序章. 장안에 자자한 이야기
장 내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삼층 건물이 즐비해 있는 대로에는 물건을 사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잡상인들, 엿가락을 사 먹는 어린아이들, 비단옷을 차려입은 규수와 무명옷 차림의 아낙들이 가없이 뒤섞여 있었고 길목에는 홍등이 발갛게 빛나고 있었다.
기루(妓樓)와 주막은 성황. 널찍한 마룻바닥 위에는 술 취한 사내들이 머리를 올린 기녀를 끼고 앉아 한창 즐기느라 여념이 없고, 그 바글바글한 손님들 사이로는 술독을 인 노비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여자들의 분 냄새, 기름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을 한다.
희란국의 수도 양우(陽雨)는 그 흉흉한 소문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아시타는 삿갓을 고쳐 쓰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요괴들의 소굴이라는 음곡을 곁에 두고서도 잘도 이만큼이나 번영하였구나. 기묘한 일이다. 정말로 이 도시에 유례없는 흉사가 벌어질 참인가.
그는 여우의 것처럼 치켜 올라간 눈매를 실처럼 가느다랗게 떴다. 스승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희란국의 모습에 일순 괴리감이 들었다.
‘…좀 더 음산한 기운이 감돌 것이라 예상했다.’
요괴들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존재가 아니던가. 귀신들이 가까이 오면 사람들의 신경은 예민해져 기가 흐트러지며 자연 다툼이 잦아진다. 하지만 희란국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이제 막 도착한 참이니… 실상이 어떨지는 좀 더 머물러 봐야 알겠지만.’
본디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어디든 떠들썩하기 마련이 아니던가. 아시타는 의문을 접고 긴 여정으로 지쳐 처진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머물 곳을 정해야 한다. 그는 큰길을 지나 술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인파를 헤치고 여관을 찾아 헤매는데 문득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슬몃 올라오는 호기심에 아시타는 그리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쨍쨍한 목소리가 곧장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금일! 희란연을 구경 오신 객들에게 내 기묘한 이야기를 하나 해주겠소.”
야담꾼인가. 군중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자리, 술 파는 곳 단상 상머리에 건방진 자세로 올라앉은 빼빼 마른 사내가 누렇게 빛바랜 부채를 펼쳐 들고 요란스레 외쳐대고 있었다.
아시타가 어찌할까 머뭇거리는 새에 야담꾼이 청산유수로 좔좔 내뱉기 시작한다.
“이 희란국 사는 백성들이면 다 아는 이야기! 허나 몇 번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기묘한 이야기! 저 깊은 계곡서 들려오는 노랫말의 주인공 소루 공주에 관한 이야기요. 흥미 있는 자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흥미 없는 자는 지나가시면 되겠소.”
수군수군, 모인 이들 중에서 몇몇이 굳은 낯으로 저리 떠들어도 괜찮을까 하며 중얼거린다. 눈을 가늘게 뜨던 아시타는 곧 그들 사이로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야담꾼이 사발 가득한 술을 시원하게 들이켜더니 창이라도 하듯 낭창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귀신들이 사는 저 깊고 깊은 계곡, 음곡을 등지고 솟아오른 희란국 궁성에는 세 명의 왕자가 살고 있었소이다. 총명하고 자애로운 첫째 왕자 세륜, 무예에 능한 둘째 왕자 가륜. 그리고 가장 출중한 용모를 가진 셋째 왕자 신율이 바로 그들이오. 능히 한 나라의 왕이 될 만하다 온 백성이 인정하는 위의 두 왕자들과 달리, 셋째 왕자, 놀기 좋아하고 경박스럽기 그지없으니, 그 현란한 언변으로 하는 짓이라곤 기녀들 후리는 일뿐이라. 저 왕자 언제 철들까, 이 나라의 탄식이 저 귀신 계곡만큼이나 깊었소이다.”
그러고는 엇험!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야담꾼이 부채를 탁, 하고 접는다. 현란한 손놀림이었다. 구경하는 이들의 흥미진진한 얼굴을 쭉 확인한 사내가 바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왕위에 오를 것은 적통 왕자인 세륜 아니면 가륜. 왕의 심중에 첫째 왕자가 병약하니 건장하고 늠름한 둘째 왕자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면 하는데,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이 왕자, 위에 형님이 계신데 어찌 감히 하며 극구 태자 자리 사양하니 늙은 왕,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지. 그 와중에 풍류 즐기기 좋아하는 셋째 왕자 신경 쓸 여력이 있었겠소? 그 누구의 간섭도 없으니 이 젊은 왕자 인생 즐기기에 여념이 없구나!”
