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의 장(10)
19.
하늘이 일그러지자 비명이 마을을 가득 채운다.
익숙한 얼굴들이 일그러졌다.
거동이 힘든 자들은 다리에 힘을 잃고 쓰러졌다.
젊고 어린 녀석들은 필사적으로 달렸다.
모두가 놈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후훗··· 멋진 광경이지, 빅터?”
클라리스가, 아니 친구의 모습을 한 마물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것은 공허하게 뚫린 눈으로 무너져가는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리곤 연신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표정이 왜 그래? 아, 혹시 이게 신경 쓰이나?”
클라리스는 손아귀의 뭔가를 내 앞에 툭 하고 던졌다.
흉하게 뭉개진 눈알이었다.
그녀의 아름답던 초록 눈동자는 이미 완전히 찌그러져, 예전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너희의 고통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이편이 훨씬 낫거든.”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자칫 목소리를 냈다간 절규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허나 클라리스는 내 사정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뿐이었다.
“혹시 그거 알고 있나? 사실 인간의 눈은 하자가 많다는 걸.”
그건 물음이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그녀가 나에게 지식을 줄 때와 같은, 일방적인 가르침이었다.
“구조적으로 결함투성이야, 우습게도 빛을 감지하는 기관이 안쪽에 있지. 어지간히 멍청한 설계인거지. 만약 교전에서 말하는 것 마냥 신적인 존재가 우릴 만들었다면··· 그놈은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거야.”
그러나 나로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녀는 부연설명을 하겠지.
나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간단한 예시를 덧붙인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리스는 다정다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는 본 적이 없겠지. 바다에서 잡히는 뼈가 없는 신기한 고기를 말이야. 녀석은 다리가 10개나 된다고 해. 추악한 생김새지만 맛은 좋다고 하는군. 그런데 하필 그 미물의 눈은 사람의 것보다 훨씬 우수해. 우리와는 다르게 맹점이 없지. 매우 훌륭하고 효율적이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이러했다.
사람의 눈알에도 혈관은 존재해, 허나 그것이 사물을 보는 투명한 막을 가린다고 한다.
나는 그게 사실일거라 짐작한다.
화가 난 사람의 눈에 핏발이 선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적이 있으니까.
“그런데 왜 자네의 눈에는 마땅히 보여야할 핏줄이 보이지 않는가? 여기서 부터가 재미있는 거야, 빅터.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관이 그걸 보이지 않도록 해주는 거지. 놀랍지 않아? 분명 존재하지만, 의식이 보이지 않게 현실을 조작해. 즉, 우리는 항상 환상을 마주하지.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서는 절대로 본질에 도달할 수 없는 거야.”
분명 신기한 현상이다.
동시에 놀라운 지식이기도 하다.
마을이 평화롭던 시절이라면 나는 크게 감탄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클라리스가 말하려는 요점이, 섭리나 이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나에겐 불완전한 눈은 없는 편이 나아. 이 천리안이 훨씬 잘 보이거든. 전부 그 분이 내려주신 은총 덕이지. 모든 걸 내려다볼 수 있어. 자네의 혼란도, 마을 사람들의 절망도 모두 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나는 그토록 표독스러운 미소를 짓는 클라리스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당장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으드득···!
나는 어깨를 파고든 화살을 온힘을 다해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관통시켜 몸에 스며드는 통각을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나는 겨우 입을 열 수 있게 되었다.
“···클라리스!”
“그래, 빅터.”
“그만해라, 이제 그만 둬!”
“뭘 말이야?”
“이 모든 게··· 마을에 일어난 재앙들이 네가 벌인 거라면 이제 그만 멈추란 말이다!”
이유는 모른다.
나로서는 클라리스가 어떤 생각으로 모두를 고통 속에 밀어 넣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사정이 있을 거다.
그 착하고 지혜롭던 클라리스를 이렇게 변모 시킨 무언가가···.
