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란국연가-3화 (3/16)

三章. 덧없는 소망

와그작, 뼈를 부수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요란하게 울렸다. 질퍽질퍽한 살덩어리를 입 안에 욱여넣던 사내는 문득 인상을 찡그렸다.

비리다.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 동안 먹어온 고기가 왜인지 쓰고 비리게 느껴졌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사내는 움켜쥔 것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채 반도 먹지 않은 것이 철푸덕 소리를 내며 피 웅덩이 위에 스러진다. 배는 조금도 차지 않았지만 어차피 이걸 남김없이 다 먹어 치운다고 해도 차지 않는다.

세상에 난 이래, 이 허기가 가신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이제 어쩔 셈이냐.”

찐득찐득한 손을 옷자락에 쓱쓱 닦아내는데 못으로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사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등불도 켜지 않아 어두침침한 방에,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깡마른 사내와 두꺼비처럼 살이 뒤룩뒤룩 찐 사내가 꿇어앉아 두려움에 잠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어쩔 셈…?”

마치 말에 서툰 아이처럼 어눌한 음성이었다. 장작처럼 마른 사내가 뼈다귀 같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답한다.

“우리는 이제 공주에게 접근할 수 없다. 너라고 해도 그자에게는 범접할 수 없을 터. 이대로 내버려 둘 거냐.”

“…수백의 요마가 물러날 정도로 드센 기세였다. 그라고 해서 어찌할 방도가 있겠나.”

잠자코 있는 그를 대신해, 두꺼비같이 생긴 자가 입을 열었다. 사내는 말없이 치렁치렁한 소매로 입가를 쓱 닦기만 하였다. 코끝을 자극하는 비릿한 냄새가 어째서인지 역하다. 떨쳐내기 위해 얼굴을 몇 번 더 쓱쓱 문질렀지만 소매 역시 끈적끈적하게 젖어있었던 터라 더더욱 더러워지기만 한다. 온통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사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저거, 눈에 띄지 않게 치워 둬라. 냄새 지독해.”

그러고는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긴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바닥에 피가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그는 바닥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긴 옷자락을 질질 끌며 문 쪽을 향해 나아갔다.

“이봐… 이제 뭘 할 셈이냐니까.”

멀어지는 등에 대고 빼빼 마른 사내가 불만스레 꿍얼거린다. 그는 우뚝 멈춰 서서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사내의 금색 눈동자가 기묘한 빛으로 일렁거렸다.

“지켜본다. 그리고….”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격렬한 기색이 어렸다.

“…사냥을 계속한다.”

그러고는 방을 나선다. 그 명을 따르듯이 꿇어 앉아 있던 두 사내도 몸을 일으켰다. 소리 없이 이어지는 발소리. 달빛에 늘어진 그들의 그림자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것처럼 크고 짙었다.

***

군병들이 역적무리를 조사한답시고 이집 저집을 들쑤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주막 안에는 어설프게 그린 괴한들의 얼굴이 빼곡하게 붙었고, 심지어는 장성한 사내 다섯 이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금한다는 어처구니없는 포고령까지 내려왔다. 그 탓에 화재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거리에 나온 목수와 일꾼들은 군병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감히 왕에게 반역한 무리가 누구냐 하는 일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궁궐 일이 어찌 돌아가든 저들과는 먼 이야기. 그보다는 영웅 자현의 무용담이 훨씬 재미났다. 장안에는 그의 활약기만이 떠들썩했다.

그 많던 역적무리가 자현이 무서워 꽁지를 빼고 달아났다더라. 불 속으로 몸을 사리지 않고 뛰어들어 백성들을 도왔더라. 그 꺼림칙한 귀신 공주를 처로 들이고도 여태 아무 일 없더라. 도리어 가세가 흥하기만 하니 자현이야말로 진정 천기를 타고난 이가 아닌가.

그리 떠들어대는 기세가 어찌나 활기찬지 그 흉사가 귀신 공주 때문이 아니냐 하는 숙덕임이 푹 꺾였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 자현은 아주 살판이 제대로 났다. 매일매일 젊은 무인들이 우르르 집 앞에 찾아와 주군으로 모시게 해 주십쇼 하고 간청해 온 것도 모자라, 장수가 되어 천하에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이들, 자식을 무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 연줄을 만들고 싶어 선물을 싸들고 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이렇듯 집안의 가세가 하루가 다르게 기세를 뻗쳐가더니 며칠 만에 먼지만 쌓여 있던 숙소에는 문하생들이, 공터에는 단련을 하는 무인들이 빼곡히 들어찼고, 곳간에는 그들이 가져온 쌀가마며 비단이 켜켜이 쌓여갔다.

이 와중에 제집 한구석에 처박아둔 아내 생각이 날 턱이 있나. 뒤채를 내어 주고 시비 한 명을 붙여준 뒤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아 나중에는 제가 귀신 공주와 혼례를 치렀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만약 비령이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면 계속 잊고 있었을 것이다.

“괜찮은 이야기가 아닌가?”

친우의 능구렁이 같은 얼굴을 돌아보며 자현은 미간을 모았다. 가솔이 배로 늘어 정신없이 바쁜 와중이었다. 수하들은 낯설기 그지없는 지도관 노릇을 하느라 매일 앓는 소리를 했고, 그는 팔자에도 없는 문관 역할을 하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식구가 늘어나면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늘어나게 마련. 챙겨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구 밀려들어 오는 재산을 관리하는 일이며, 땅을 굴리는 일이며, 들어오는 금전과 나가는 금전의 계산 등등… 기록할 일이 태산이니, 천성 무관인 자현은 매일 붓대를 쥐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악우가 달가울 리 없었다.

“부관이란 자가 일은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혼자 유유자적하더니… 느닷없이 나타나 무슨 성가신 일을 말하는 거냐.”

“자네를 위해서 발이 닳도록 뛰어다닌 이에게,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자현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기록을 하기 위해 책자를 펼쳤다. 비령이 우는소리를 하며 그 옆에 바짝 달라붙는다.

“그러지 말고 귀담아들어 보게. 이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야.”