얼쑤! 하고 술 취한 사내 하나가 추임새를 넣었다.
“이 신율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말해 보자면 귀신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요. 여인네도 낯부끄러워 고개를 숙일 정도로 요염한 자태에 학처럼 고고하고 소나무처럼 훤칠하신 미장부시었으니, 왕도 제 아들 철없음을 알면서 눈감아 주는 이유는 기이할 정도로 고운 막내아들을 예뻐하기 때문이라. 어차피 왕좌에 앉힐 놈도 아닌 것, 오냐오냐한 것이 큰 실책이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홀리는 고 얼굴 두고 누가 감히 싫은 소리 할 수 있으랴! 온 궁전 사람들이 저를 두고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구니, 이 왕자 철들기는 애초에 글러 먹은 일. 신율 왕자가 그리도 아리따웠소이다. 어디 그뿐이랴. 반반한 얼굴만큼이나 세 치 혀에도 유들유들 기름기가 좔좔 흘러 그 매끄러운 언변으로 왕도 구워삶고 제 형들도 요리조리 가지고 노니 악독한 말재간으로 이간질하는 것이 고놈의 특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그 입술이 벌어질라치면 또 무슨 요사한 소리를 지껄이나 보자 벼르면서도 막상 듣고 보면 홀딱 넘어가고 마는 것이 이 무슨 해괴한 조화인지. 셋째 왕자, 참 무서운 재주 가진 분이셨지!”
나이 지긋한 노인 몇몇이 허허, 하며 무릎을 친다. 흥이 돋아 야담꾼의 어깨가 들썩들썩하였다.
“허나 뛰어난 말재주, 훤칠한 용모 가졌으면 뭐 하는가? 철없기로는 희란국 으뜸. 이 왕자가 하는 일이라곤 탱자탱자 노는 일뿐이니. 그것도 어디 적당히 즐기는 줄 아시는가? 어찌나 요란 악독하게 노는지 그 방자한 놀음은 논다 하는 공자들도 낯을 붉힐 만큼 난잡한 것들뿐이고, 호화롭게 산다 하는 부호들도 퍼렇게 질릴 만큼 사치스럽기 그지없으니, 셋째 왕자 언제 사람 되겠는가 혀 차는 소리가 도성 가득했더라!”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이야기에 열중하듯 점차 조용해졌다. 인파가 점점 몰려들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아시타는 야담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 하나 크게 꾸중하는 사람 없으니 그 방자함이 하늘까지 닿아 셋째 왕자가 어느 날에 일을 쳤소이다. 막내 왕자라 하면 그저 허허 웃던 왕도 안색을 바꾸어 불호령을 내릴 만큼 기함할 일이니, 이 왕자가 왕께서 가장 아끼던 후궁을 유혹해 핏덩이를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이 무슨 패륜이란 말이냐. 왕께서 크게 노하시어 아끼던 아들을 내치되 다시는 내 앞에 낯을 보이지 말라 하셨고, 태어난 아이는 구중심처 가장 깊고 초라한 곳에 두라 하셨소. 고까짓 핏덩이 내 알 바 아니다, 허나 아비가 어찌 나에게 이럴 수 있는가 엉엉 우는 셋째 왕자. 제 잘못은 생각도 않고 원망하는 소리만 하시니 이 왕자 정신 차리기는 이미 글러 먹은 일이 아니겠소. 저를 연모하여 불경한 일인 줄 알면서도 부정한 씨를 남긴 여인, 사약 받고 죽었다 소리 듣고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오로지 왕께서 저를 유폐시킨 것만 원망하며, 설마 내가 평생 여기 있겠느냐? 부왕의 노가 풀리면 내가 풀려나리라, 그때에 내 이 원망함을 풀리라, 그런 흰소리를 도성 밖까지 쩌렁쩌렁 외쳐대었지.”
