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9화 (9/186)

제물의 장(9)

17.

해가 지지 않은 지도 며칠이 지났다.

하늘은 여전히 인간을 미치게 만드는 기묘한 색체를 머금은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이것은 밤보다도 기괴해, 악몽보다도 더욱 두려운 오싹함을 보이고 있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움직여야만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맴돈다.

지금 해내지 않으면 다신 기회가 없을 거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이 멍청이, 왜 이제야 몸을 움직인 거야?’

사실 지금까지 이 수단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여차하면 언제든 숲을 태워버릴 생각이 있었다.

최초의 행방불명자가 나온 그 날에도 나는 불씨를 들고 바로 나설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나는 왜 여태 그걸 실행하지 못했을까?

그레이스의 만류 탓으로 돌릴 순 없다.

아델라이드를 내버려두기 걱정되어서도 아니겠지.

왜냐하면···.

‘···또다. 왠지 의식이 흐릿해. 시커먼 뭔가가 자꾸만 내 마음을 흩트려놓는다.’

의지를 다잡으려하면, 어느 순간 의욕이 금세 가라앉는다.

누군가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았다.

아무 것도 하지 마, 마치 무력하게 그 자리에 쭉 머물러 있으라는 듯···.

일종의 언령言霊이 심어진 것 마냥 일거수일투족이 조종당하는 기분이었다.

빨간 머리 소녀가 광장에서 불태워 질 때도 이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말 저주라는 게 존재하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면 이건 대체 어떤 사악한 비술인지?

어느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는 걸까?

‘···웃기지 마라. 그런 게 있을 리 없어.’

나는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핏물이 입안으로 스며들자, 날카로운 아픔에 정신이 깨어난다.

심연에 잠긴 의식을 강제로 끄집어내, 그걸로 나는 겨우 무기력에 빠지려던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레이스, 아델··· 조금만 기다려줘.’

그 뒤는 딱히 어려울 것이 없었다.

마른 장작을 몇 개만 구해서 불씨를 만들면 그만이다.

산에서 노숙을 하던 때의 요령으로 간단히 옮겨 붙일 수 있지.

‘좋아. 이걸로 우린···.’

화염은 순식간에 건조한 수풀을 타고 퍼져나갔다.

이제 하루 이틀이면 모든 걸 재로 바꾸어놓겠지.

그러면 해방이다.

이후엔 살아남은 주민들을 이끌고 이웃 마을에 정착하면 된다.

처음엔 불편하겠지만, 각자 특기를 살리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

그쪽도 인력이 늘어나면 나름대로 반길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딱 한 해만 농작지를 빌리자.

수확량을 늘려서 인정을 받으면 새로운 출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걸로 우리는 다시···.’

고향을 잃어도 변방의 사람들은 간단히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마을이 없으면 사는 것이 조금 힘들어 지긴 하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당장 죽거나 하진 않는다.

반대로 주민이 없으면 마을은 존재조차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마을보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살아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무 것도 없던 이곳에 정착했던 세대인 아버지나, 그 이전의 선조들도··· 모두가 비슷한 고난을 겪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라고 해내지 못할 리 없다.

죽거나 사라져간 이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들 몫까지 필사적으로 나아가야하는 것이다.

그게 살아남은 자의 의무이니···.

“···아.”

그러나 하늘은 비웃는다.

나의 각오나 발버둥을 말 그대로 허사로 만들어버린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뒤틀린 천장이··· 빗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피와 같았다.

짙은 갈색의 질척한 물방울이었다.

나는 위를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젠장, 빌어 처먹을!”

이대로 포기할 순 없다.

화마火魔가 제대로만 깃 들기만 한다면, 어설픈 빗줄기 따위에 지지 않을 것을!

다시금 필사적으로 불을 지펴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꽃은 순식간에 가라앉아, 이윽고 약간의 탄내조차 남기지 않았다.

무리인가?