“그 아이 때문이냐? 너와 같은 머리색의 그 소녀를 불태워버린 게 문제인가?”
“재미있는 소릴 하는구나, 빅터. 만에 하나 그렇다면 뭘 어쩔 거지?”
“···사과하겠다. 이미 돌이킬 순 없겠지만 나만이라도 고개를 숙이마. 네 동포를 구하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그 뿐만이 아닐 텐데?”
클라리스의 되물음에, 나는 스쳐가는 생각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다.
“···그래, 네 아기를 제대로 묻어주지 못한 것도 인정하겠다. 전부 우리가··· 마을 사람들이 매정하게 죽은 아이와 너를 내쳤기 때문이다!”
그거라면 클라리스가 원한을 품을만하다.
어떤 의미에선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필사적인 고해에도 그녀는 마치 남의 일처럼 키득거릴 뿐이었다.
“후후, 확실히 그 녀석에겐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비록 겁탈 당해 밴 아이라도, 직접 낳은 아기니까. 혹여 애정을 품었을 수도 있으니. 그런데 말이야, 빅터. 이야기가 조금 이상한 걸?”
무슨 소리지?
터무니없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이 몸뚱이에서 잉태한 그건, 이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도 분명 살아있었을 텐데?”
“···하?”
“킥, 인간은 정말이지··· 편리한 기억을 가지고 있구나.”
“그게 무슨 말이지? 설마···.”
“순서가 반대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빅터. 아기가 죽은 건 이 마을에 발을 들인 다음이었어. 너희가 죽인 거지. 젖을 달라고 애원하는 타지 여인을 핍박한 결과로 말이야.”
그랬던가?
나는 그 깊은 사정을 알지 못하여 클라리스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고개를 들 수가 없다.
“큭큭큭··· 이제 알겠어? 굳이 원한을 가진다면, 너희가 이 몸에서 태어난 미숙아의 목숨을 빼앗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기이한 말투다.
어째서 클라리스는 지금 가정하듯 말하고 있는 거지?
“···그럼 광장에서 불태워진 소녀는?”
“그 사역마(Familiar)는 죽은 아기로 만든 것이었다. 너희가 처리하기 전까진 재미있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앞뒤가 맞지 않아, 방금 말한 것처럼 클라리스의 아기는 오래 전에 오두막 옆에 묻었을 터인데···.
“귀여운 괴물이었지? 꽤나 공들여서 만들었을 거야. 무덤에서 파낸 주검을 재료로 정성스럽게 다듬었겠지.”
“만들다니··· 그게 무슨?”
“간단한 장난이란다. 네가 보기엔 마술··· 아니, 마법으로 밖에 안 보이겠지만.”
잘못 짚었다.
이 녀석은 죽은 아이에겐 일말의 애착조차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 하나··· 우리를 향한 가공할 증오가 느껴진다.
나는 머리를 바닥에 처박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재앙을 끝내주길 바라며 빌어야만 했다.
“···이제 충분하잖아? 봐, 이 꼴을··· 전부 정신이 나갔어.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람도 있다. 나는 그레이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고 말았어. 우리 아델라이드는 아직도 깨어나질 못해. 그리고 이젠 너까지···.”
나는 끄집어낸 화살과 쥐고 있던 도끼 멀리 집어 던졌다.
그리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끝내자. 제발···.”
나는 이 시점에서도 희망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경험했던 건 단순한 악몽일 뿐이라고, 차라리 일을 벌인 게 클라리스라면 언제든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을 지도 모른다며···.
그렇게 안이한 기대를 걸었다.
어리석게도, 내가 그간 보아온 클라리스의 선한 면에 의지하고 만 것이다.
“빅터, 너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네. 이건 내 의지가 아니야.”
“뭐···.”
“모든 것은 위대한 그 분의 뜻일 뿐이지.”
무슨 소리지?
그 분?
수많은 의문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이상 입을 놀리지 못했다.