천하에 그런 금수만도 못한 이가 다 있더냐 하며 여행객으로 보이는 이 하나가 분개하여 외쳤다. 그에 동조하듯 야담꾼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그러나 제 아들의 간살거리는 소리에서 풀려난 왕, 멀찍이 두고 보니 이처럼 못되고 악독한 것이 없도다. 다 내가 오냐오냐한 탓이다. 왕께서 깨달아 그를 엄하게 두시니, 왕자는 도리도 모르고 법도도 모르는 도다. 거기서 평생을 배우라 명하셨소. 그리 된 지 벌써 십수 년,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 왕자 코빼기도 볼 수 없으니. 아! 드디어 우리 희란국이 골칫거리를 하나 덜었도다!”
과장된 얼굴로 가슴을 팍팍 쓸어내리는 야담꾼의 행동에 군중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아시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왕실의 일을 저리 떠들다가 화를 당하게 될 것이 겁나지도 않는가.
야담꾼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다.
“하지만 기뻐하긴 아직 이르다오. 골칫거리가 아직 하나 남아 있었으니! 바로 그 신율 왕자가 남긴 핏덩이, 이 이야기의 진정한 주인공인 소루 공주올시다.”
아시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이유이기도 했다.
그 이름에 즐겁게 웃던 이들의 얼굴에 다시 긴장감이 어렸다. 뭣도 모르는 객들만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소루 공주가 태어난 날 희란국 왕께서 낯을 굳히며 말하기를 왕의 여인이 낳았으되 그 아들의 자식, 이는 패륜의 증거이니 땅에 묻어 마땅하나 내 손에 혈육의 피를 묻히기를 꺼린다. 그것을 가장 천한 종에게 주어 죽지만 않게 하라 하셨소. 그리고 그 천한 딸에게 이름 붙이기를 눈물로 태어나 근심거리일 뿐이니 소루(騷淚)라 하여라! 그리하여 가장 미천하고 미욱한 말더듬이 노비의 손에 양육된 소루 공주, 여종이 불우한 사고로 죽고서는 사당 신녀들이 돌보았는데, 성을 도망 나온 여인들의 말에 의하면 배운 것이 없어 어리석고, 거동이 흡사 늑대 새끼와 같았다 하더이다. 참으로 공주란 이름이 아깝구나!”
야담꾼의 목소리가 사방에 쩌렁쩌렁 울린다. 음산한 기척을 느끼고 아시타는 고개를 돌렸다.
궁성 뒤로 병풍처럼 솟아 있는 흑산 태화(胎禍). 그 너머로 찬찬히 지는 해가 불그스름해지고 있었다.
귀신들이 좋아하는 색이었다. 슬슬 귀물들이 깨어날 시간인가. 아닌 게 아니라 그 활기찼던 장 내에 스멀스멀 귀기(鬼氣)가 어린다.
야담꾼의 이야기에도 귀기가 어렸다.
“그 때문에 귀신 공주라 불리는 것인 줄 아시는가? 천만만만이올시다! 이 공주의 기이함은 거기서 그치질 않았으니. 출생부터 심상치 않은 이 계집은 자라기는 어찌 그리 더디 자라는지 몸집이 조그맣고 왜소해 매일을 절절 앓았소이다. 곧 죽지 않겠나 싶다가도 간간이 살아나는 게 질긴 것은 또 어찌 그리 질긴지. 시름시름 하던 것이 언변을 텄을 즈음에는 헛소리까지 중얼중얼. 빈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은 예삿일이고, 허구한 날 귀신들이 자신을 먹으러 온다며 경기를 일으키기까지 했다니, 그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하여 모두가 꺼리었지. 그뿐인 줄 아시오? 이 계집은 나무나 풀잎, 짐승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무시무시한 것은 그 조그만 핏덩이가 꽃을 피워라 하면 죽은 나무가 꽃을 피우고, 죽어라 하면 퍼렇던 잡초가 죽어 버리고, 짐승들도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것이 아니요! 참으로 이상허다, 이 괴이한 것, 나는 무서워 죽겠다, 몸종들이 벌벌 떨며 성을 도망 나왔으니, 온 도성에 소루 공주가 귀신 쓰였다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소이다. 판세가 이리되자 왕의 인내심도 닳아 없어졌소. 그 요물 더는 못 견디겠다 하시며 궁전 사당에 가두라, 먹을 것도 물도 주지 말고 굶겨 죽이라, 고것이 저주받았다 명하셨소. 그리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지나던 날 밤! 온 천지에 천둥벼락이 내려치고 하늘은 시커멓게 변하니, 불길한 징조라.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져 왕실 사당이 화염에 휩싸였소. 그 불 그림자가 마치 요물들이 뒤엉켜 몸부림치는 것처럼 요동하였지! 저 높은 궁성 지붕 위까지 불길이 치솟은 광경이 이 두 눈에도 똑똑히 보였다오!”