이렇게까지 해도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대체, 우리가 뭘 그리도 잘못했더냐!”

그렇게 하늘을 저주하고 있을 쯔음···.

“···빅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나보다 서넛 살 많은 나이의 창고지기 마커스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마을에서 드물게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자로, 나와 같이 클라리스를 편드는 소수파였다.

“어서, 마을로 와주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나 혼자선 도저히 막을 수가 없어!”

“무슨 일입니까?”

“결국 전부 돌아버렸어. 녀석들이 끝내···.”

“마커스 씨, 제대로 말씀해주시죠.”

“그럴 시간이 없어! 그녀가 위험하네! 놈들이 그 아가씨가 머물고 있던 창고를 습격했단 말일세!”

그 경악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18.

한동안 피 비린내가 나는 비가 멈추지 않았다.

산길은 물론, 마을의 논과 밭이 온통 진창으로 변해버렸다.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마을 사람들은 모두 광장에 나와 있었다.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빗물을 마시려는 건가?

아니, 차라리 그랬다면 다행이었으리라.

그들은 이마저도 어떤 징조로 보고 있었다.

특히 마을의 원로 중 하나인 미신쟁이 올가에겐 더욱 더 그렇게 보였겠지.

“신이··· 신께서 노하신 게로다! 그분께선 우리가 결단을 하도록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

이 마을에는 원로가 세 명이 있었다.

바로 은퇴한 농부 말라카이 늙은이와 베틀을 짜는 노파 앙리, 그리고 마지막이 사제를 아들로 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올가 할멈이지.

이들은 주민 모두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다.

50년 전, 징집과 전염병 때문에 거의 망하기 일보직전이었던 촌락을 되살린 위인들이기도 하니까.

수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열댓 명이 넘는 원로들이 살았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다들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최근에 두 사람마저 목숨을 잃었고···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명뿐이다.

‘···젠장할, 하필이면 그 귀신같은 할망구가···!’

나는 이 중에서 특히··· 올가 할멈을 가장 가증스럽게 생각한다.

괜히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죽어주는 편이 더 좋을 여편네라고.

나는 그런 인간이 아직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다닌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는다.

내가 그 늙은 여자를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까닭은, 바로 그 노친네가 클라리스의 주적이기 때문이었다.

“이··· 개자식들!”

나는 마을로 내려가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사람들이 몰려든 그 자리에는, 이마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클라리스는 정신을 잃은 채 온몸을 포박당해 수레에 끌려가고 있었다.

그 비참한 모습에, 나는 전신이 분노로 떨렸다.

나는 수레를 멈췄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오, 빅터. 잘 왔어! 자네라면 안심이지!”

“뭐라고?”

“이 년을 매달려면 자네처럼 힘이 좋은 장정이 필요했거든. 자, 어서 마녀를 끌어내자고.”

“기다려.”

순간, 나는 클라리스가 입은 치맛자락을 더럽힌 혈흔을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의 사타구니와 허벅지 안쪽에서 스며들어, 천 조각을 계속 시뻘겋게 적시고 있었다.

“아, 그거 말인가? 혈기 넘치는 놈들 몇이 재미를 좀 본 모양이야.”

“···.”

“그 뭐시냐, 빨간 머리들은 음탕해서 아랫도리 맛이 끝내준다고 하잖아? 그 소문을 실험해봤나 보더군. 하여간 반항이 얼마나 심하던지. 여섯 명이서 포박해가지고 겨우 잡았다니까. 외지인 창녀 주제에 참 가지 가지한···.”

콰직.

아마 코나 광대뼈가 완전히 뭉개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놈의 멱살을 잡고, 죽일 생각으로 몇 번이고 후려쳤다.

수레를 끌던 녀석들이 나에게 들이 붙었지만, 나는 방해하는 놈들의 코에도 팔꿈치와 주먹을 먹여주었다.

“···또 누가 클라리스를 건드렸나?”

