은 만신창이로, 여기저기가 부어서 제대로 서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몸부림치며 반항을 멈추지 않았다.
“이거 놔! 나를 건드리지 마라!”
내 손에 쥐여진 것은 끝이 날카로운 막대이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무기지만, 사람의 목에 박힌다면 얕볼 수 없는 물건이지.
“거참, 마치 맹견··· 아니, 성난 황소 같지 않은가? 그 혈기만큼은 부럽구만. 허나 대화로 풀도록 하지. 그 전에 우선 자네 몸부터 살펴보고 말이야.”
“꺼져라···.”
내가 위협하자 노인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찼다.
“잘 보시게나. 난 자네를 도우려는 거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등짐에서 천 쪼가리를 꺼든다.
그래···.
한 눈에 봐도 붕대 대용으로 쓰기 좋게 미리 손질해둔 물건이군.
하지만 나는 그 자들이 다가오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멈춰! 내 몸에 손이라도 하나 대기만 해봐라.”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
비록 상처가 있다 해도, 약점을 내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특히 저 자들에겐 더더욱···.
왜냐하면, 놈들은 이방인이니까.
마녀사냥이라는 둥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자들이다.
그런 정체모를 외부자에게 몸을 맡기라고?
만난 지 반나절도 되지 않은 놈들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저 안광···.
여자도, 노인도 모두 오른쪽 눈에서 요사스런 빛이 뿜어져 나온다.
지상에 어둠이 내린 만큼 그 광채가 더 또렷해, 흡사 늑대의··· 어떤 밤 짐승과 마주보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수 년 간 곁에 있던 자의 본성조차도 꿰뚫어보지 못했다.’
그렇지.
나는 그 정도의 통찰력도 없는 등신이다.
하지만 같은 실수를 언제까지고 반복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다.
의심하자.
적대하고 견제하는 거다.
여자는 수도에서 현상금이 붙은 도망자일 수도 있지.
저 노인은 그저 나이 많은 도적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저절로 경계심이 든다.
“···크.”
“무리하지 말게. 자넨 지금 아파서 제정신이 아닐 테니.”
노인의 말처럼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우자, 겨우 잊고 있었던 통증이 다시 퍼졌다.
허나 바라는 바다.
제정신이 아니긴 개뿔···.
오히려 아픔으로 정신이 바짝 들고 의식도 또렷해질 정도다.
‘이제 여긴 아무 것도 없는 폐허다. 이런 곳에 상인이나 여행객이 올 리도 없어.’
머릿속이 맑아지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냥용 코트 복장의 노인과 동양인 계집···.
이 자들은 명백히 이상하다.
수상한 이인조다.
다가오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다.
나는 이제 어느 누구도 믿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나 자신 조차도!
하지만 은연중에 망설이는 태도를 노인은 놓치지 않았다.
내 구부정하고 엉거주춤한 자세가 어지간히도 우스웠던 건가?
상대는 나를 쓱 훑어보더니···.
“그런 일을 당했으니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만···.”
“뭐라고?”
“그렇게 상태가 엉망인데 용케 으름장을 놓는군. 뭐가 그렇게 두려운가? 초로가 한참 지난 이 늙은이가? 아니면 자네 머리보다 몇 개나 작은 여자아이가 무서운 겐가?”
“개소리··· 누가 겁을 먹었다고?”
“인내는 사내의 미덕이지만, 그 고집은 미련할 뿐이라네.”
아이를 달래는 말투가 괜히 못마땅해, 나는 답하지 않았다.
내가 여전히 꼼짝 않자, 이번엔 여자 쪽에서 말을 거들었다.
“잠자코 있도록. 우린 네놈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아. 대스승께선 선의를 베풀려는 거다.”
“닥쳐! 누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나?”
“···.”
“짜리몽땅한 계집··· 허수아비 같은 노인네도! 너희 둘 다 이 마을에서 당장 나가, 나에게 상관하지 마라!”
이때, 여자는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다.
“애송이 놈···!”
몸집은 작은 주제에 모자 아래 드러난 눈빛이 사납기 그지없다.
그것은 마치 고양잇과 동물이 적의를 품었을 때와 닮아있었다.
여자는 내가 반응할 수조차 없는 빠르기로 자신의 허리춤에 오른손을 가져갔다.
비수나 단검을 숨겨둔 건가?
“진정 하려무나.”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은 여자의 행동을 저지했다.
단검이 칼집에서 나오기 직전에 손을 뻗어, 그 앞을 막은 것이다.
‘이 작자들은 대체···.’
무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는 내가 보아도 놀라운 일이었다.
찰나의 빠르기로 칼을 뽑아드는 저 살벌한 여자도 그렇지만, 그걸 직후에 차단시킨 늙은이도 보통은 아니다.