야담꾼이 제 눈을 익살스레 부릅떠 보인다. 하지만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온 궁전의 모든 일꾼들이 달려들어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던 그 불길. 하늘에서 괴이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 뒤에 거짓말처럼 꺼지었는데, 고 숯 더미 속에서 놀랍게도 어린 공주가 살아 있는 게 아니겠소!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쌀 한 톨 삼키지 못해 앙상하게 마른 계집아이는 두 눈만 멀고 나머지는 다 멀쩡하였소. 왕이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여 이르기를, 기이하고 불길하도다. 내가 핏줄을 끊어 버리려 하였다고 하늘이 노한 것이 아닌가. 새 사당을 지어 공주를 그곳에서 지내게 하고 하늘의 노를 풀기 위해 제사를 드리자. 그날부터 희란국 계곡에선 기이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노래의 내용은 이러하오.”
야담꾼이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소루 공주 먹으면
새 몸 얻어 사람이 될 수 있으니,
희란국 요물들
공주를 두고 싸웠더라.
그중에서도 가장 추한 요괴가
몰려든 모든 귀물을 집어삼키었는데
배가 가득 차 공주는 먹을 수 없었더라.
요괴는 결국
공주의 눈만을 빼앗고
달아났다.」
노랫말이 묘한 여운을 남기며 장 내에 길게 메아리쳤다.
“늙은 왕께서 돌아가시기까지, 병약한 첫째 왕자께서 돌아가시기까지, 그리하여 둘째 왕자께서 왕위에 오르시기까지, 저 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멈추지 않았으니, 지금도 저 귀신 계곡서 해질녘이면 자자히 울려 퍼지고 있소이다.”
이야기가 끝이 났다. 군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계곡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불그스름한 노을빛에 더더욱 새카매지는 산 그림자가 요괴의 그림자처럼 음산해 보인다. 해를 삼키는 검은 계곡서 윙윙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 속에 감도는 요요한 노랫말이 귀를 어지럽힌다.
「소루 공주를 먹으면
새 몸 얻어 사람 될 수 있으니….」
가만히 계곡을 바라보던 아시타는 곧 인파를 헤치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복작복작한 거리. 사람들의 그림자가 기이할 정도로 짙다.
一章. 귀신 공주
소루 공주의 주변에는 기묘하고도 불길한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를 젖 먹여 키운 말더듬이 여종은 어느 날 인가에 내려온 범에게 물어 뜯겨 처참하게 죽었고, 이후 그녀를 모시던 여종들도 하나둘 병이 들어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광증을 앓다가 뒷산에 올라가 목을 맨 이도 있었고,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이도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노비들이 앞다투어 귀신 공주를 모시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엎드려 대성통곡을 했다. 목숨을 걸고 도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럴 만한 배짱이 없는 이는 혹시라도 귀신이 들러붙어 피붙이에게까지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며 자결했다.
소루 공주의 곁에 머문다는 것은 비천한 노비들에게조차 그처럼 끔찍한 일인 것이었다. 결국 소루 공주의 사당에는 음식을 날라다 주는 무녀들 이외의 발길은 뚝 끊겼다.
가륜 왕은 꺼림칙한 조카에게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고, 성을 들락날락하는 이들도 부정 탈까 두렵다는 듯 사당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그리 된 지 어언 육(六)년. 숨이 붙어있다는 것 이외에 그녀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었다.
술상에 앉아 보고서를 훑어보던 사내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무녀들에게서라도 뭔가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사람을 심어 조사하게 했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공주의 세 끼 식사가 무엇인가 하는 것뿐이었다. 무녀들조차도 사당 안으로 음식이나 소셋물, 의복 같은 것을 밀어 넣어 줄 뿐 공주를 가까이하지 않는 모양이다.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용모조차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없다니….
“들여다보고 있으면 해결방안이라도 나온다더냐? 접어라. 술맛 떨어진다.”
심각하게 턱을 쓰다듬고 있는 그에게, 맞은편에 앉아 술을 푸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사내를 보았다. 망나니처럼 잔뜩 흐트러진 머리칼에 광인처럼 번뜩거리는 두 눈. 안 그래도 냉혹해 보이는 얼굴을 그리 섬뜩하게 일그러뜨리고 있으니 귀신이 따로 없었다.