그 순간, 클라리스의 가벼운 손짓이··· 경악스러운 뭔가를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보라, 별을 보라, 우주를 보라. 지혜는 저 너머에서 내려올지니.”
“···고오오오오오!”
갈라진 하늘의 틈을 비집고 무엇인가가 내려온다.
무수한 밧줄?
아니, 그것은 하나하나가 무는 입을 가진 흉측한 벌레 같았다.
수 천, 수만의 마물이 하늘의 구덩이에 꼬리를 이어붙인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오색빛깔의 무리가 지상을 뒤덮었다.
“으, 으아··· 으아아악!”
“꺄아아아아아악!”
그만해.
나는 그렇게 울부짖었다.
클라리스의 어깨를 흔들며, 그녀가 그만두길 간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잔혹한 한 마디 뿐이었다.
“이미 늦었어.”
이어서 땅이 반으로 쪼개진다.
광장 아래의 균열 사이에서 촘촘하고 빼곡한 이빨들이 보였다.
지네나 사마귀가 먹이를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걸 떠올려보면 된다.
가로로 벌려지는 턱 속에, 씹고 뭉개고 분쇄하는 구조의 이빨이 무수히 박혀있는 광경을 말이다.
나는 경악했다.
마을을 등분할 정도의 거대한 아가리가 쩍하고 벌어진 것이 아닌가?
“너희는 이미 제물이야.”
갈라진 하늘은 벌레를 닮은 촉수를 뻗어 사람들을 휘감는다.
아래에 나타난 균열이 집과 함께 땅 위에 선 모든 걸 집어삼켰다.
아비규환이··· 지옥이 도래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지금 뭔가의 위장 속에 들어와 있다는 걸.
그리고 이것들은 사람을 먹는다.
나는 그제야 겨우 그레이스와 아델라이드의 존재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다리가 멋대로 가족을 향해 움직였다.
“그래··· 달리는 거야, 빅터. 실컷 발버둥 쳐. 그렇게 세계의 본질을 직시하렴.”
들리지 않는다.
듣지 않으려 했다.
그저 필사적으로 뛰었다.
아직 광장에서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할 그녀를 향해.
“그레이스··· 그레이스!”
다행이다.
두 사람은 아직 요물들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았다.
나는 빌었다.
부디 아델이 지금 눈을 뜨지 않길··· 나조차도 두려움을 느끼는 이 무시무시한 마경을 아이가 볼 수 없기만을 바랐다.
“여, 여보?!”
그녀가 고개를 들어 소리치자, 인근의 괴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든다.
아뿔사!
도끼를 놓치고 왔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내 손아귀엔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사악한 마수가 그레이스에게로 향하고 있다.
“···크, 으아아아!”
나는 뛰어들었다.
동시에 뒷목과 등뼈, 오른쪽 견갑골이 도려 나가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 퍼졌다.
서넛 마리의 벌레가 내 살가죽을 물고 늘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바라는 바다.
그레이스와 아델에겐 상처 하나 없다.
“여보, 당신···.”
“달아··· 나! 어서!”
이빨이 깊게 파고든다.
놈들이 내 살점을 씹을 때마다 전신에 격통이 퍼진다.
가까이서 보니 이것들은 내가 지금껏 봐온 벌레들과도 다르다.
이마에 무수한 눈알이 뭉쳐져 있다.
크고 기다란 몸에는 온통 갈고리 같은 가시로 가득하다.
끔찍한 확신이 든다.
이건 절대로 지상의 생물이 아니다.
놈들은 지옥에서 흘러들어온 사악한 독충이다.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이 고통이 내가 아닌 두 사람에게로 향한다고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당장 도망치라고!”
다행히 그레이스는 나의 각오를 알아주었다.
역시 내가 선택한 아내답다.
그녀는 아델을 조심스럽게 안고, 아직 괴물들이 내려오지 않은 곳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좋아, 이대로 계속 나를 베어 물어라.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사지가 흩뿌려질 만큼 물고 늘어져라.
