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의 장(1)
1.
일찍 마을을 나서 산을 오르다 보면, 좋던 싫던 마주치는 이들에게 소문을 접하게 된다.
오늘도 아침부터 외간 여자들이 소곤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상류에서 사체가 떠내려 왔다.
이번에는 강가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그네스가 혼절했대요.”
“그럴 만하지. 딸이 그런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참담했어. 그 어여쁘던 아가씨가 물고기한테 뜯어 먹히고 퉁퉁 불어서 꼴이 엉망이었지.”
“아이들이 죽은 게 이번이 세 번째죠? 대체 왜 이런 일이 자꾸만···.”
지난주, 미장이 월터네의 장남인 안소니가 언덕에서 발을 헛디뎌 머리가 깨졌다.
나흘 전에는 오웬이라는 이름의 다섯 살 난 남자애가 원인 불명의 괴질에 목숨을 잃었지.
그리고 또 어제··· 불현 듯 산에서 미아가 되었던 아그네스의 막내딸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열린 배를 통해 내장이 쓸려나가고, 턱 위의 두상이 사라진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범인은 산짐승들인가?
부디 그러길 빈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 외엔 달리 생각할 수 있는게 없으니.’
물에 불어서 뭉개진 모습은 납득할 수 있다.
제 아무리 생전 아름다움을 뽐내던 소녀라 할지라도, 익사체 특유의 썩어 문드러진 흉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집요하게 얼굴만 노리고 뜯어 먹힌 흔적이 있지만 말이다.
굶주린 것들에게 있어선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을 그 자그마한 몸에, 어째서 들개의 이빨 자국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 이걸 설명하지 못하는 건 단지 내가 무지하기 때문이다.
십 수 년 넘게 산을 오고가며 몇 번이나 마을 사람들을 위해 사냥을 해온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가 어떻게든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벌어진 결과일 뿐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그네스의 딸이 맞이한 최후는 불행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어쩔 수 없다.
명백한 비극이지만 그렇다고 돌이킬 수는 없다.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바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분수를 넘어선 일이다.
적어도 나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다.
‘잘 듣거라, 빅터. 세상 모든 일은 일어날 법하니까 일어나는 것이다. 그게 이치란 거지. 그러니 산에서 경험한 건 전부 경건하게 받아들여야한다.’
때론 겨울잠을 자지 않는 곰도 있다.
배가 곯은 것도 아님에도 별 다른 의미 없이 마을 어귀까지 내려오는 멧돼지도 존재한다.
사람을 겁내지 않아서 길들일 수 있는 늑대의 이야기는 썩 흔하다.
나는 안다.
제아무리 신묘한 일이라도, 그 전말을 들여다보면 어떻게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번도 마찬가지겠지.
틀림없다고 확신하다.
나에게 있어 이치와 섭리란, 이웃마을의 주교가 가진 독실한 신앙 이상의 믿음이기에.
그러나, 이런 나조차도 가끔씩 흔들릴 때가 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무언가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하게 되면 드물게 혼란에 빠진다.
바로 지금처럼···.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괴상망측한 광경에 직면하면 말이다.
‘···뭘 먹고 있는 건가?’
건너편 개울, 몸집이 큰 사슴 한 마리가 서성인다.
놈은 입가를 연신 우물거리며, 강가에 탁하고 끈적이는 뭔가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처음엔 산딸기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과육이 시뻘건 열매라도 하나 씹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바닥에 떨어지는 검붉은 핏덩이를 보고나서야 나는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한 동안은 벙 찐 얼굴로 손아귀의 쇠뇌를 들어 올릴 생각조차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풀이나 건초 따위를 먹어야할 짐승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탐하고 있었기에···.
그랬다.
그것은 섬뜩하게도,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 토끼의 몸통을 발굽으로 뭉갠 채 머리부터 뜯어먹고 있었다.
“···읍.”
곤두선 토끼의 흰털에 삐져나온 내장을 통해 진홍색 물방울이 맺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비위 좋은 사냥꾼인 나조차도 역함이 몰려왔다.
가죽이 뒤집힌 것이 끔찍해서가 아니야, 고기를 처먹는 초식동물의 모습에서 말로는 형용 못할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만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놈의 주의를 끌었다.
기이할 정도로 새빨간 눈동자··· 그 시선이 나를 향하자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기를 든 사람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음에도 놈은 달아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진득한 살점이 붙은 아가리를 크게 벌리면서 내 쪽으로 뛰어드는 게 아닌가?
사슴의 뿔이 위험한 각도로 나를 들이받으려 한다.
독기가 찬 눈동자에 동요한 내 얼굴이 비춰졌다.
나는 반쯤 냉정을 잃고 급히 손가락을 놀렸다.
다행히 운이 좋았다.
거의 조준을 하지 않았음에도, 활대를 타고 날아간 화살이 놈의 이마 정중앙에 박혔다.
“헉, 허억···.”
가까스로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놈은 개울에 대가리를 반쯤 담그고 있었다.
이제 녀석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뒷발을 경련하는 것뿐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사슴을 잡아 기뻐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오싹한 기분에 뒤끝이 좋지 않았다.
모처럼 까다로운 마누라에게 으스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음에도, 그 이상으로 불안감이 앞선다.
어릴 적부터 산을 타왔지만, 사냥감에게 이런 꺼림칙함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사슴의 탈을 쓴 무언가···.
빌어먹을, 반신이 마비되었으면서도 놈은 여전히 충혈 된 눈깔이 적의를 품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무슨 이변인가?
대체 이 산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게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 산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서넛 번 이상 경험하고 있었기에.
철새가 이삭대신 묘지를 파헤치고, 들개가 자신보다 덩치가 몇 배나 큰 말을 공격한다.
그 뿐만이 아니지.
근래 들어 마을을 비롯해 사방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일주일 사이 아이들이 셋이나 죽어 나간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신에 약한 늙은이들은 가당찮게도 이를 저주라고 읊조렸지.
비교적 젊은 자경단의 청년들도 입 밖으론 내뱉지 않지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해보였다.
‘···갑자기 해가 사라졌군.’
산등성이 너머에서 비를 머금은 구름떼가 몰려온다.
하늘에 암막이 드리워지더니 순식간에 햇빛을 가린다.
이 숲은 대낮이어도 고목들의 잎사귀 들이 짙은 그늘을 만들지.
산에 익숙한 나라해도 해가 자취를 감추면 길을 찾는 게 쉽지 않다.
최악의 경우, 사슴의 피 냄새에 이끌려 불청객이 찾아올 수도 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수풀에서 늑대 무리라도 만난다면 그걸로 끝장이다.
찝찝한 기분이 남았지만 당장은 움직이는 편이 현명하다.
어차피 이 앞의 언덕만 넘어가면 그 녀석의 집이 있으니까.
바로 이 모든 기이한 현상을 내가 납득갈 수 있도록 설명해줄 사람이···.
‘그래, 애초에 내가 오늘 집을 나선 것도 녀석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툭, 어깨에 걸친 망토에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주변 공기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
머잖아 비가 쏟아질 지도 모르겠군.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