“누누이 말했지만 난 정치판에는 관심 없어. 자네 속셈에 날 끌어들이려는 생각은 말게.”

“속셈이라니… 난 뭐 정치에 뜻이 있는 줄 아나? 이게 다 자네 때문이 아닌가! 왕과 아예 척을 두었으니, 수를 내야지.”

“수를 내도 내가 낸다. 뒷공작에는 관심 없어.”

“자네가 대체 무슨 수를 낸다는 건가?”

“군대를 만들어 궁궐을 한바탕 뒤집어엎으면 될 일 아니냐. 일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 것 같다만.”

역모에 해당하는 것을 자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싸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노려보던 비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네는 가륜 왕을 너무 만만히 보는구먼. 일전에 그런 흉사가 있었는데 두 눈 뜨고 또 당하겠는가? 아직 배후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일세. 궁궐은 군기가 아주 삼엄하게 잡혀 있다고.”

“그럼 뭐하나. 아직도 배후를 밝히지 못했는데. 그 많은 무리가 궁성을 습격했는데 꼬리도 잡지 못한 무능한 군병들, 천이 됐든 만이 됐든 문제 될 것 없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란 말일세.”

비령은 목소리를 차분히 내리깔았다. 농담 따먹기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껄렁껄렁 말하던 자현은 입매를 일자로 굳혔다. 이놈이 사람을 이리저리 갖고 놀기 좋아하는 능구렁이기는 하나 허투루 입을 놀리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귀담아듣겠다는 뜻으로 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바로 세우자 비령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미 자네와 가륜 왕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네. 자네가 설령 그에게 대적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자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가 세력을 키워 나가는 것을 두고 볼 군주가 어디 있던가? 자네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다른 귀족들은? 그들이 잠자코 두고 보겠는가.”

“…두고 보지 않으면?”

위험스레 목소리를 내리깔며 묻자 비령이 쐐기를 박듯 말한다.

“방해하려 들 걸세. 그들이 쓸 수 있는 수는 자네의 생각보다는 많아.”

“예를 들어? 어디 한번 말해 봐라.”

“우선 말일세, 권세 있는 누군가가 상인들에게 압력을 행사해 거래를 끊게 만들 수도 있지. 상인들과 권력자들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자호 가문 하나쯤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야. 그리 되면 자네는 저 많은 이들을 어찌 입히고 먹일 셈인가. 앞으로 그 수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을 텐데.”

“…….”

“사람이 늘어 덩치만 커진다고 힘이 생기는 게 아닐세. 지속적으로 그 권세를 유지하는 게 가능해야 세도가라 할 수 있지.”

“또?”

자현이 가슴께에 팔짱을 끼며 삐딱하게 물었다.

“그들이 또 무슨 작당을 할 수 있나?”

비령이 청산유수로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정치적으로 모략을 꾸밀 수도 있지. 나라면 반드시 이 방법을 쓸 걸세. 자호가 소속의 무인들이 늘어나는 것을 달갑게 여길 이는 하나도 없어. 자현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들이 작당을 해 무언가 꼬투리를 잡는다면… 그래, 예를 들어 역심을 품고 모반을 꾸미고 있다 몰아붙이기라도 한다면 가륜 왕은 냉큼 받겠지. 자네 하나 누명 씌워 좌천시키거나 유배 보내는 것쯤 그들에겐 일도 아닐세.”

이놈 머리 돌아가는 게 보통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가. 자현은 눈가를 찡그렸다.

“꽤나 그럴싸하게 들리나 네 생각이 너무 앞서 나간 것이 아니냐.”

“정치판의 속성에 대해서는 자네보다는 내가 더 잘 알고 있네. 지금 당장이야 민심이 자네에게 있는 데다가, 왕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비판하는 소리가 크니 어쩔 수 없이 두고 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야. 자네가 왕에게 이를 가는 것만큼 왕은 자네를 경계하고 있네. 제게 적의를 품고 있는 게 분명한 이가 힘을 키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어. 권력을 쥔 사람일수록 그 두려움은 더욱 극심하지. 자네도 대비를 해야 하네.”

거기까지 말한 비령이 씩, 느물느물한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 왕에게 납작 엎드려 빌면 이런 성가신 일들은 피할 수 있네만. 손과 발이 되어 개처럼 구르기를 자청한다면 가륜 왕도 자네를 찍어 누르려 하지는 않을 걸세.”

“…대답할 가치도 없군.”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군.”

비령이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서탁 위에 펼쳤다. 자현은 찌푸린 눈으로 그걸 내려다보았다. 명부였다.

“지방의 유력자, 대상인, 명망 있는 퇴직 무관, 현직 관리들도 끼어 있네. 자네가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이들이지.”

“흥. 내가 말만 하면 이들이 따른다더냐. 왕의 눈 밖에 날 것이 뻔한데 어느 누가 나를 편들겠나.”

“그래서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소루 공주를 이용하라고.”

비령의 미소가 진득하니 짙어졌다.

“이 명부는 말일세, 지인이나 피붙이 혹은 저 자신의 건강에 문제가 있는 이들로만 꾸려졌네. 사고로 불구가 된 아들이 있는 이. 아내가 병에 걸린 이. 딸이 원인 불명의 열병을 앓고 있는 이. 불치병에 걸린 이….”

“…….”

“이 세상에서 생명보다 중한 것이 어디 있던가. 온전한 육신만큼 간절한 것이 없지. 그것을 준다는데 무엇을 못 할까. 자네가 개처럼 구르라고 해도 구를 걸세.”

비령이 야담꾼이라도 된 듯 과장된 어투로 은밀히 말하였다. 그 얼굴이 간계를 꾸미는 모략꾼 못지않게 교활해 뵌다. 자현은 기가 차서 고개를 저었다.

“…네놈, 그 계집을 안쓰럽게 여기지 않았던가?”

“안쓰럽지. 하지만 안쓰러운 것은 안쓰러운 것이고 실리는 실리가 아닌가.”

뻔뻔스레 하는 말에 자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불쌍하다 동정하면서도 필요하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려 드는 게 이놈의 무서운 점이었다. 겉과 속이 똑같은 자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면모였다.