“이게 다 자네를 위해서 수고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툴툴거리자 사내가 코웃음을 친다.
“누가 부탁이나 했던가.”
“자넨 궁금하지도 않나? 아내 될 이가 어떤 여인인지. 소문만 자자하지 무엇 하나 분명한 것이 없으니 친우를 위해 이리 조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혹시라도 자네가 초야날 밤 돌연사 할지도 몰라….”
“긁지 마라.”
남자가 으드득 이를 갈며 들고 있던 술잔을 탁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조그만 술잔이 그 완력을 이기지 못하고 쩍 갈라졌다.
“네가 긁지 않아도 속에서 천불이 인다. 눈이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란 말이다.”
그 살벌한 기세에 밝게 웃던 남자도 슬그머니 입꼬리를 내렸다. 야차와 같은 얼굴을 하고서 사내는 독주를 아예 병째로 들이켰다.
“귀신 공주가 다 뭐란 말이야. 목숨 걸고 싸웠는데…. 왕의 약속 하나만을 믿고서 개처럼 전장을 굴렀다! 그에 대한 대가가 고작…!”
분이 치밀어 올라 차마 뒷말을 잇지도 못한다. 사내는 술만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는 귀신의 저주를 받아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보다는 모욕당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어쩌질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기는 이놈이 어디 귀신 따위에 겁을 집어먹을 위인이던가.’
이 사내의 이름은 자현. 높은 신분의 귀족은 아니나 그래도 뼈대 있는 무가의 장남이자 희란국 제일의 장수라 일컬어지는 자였다. 또한 구국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현의 부관이자 절친한 친우인 비령이 보기에 그에겐 영웅이라는 칭호가 정말이지 어울리지가 않았다. 이 불귀신 같은 사내에게선 숭고한 일면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천하에 명성을 떨쳐보겠다는 야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유별난 것도 아니다.
그런 그가 자청해서 전장의 선두에 섰던 이유는 단 하나. 혁혁한 공을 세워오면 가륜 왕의 귀애하는 딸, 가란 공주를 주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나에게 주기로 했다. 적장 이휼의 목을 베어오면 가란 공주를 내게 주기로 약조했단 말이다!”
너무도 억울하고 분하여 자현이 피 끓는 듯 외치었다. 그는 삼 년 전 궁궐에서 왕의 막내딸 가란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왕에게 청혼을 넣었다.
그러나 귀족이라고 다 같은 귀족인가, 별 볼 일 없는 네놈에겐 이 귀한 금지옥엽을 내어줄 수 없다 하는 모욕만 당하고 내쫓겼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청혼을 넣길 몇 차례.
심드렁하게 고개 젓던 왕이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네가 그리도 가란 공주 얻기를 원한다면 적국 자환의 명장(名將) 이휼의 목을 가져오라. 그리한다면 나라를 구한 영웅, 부마가 되기에 적합하니 네가 그리한다면 공주를 내어 주겠다 그리 약조하였다.
그 약속 하나만 믿고 전쟁터로 나간 자현. 긴 전쟁이 끝나고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와 약조한 대로 공주를 내어 주십쇼 하고 청하였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통지가 내려왔다. 바로 희란국 온 백성이 다 아는 귀신 공주, 소루를 데려가라는 것이다.
“으득, 가륜…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한 나라의 왕이라는 작자가 한 입을 가지고….”
어찌나 울화가 치밀던지 악문 잇새로 피가 다 넘어왔다. 비령이 기겁하며 진정하게나 만류해 보았지만 그는 매몰차게 비령의 손을 쳐내고는 술만 연거푸 들이켰다.
날 때부터 기가 세고 긍지가 남달라 지기 싫어하는 성미를 가진 자현이었다. 오만 방자하다 싶을 정도로 대가 센 성미 때문에 척을 진 이만 한 부대는 편성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작자가 난생처음으로 고개까지 숙여가며 나 주십쇼 하고 청한 것이 바로 가란 공주. 네 주제에 감히 하는 소리를 참아가며 그 굴욕을 견디면서까지 청했다.
