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7화 (7/186)

제물의 장(7)

10.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정오가 넘어서였다.

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한동안 광장에서 발을 떼지 못 했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중심가에 모여들어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어째서일까?

자처해서 횃불을 나눠 든 주민들은 제외하더라도, 나는 강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기를 바랐었다.

사교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식과 인신공양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나섰을 터였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꼼짝없이 멈춰서 몸과 정신을 지배당한 것은 무슨 이유 탓일까?

‘마을의 광기를 두 눈으로 본 적에 큰 충격을 받아서? 아니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마력에 넋을 잃었기 때문에?’

가당찮다.

현실에서 눈을 돌리면 이딴 식으로 밖에 귀결되지 않겠지.

그나마 그럴싸한 해답을 찾아보자.

불길한 미신이 아니라 또렷한 이성으로 생각해보는 거다.

시간이 지나서 클라리스의 해독차가 이제 효과를 잃었던가, 어쩌면 나조차 눈치 채지 못한 요인으로 광증이 발발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둘 다 일수도 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클라리스의 지혜가 필요해.’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이 사태를 설명해줄 친구의 현명함이 간절했다.

나는 내 코트 자락을 쥐고서 유난을 떠는 그레이스의 손길을 애써 뿌리쳐야만 했다.

그리곤 곧장 클라리스의 오두막을 향했다.

11.

나는 도착과 동시에 당장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혔다.

“클라리스!”

당연하게도 집 주인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빅터? 이건 경우가 아니지 않나? 아무리 급해도 노크 정도는···.”

허나 방문에 허락을 받을 겨를이 없었다.

심지어 사과하며 예우를 챙길 여유조차도 부족했다.

“사람들이 미쳐버린 것 같다.”

“뭐?”

“그들의 손에 아이가··· 이방인 소녀 하나가 매달아졌어!”

“빅터, 잠깐만 진정하고···.”

“너와 같은 붉은 머리 아이가 불태워졌다!”

나는 바로 묵혀둔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두서없이, 그저 생각이 흘러가는 그대로 말을 뱉었다.

그것은 거의 절규나 하소연에 가까웠다.

클라리스는 그것을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그렇게 쏟아낸 끝에서야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미안하다, 클라리스. 하지만 이 일은 내 좁은 식견만으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이 섭리인지,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사건이 계속···.”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던 것일까?

나 스스로가 보아도 어울리지도 않는 한풀이에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사연을 들은 클라리스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 며칠 사이에 또 그런 일이 있었군. 마을 사람들도 참 너무하군. 좀 외모가 특이하기로서니 어린 아이를 매달아··· 그것도 불태워 죽이다니, 심히 유감이야.”

“아내나 딸 아이 앞에선 내색할 수 없었지만··· 나도 이제 슬슬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음, 그럴 만도 하지. 자네 마을에 처한 상황은··· 누가 봐도 혼란에 빠질 거야.”

“자네도, 클라리스 너에게 있어서도 그런가?”

“···당연하지. 나도 자네 못지않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이건 내 이해를 오래 전에 넘어섰단 말이야.”

나는 잠깐 동안 마음이 흔들렸다.

그럴 수가, 클라리스 마저도 탐구를 포기했단 말인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곤란해, 빅터. 나라도 모르는 건 있어. 제아무리 동방에서 공부를 했던, 위대한 고서를 얼마나 읽건 간에··· 결국은 나도 한낱 사람에 불과하다고. 자네가 원하는 모든 걸 설명할 순 없어. 허나, 그래도···.”

허나 그것은 내 일방적인 억측이었다.

아직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의지의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포기하긴 이르지. 난 아직 일련의 사건들에서 본질을 찾아내지 못했으니까.”

“뭔가 생각한 거라도 있나?”

“자넬 안심시킬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듣고 싶다.”

“정말? 하지만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을 수도 있어. 오히려 더 복잡해질 거야.”

“상관없어.”

“빅터···.”

“난 자넬 믿고 있다. 허튼 소릴 하지 않을 거란 것도 알아.”

내 간절한 요청에, 클라리스는 마지 못해서 입을 열었다.

“물 뿐만이 아닐 지도 몰라.”

“뭣이?”