“자네도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 곁에 두기로 한 거잖아. 대체 무얼 꺼리는 건가. 혹…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그가 바로 답하지 않자 비령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묻는다. 자현은 코웃음을 쳤다.

“그날 이후 얼굴 한 번 보지 않았다. 정은 무슨.”

퉁명스레 말하던 자현은 문득 엉엉 울며 매달리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멈칫했다. 물기를 머금은 그 투명한 눈동자가 떠오르자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진다. 아이처럼 웃던 얼굴을 떠올리며 머뭇거리기를 잠시 자현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쓸데없는 감정이다. 저 스스로 뭐든 하겠다 하지 않았나. 이놈 말대로 거리낄 이유가 없다.’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귀신 들린 계집 끼고 사는 자현이라 빈정거리는 소리를 감수하고 있질 않던가. 피 몇 방울 내어주는 것 정도는 싼값이지. 냉소적으로 입술을 비틀던 자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어찌 되든 손해 볼 일은 없겠군.”

“그럼 결정 났군!”

“단, 그 계집의 피가 어디까지 효력이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으니 너무 주변에 바람 넣지는 말아라.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니, 도리어 화가 될 수 있다.”

비령이 염려 말라는 듯 가슴께를 탕탕 두드렸다.

“걱정 말게나.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하긴, 네놈 잔 술수를 당해낼 이가 어디 있겠나.”

“과찬일세.”

비령이 낄낄낄 경박한 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들에게 기별을 넣을 테니 공주에게 미리 언질이라도 주게. 혼례가 있은 지 며칠이 지났는데, 얼굴 한 번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억지로 한 혼례다.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러지 말고 잘 대해 주게.”

이런 목록까지 써온 놈이 뻔뻔하게 잘도 말한다. 코웃음을 치는데, 비령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 곁에 있으면 귀신이 괴롭히지 않는다 하여 곁에 머물기를 청한 게 아닌가. 만약에 귀신보다도 자네가 싫어진다면 달리 마음먹을 수도 있지.”

달리 마음먹으면 뭐 제가 아쉬울 거라도 있단 말인가.

짜증을 내려던 자현은 곧 입을 다물었다. 손에 잡힌 기나긴 목록이 눈에 들어온다. 대충 훑어본 이름들 중에는 자현이 익히 알고 있는 명망가의 대귀족도 있었다.

이들이 제 편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만큼 아둔하지 않았다. 묘하게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숨기려 자현은 부러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런 얄팍한 속을 알아채지 못할 비령이 아니다.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자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잘 구슬리란 말일세. 소루 공주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쓸모가 있네.”

“…….”

“정말로 자네에게 천운이 따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야.”

친우의 뱀 같은 미소를 조용히 바라보던 자현은 곧 한숨을 내쉬었다.

“천운이 될지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그 계집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쓸모가 있다는 거 하난 확실하였다.

***

“마님, 소셋물을 올리겠습니다.”

장지문이 열리고 가까이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뜰에 앉아 햇볕을 쬐던 소루는 그리로 고개를 돌렸다. 몸종으로 붙여진 시비 염이가 출렁이는 물그릇을 낑낑거리며 가져와 바로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손 위에 보들보들하고 얇은 천을 쥐여 준다.

소루는 고맙다 하고는 그 무명천을 물에 적셔 흙먼지가 묻은 손발을 깨끗이 씻었다. 햇볕 냄새와 물 냄새가 기분 좋다. 코를 킁킁거리며 그 달달한 냄새를 폐부 한껏 들이켜다가 옷매무새를 끌러 땀에 젖은 피부도 닦아냈다. 바람이 젖은 피부에 와 닿는 선연한 감촉에 등골이 다 서늘해진다.

신경이 유리조각처럼 맑아지는 듯해 참으로 기분 좋았다. 소루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그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염이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묻는다.

“마님께서는… 괴롭지 않으십니까?”

“괴롭다니, 무엇이?”

“…그것이….”

소녀가 우물쭈물하며 쉽게 말을 잇지 못한다. 소루는 쓴웃음을 지었다. 시집온 첫날부터 소박맞은 뒷방 마님, 찾는 이도 하나 없고 모시는 이도 저 하나밖에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제 처지가 그 눈에 딱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여종은 저를 측은해 하는 기색을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소루는 젖은 천을 한편에 내려놓으며 무던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평안하다.”

“…외롭지는 않으십니까?”

네가 있지 않느냐고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머쓱하고 낯이 뜨거워진 까닭이다. 이 소녀가 알까. 누군가가 곁에서 말을 걸어주고 마음을 써 준다는 것이 제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처음에는 두려워 머뭇머뭇하던 염이는 언제부터인가 저를 편안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재밌는 얘기가 있다며 곁에서 재잘거려주기도 하고, 간식 같은 것을 남몰래 챙겨 주기도 하고, 굳이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이처럼 세세하게 신경을 써 준다. 소루에게는 이 모든 게 꿈같은 일이었다.

“나는 정말로… 즐겁다.”

어물어물 내뱉은 말에, 하는 거라곤 마루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뒤뜰의 무성한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들뿐인데 뭐가 즐거우시냐며 염이가 구시렁거린다.

소루는 웃기만 했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고요함, 이 적막감이 얼마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지. 오감이 평화롭다. 느껴지는 것은 피부에 와 닿는 선선한 바람, 쌉싸래한 풀냄새, 물기를 머금은 새벽녘의 찬 공기, 보드라운 흙의 감촉,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와 새소리….

이곳에는 밤낮없이 괴롭히는 귀신들의 눈알들도 없고, 그들의 떠들어대는 소리도 없다. 들리는 것이라곤 제 또래 시비의 수다 말뿐. 살면서 이러한 평화를 누리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주인님을… 원망할 법도 한데….”

그런 제 마음을 알 리 없는 염이가 불퉁거리며 말한다. 소루는 손을 내저었다.

“원망하다니, 당치도 않다. 너도 그가 나를 원치 않았음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나를 받아들여 주었다. 몸종을 붙여 주기까지 했어. 나는 그에게 어찌 감사해야 좋을지 모른다.”