얼마든지 뜯어 먹어도 좋다.
두 사람이 달아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어떤 아픔이라도 견뎌 내리라.
나는 그럴 각오로 이를 악물었다.
그 외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
요괴들은 나를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달라붙어있던 몇 마리 벌레가 내 몸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흥미를 잃은 듯, 다른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방향에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그레이스와 아델이 있었다.
“웃기지 마! 거기가 아니다! 나를 봐, 나를 먹으라고!”
그러나 괴물이 인간의 말을 이해할 리 없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씹고 있던 놈들은 물론, 사방에서 마귀들이 그레이스를 덮치려 했다.
나는 다시 땅을 박찼다.
주변에 나뒹구는 누군가의 단검을 하나 쥐어들고 무리에게 달려들었다.
제기랄!
날이 무디다.
요물의 몸통에 반쯤 들어가기도 전에 칼이 부러졌다.
나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고 다시금 찔러 넣고 다른 손으로 집어 당겼다.
‘네놈들이 그레이스에게 가게 내버려둘 성 싶으냐? 내 딸을, 아델을 해코지하게 뻔히 보고 있을 것 같으냐?’
그런 내가 성가셨는지, 놈은 가시처럼 튀어나온 측면으로 내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쇄골이 있는 목 아래에서 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래의 갈비뼈에서도 묵직한 고통이 파고든다.
이제 양팔엔 힘이 들어오지 않는다.
입 안에는 피 맛이, 숨은 가쁘고 가슴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쓰러질 수 없다.
쓰러져선 안 된다.
아직 두 다리가 온전하다.
나는 달린다.
달려야만 했다.
‘아아, 신이시여!’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곡히 기도를 올렸다.
그리곤 평생의 소원을 빌었다.
제발, 가족을 지켜달라고.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그레이스와 아델만큼은 무사하길 바라며 영혼까지 걸었다.
만일 그 바람이 이뤄진다면, 평생을 신앙을 위해 바치리라 일말의 거짓 없는 맹세를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어 올린 내가 본 것은···.
“···키, 아악!”
세상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던 단말마가 울렸다.
이어서 아내의 작은 몸이, 추악한 요괴들에게 사정없이 찢겨졌다.
놈들은 작은 조각조차 남기지 않고 그레이스를 탐했다.
“으, 아아··· 아, 아아아아!!!”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마치 분노에 미쳐버린 짐승이 숨통이 끊어질 듯 내뱉는 포효 같았다.
아니, 그것은 나였다.
이 찢겨지는 고함을 내뱉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던 것이다.
“아델! 아데에에에엘!”
아내는 죽었다.
그레이스는 끔찍하게 뜯어 먹혔다.
허나 정신이 나가버린 그 상태에서도, 나는 벌레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레이스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 그 품에서 놓친 딸아이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아, 아아아···!”
나는 하늘에 감사했다.
무사하다.
신의 은총이 틀림없었다.
아델의 몸에는 상처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깨끗한 얼굴 그대로다.
이 지옥과 같은 소동 속에서도, 그저 두 눈을 감고 꿈속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를 힘껏 껴안았다.
다신 놓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쉰 목소리로 아델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불쌍한 빅터.”
어느새,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두 눈이 없는 클라리스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직도 눈치 채지 못 한 거야?”
“닥쳐···.”
“아니면 애써 모르는 척 하는 건가?”
“닥치라니까!”
“그 아이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손끝까지 굳은 모습을 보니, 숨진 건 대충 어제 밤이었겠지.”
아델은 잠버릇이 나쁘다.
자주 자신의 팔을 베게 삼아 머리를 기대니까 가끔씩 이렇게 쥐가 날 수도 있는 거다.
피가 통하지 않으니 당연히 체온도 싸늘하겠지.
“안 믿겨지나? 그 창백한 혈색을 보시지 그래?”
아델의 피부는 원래 하얗다.