“의심 가는 게 더 많아졌어. 이젠 어떤 것도 가벼이 여길 수 없어진 거지. 바람··· 공기에 토양까지, 이것들 전부가 광증의 요인일 수도 있단 말이야.”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이제 왜 클라리스가 말을 아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가장 중요한 섭리 중 하나는, 사람은 아무것도 먹지 않곤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고기가 없다면 풀이라도 뜯어야하고, 정 속에 집어넣을 게 없다면 마실 것으로라도 채워야한다.

하다못해 숨이라도 자유롭게 쉴 수 있어야 하지.

그런데 이젠 그마저도 제약이 걸린다?

이 모든 게 정신을 좀 먹는 원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대로 모두가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아니면 미쳐버릴 것을 각오하고 계속해서 오염되었을지 모를 식량을 탐해야 하나?

클라리스는 어느 한 쪽을 고르지 않았다.

그녀에겐 더 현명한 묘수가 있었다.

“간단해. 옆 마을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그래, 그거라면!”

“분명 그쪽과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지? 최근에도 그 누구였지? 마틸다였나? 아무튼 마을 처녀가 시집갈 정도로 왕래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 너머에, 반나절 정도 거리에 위치한 클로드 마을과는 꾸준히 옷감을 거래하고 있다.

우리 마을 아가씨들은 손재주가 뛰어나니까 말이다.

나도 몇 번인가 가죽과 말린 고기를 팔기 위해 상인들과 동행한 적이 있다.

“어떻게 생각해, 빅터? 그들이 도와준다면 어떻게든 다음 해까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관계가 좋다고 해서 이야기가 잘 풀릴 거란 보장은 없었다.

“쉽지는 않을 거다.”

“왜?”

“옆 마을도 겨울 날 준비를 했을 텐데, 다짜고짜 수확한 걸 나눠달라 한다고 간단히 내줄리 있나? 거기다···.”

역병 때문에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말해봐야 역효과만 될 뿐이다.

오히려 이웃 마을에 방문한 우리를 질겁하며 쫒아버릴 지도 모르니까.

“거기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야··· 제대로 사정 설명해야 도움을 주지 않겠나? 그게 구원을 받는 우리 입장에서 당연한 태도고.”

멍청하긴, 그녀는 나를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더니.

“둘러대는 것도 처세술이야. 적당히 흉년이 들었다고 하면 어떨까? 아니면 곡식 창고에 불이 나서 식량이 다 타버렸다고 하던가?”

“그건 거짓말이다.”

“나중에 어떻게든 갚아주기만 한다면 괜찮지. 어설픈 진실보단 납득 가능한 거짓이 도움이 될 때도 있어.”

“그런가···.”

“빅터, 난 자네의 그 우직한 면을 참 좋아해. 그런데 그것도 정도가 지나쳐서 가끔씩 질릴 때가 있어. 지금은 사람들 목숨이 달렸잖아? 마을 최고의 사냥꾼이자 치안관인 댁이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어찌하겠어?”

툭.

그러면서 클라리스는 나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다.

아프진 않다.

오히려 어설픈 지르기에 새삼 그녀의 약해빠진 완력에 코웃음이 다 나온다.

하지만 거기에는 내가 지금껏 고민하던 것을 시원스레 날려버릴 만큼의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레이스를 생각해. 그리고 아델라이드도.”

“네 말이 맞다. 내일이라도 당장 수레를 끌고 다녀와야겠어.”

“그래. 잘 풀리길 빌게.”

“클라리스, 괜찮다면 너도 동행하는 건 어떤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데.”

“왜지?”

“자넨 모르겠지만, 이 지방은 어딜 가든 내 머리칼에 불만을 가져. 유별난 곳에선 아예 나더러 영혼이 없다며 면전에서 악담을 늘어놓기도 하지.”

“그거라면 걱정마라.”

“응?”

“그런 자식이 있다면 내가 주먹으로 직접 예의를 알려줄 테니까.”

“참아주셔. 그럼 자네까지 쓸데없는 원한을 사게 될 거야. 나만 참으면 되는 문제를 크게 벌리지 말아줘.”

“아무튼 네가 옆에 있다면 든든할 거다. 나는 말주변이 없으니까.”

“음, 그건 그렇지.”