“하, 하지만… 마님은 처가 아니십니까!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턱없이 모자랍니다. 눈도 편치 않으신 분께 시중드는 이가 저 하나뿐이라니…. 거기에 이처럼 초라한 곳에 두고는 고개 한 번 내밀지도 않으시고….”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이 어디 있느냐.”

애초에 아내 취급하지 않아도 좋다, 있는 듯 없는 듯 살겠다 한 것은 자신이었다. 안사람으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들 리가 없었다.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살던 저에게 이런 평화를 누리게 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제게 은인이었다. 아니, 은인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처음 그를 대면했을 때를 떠올리며 소루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혼례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순간 사방이 밝아져서 얼마나 어리둥절했던가. 어안이 벙벙하여 서 있는 저를 시비들이 그 빛의 출처로 이끌어 갔다.

마치 불길과도 같은 기세를 내뿜는 사내. 그 활활 타는 듯한 그 열기에 제 주위에 드글드글하던 귀신들이 일시에 꽁지를 빼고 달아나 버렸다.

그 빛은 제가 갇혀 있던 심연마저도 거침없이 밝혀냈다. 그 기세가 마치 오래전에 보았던 태양과도 같아서 소루는 눈부심마저 느끼었다.

그리고 가슴 안에는 생경한 격정이 일었다. 이 사람의 곁에서라면 나도 사람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제 곁을 맴도는 귀신들이 누굴 해칠까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원망에 밤잠을 설치지 않고, 요마에게 시달리지도 않는 삶. 그런 꿈만 같은 삶은 하늘을 향해 바라여 본 적도 없었다. 내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적일지도 모른다. 마음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이 무섭게 타올랐다.

어떻게든 이 사람 곁에 머물러야 한다. 이 밝은 세계 안에 머무르고 싶어.

그런 절박함에 휩싸여 아이처럼 매달리는 저를, 그 사내는 받아들여 주었다.

“그는 나를 돌봐 줘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도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내게 하염없이 고마운 이야.”

“그, 그래도 혼례의 법도가 그렇지 않은 것인데…!”

거기까지 말한 염이는 제가 너무 주제넘게 물고 늘어진다고 느끼었는지 곧 입을 다물었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소녀가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꿍얼거린다.

“마님의 마음이 편안하시다면 제가 불평하는 것도 우습지요.”

“…….”

“저는… 이렇게 좋은 분이신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무, 물론 소문만 들었을 때는 저도 마님이 조금 무서웠습니다만….”

조금이라니. 소녀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벌벌 떨었었다. 그때를 기억하지도 못하는지 염이는 거리낌 없이 말했다.

“이렇게… 좋은 분이신지 몰라 그랬습니다. 소녀는 마님께서 좀 더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말해 주어 고맙구나.”

기쁘기도 하고 낯부끄럽기도 하여 소루는 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처럼 불길한 것을 두고 좋은 사람이라 하는 여종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제 모습이 재밌었는지 그녀가 살짝 소리를 내어 웃었다.

“아무튼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구해오겠습니다.”

“그럼…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요청해도 되겠느냐?”

“그럼요! 편히 말씀하세요.”

소녀가 기쁘게 답한다. 소루는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꽃씨를 좀 얻어다오.”

“…꽃씨요?”

“품종은 무엇이든 상관없다. 네가 좋아하는 것으로 해도 되고… 뒤뜰에 뿌릴 생각이다. 귀한 것이 아니어도 좋으니….”

볕이 드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소루는 며칠 동안 잡초를 뽑느라 다소 거칠어진 제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을 흐렸다. 무언가를 바라고 요청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 낯선 일이었다. 다른 이들을 잡아먹으며 살아온 제가 여기에서 뭔가를 더 원한다니…. 뻔뻔스럽고 염치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에 자연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희미했다.

“…바람결에 꽃향기를 맡아 보고 싶다.”

“제, 제가… 꼭 구해다 드릴게요.”

염이가 꽉 잠긴 음성으로 답한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던 소루는 곧 미소 지었다.

“고맙다.”

***

‘그 계집의 영험함을 시험해 볼 기회다.’

자현은, 멍청하게도 말 뒷발에 채여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어린 문하생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갓 열네 살이 된 그 풋내기는 매우 운이 나쁘게도 머리를 걷어채었다. 관자놀이 부근을 빗겨 맞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상태는 충분히 심각했다. 오늘 밤을 견딜 수 있으려나. 설령 산다 해도 정신이 온전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만큼이나 중한 자도 살려 낸다면 비령의 말대로 소루 공주는 세를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는 대기하고 선 시비에게 소루를 불러오라 명했다. 지목받은 계집이 흠칫거리며 굳어진다.

“…모셔오란 말을 못 들었나?”

“그, 금방 모셔오겠습니다.”

싸늘하게 읊조리자 그제야 사색이 되어 후다닥 방을 나선다. 자현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 계집이 제 곁에 있으면 귀신이 해할 일이 없다 호언장담을 하긴 했지만 꺼림칙한 마음이 어디 그리 쉽게 떨쳐지던가. 듣자하니 소루에게 붙여 준 어린 시비 하나 빼고는 그 누구도 뒤채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귀신 공주가 두렵고 찝찝한 것이겠지. 궁궐의 노비들도 줄줄이 달아났을 정도인데 어디 여기라고 다를까.

그 계집을 멀리 요양 보내려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귀신 공주가 자호가에 시집왔다 민가에서 쑥덕거릴 일도 걱정이었거니와, 노비나 일꾼들이 도망하지 못하도록 간수할 일도 성가셨던 것이다.

‘…사람들 눈앞에 내놓아 좋을 게 없겠지.’

사람들에게 귀신 공주의 존재를 상기시켜줄 필요는 없었다. 꺼림칙하다는 이유로 방문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길 수도 있는 일. 뻗어 나가는 가문의 기세가 주춤하게 놔둘 수는 없다.

하지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한 명의 시비만 두는 것도 적합하지 않았다. 감시를 위해서라도 입이 무거운 이들을 몇 명 더 붙여 줘야겠지. 어떤 이가 적합한가 머릿속으로 헤아리고 있는 사이, 시비가 돌아와 마님을 모셔왔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자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마님. 그리 불리고 있나.