놈들은 피가 흐르는 얼굴을 잡고 시선을 피했다.

하나같이 기가 죽어선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사내구실도 못하는 병신들···.

여자가 무력해지기만 하면 발정이 나서 사족을 못 쓰는 쓰레기 놈들이···.

“소란을 일으키지 마라, 빅터!”

갈라지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그쪽을 노려보았다.

“올가 할멈, 이건 댁이 명령한 건가?”

거기엔 온몸에 살집이 전혀 보이지 않는 해골 같은 노파가 지팡이를 의지해 서있었다.

나는 이 늙은 여자야말로 진짜 요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나이를 지나치게 먹어도 그건 이상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퀭하니 움푹 들어간 눈을 가늘게 뜨고 말라붙은 입을 놀렸다.

“···진즉 말살했어야 했음이야. 이 모든 건 그 이방인을 용납한 우리들의 죄였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저 노파는 클라리스를 모욕하고 있었다.

저 몰골에 며칠을 굶었을 텐데도 힘이 넘치는군.

“너도 이해해다오, 꼬마 빅터야. 모든 것은 마을을 위해서이다.”

뭐가 마을을 위해서냐?

잘도 신나게 지껄이고 있다.

평소라면 망령이 난 거라며 무시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럴 수도 없다.

이제 올가 할멈의 외침은 한낱 헛소리나 선동 따위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지쳐있다.

다들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것이다.

막아야 한다.

이 광기가 또 무고한 사람에게 향하기 전에···.

“입 닥쳐. 빌어먹을 늙은이··· 하루라도 빨리 저세상에 가고 싶은 모양이군. 그렇게 안달이 났다면, 내 손으로 직접 초상을 치러주지. 거기서 내려와라. 아니, 그 다리론 제대로 못 걷겠나? 그럼 내가 가주지.”

나는 사람들을 밀치며 군중 사이로 들어갔다.

그리곤 품에 숨겨온 도끼를 꺼내들었다.

“무지한 사냥꾼아! 그대는 왜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느냐?”

“···뭐가 신이냐? 대체 어떤 신이 이딴 미치광이 같은 짓을 한 단 말이지?”

“신께선 여러 번 경고를 하셨음이다. 우리 중에 불신자가 있다고 몇 번이나 징조를 보이셨다. 그런데도 우둔한 우리가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영혼 없는 붉은 머리를 쳐내지 않았던 것이다!”

“놀고 있네, 머리색이 다른 걸 가지고 질리지도 않게 입을 놀리는군. 애초에 그 영혼이란 어디서 나오는 건가?”

클라리스가 말했다.

영혼이란 정신에서 나온다고,

그리고 그 정신이란 내 머릿속, 두개골이 지키고 있는 기관에서 만들어진다.

그것은 육체의 일부이다.

육체가 죽는다면, 생각을 관장하는 부분도 죽는다.

단지 그 뿐이다.

대체 이 과정에서 혼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올가 할멈은 내 외침이 전혀 듣지 않았다.

“마녀를 옹호하지 말라! 너의 불경한 혓바닥이 더욱 하늘의 심기를 거스른다!”

나는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언제나처럼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군. 그렇다면 당장 댁을 끝장내도 아무 문제없겠어.”

나는 단숨에 뛰어들 셈이었다.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이용해서 자신의 증오를 표출하려는 진짜 마녀의 목을 내려치려했다.

하지만 방해꾼들이 있었다.

망자들이, 아니··· 순간적으로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비쩍 마른 주민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레니, 폴, 마커스, 오웬···! 꺼져라, 나를 막지 마라!”

“그만둬야 할 건 자네야!”

“치안관이 장로에게 무기를 겨누다니? 미쳤나, 빅터?”

“이번엔 올가 할머니가 옳아! 이만큼이나 재앙을 봤는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렸나?”

“너희야말로 제정신이냐? 클라리스가 마을을 구해줬던 걸 벌써 잊은 건가? 작당해서 은인을 쳐 죽이자는 거냐!”