“물러나 있거라, 레이 엔쯔이. 해도 내가 하겠다.”
“하지만 대스승···.”
“암시가 통하지 않을 만큼 혈기왕성한 사내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은 여흥이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노인은 동양인 여자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아무런 실력 행사나 위협도 없었음에도, 여자는 순순히 손을 칼에서 떨어뜨렸다.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게야, 젊은이. 보다시피 우리 레이는 아주 무서운 아가씨거든.”
“손버릇이 나쁘단 건 알겠군.”
“이크, 자넨 말버릇부터 고쳐야겠어. 계속 그러면 초면에 미움부터 받는다네.”
노인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지만, 여자는 도끼눈으로 나를 쏘아봤다.
아주 죽일 듯이 화를 내는군.
하지만 당장 내가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여자 쪽이 아니었다.
어느새··· 노인네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큭!”
나는 끝이 뾰족한 막대를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이미 내 손아귀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어느새 낚아챈 거지?
왜 저 노인네가 내가 들고 있던 걸 등 뒤로 던지고 있는 거냐?
“그쯤 해둬.”
오른팔을 붙잡혔다.
하지만 뿌리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다쳤다곤 하나, 어깨를 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완력은··· 절대 노인네의 것이 아니다!
“너무 날뛰면 나도 실력 행사를 할 수 할 수 밖에 없다네. 자칫 힘 조절에 실패해서 더 큰 상처가 생기면 큰일이잖나?”
“힘···조절?”
웃기지 마라.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는 늙은이주제에···.
오래도록 숲을 오가며 단련해온 나를 맨손으로 제압하시겠다고?
나는 순간 통증을 잊었다.
그리고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어떤 충동이 되살아났다.
청년기··· 그레이스와 결혼하기 이전의 나는 언제나 싸움에 휘말렸었다.
주먹에는 자신이 있어, 덩치도 또래들 보다 컸기에 육박전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뼈가 몇 군대 작살났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차라리 잘 되었다.
목 아래에 머물고 있는 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나는 어떻게라도 해소하고 싶었다.
비록 그 상대가 처음 보는 상대라 할 지 라도.
심지어 그게 노인이라 해도 말이다.
양심도, 윤리도···.
지금의 나에겐 어떤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저 속이 탈 것만 같은 이 앙금을 어떻게든 풀어낼 수 있다면!
“후···.”
노인이 한숨을 쉰 것과 내가 반대쪽 팔을 휘두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나는 아마 그 짧은 순간에 약자를 위한 배려라도 떠올렸으리라.
노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잠깐 망설였던 게 틀림없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자네는 정말 말을 안 듣는구만.”
두 발이 땅에서 멀어졌다.
노인에게 붙잡힌 팔이 큰 궤도를 그리자, 내 몸은 공중을 한 바퀴 돌아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믿을 수가 없다.
노인은 마치 내 몸을 깃털이나 갈대처럼 다루고 있었다.
이어서 또 다시,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패대기쳤다.
그것이 계속 되었다.
몇 번이고··· 나는 일방적으로 땅을 굴러야만 했다.
“크··· 허억!”
숨을 쉴 수가 없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폐 속의 모든 공기가 빠져나가 쪼그라든 것만 같다.
이건 아주 어렸을 때 물에 빠졌다가 건져졌을 때보다도 괴롭다.
“이제야 좀 얌전해졌군. 한 동안은 그렇게 있게.”
그리고 노인은 내 양팔을 끈으로 구속하고 바닥에 엎드리게 만들었다.
“레이 엔쯔이, 자네에겐 모닥불은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여자에게 뭔가를 지시하고서 그는 한동안 내 등과 어깨를 살펴보았다.
“···역시 늑골과 견갑이 상했군. 목숨엔 지장은 없겠어. 하지만 이 상태로 내버려두면 뼈가 붙어도 내상이 남아.”
의사?
의원인가?
내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노인은 답했다.
“간단한 의술 정도는 알지. 그래도 안심하게나. 촌구석의 민간치료사보다는 훨씬 실력이 좋으니까. 조금만 참아.”
뚝, 뚜둑···.
노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전신이 요동칠 정도의 고통이 몰려왔다.
부러진 뼈를 맞추는 건가?
이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제기랄, 돌팔이라고 매도하고 싶지만··· 시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통증은 누그러졌다.
“···당장은 이 정도면 되겠지.”
“대스승 크레이그··· 당신은 너무 다정하십니다.”
“폭력이 모든 걸 해결하는 건 아니란다, 레이 엔쯔이.”
능청스럽게···.
누가 이 꼴을 만들었는데?
하나도 웃기지 않는 농담이다.