“들라.”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고 시비가 한쪽으로 비켜섰다. 그 뒤에 서 있던 소루가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온다.

“…불렀느냐.”

그는 문가에 선 여자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수수하지만 깨끗한 옷차림에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 제법 시집온 여인의 태를 흉내 냈지만 어딘가 어설프고 풋내 나는 모양새였다.

혹, 그새 몇 년 더 어려지기라도 한 것인가. 조막만 한 얼굴이 꼭 열네댓 된 어린 소녀의 것처럼 앳되어 보인다. 제 처라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한껏 인상을 찌푸리던 자현은 시비에게 물러가라 명한 뒤, 소루의 팔을 잡아 소년의 앞으로 이끌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듯 움찔거리던 여자가 색색 가쁜 숨소리를 들었는지 멈칫한다. 그는 조심스레 그 손을 소년의 얼굴 위에 올려놓았다. 여자가 더듬더듬 상처 난 곳을 매만졌다.

“살릴 수 있겠나?”

“…머리를 다친 것인가.”

“그래.”

“…이렇게 큰 상처는 치유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여자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자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하면 어디까지 치료해 봤나?”

“어릴 적… 나를 키워 준 이가 다쳐오면… 입 안에 상처를 내어 핥아주는 정도로만…. 눈이 이렇게 되고 난 뒤로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으려 해서… 사실 많은 이를 고쳐본 것은 아니다.”

“그런 주제에 저도 쓸모 있다 잘도 떠들었구나.”

냉소적으로 말하자 여자의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제가 쓸모없다 내 집에서 나가라 할까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 표정에 꼭 자신이 어린 계집아이를 못살게 구는 망나니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언짢다.

“…살릴 수 있나 없나, 한번 시험이나 해보아라.”

그렇게 퉁명스레 말하고는 여자의 손을 쥐어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계집은 손마저도 조그마했다. 그 조막만 한 손에 비수를 쥐여 주자 여자가 어깨를 굳힌다. 그는 조금 강압적인 어투로 말했다.

“…필요할 것 같아 가져왔다. 입 안을 깨무는 것보다는 그걸 사용하는 게 편하겠지.”

“칼… 인가.”

“그래.”

비수를 어루만지던 여자가 곧 그 끝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날카로운 칼끝에 여린 살결이 두부처럼 쉽게 베인다.

핑글핑글, 새빨간 피가 손가락 끝에 꽃봉오리처럼 맺히자 여자가 그걸 확인이라도 하듯 매만져 보더니 다음 순간 상처를 더 길게 냈다. 검지를 따라 주욱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녀가 그걸 더듬더듬 소년의 입에 흘려 넣었다. 어딘지 모르게 섬뜩하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자현은 굳은 어조로 물었다.

“…효과가 있나?”

“호흡이 조금 편안해진 것 같다.”

그녀가 소년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울여 숨소리를 확인해 보더니 조금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확실히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헉헉거리던 숨소리가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소루는 조금 자신이 붙은 듯 더듬더듬 머리의 상처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피떡 진 검은 머리칼이 하얀 손가락에 흉측하게 휘감겼다.

하도 피를 많이 흘려 상처가 아물고 있는지 아닌지는 육안으로 잘 확인되지 않았으나 베갯잇을 적시는 혈액의 양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잠시 뒤 그녀가 피로 흠뻑 젖은 손을 머리칼 속에서 떼어냈다.

“다 아문 것 같다.”

“…벌써?”

“그래. 괜찮은 거 같아. 네 눈으로 확인해 봐라.”

그는 반신반의하며 침상 가까이 다가섰다. 확실히 창백하던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와 있었고 숨소리도 고르다. 고개를 수그려 상처를 살피니 찢어진 두피가 깨끗이 아물어 있다. 두개골도 온전하다. 처음부터 다친 적이 없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끔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실로 놀라운 효력이었다.

“…과연 귀신들이 탐낼 만하군.”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곁에 앉은 이의 어깨가 굳어진다. 빈정거리는 말로 들린 건가. 확실히 온전한 칭찬의 말은 아니었다. 신통하면서도 꺼림칙하다. 실로 기이하고 해괴하지 않은가. 피로 다 죽어가는 이를 깨끗이 고쳐 내다니.

‘이 계집, 대체… 정체가 무언가.’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으로 자현은 얼굴을 굳혔다. 께름칙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것을 눈치채었는지 여자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마치 부모에게 혼이 날까 봐 조마조마해 하는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그 애처로운 얼굴에 살살 구슬려 보라던 비령의 말이 떠올랐다.

‘…웃기지도 않는다.’

이 여자가 쓸모 있음은 분명하지만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지나칠 정도로 자기감정에 솔직한 자현은 제 이득을 위해 그런 감정을 숨기고 아닌 척 위선을 부리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를 내려다보길 잠시 그는 충동적으로 여자의 작은 머리통 위에 손을 올렸다. 매끈매끈하고 서늘한 머리칼 감촉이 꼭 질 좋은 비단 같았다. 그 낯선 감촉에 멈칫한 것도 잠시 자현은 손을 올려놓은 채 어색하게 말했다.

“잘하였다. 도움이 되었어.”

여자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움츠린다. 겁먹은 듯한 그 태도에 자현은 잠시 헤맸다. 사람을 구슬릴 재주 따위는 없었다.

이다음에는 뭘 어째야 하는 거지?

머뭇거리던 그는 곧 개에게라도 하듯 그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보았다. 거칠기까지 한 그 손길에 믿을 수 없게도 여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 내가 도움이 되었느냐.”

“…다 죽어 가던 이를 살려놓았다. 당연 도움이 되었지.”

“그렇구나…. 내가 도움이 되었어.”

대체 무엇이 그리 기쁜 것인지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그 표정에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져 그는 손을 떼어냈다.

“이만 되었다. 처소로 돌아가라. 손을 치료할 수 있게 약을 보내 주겠다.”

“…그래.”