“이보게, 빅터. 처신 잘 하라고. 그 잘난 이방인이 이 사태의 무엇을 해결했지? 그렇다면 원흉이 마녀가 아닌 이유는 또 뭐라더냐?”

“짐승만도 못한 놈들! 클라리스는 이미 이 마을에서 거의 10년 가까이 얼굴을 비췄다! 그런데도 아직 이방인이라고? 감히 그런 소릴 어떻게 입에 올릴 수 있나!”

나는 필사적으로 목청을 높였다.

당장이라도 도끼를 내리칠 듯 호통을 쳤다.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이들의 눈동자는··· 나를 비추고 있지 않았다.

분명 나를 바라보는데도, 전혀 다른 뭔가가 스며있다.

그건 불꽃이었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화염만이 그들의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빅터는 이미 마녀에게 홀렸다. 끌어내시게.”

올가 할멈은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같잖은 선민의식.

신을 믿는 자신이야말로 신앙 없는 모든 이들을 이끌어야 한다고 착각하는 그 오만함이 견딜 수 없었다.

“지랄하지 마!”

나의 신념은 숲에서 배운 이치와 섭리인 것을···.

저 늙은 년은 이따금씩 나는 물론 아버지의 긍지까지 부정하곤 했다.

“커헉!”

“물러나,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들아!”

나는 단상의 올가 할멈의 목을 뒤에서 낚아챘다.

그리고 언제든 꺾어버릴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았다.

“또 지껄여 봐. 클라리스를, 내 친구를 한 번만 더 그렇게 불러봐라! 반드시, 내 모든 걸 걸고 죽여 버리겠어!”

나는 지금 틀림없이 악귀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것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이에게 보이고 말았다.

북적이는 광장, 그 많은 인파 중에서··· 내 가족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무 걸음 정도 밖에 안 되는 거리에 어째서인지 아내와 딸이 서 있었던 것이다.

“···여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아델을 안고서, 그레이스가 필사적으로 앞으로 다가온다.

팔을 뻗어 막으려 했지만, 나는 차마 그녀에게 심하게 굴 수 없었다.

“놓아주세요. 올가 할머니를 풀어줘요.”

“그레이스···.”

“이건 당신답지 않아요. 언제나 마을을 최우선으로 여기던 그 이가 할 짓이 아니라고요.”

“하지만 이 노친네는 클라리스를···.”

“그게 뭐 어쨌단 거죠?”

“뭐?”

“저도 이제 뭐가 옳은지 모르겠어요.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 그 무엇 하나 해결하지도 못해요! 그렇다면, 어쩌면 이게 옳은 걸 수도 있잖아요?”

“아니야! 그레이스, 그건 틀려! 만에 하나라도 절대 그럴 수는 없는 거야!”

“아뇨! 당신이 틀렸어요. 그리고 올가 할머니가 옳고요. 당신을 홀린 그 더러운 붉은 머리··· 마녀는 죽여야 해요. 하늘을 달래야 우리도 살아날 수 있는 거라고요!”

틀렸다.

어느새 그레이스의 눈동자에도 썩어문드러진 마기가 씌어져 있었다.

“···그레이스, 아델을 데리고 물러서.”

“여보!”

“지금 당장!”

“왜 그러는 거예요! 왜 우리가 아니라 저 창녀를 편드는 거냐고요!”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단지 옳은 일을 하려는 거다.”

“고작 그딴 게··· 나와 이 아이보다 중요해요?”

제기랄, 가슴이 옭죄는 것 같다.

더 훌륭한 말과 논리가 필요하다.

보다 멋진 어휘로 그녀를 설득하고 싶다.

아아, 나는 어째서 이토록 배운 것이 없는 거지?

왜 클라리스처럼 언어로 상대를 깨우치게 만들 수 없는 거지?

시간이 있다면··· 천천히 마음을 터놓아 이야기하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다.