그레이스를 닮아 그런 것뿐이다.
“숨도 쉬지 않잖아?”
원채 작은 몸집이라 들숨이 보이지 않아 그렇다.
보라, 이렇게 귀를 가까이 가져가면··· 아이의 숨소리가, 심장박동이 느껴질 것이다.
“빅터, 언제까지 고집피울 생각이지?
역시 들린다.
강렬하게 생명의 숨결이···.
‘아니, 그것은 아이의 뺨에서 되돌아오는 내 거친 호흡이다.’
뜨겁게 뛰는 고동도···.
‘이 또한 미칠 듯이 울리는 내 심장의 소리이다.’
그래도 아델은 눈을 뜰 것이다.
왜냐면··· 왜냐하면, 이 아이는 나와 그레이스의···.
“설마 해가 질 때까지 계속 송장만 끌어안고 있을 거야?”
또 몇 마리의 벌레가 몰려온다.
그것들은 내 품에서 아델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너무도 많은 수의 마물들이 덮쳐들어 떨쳐낼 수 없었다.
차마 끌어안지 못한 팔을, 삐져나온 다리를··· 이윽고는 머리와 몸통까지 하나하나 집요하게 찢어발긴다.
아래로 떨어지는 손가락 하나까지.
놈들은 딸아이의 살점하나 놓치지 않았다.
결국 내 품안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나는 울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절규했을 테지.
모든 걸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한 무능한 멍청이가 있었다.
나다.
내가 바로 그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너어어어어!”
나는 증오의 대상을 찾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튀어나간 내 몸이 클라리스와 부둥켜 지면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손톱이 부러질지언정 그녀의 목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기도를 뭉개고, 경맥이 터질 만큼 악력을 담이 짓눌렀다.
하지만 그것은 죽지 않는다.
손가락 끝에서 분명히 으깨지고 부러지는 감촉이 느껴졌음에도, 클라리스는 여전히 오싹하게 웃고 있었다.
“드디어 인정했어? 이제 명실공히 넌 외톨이야.”
“어째서···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하는 거냐? 어째서!”
“난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내가, 우리가 대체 너에게 뭘 했다고오오오!”
“딱히? 너와 네 가족에겐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개소리! 나와 너는···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단 말이냐!”
여기서 클라리스는 또 다시 입가를 실룩였다.
명백하게 나를 비웃고 있었다.
“클라리스란 계집에겐 그랬을 지도 모르지.”
나는 순간 양손에서 힘을 풀어버렸다.
내 앞에 인간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너는 누구지?”
내 완력으로 부러진 목뼈를 부자연스럽게 주무르며, 그것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도 모르겠나?”
그리곤 점잖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 몸은 오래 전엔 클라르테. 때론 클레르··· 어느 시점에선 클로제라고도 불렸지.”
“···뭐?”
“대륙을 넘어 온 이후부턴 비슷비슷한 이름을 댔어. 대충 클라리아, 클라리사··· 그리고 네가 아는 클라리스까지.”
“그게 무슨···.”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야, 빅터. 나는 너에게 어떤 인간이었지?”
녀석이 다가온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었다.
“이 몸은 만인을 위하는 이타적인 의사였나? 희생정신이 넘치는 선생? 아니면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가까웠던 친구? 애틋한 밀회 상대였을 지도 모르지. 자, 말해보게··· 우직한 빅터. 지난 9년 간, 자네가 보아온 클라리스란 이름의 여자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다.
완전히 별개의 인격이다.
아니, 애초에 이것이 사람이긴 한 건가?
“후후,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어차피 그 사고는 전부 나에게 보이고 있으니까. 그렇구나··· 클라리스였던 나는 꽤나 너에게 특별한 존재였던 모양이야.”
그것이 기뻤던 것인가?
녀석은 박수까지 치며 깔깔 웃어댔다.