그제야 아픔을 느낀 듯 여자가 손의 상처를 살핀다. 남의 상처를 그리도 잘 치료하면서 정작 제 상처는 어쩌질 못하는 모양이다. 무언가 상처를 감쌀 것이 없을까 무의식중에 탁상 위를 살피던 자현은 곧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찌르라며 칼까지 쥐여 줘 놓고는 그 상처를 걱정하는 척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힐끔, 아직도 붉은 피를 토해 내고 있는 자그만 손을 내려다보던 자현은 곧 언짢은 얼굴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나섰다.

어째서인지 신경이 곤두선다. 뭔가를 떨치듯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

낮에 있었던 일을 듣고 비령은 반색을 했다. 재빠른 놈답게 그는 이미 명단 제일 위에 자리한 대상인 주호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고 있는 중이었다.

주호는 비록 양민 신분이나 가진 재물이 세도가를 후려치고도 남는다는 희란국 제일가는 상인이었다. 이자를 끌어들인다면 적어도 돈 걱정은 없을 것이다 하며 비령이 그를 첫 번째로 지목했다.

“주호는 열 살배기 딸이 원인 불명의 열병에 걸려 곤혹을 겪고 있네. 사방팔방으로 효험이 좋다는 약초, 영약 모두 찾아 써 봤지만 차도가 없다더군. 무술인을 불러 굿도 해보고, 명의를 불러 진찰도 해봤지만, 상태가 점점 심각해져만 가는 모양이야.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걸세.”

“…소루의 피가 질병에도 효험이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귀신도 탐을 낼 만한 영약이라지 않던가. 분명 효과가 있을 거야. 혹 없다고 해도 크게 피해가 가진 않을 걸세. 누구랑 달리 머리가 좋은 인간이라 분풀이로 귀족과 척을 지려 하진 않을 테니.”

“…그 누구란 게 누굴 말하는 것이냐.”

“뉘겠나?”

비령이 부채를 펼쳐 들며 능청스레 웃어 재낀다.

자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살벌한 눈초리에 비령이 바로 미소를 거둔다.

“험험, 아무튼 자호가에 방문해 달라는 내용의 전보 하나만 써 주게. 내 직접 건네줄 터이니.”

“…지금 당장?”

“미적거릴 필요 있나.”

소루의 손에 난 상처가 떠올라 자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 아문 뒤에 부르는 게 낫지 않겠나 그리 말하려다 입을 다문다. 스스로의 생각에 어처구니가 없어져 실소가 나왔다. 어차피 또다시 칼로 베어라 할 거 낫기를 기다리자 하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그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한 상처라고.

“무어라 쓰면 되지?”

“흠….”

탁상 위에 종이를 펼치며 묻자, 비령이 생각하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일단은… 효험이 좋은 영약이 있으니 필요하면 자호가를 방문해 달라고만 적게.”

“무엇으로 치료하는지 밝히지 않을 셈인가?”

“그편이 여러모로 좋을 듯하네만….”

늘 척척 이러는 게 좋겠네, 저러는 게 좋겠네 잘도 떠드는 놈이 답지 않게 팔짱을 끼고서 한참을 어물거린다. 자현은 붓을 든 채 인상을 찡그렸다. 어쩌자는 건가 하고 답을 재촉하자, 미간을 모은 채 허공만 바라보던 비령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숨기기 어려울 걸세. 한두 명도 아니고 꽤 많은 이들을 치료할 예정인데 섣부르게 어느 짐승의 피라고 속일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차라리 비밀을 보장받고 사실대로 보여주는 것이 낫겠지.”

“…사람의 피를 먹는다는 것에 저항감을 품는 이도 있을 거다.”

“그래도 먹을 걸세. 죽게 생겼는데 인육인들 못 먹을까.”

비령은 흉한 소리를 쾌활하게 지껄였다.

“그리고 그 저항감이 결속력을 더 단단하게 해줄 테지. 묘하게도 사람 간의 관계는 떳떳치 못한 일을 공모했을 때 더 긴밀하여지거든.”

“…떳떳치 못한 일이란 자각은 있군.”

“어디에 큰소리로 떠벌릴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는가. 찝찝하고 개운치 못한 일이지. 하지만 얻게 될 이익에 비하면 사소한 감정일세. 소루 공주에게 작은 생채기 하나를 냄으로써 다른 이들은 목숨을 구하고, 우리는 막대한 실익을 얻게 되지 않나.”

비령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물론, 소루 공주의 능력이 퍼졌다간 소동이 일어날지 모를 일이니 입단속은 단단히 할 걸세.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말이지.”

그 여러 방법이라는 게 얼마나 비열하고 지저분한 것일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약점을 캐어내어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이놈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던 것이다. 입꼬리를 씰룩거리던 자현은 더 캐묻는 것을 관두고는 붓에 먹물을 듬뿍 묻혀 간결하게 두어 문장을 써내었다. 그걸 건네받으며 비령이 만족스레 웃는다.

“성미가 급한 양반이니 내일 당장이라도 뛰쳐 올 걸세.”

그러고는 냉큼 방을 나섰다. 자현은 그 뒷모습을 노려보다 다시 장부를 펼쳐 들었다. 여자의 아이 같은 무구한 미소가 머릿속을 잠깐 스치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그는 바로 해야 할 일에 몰두했다.

***

주호는 그다음 날 오전, 해가 뜨기가 무섭게 자호가의 방문을 두드렸다. 호화로운 가마에 금지옥엽 외동딸을 싣고 찾아온 그 사내는 이른 시간에 찾아와 죄송하다며 납작 고개를 조아렸다.

언짢은 얼굴을 하던 자현은 옆구리를 찌르는 비령의 재촉에 못 이겨 괜찮다 입에 발린 소리를 지껄였다. 그러자 비령이 마치 제가 집주인이라도 된 양 앞으로 나와 그를 인도한다.

“자자, 오느라 수고 많았네. 이쪽으로 오시게나.”

자현은 기가 막힌 얼굴로 그 꼴을 바라보았다. 저놈의 나댐이 가면 갈수록이군. 이를 갈며 성큼 그 뒤를 쫓았다.

