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8화 (8/186)

제물의 장(8)

14.

공포는 이제 더 이상 본색을 숨기지 않았다.

상황은 매일이 지날수록 악화되어 갔다.

로프를 설치하면서 나아가도 언제나 마을로 향하는 익숙한 오솔길이 반긴다.

이정표라고 생각하던 고목을 따라갔더니 어느 순간 입구로 되돌아오고 만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도무지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방향 감각이 좀 먹힌 기분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도깨비가 우리는 비웃고 있는 것만 같다.

이틀째, 숲에 들어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이가 생겼다.

그런데 수색을 할수록 실종자가 더 늘어났다.

그것이 사흘, 나흘로 이어졌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산의 그 무엇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15.

일주일이 지날 무렵, 이제 이변은 우리의 머리 위에까지 닿았다.

어둠이 두렵기에, 변방의 사람들은 언제나 아침을 기다린다.

여명이 밝아오고 하늘이 선명한 푸른빛을 발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다.’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면에 불과하다.

때론 하늘이 붉은 빛을 띠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본디 해가 뜨거나 땅거미가 내릴 시간이 되면 산 끄트머리부터 진홍색으로 물든다.

‘이 또한 자연스럽다.’

무지개를 떠올려 보자.

그것은 태양의 광채가 가진 본연의 색채이다.

하늘은 이처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자연의 위용을 뽐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하늘 위에 추잡하게 뒤섞인 것들은 어떠한가?

‘이건···.’

나는 오래도록 위를 바라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하늘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였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역겨운 청록이 보인다.

그리고 탁한 자주빛···.

이어서 주황색 반점이 드문드문 찍혔다.

마치 눈동자와 같은 무늬가, 쩍 벌어진 입술이 휘어지는 기괴한 문양들이 하늘을 가득 채웠다.

태양이 녹아내린다.

창공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이 날을 기점으로··· 마을의 모든 가축들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목구멍에 진흙을 삼키는 닭에, 자기 새끼를 머리부터 씹어 먹는 말을 상상해보라.

소들은 서로의 눈깔에다 뿔을 처박아 넣고 휘저어댔다.

무슨 악마의 조화인지 식량들도 하나같이 상해버렸다.

보관해둔 양젖은 모두 썩고, 따로 보관해둔 치즈에도 처음 보는 구더기가 들끓었다.

땅이 갈라지고, 흙에 뿌리를 둔 모든 초목이 말라버렸다.

곡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 과거의 설사병이 재발했다.

강물은 토사물처럼 악취가 피어올랐다. 갈증을 참지 못해 억지로 마시면 입안에서 기름처럼 걸쭉한 맛이 났다.

단 며칠 사이, 마을은 그야말로 마계처럼 변해버렸다.

클라리스는 이 모습에 말문을 잃었다.

나는 애원했다.

이것에 대체 어떤 섭리가 있는 것이냐고.

이딴 끔찍한 지옥도에 어떤 이치가 담겨 있느냐고.

그러나 내가 아무리 간절하게 설명을 요구해도,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미안해, 빅터. 이건 나로서도 잘 모르겠어. 언제나처럼 우리가 모르는 것뿐이겠지만··· 당장은 짐작조차 가지 않아.”

그렇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나는 필사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을 되뇌였다.

16.

시간은 흘러, 어느덧 보름이 지났다.

드디어 아껴 온 식량마저 떨어졌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우리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사생결단의 각오를 품고 산을 오른 이들이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잇따라 자취를 감추었다.

소문에는, 처음 보는 짐승이 길을 잃은 주민들을 찢어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다.

어느 쪽이 사실이 되었든지··· 이제 남은 마을 사람들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녀석이 걱정이다.’

숲으로 가는 길이 폐쇄되자, 당연히 클라리스도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녀석이 마을 외진 곳에 있는 창고에서 지내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레이스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못 나가요.”

내가 겉옷을 챙기는 것만으로 그레이스는 매달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도 거의 비명까지 지르며 나를 막으려 했다.