하필 여기서 클라리스는 싱긋 웃으며 맞장구 쳤다.

“···어쩔 수 없네. 거짓말을 못하는 자네를 대신해서 내가 설득해보도록 하지.”

나는 안도했다.

그 승낙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는 아마 클라리스 본인조차 모를 것이다.

놀랍게도, 어느새 나는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나는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게 채비를 할게. 빅터, 항상 그렇듯 자네에겐 마을 사람들의 설득을 부탁하지.”

“아니, 괜찮다. 지금 당장 우리들끼리 떠나도록 하지.”

“응? 원로들에게 말하지 않을 건가?”

“···그 망령 든 노친네들에겐 이제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아.”

그도 그럴 것이, 빨간 머리 소녀에게 기름을 끼얹고 불에 태워죽이도록 지시한 것이 그 원로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슬아슬하게 지탱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광기에 불씨를 끼얹은 것도 그들일 테지.

클라리스의 전언에 어떤 반응이 나올 지도 뻔하다.

실랑이에 하루를 보내느니, 내 독단으로라도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이롭다.

잠시 후, 준비를 마친 클라리스와 나는 오두막을 떠나 이웃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까지만 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이변의 여파가 마을을 넘어서 숲속까지 마수를 펼쳤다는 것을···.

\

12.

산에는 마魔가 산다.

그게 아버지의 말버릇이었다.

동시에 유언이기도 했다.

내가 열세 번째 생일을 맞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숲에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의 최후는 맹수와의 처절한 싸움도, 대자연의 가혹한 천재지변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실족사···.

한 순간 균형을 잃은 탓에 바위 위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한평생을 산에서 살아온 사람이 맞이한 것치곤,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지.’

믿고싶진 않지만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친부의 주검을 맨 먼저 확인한 자가 다름 아닌 나였고, 그때 유일하게 보이는 상처라곤 역방향으로 꺾인 발목뿐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돌아가신 모습마저도 의연했다.

고통의 기색이 보이지 않는 무표정이었다.

틀림없이 머리를 부딪쳐 목숨을 잃었을 텐데, 겉으로는 피 한 방울조차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본디 편두통을 남들 모르게 앓고 계셨던 것일지도 모르지.

클라리스의 말론, 머릿속에 퍼진 혈관 한 줄에 출혈이 생기는 정도만으로도 인간은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사지를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되어버려, 그래서 다리를 삐끗한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에는 그런 사연이 있지 않았을까?

확인할 방법은 없다.

시간이 지난 지금으로선, 단지 그렇게 짐작할 뿐이다.

허나, 왜 하필 산에서였을까?

기왕이면 마을에서, 가족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뜰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 아픈 내색 한 번 없이, 완고함으로 견뎌온 중년의 사나이에게···.

하필 그가 사랑하며 모든 의식주를 의존해온 숲이 마지막 묘지가 되어야만 했던가?

어쩌면 정말 존재할 지도 모른다.

어둑한 산 속 깊은 곳에 암약한 마魔라는 것이···.

놈은 인간의 안락 따위엔 일말의 관심조차 없으며, 더욱이 살벌한 악의마저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우리를 홀리는 것 또한 그 알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하고···.

“뭔가 이상해.”

“나도 안다, 클라리스.”

“같은 자리를 계속 돌고 있는 것 같아.”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빅터···.”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시도해보자.”

오늘의 산길은 한층 더 어둡게 그늘이 져있었다.

이렇게까지 음산했던가?

이것은 내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르던 시절보다 불길함이 느껴진다.

이맘때쯤 들려와야할 새의 지저귐이 전혀 없다.

벌레들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도···.

심지어 바람조차도 불지 않는다.

결국은 숲에까지 마의 손길이 뻗친 듯 보였다.

‘클라리스의 집에서 떠난 지도 한참이나 지났는데 이 모양이라니···.’

체감 상, 시각은 오후 다섯 시에서 여섯 시를 조금 넘겼을 것이다.

처음 수십 분간은 안이하게 생각했다.

이 숲은 원래부터 그런 곳이다.

태양이 정중앙에서 다소 벗어날 것이니, 당연히 해도 산등성이로 기울어졌을 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문득 하늘을 보니, 산 너머까지 두터운 구름들로 가득 메워져있었다.