그들을 안내한 곳은 조용한 곳을 좋아하는 손님을 위해 마련된 별채로, 뒤채와 가깝고 거의 비어 있어 일꾼들 발걸음이 드문 곳이었다. 비령이 이리로 모셔라 명하자, 노비들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요란한 가마를 내려놓고 그 안에서 비단 장포에 감싸인 조그만 소녀를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열 살배기라더니 꼭 인형처럼 자그마한 소녀였다.

“지난밤 상태가 더 나빠졌습니다. 새벽에라도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만한 폐를 끼칠 순 없어 아침까지 애타하며 기다리다 온 것입니다.”

주호가 색색거리며 앓는 제 딸을 애달프게 바라보며 말했다. 자현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노비들에게 손짓했다.

“저 방으로 모셔라.”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잘 정리해 놓은 침상에 소녀를 조심스레 뉘인다. 그 뒤를 따라간 자현은 대기하고 선 시비에게 차를 내오라 지시했다. 주호가 냉큼 손을 휘젓는다.

“차는 되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잠시 이리 앉게나. 얼굴이 말이 아니구만. 밤새 어지간히도 맘을 졸인 모양이야.”

비령이 딱하다는 듯 내뱉었다. 사내가 시무룩한 어조로 말한다.

“자식 일에 맘 졸이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자리에 앉아라. 먼저 할 이야기가 있지 않던가.”

딸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던 주호가 재촉에 못 이겨 의자를 꺼내 앉았다. 축 처진 어깨가 꼭 노인의 것처럼 왜소하다. 정말로 밤을 꼴딱 새운 모양이었다. 주호가 성급하게 본론을 꺼내었다.

“이 집안에 거의 다 죽어가는 이도 살리는 영약이 있다 들었습니다. 직접 와야만 한다는 말에 예까지 허겁지겁 발걸음을 한 것입니다. 천금 만금이라도 드리겠으니, 부디 그 약을 제게 파십시오.”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다.”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자현은 힐끔 비령을 돌아보았다. 놈이 잘 좀 해보라는 양 정신 사납게 눈짓을 해댄다.

남의 구슬리는 말재주 따위가 있었으면 제가 이 꼴이 되었겠나.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자현은 제 본래 성미대로 툭 까놓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대에게 원하는 건 돈이 아니야.”

“그럼…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상인이라면 정보에 능할 터. 아닌 척 숨기는 것도 우스울 테니 솔직하게 털어 놓지. 나는 왕에게 아주 미운털이 콕 박힌 처지다. 그 밖에도 적들이 무수하지. 지금이야 가문이 흥하고 있다지만… 후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 자네의 힘을 빌리고 싶네.”

“…저는 미천한 상인입니다. 그 같은 문제를 해결할 만한 정치적 힘은 없습니다만….”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게 아니야. 단지 가문의 부흥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지. 물론 이는 약이 효과가 없을 시엔 없는 이야기로 해도 좋네.”

“…그리 말씀하실 정도이면 정말로 효능이 좋은 약인 모양입니다.”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어찌 될지는 써 봐야 알겠지. 어쨌든 나아졌으면 나아졌지 절대 해가 되진 않을 거다.”

사내의 얼굴이 희망으로 밝아졌다.

“하나뿐인 피붙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도움을 주십시오.”

자현은 곧바로 시비에게 소루 공주를 모셔 오라 명했다. 그 이름을 듣고 상인의 얼굴이 살짝 굳는다.

“걱정 말게. 다 그대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 일인데 설마 자네와 자네 딸에게 해를 끼칠까.”

비령이 부드럽게 달래듯 말하자 상인의 얼굴이 다소 풀린다.

그새 꽤나 신뢰를 얻은 모양이군. 재주도 좋다.

자현은 입술을 비틀었다.

“주인 나리, 마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안으로 모셔라.”

허락이 떨어지자 시비가 소루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제대로 몸가짐을 하지 못한 것인지 소루는 다소 가벼운 옷차림에 머리채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듯 상기된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서던 계집이 문득 걸음을 멈춘다. 그녀가 낯빛을 흐리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손님이 있는 줄 몰랐다. 차림을 갖추지 못해 미안하구나.”

인기척도 않았는데 어찌 알아차린 것인지. 그런 점이 께름칙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인상을 쓰던 자현은 곧 자리에서 일어서 소녀를 뉘인 침상으로 다가섰다.

“차림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네가 치료해 주었으면 하는 이가 있어 불렀다.”

자현은 뒤에 선 시비에게 소루를 가까이 데리고 오라 눈짓했다. 어린 시비가 그녀를 조심스레 침상 앞으로 이끌자 소루가 더듬더듬 소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마조마한 낯으로 지켜보던 상인이 허겁지겁 그 앞을 막아선다.

“…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설명부터 해 주십시오.”

“치료를 하려는 거다.”

“치, 치료라니요?… 이, 이분은….”

엮이면 재수가 옴 붙는다던 그 귀신 공주가 아니던가. 차마 그 뒷말을 내뱉지 못하고 쩔쩔매고만 있자, 자현이 싸늘한 음성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이분은… 뭐냐?”

“…….”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하였다. 나는 두말하는 것이 싫다. 못 믿겠으면 도로 데려가라.”

“자현!”

비령이 잘 나가다가 왜 그러냐 하며 옆구리를 찌른다. 자현은 꿈쩍도 않았다.

한참을 소루와 끙끙 앓는 제 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상인이 곧 옆으로 비켜서며 풀죽은 음성으로 도와주십쇼 한다. 자현은 무뚝뚝하게 소루를 재촉했다.

“어서 치료해라.”

“…병이 난 아이인가?”

손을 뻗어 확인하듯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소루가 물었다.

“그래. 고칠 수 있겠나?”

소루는 대답 대신 그가 건네주었던 그 비수를 품에서 꺼내 들어 엄지손가락을 덤덤하게 그어 내렸다. 거리를 잘못 가늠한 것인지 어제 냈던 상처보다 더 깊고 긴 상처가 생겼다. 붉은 피가 주룩 흘러 손바닥을 타고 흐른다.

통증을 느낀 듯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소루는 그것을 재빨리 소녀의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 해괴한 행동에 상인이 소스라치며 소루의 팔을 붙잡았다.