“안타깝네. 지금도 너에게선 복잡한 감정이 느껴져. 이렇게 날 바라보며 끝 모를 증오를 느끼면서, 한편으론 아직도 그녀를 깊게 믿고 있구나? 굉장히 흥미로워, 실로 어리석구나.”
사악함이 형체를 가진다면 바로 이런 것일까?
존재해선 안 되는 뭔가가 버젓이 서있었다.
나는 더 이상 클라리스에게선 섭리나 이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왜··· 나인 거냐?”
“뭐가 말이지?”
“어째서 나만 살려뒀냔 말이다!”
주위를 돌아보자, 마을엔 주검으로 가득했다.
클라리스를 제외한다면 나만이, 오직 나 혼자만이 두 발로 멀쩡히 선 유일한 인간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요괴들이 나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에 띠는 모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나만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죽여··· 나도 죽이라고! 다른 주민들같이, 그레이스처럼! 어서 죽여 봐라!”
나는 목청이 터지도록 외쳤다.
그러나 클라리스의 모습을 한 무언가는 단지 혀를 찰 뿐이었다.
“빅터, 너는 찌꺼기야.”
“지랄··· 마라.”
“그래. 가엾게도 제물이 되지 못했어.”
“알아 듣게 말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라, 클라리스!”
“불쌍한 빅터···.”
“너는 누구냐? 왜 마을은 이렇게 된 거지? 왜 나만 살아남았나?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어어어!”
“후후후··· 나를 온 마음으로 미워하기엔 너무나 다정한 사내, 그렇기에 클라리스가 너를 남겨두려 했던 건지도 모르지. 미쳐버리기엔, 너는 너무나 올곧았던 거야···.”
“클라리스!”
“잘 있으렴, 변방의 사냥꾼이여. 부디, 이 악몽을 영원히 잊지 않고 되새기길 바라지.”
그렇게 말하며, 클라리스는 내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어째서일까?
내 의식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끊어졌다.
잠시 후, 내가 눈을 떴을 때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마을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터가 있었던 흔적 뿐···.
나는 어느새 황량한 벌판에서 넋을 잃은 채 서 있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아, 길고 지독한 흉몽을 꾼 기분이었다.
허나 산지를 중심으로 거대한 스푼으로 퍼낸 것만 같은 거대한 구덩이가 말해준다.
내가 본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그리고 이젠 들려올 리 없는 클라리스의 속삭임이 여전히 귓가에 맴돈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계속될 악몽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20.
내가 철이 들었을 무렵,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일한 가족인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나는 깊은 슬픔에 빠졌었다.
오래도록 우울했고, 그걸 해소하기 위해 더욱 아버지의 가르침에 심취했다.
산과 숲속을 오가며 당신의 뒤를 잊는 사냥꾼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어른이 되자 가족이 생겼다.
마을 최고의 미인이라 불리던 그레이스와 혼인하고, 그러면서 어느덧··· 나는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있었다.
딸이 생기자 의식이 성숙해졌다.
예전보다 책임감 있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선가···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희미해져갔다.
이처럼 부모의 죽음은 언젠가는 극복한다.
처음에는 힘들더라도, 성장하면서 반드시 넘어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방법을 새 가족을 통해서 터득했다.
그러나···.
반려자의 죽음은 모른다.
이 슬픔은 어떻게 하면 잊을 수 있지?
자식의 죽음은 더욱 더 가혹하다.
다신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 이 고통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이상의 생지옥이 없었다.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나락에 삼켜진 기분이었다.
첫날, 나는 하루 종일 뱃속의 모든 것을 게워냈다.
이대로 죽을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인간의 목숨은 상상 이상으로 끈질긴 것이었다.
이틀째, 마을이 저주에서 풀려났음을 확인했다.
주변에는 최소한 잡초라도 자라고 있었다.
무기력해도, 먹을 것이 없다면 허기가 지니 어떻게든 그거라도 삼키게 되었다.
세 번째 날, 갈증을 채웠다.
동시에 배탈이 나서 다시금 며칠을 앓아야만 했다.