순간, 이상한 것을 보았다.

촘촘하게 이어진 회색빛의 덩어리들이 몰려오는 그 광경이··· 마치 무수히 많은 손아귀가 창공을 찢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더욱 발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걷고 걸어도, 이웃 마을로 통하는 길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헤맨 것이 벌써 네 번째다.

“헉, 허억··· 하아!”

“괜찮나? 더 걸을 수 있겠나, 클라리스?”

“미안, 이제 더는··· 못 하겠어.”

“음.”

더는 재촉할 면목이 없어, 나는 먼저 걸음을 멈추었다.

클라리스는 정신없이 나무토막을 파서 만든 수통의 물로 목을 축였디.

하긴, 녹초가 될 만도 하지.

그녀는 나의 보폭을 따라 쉬지 않고 서넛 시간을 걸었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용케 따라왔다 싶을 정도다.

하지만 지친 것은 몸뿐이 아니다.

오히려 당장 힘겨운 것은 정신의 문제였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어?”

“아니.”

“자네 정도의 위인이 헤맬 정도면··· 이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어디 가서 으스댄 적은 없었지만, 나는 산을 타는 일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 이상으로 숲길을 잘 아는 사람은 마을에 없다.

이웃 마을로 가는 통로 따윈, 눈 감고도 찾을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우리는 길을 잃었다.

“저기, 저거 보여?”

“···그래.”

클라리스는 손가락을 뻗어 넝마조각이 묶여있는 나무 가지를 가리켰다.

저것은 내가 한 시간 정도 전에 옷감을 찢어 표시해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한 번 온 장소를 한 바퀴 돈 셈이라는 것이다.

분명 직진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같은 외곽 자리만을 빙빙 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자기가 직접 매단 흔적을 확인하니 변명의 여지마저 사라졌다.

‘산에는 마魔가 산다···라.’

잊고 싶었던 아버지의 말이 다시금 뇌리에 떠오른다.

앞으로 몇 시간 뒷면 완전히 해가 진다.

그렇게 되면 도사리고 있는 위협은 어둠이나 추위가 아니다.

밤이 내리깔린 숲속에서 산짐승은 더 이상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나 혼자만이라면 어떻게든 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클라리스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지친 채로, 도망칠 기력조차 없지.

···이쯤에서 몸을 사려야 하는가?

우리는 결국 마을을 떠나 숲을 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13.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자경단을 대동해 다시 산으로 올랐다.

어제는 뭔가 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아직 광장에서의 화형식에 적지 않게 충격을 먹어, 내가 갈 길을 잃어버렸던 것이 틀림없다.

클라리스는 그걸 멋모르고 의심 없이 따라왔다 봉변을 본 것일 뿐이고 말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건장한 사내놈들을 열댓 명이나 선별했다.

전부 믿음직한 녀석들만 뽑았지.

모두가 마을 밖으로 혼자서 나갈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던 모양이다.

나는 어제와 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정면 돌파를 노렸다.

다음에는 산개해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빙 둘러 가보려고도 했다.

심지어는 이웃 마을이 아니라 그저 반대쪽 숲을 가로질러 나가는 것을 시도했다.

그러나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우리는 언제나 한 곳으로 다시 집결해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해가 질 때까지 그것을 반복했지만··· 변화는 없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천 걸음··· 어느 쪽으로 가도 더는 나갈 수가 없는 건가?’

이렇게 되니 황당함을 넘어서 무섭기 까지 하다.

당연히 모두가 공포에 질렸다.

마을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정신이 또렷하고 허우대도 멀쩡한 놈들이 전부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렸다.

“비, 빅터 형님. 이건 대체?”

“아무리 해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니···.”

이제 인정해야만 했다.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숲의 마력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만 것이다.

거기다···.

‘···내가 어제 달아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바람에 날려갔을 린 없다.

단단한 가지에 잘 묶어두었으니, 절대로 풀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경단 녀석들을 시켜서 색이 있는 천으로 지나온 길을 표시하도록 했다.

허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알아낸 건 더욱 경악스런 사실이었다.

경계가 점점 좁혀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가 활보할 수 있는 숲의 영역은 줄어만 갔다.

틀림없이 뭔가가 우리를 죄여오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