일말의 기회조차 없는 것이다.

나는 결국 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하는가?

“키야악!”

나는 올가 할멈의 등을 발로 차서 몰려든 광인들 사이로 날려버렸다.

“한 놈도 움직이지 마. 누가 될 진 몰라도 내 앞에 맨 처음 선 놈은 무조건 죽인다.”

다행히 인파가 꽤나 북적였기에, 늙은이는 무사히 그들의 손길에 받아들여졌다.

“이, 이놈! 천륜을 어길 셈이더냐!”

살려준 것도 모르고 할망구가 지껄였다.

역시 죽여 둘 걸 그랬나, 잠깐 후회가 들었지만··· 그래도 차마 이 마을을 만들고 꾸려온 원로의 목숨을 함부로 빼앗을 순 없었다.

오래 전, 개척자들이 처음 이 땅을 찾았을 때는 가혹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사라진 고향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몸뚱이 하나만을 믿고 오래도록 밭을 일구고 집을 지었다.

산지 아래의 메마르고 황량한 대지를 가꾸는 데엔 수십 년이 필요했을 것이다.

‘지금은 반쯤 미쳐버린 올가 할멈도, 그 시대엔 후손을 위해 필사적으로 일했겠지.’

그렇기에 원로로 추대 받는 것이다.

그 공로 때문에 우리에게 옛날의 고난을 작게나마 보상받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제아무리 미워도 죽일 수는 없다.

“빅터! 지금이라도 그 년을 죽여야 한다! 나는 꿈에서 몇 번이나 참혹한 결말을 보아왔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야! 악마의 권속이란 말이다!”

화를 내기보다는 울음을 터뜨린다.

올가 할멈은 나에게 빌고 있었다.

어리석고 가증스럽지만, 그럼에도 이 노파는 나름대로는 진심으로 마을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다.

허나, 나는 무엇이 옳은 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아으···.”

“클라리스···.”

“···빅, 터?”

정신을 차렸나?

클라리스는 얼굴의 절반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눈가를 바르르 떨었다.

“아, 아아···.”

일어나자마자 고통과 끔찍한 기억에 몸서리친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도, 나는 제대로 된 위로조차 건넬 수 없었다.

“빅터··· 자네가 날 구해준, 거야?”

아니, 구할 수 없었다.

내가 쓸데없는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이미 그녀는 상처를 입었으니까.

그 끔찍한 일을 벌인 놈들과 같은 마을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나는 면목이 없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클라리스는 핏기 없는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말한다.

내 탓이 아니라고.

“···그래도 자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순간, 나는 성모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은 아델을 돌림병에서 고쳐주었을 때와 같았다.

이 순수하고도 선명한 녹안···.

자신을 해코지한 무지한 자들을 원망하기는커녕, 친구인 나의 무사함을 바라는 올곧은 마음이 그대로 내비친다.

마녀가 아니다.

이런 고운 심성을 가진 그녀가 절대 마녀일리 없다.

나는 다시금 마음속에서 강한 결단을 내렸다.

“눈뜨자마자 미안하지만, 일어날 수 있겠나?”

“으, 응···.”

“가자.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있어라. 도망칠 길은 내가 열 테니.”

이 녀석은 죽어선 안 된다.

클라리스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오래오래 살아남아, 세상을 위해 빛을 밝혀야 한다.

나를 넘어서 우리에게, 모든 이들에게 클라리스는 필요한 사람이기에···.

“여보, 거기서요!”

“미안하다, 그레이스···.”

“당장 멈추라고요!”

그런데 거기서, 그레이스의 고함 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동시에 왼쪽 어깨에 강렬한 통증이 박혀들었다.

“큭!”

팔에 꿰뚫린 화살촉이 보인다.

그레이스가 내 쇠뇌를 멋대로 가지고 나온 모양이었다.

“지금이다! 빅터를 잡아!”