“그건 그렇고, 자네는 몸을 너무 굴렸군. 며칠이나 제대로 못 먹었지? 늙어서 고생하고 싶나?”
“···지랄··· 마.”
“날 믿게,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이 상태론 말 한마디를 내뱉는 것조차 고역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상대를 노려 볼 수 밖에 없었다.
“분하나? 힘의 차이를 실감해놓고도 아직도 부족한가?”
“···.”
“그렇게 내동댕이쳤는데 싸울 마음이 남아있다니···.”
노인은 어깨를 들썩였다.
기침을 하려고 입을 막는가 싶더니, 간헐적으로 나온 실소를 참으려한 모양이었다.
“···큭, 큭큭큭. 재미있군. 아주 마음에 들어. 이런 건 오랜만이야. 자넨 아주 쓸만한 물건이로군.”
누가 물건이냐?
호흡이 온전했다면 나는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그리고 말문을 잃었겠지.
직후 노인이 지껄인 몇 마디에 의해서.
“나에겐 자네의 분노가 보이네. 가공한 증오가··· 깊은 슬픔이 뒤섞여서 소용돌이치고 있어.”
지금 노인은 내 가슴 속의 울분을 안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당연히 내 심정을 알 리도 만무하다.
날 놀리는 거다.
모든 걸 잃어버린 자를 비웃는 것이다.
그레이스를, 아델을 눈앞에서 빼앗겨버린 나를···.
“으드드득···.”
입 안에서 피맛이 난다.
어금니가 깨질 정도로 이를 악문 탓이었다.
격노를 참을 수가 없어,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분명, 지금 못 봐줄 꼴을 하고 있겠지.
“아니, 그 마음은 나도 안다. 그리고 내 제자, 레이 엔쯔이도.”
“웃···기지 마라아아아아아!”
나는 고개를 돌리려고 발버둥 쳤다.
그런데 그 순간, 바로 등 뒤에서 어떤 기운이··· 무겁고 날카로운 한기가 몰아쳤다.
나는 겨우 어깨 너머의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젊은이, 우리는 그 누구보다 자네의 기분을 잘 알고 있네.”
노인은 어느새 다시 모자를 눌러 쓴 채였다.
동양의 여자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보이는 건 달빛을 머금은 눈동자뿐이었다.
그것은 결코 차분한 빛깔을 띠고 있지 않았다.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몇 겹이나 눌러 담아 폭발직전의 뭔가와 같다.
아니···.
나는 이 시점에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착각했다는 것을.
‘이 노인은 신사와는 거리가 멀다.’
부드러운 미소 뒤에 어떤 짐승보다도 흉포한 뭔가를 가지고 있다.
‘여자 쪽도 마찬가지다. 일견 냉철해 보이는 인상은 위장이다.’
인형처럼 굳은 표정 속에 차오르는 울분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것이다.
노인의 말은 옳았다.
나에게도 보인다.
이 두 사람의 마음이.
그건 나보다도 깊은 원한···.
오래도록 이어져왔을 분노가 농축되어 있었다.
말로는 표현 못할 응어리가···.
“이제 알아주겠는가?”
“당신들은···.”
“이미 말했을 터다. 불필요한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건 어떤 미학도 없다네,”
그래.
그랬었지.
그들은 헥센야크트.
적.
마녀를 사냥하는 자.
“···그런 댁들이 대체 나에게 무슨 볼일이지? 나는 전부 말했어. 클라리스는 사라졌다. 여긴 아무 것도 남지 않았고,”
기분이 가라앉으니, 순식간에 허탈감이 몰려왔다.
요 며칠간 항상 이랬다.
아내와 딸을 떠올린 순간 주체할 수 없게 발광하다, 시간이 지나면 무력감에 빠져 주저앉고 마는 것이다.
구원은··· 없다.
나는 아마 평생 이 고통과 함께해야 하겠지.
“젊은이, 자네는 살아남았네. 정확히는 살아남고 말았지.”
노인은 몸소 내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나는 일으켜 세우더니, 끌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제물로도 바쳐지지 못한 자. 그게 자네라네. 신앙에 의지하며 자아를 버리기엔 너무 이성적이었고, 미쳐버리기엔 어설프게 용감했다.”
또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만 잠자코 들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자에겐 선택지가 얼마 없어.”
“선택···지라고?”
엄지, 검지, 중지···.
노인은 내 앞에서 손가락을 세 개 펼쳐보였다.
중지를 접으며 노인은 말했다.
“하나는 안식이라네.”
개소리.
나는 이제 앞으로의 인생에서 어떤 평온도 찾아낼 수 없을 것을···.
설마?
“그래.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된다네. 그럼 어떤 고통도 없이, 영원한 안식으로 도망칠 수 있어. 그럼 모든 것이 끝난다.”
“날 놀리는 건가?”