“이,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사람 피를 먹이다니…!”

“…희란국 귀신들이 노래하지 않던가. 소루 공주 먹으면 새 몸 얻어 사람 될 수 있다고…. 내 피는 귀신에게 새 몸을 줄 정도의 효험을 지니고 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락당했다고 여기었는지 상인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신분도 잊고 씩씩거리며 자현과 비령을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사람의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이런 장난질이라니…!”

분하여 더는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양 어깨를 들썩거리던 사내는 곧 딸을 덥석 안아 들었다. 이만 돌아가겠다, 다신 볼일이 없을 것이다, 그리 일갈하는데 문득 품에 안긴 것이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진다. 사내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혼미하여 며칠 동안 정신을 못 차리던 딸아이가 가물가물 눈을 뜨고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

“기, 기화야.”

그는 펄펄 끓어오르던 이마를 짚어보았다. 열이 거짓말처럼 내려 있었다. 불덩어리 같던 몸도 식어 있다. 괜찮은 것이냐, 아프지는 않느냐, 떨리는 음성으로 묻자 아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큼지막한 눈을 씀벅거렸다.

“…뭐가요?”

제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기억 못 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귀여움을 떠는 그 모습에 사내가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제 딸을 끌어안고서는 네가 죽는 줄 알고 내 얼마나 맘을 졸였는지 아느냐 하며 목 놓아 엉엉 운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딸아이를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더니 소루의 손을 와락 움켜쥐며 절절히 외쳤다.

소루는 어깨를 움츠렸다. 단순히 상처 난 손을 붙잡힌 탓만은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가 제 손을 잡아 준 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해 쩔쩔매는 그녀에게 사내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폭포수처럼 쏟아 내었다.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제 은인이십니다.”

“내, 내가….”

가만 지켜보던 자현이 상처가 덧난다, 그만 놓아 주어라, 말하려던 찰나에 소루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자그만 입술에 어렴풋 수줍은 미소가 머물렀다.

“…도움이 되었다면, 기쁘다.”

들릴락 말락 하는 조그만 목소리. 딸을 구함 받은 감격으로 목 놓아 우는 저치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현의 귀에는 톡톡히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일전에 느꼈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는 듯한 그 기분과는 사뭇 다른, 좀 더 날카로운 감정이었다.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하고 마음이 들척거린다.

‘저 계집이 너무나 어리석고 이상하여서….’

그래서 짜증이 난 게 분명하다. 그는 소루의 얼굴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이른 아침, 영문도 모른 채 불려와 생전 처음 보는 이 때문에 몸에 상처를 내어놓고도 뭐가 좋다고 웃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바보 같으니라고. 저는 뭣 하나 손해 보지 않으려고, 뭣 하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괄대받고 이용당하는 처지에 어찌하여 웃는 것인가.

저 얼굴이 거슬리고 싫다.

“자자, 이만 진정하게나. 따님께서 놀라지 않는가. 이럴 게 아니라 방을 빌려줄 터이니 좀 쉬다가 가게. 죽이라도 내오라 이르겠네.”

자현의 낯이 살벌해진 것을 보고 비령이 허겁지겁 사태를 수습한다. 그제야 정신을 추스른 주호가 민망한 낯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보,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볼썽사납다니! 자식 일에 극진한 것이 참으로 보기 좋네. 자자, 어린 아씨께서도 배가 고플 테지? 내가 쉴 곳으로 안내해 주겠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상인이 한 번 더 고맙다 고개를 조아리고는 비령을 따라 방을 나섰다.

자현은 아주 집주인 노릇을 다 하는구나 하고 이죽거리고 싶은 것을 참았다. 대상인이라는 자도 자식 일에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인지 누가 집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분간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저치가 내게 아주 단단히 빚을 졌군.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자현은 곧 사나운 눈으로 계집을 돌아보았다.

“이제 되었으니 거처로 돌아가 쉬어라.”

제가 듣기에도 정나미 없는 음성이었다. 계집의 얼굴에 언뜻 당황한 기색이 어린다.

왜? 이번에도 머리를 쓰다듬어 칭찬해 줄 것을 기대했나 보지?

속으로 냉소하며 뒤돌아서는데 느닷없이 여자가 그의 옷자락을 거머쥔다.

“…뭐냐?”

“…너에게도 내가 도움이 되었느냐.”

“…되었다.”

“그, 그렇구나.”

냉랭한 반응에 기가 죽었는지 여자가 슬그머니 옷자락을 놓는다. 손가락에서는 아직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쓸데없는 것을 물을 시간에 상처부터 돌보라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이렇게나 거슬리고 불쾌하게 여기고 있으면서 걱정하는 척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는 다시 몸을 돌렸다.

“…고맙다.”

문을 나서려는 순간 등 뒤에서 꺼질 듯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는 기가 막혀 고개를 돌렸다. 도움이 된 것은 제 쪽이었다. 왜 저가 고맙다고 하는 것인가. 입에 발린 소리는 집어치워라 하려는데 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말문이 턱 막힌다.

그는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눈물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온 희미한 빛에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가 하얗게 빛났다. 여자의 조그만 입술에 어렴풋한 미소가 감돌았다.

어찌하여 우는 것인가. 어찌하여 웃는 것인가.

불가사의한 것을 목도한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생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로운 것이 되어 보았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 보았어.”

소녀가 고요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덧없는 소원들을… 네가 모두 이루어 주는구나.”

목 안쪽이 가시가 걸린 것처럼 따끔거렸다. 입을 벌렸지만 대꾸할 그 어떤 말도 생각나지가 않았다.

“너에게는, 싫고 모욕적인 혼사였을 테지만… 내게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맙다, 자현. 고마워….”

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그러고는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들척거리며 가슴속에서 시커먼 게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배 속까지 끈적끈적해진 기분이었다. 그 정체 모를 충동이 식도를 타고 올라올 것 같아 그는 목을 움켜쥐었다.

꺼림칙한 계집. 꺼림칙한 계집. 꺼림칙한 계집….

그 말만 쉴 새 없이 되뇌었다.

실로, 꺼림칙한 계집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