‘무리도 아니지.’

아내는 한계에 달해있었다.

오히려 마을이 미쳐버린 이 시점에서, 아직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레이스,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아요! 뻔히 보이는 핑계야! 또 그 여자에게 가려는 거잖아!”

“···.”

친구를 향한 아내의 적개심은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럴 때마다 항상 일관적인 변명을 했었지.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클라리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이제 그것도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듯 했다.

“이젠 지긋지긋해! 당신은 우리가 불쌍하지도 않나요? 아델을 봐요. 이 아인 일주일 넘게 바깥에 나가지도 못했다고요! 나만 해도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치안관이야, 그레이스.”

“네, 물론 그러시겠죠! 이 작은 마을에서 가장 힘세고 싸움을 잘하는 덩치 나으리, 그게 당신이니까요! 하지만 그 이전에 사냥꾼 빅터는 내 남편이에요. 이방인의 조수가 아니라!”

“왜 몰라주는 거지? 이대로는 마을이 끝나고 말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단 말이야.”

“이미 이 지경인데 당신이 나선다고 뭐가 더 변하는데요?”

“그래도 뭔가는 해봐야지.”

“그럴 가치가 있어요?”

“뭐?”

“나와 아델을 내버려 둘만큼 의미가 있는 일이냐고요!”

아내가 옳다.

그녀의 말은 항상 옳았다.

가족을 돌보는 것···.

나는 그것이야말로 가장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야.”

“우리만 보란 말이에요! 그 빨간 머리 창녀랑 우리 중에서 누가 더 중요한데요?”

순간, 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양팔이 멋대로 뻗어나간다.

나는 어느새 아내를 끌어안고 있었다.

“갑자기 뭐에요, 당신···.”

차마 얼굴을 볼 수 없어, 나는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숙인 채 읊조렸다.

“···맹세해. 나한테 가장 중요한 건 두 사람이다. 앞으로 내가 아무리 실언을 하고 약속을 어긴다 하더라도, 그것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야.”

“언제나 말뿐이면서···.”

“아니야! 나는 어디서든 항상 당신과 아델 생각뿐이다.”

언어란, 가끔 무력하다.

특히나 배운 것이 없어서 조리 있게 말을 못하는 나에겐 더욱 더 그렇다.

무뚝뚝한 나이기에 그 누구보다 잘 알지.

사실은 부끄럽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그녀의 앞에서 속마음을 털어놓기가···.

그녀에겐 내가 겁쟁이라는 걸 들키고 싶지 않다.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라 불려도, 그 속에는 보다 의지해주고, 든든하게만 여겨주길 바라는 자신이 있다.

아내와 딸을 뺀다면··· 나는 그저 덩치만 큰 머저리일 뿐이기에.

그래, 나는 이들을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이럴 때 일수록 같이 있어줘요! 아델이 깨어날 때까지 곁에 머물러 달란 말이에요!”

여기서 그레이스는 울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우리 아이의 마지막 순간까지는···!”

그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애써 피하고 있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구체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델은 며칠 째 곰팡이가 낀 빵 몇 조각을 씹고, 누린내가 나는 스프만 한 모금만 삼켰을 뿐이다.

어른도 배가 고프면 무력해져, 한창 클 시기의 아이에게 영양실조는 치명적이다.

그 영향인지 어제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서만 보내고 있다.

무슨 병은 아닐까?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 속이 타들어간다.

가만히 있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아, 나는 뭐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포기였기에.

그레이스의 탁한 눈동자는, 모든 걸 내다버리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자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나를 클라리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순간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제안이 아주 달콤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는 이빨을 부득 갈았다.

그리곤 아내를 품에서 떼어놓았다.

“여보!”

도저히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발버둥 쳐보기로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야만 한다.’

그로 인해 아내의 원망을 받는다고 어쩔 수 없지.

사냥꾼이란 내 정체성을 부정해도 좋다.

그로 인해 평생을 살아온 보금자리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상관없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날, 나는 산에 불을 지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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