그리고 나흘 째··· 그들이 찾아왔다.
21.
두 사람이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었다.
언덕 너머에서 그림자처럼 새카만 사냥복과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수상한 이인조가 방문했다.
한 명은 훤칠한 키의 늙은이···.
또 다른 한 쪽은 나보다 한참 작은 덩치의 청년처럼 보였다.
노인 쪽은 지저분한 복장임에도 의연한 표정에 신비한 기품이 있었다.
사소한 움직임에 절도가 느껴져, 신사의 기교가 엿보였다.
“우리가 너무 늦은 모양이군.”
그는 축 늘어진 나에게 다가오더니···.
“무슨 일이 있었나?”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물어오곤 있지만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에는 어째서인지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 사람들은 보통이 아니다.
안광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왼쪽 눈은 변방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갈색이었지만 오른쪽은 백내장에 걸리기라도 한 듯, 뿌옇고 탁한 회색이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모든 걸 털어놓고 싶어졌다.
“이 마을은···.”
나는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이어졌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내 처절한 사연을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경청해주었다.
넋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키가 작은 쪽이 입을 열었다.
“대스승 크레이그···.”
목소리가 높다.
소년?
아니, 상대는 여성이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러자 이번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입가를 살짝 일그러뜨리며 웃는 것이, 내가 그에게서 처음 본 표정 변화였다.
“클라리스, 자색의 마녀라··· 그 이름을 마지막으로 들은 게 거의 10년 만이군.”
“클라리··· 마···녀?”
나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당신들은··· 대체?”
“···호오? 스스로 암시를 풀었나?”
“대스승, 혹시 가루를 덜 쓰신 것은?”
“이제 제법 건방진 소릴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내가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으냐?”
“그렇다면 이 애송이가···.”
“음, 소질은 있어 보이는군.”
남을 앞에 두고서 멋대로 떠들어대긴···.
나는 버럭하고 말았다.
“누구냐고 묻고 있다. 멋대로 들어와선··· 타지 놈들은 예의도 모르나?”
“오, 이거 미안하군. 맨 정신으로 이렇게까지 대드는 놈은 오랜만이라 말이야. 그래··· 방금 우리의 정체를 물었는가, 젊은이?”
노인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새치 섞인 회색 머리칼이 어깨까지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예의를 차렸다.
“우리의 적들이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도 여기저기에서 많은 명칭으로 불린다네.”
“적···?”
“마녀를 말하는 거라네, 젊은이.”
순간, 그늘 속에서 그의 오른쪽 눈이 새하얗게 빛났다.
“회색늑대··· 때로는 위자드 헌트, 옆나라에선 스펠브레이커, 혹은 틴탈로스의 사냥개··· 하지만 실체는 존재하지 않네. 사실 정해진 이름이 없지.”
노인은 내가 그 이유를 묻기도 전에 바로 말을 이었다.
“명칭이 정해지면 사악한 언령이나 저주의 표적이 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우린 스스로를 정의하지 않네. 이름을 부여하지 않지. 전부 남이 멋대로 부르게 내버려둬. 그 외에는··· 또 뭐가 있었지? 자네가 한 번 말해보겠나, 레이 엔쯔이?”
“···다리 밑의 개새끼들도 있었죠.”
“핫하, 그건 어휘가 빈곤한 주교들이나 부르는 이름이지.”
“대스승, 저는 경험이 부족하여 그것 말곤 모릅니다.”
“그래, 좋은 기회로군. 마침 아주 오래 전에 이쪽 지방에서 우릴 부르던 말이 있어. 나는 그 지칭을 썩 좋아한다네. 아주 직설적이고 알기 쉽지. 그건···.”
그때,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창백한 달빛 아래··· 노인의 낮은 목소리가 폐허에 조용히 울렸다.
“헥센야크트Hexenjagd···!”
그것은 말 그대로, 마녀사냥을 뜻하는 단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