“아니, 그런 방법도 있다는 거지.”
이번에는 검지다.
그는 두 번째 해답을 내놓았다.
“둘은 견디는 걸세. 몸이 나으면 이웃마을이나, 저 멀리 다른 촌락이라도 찾아보게나.”
“뭐···?”
“최대한 긍정적인 상상을 해보도록. 운이 좋다면 새 아내를 거둬들이고 자식을 기를 수도 있겠지.”
“그건 무리다. 나는 절대 그 둘을···.”
“아니, 꼭 그게 아니어도 상관없네. 설사 그게 가능하더라도 소용없을 거야. 중요한 건 자네가 평생 행복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 뿐이네.”
“···.”
“어둠을 두려워하게 될 걸세. 매일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겠지.”
“그렇겠지···.”
“하지만 그마저도 견딜 수 있을 걸세. 자넨 언젠가 익숙해지겠지.”
“내가··· 그레이스와 아델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그게 인간이니까.”
노인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전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마음에도 흠집은 난다네, 젊은이. 세월에 의해서 풍화되고 마모되지.”
나이가 많은 자가 들려주는 미래의 이야기에는 어째서인지 설득력이 있다.
나는 좀 더 인내심을 갖고 그의 말을 경청할 마음이 들었지만, 그 내용은 전부 포기하란 것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요령도 익히게 될 걸세. 현실을 외면하려고 부단이 노력한다면 좀 더 쉽지. 그러면 반드시 흐려져. 이윽고 고통에 익숙해지는 거지. 처음엔 아내의 미소도 기억에서 멀어진다. 다음은 딸의 목소리조차 생각나지 않게 되어 버린다.”
“죽는 것만도 못한 인생이군.”
“정말 죽는 것만 못한 건 따로 있다네. 그래서 나는 두 번째를 추천하지.”
그러나 그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담담히 이야길 늘어놓았다.
“살아만있다면, 인간은 어떻게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야. 시간은 걸리고 후유증도 남겠지만, 그래도 그게 삶이다. 상처투성이인 미래에도 의미는 있지. 자넨 아직 젊어. 분명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걸세. 불행한 과거를 잊고 새출발하는 거지 ···어떤가? 그런 걸 원하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답할 가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노인은 엄지를 접지 않았다.
“···좋아. 죽는 것도, 망각하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겠단 얼굴이로군. 그렇다면 마지막 길이 있네. 그건···.”
세 번째 손가락이 안으로 기울어지자 그것은 자연스럽게 주먹 쥔 모습이 되었다.
“우리를 따라가는 것이다.”
노인은 그것을 내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평생 고통을 짊어지는 선택지일세. 다시 말해, 매일 밤마다 아내와 딸이 유린당하다 찢겨죽은 현실과 마주하는 것이다. 오직 증오와 분노만을 원동력 삼아 살아가지. 내일을 포기하고 과거에만 머무는 가장 어리석은 길이야. 알겠나? 이거야말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니지.”
“그런가···.”
“이쪽을 택한다면, 자네의 최후는 비참할 것이다..”
말 그대로다.
자세히는 몰라도 이 둘은··· 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처절함을 품고 있겠지.
그것도 오래도록···.
특히 이 노인이 겪었을 긴 세월에서 훨씬 깊은 증오가 담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자네가 탐이 난다네. 우리의 목적을 위해선 항상 새로운 복수자가 필요하니까. 그러나 강요하진 않겠네. 오히려 거절하는 것이 자네에게 이로워. 아니, 그게 현명한 판단일세.”
여기서 나는 갑자기 양손이 자유로워졌다.
등 뒤에서 여자가 단검으로 내 팔의 포박을 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한가? 이틀 정도라면 기다려주겠네.”
“···아니.”
“호오?”
“그럴 필요 없다.”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망설임도, 여한도 없다.
입을 열려했다.
단호한 결의를 담아 눈앞의 망할 노인네에게 퍼부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때···.
“이런, 하필 이럴 때 불청객이···.”
노인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양인 여자도 긴장한 듯 자세를 잡았다.
“마기魔氣에 이끌려왔나? 하여간 눈치 없는 족속들이야.”
여러 개의 그림자 무리.
사람의 실루엣 댓 개 정도가 저 멀리서 보인다.
그것은 터만 남은 마을의 광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제길···.
쓸데없이 밝은 밤눈이 원망스럽다.
“아는 얼굴들인가?”
노인의 물음에 나는 치를 떨었다.
“알다마다···.”
딘, 데니스, 루헤인···.
전부 자경단의 일원으로, 나이 차가 조금 나긴 하지만 마을에선 형 동생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있을 리 없다.
왜냐면, 저 녀석들은···.
“숲에서 행방불명된··· 내 지인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