멍청이들, 할 수 있으면 해보라지.

나는 도끼를 역수로 쥐었다.

날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드는 몇 놈을 갈겨주니, 아직 내가 건재하다는 걸 깨닫고 움직임을 멈춘다.

겁쟁이다.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모두 겁만 많은 등신들이다.

“아··· 미, 미안해요! 여보, 정말 미안해요!”

지금 아내는 주저앉아 있다.

활대가 튕겨나간 것에 꽤나 놀란 듯하다.

바보 같이··· 자세를 제대로 잡지 않고 쏘았으니 그렇게 되지.

“제발··· 제발 가지 말아요! 우릴 버리지 말아줘요!”

“버리는 게 아냐. 이 녀석을 마을 밖으로 돌려보내고 바로 돌아올 거야.”

“그게 아니에요! 내가 아니라 그 여자를 선택하지 말아요!”

오해하고 있다.

슬플 정도로 뒤얽힌 착각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오직 그레이스 뿐 임에도, 그녀의 가슴에 내 말이 닿지 않는다.

당장은 방법이 없다.

어떻게든 클라리스는 안전한 곳으로 두고··· 돌아와서 그레이스를 안아주는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 용서를 빌자.

다신 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개를 숙이자.

그 다음엔 그레이스가 바라는 걸 전부 이뤄주는 거다.

그것이 비록, 죽음을 기다리는 포기라 할지라도···.

나는 그걸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비켜.”

나는 도끼를 겨누고 마주치는 모든 이들을 위협했다.

다행히 하나같이 허기가 진 머저리들뿐이었기에, 나는 쉽사리 길을 틀 수 있었다.

“빅터··· 고마워.”

클라리스가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인다.

그녀에게선 쉽사리 듣기 힘든 감사였다.

울음을 참는 건가?

그럴만하다.

녀석이 마을 놈들에게 당한 꼴은 정말이지 비참하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감사를 받기엔 면목이 없다.

“그러지 마. 나는 너무 늦어버렸다. 난 아무것도···.”

여러 가지 감정이 무겁게 몰려온다.

아내와 딸을 내버려둔 죄책감이···.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는 무력함에, 마을이 완전히 끝나버렸다는 공포가 가슴을 짓누른다.

그리고 앞으론 클라리스를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 아쉬움이 든다.

아마 다신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하겠지.

우리들은 이걸로···.

“···킥.”

그때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울림이, 내 목덜미를 타고 귓가를 스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있을 리 없는 웃음소리, 그것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것의 조소였다.

“클라···리스?”

그때, 나는 돌아봐서는 안됐다.

하지만 이어서 그녀가 내뱉은 말에는 기이한 마력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 빅터, 자네는 딱 좋은 시기에 와 주었어. 정말로···.”

마치 유도라도 당하듯, 내 눈은 클라리스의 얼굴로 향하고 말았다.

“아핫, 아하핫! 아하하하하!”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클라리스는 멈춰서 있었다.

후드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인 채,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 휘어진 초승달이 보였다.

입가만이 찢어져 있다.

좋아서 죽을 것 같이 깔깔 거리는 중이었다.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같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클라리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땅이 요동치며 찢겨졌다.

사방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뭐냐?

이것은 또 무슨 악마의 장난질이란 말인가?

아직도 또 뭐가 남았단 말인가?

“클라리스, 그만··· 대체 뭘 하는 거냐!”

“키, 키키키킥··· 키득!”

“웃지만 말고 고개를 들라고!”

나는 녀석의 양손을 잡았다.

억지로 팔을 당겨 얼굴을 보려했다.

허나 그것이 실수였다.

“아하하하하하하!”

떼어낸 손은 검붉은 살점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 눈물이 흐른다.

손톱으로 거칠게 파낸 구멍이, 본래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눈치 챘다.

이 여자는 클라리스가 아니라는 걸.

지금 내 앞에는 있어선 안 될 무언가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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