비웃는 왕의 면전에 칼부림을 하고 싶은 것을 눌러 참은 게 몇 번이던가. 사지로 밀려나며 이를 갈았다. 이휼의 목을 그 목전에 던져 주리라. 그 귀애하는 딸, 내가 가져가겠다. 그리 다짐하며 피 튀기는 전쟁터를 누비지 않았나.
약속대로 이휼의 목을 가져다 가륜의 술상 위에 안주 삼으소, 하며 올려놓았을 때 그가 느낀 그 희열감을 말로 할 수 있을까.
설마 이리 치졸하게 보복하려 들 줄이야.
비령이 이를 가는 그의 모습을 보며 쯧쯧, 하고 혀를 찬다.
“그러게 내가 적당히 하라지 않았나? 일부러 왕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거 하나 없다고 그리 말했건만… 내 그 성정 때문에 언젠간 낭패를 당할 줄 알았네.”
“…긁지 말라 하였다.”
“내가 어디 틀린 말 했던가? 안 그래도 고개 빳빳하다고 씹는 것들이 사방에 널렸는데 자네 태도는 도무지 누그러지지 않으니… 왕이 자네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 소문엔 자네가 다녀간 뒤 ‘짐이 왕이지 저가 왕인 줄 아는가?’라며 벽에 벼루를 집어 던졌다지?”
“왕답게 굴어야 왕이지! 이따위 치졸한 방법으로 앙심을 풀려 하는 작자를….”
자현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바닥 위에 갈기갈기 찢어발겨 놓은 왕의 서한을 잘근잘근 짓밟았다. 비령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자넨 정말로 정치판에 낄 인물은 아닐세. 그럼 나라 제일의 권력자에게 그리 건방을 떨어 놓고도 제 팔자가 순탄할 줄 알았단 말인가. 가륜은 호전적인 인물이야. 선대왕이나 세륜 왕자와는 다르단 말일세.”
하지만 설마 귀신 공주를 갖다 붙일 줄이야. 비령도 왕의 처사가 너무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가란 공주를 주지 않으려면 말 것이지 가까이하는 것만으로 목숨이 위태롭다는 불길한 계집과의 혼례라니…. 대놓고 네놈 죽길 바란다 말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모욕도 이보다 더한 모욕이 있을까. 그에 불같은 성질을 참지 못하고 궁궐에 쳐들어가 따지는 자현에게 그 왕, 내뱉는 핑계 한 번 구차하더라.
“내가 언제 공주를 주겠다 했지 가란 공주를 주겠다 하였는가? 공을 세워오면 부마 될 만하다 하였지 가란의 남편으로 삼겠다 하였느냔 말이다.”
가륜도 설마 정말로 자현이 이휼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것이리다. 그만큼 불리한 전투였다. 그에게 배정된 군인은 모두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민병들. 그 수마저 채 이천여 명을 못 넘겼다. 그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열 배에 달하는 적의 황군을 격파한 것도 모자라 장수의 머리까지 가져왔다.
그 무훈이 어찌해볼 도리도 없이 무장들의 입을 통해 만백성들에게 알려져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으니 그 옹졸한 성미에 가륜 왕도 깨나 속이 끓었을 것이다.
집안도 대단하지 않은 것이 성미만 오만하여 왕 앞에서조차 고개를 치켜드는 불측한 놈. 주제도 모르고 제 딸이나 탐내는 방자한 자식, 개죽음이나 당해라, 하고 사지로 밀어 넣었더니 모두가 인정하는 공훈을 세우고 영웅이 되어 돌아올 줄 꿈에서야 알았을까.
속 좁고 옹졸한 인간.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놈이 칭송받는 꼴에 배알이 뒤틀려 약조고 뭐고 저버리고서 이리 박정한 대접이다.
비령은 작게 혀를 찼다. 펄펄 뛰는 자현이 불쌍하였다. 이참에 보기 싫은 귀신 공주까지 치워버리고 왕은 일석이조겠지만 이놈은 저주받은 계집 하나 얻자고 그 고생한 꼴이 되었으니.
“내 이 모욕은 결코 참지 않을 것이다. 결코!”
자현이 잇새로 살벌하게 으르렁거린다. 그는 우선, 사달을 낼 듯한 친우를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너무 그러지 말고… 한번 좋은 쪽으로 생각해 보게나. 희란국 모든 귀신들이 탐낼 정도라면 소루 공주는 필시 천하절색일 것이야. 그 부친, 신율 왕제도 희란국에서 으뜸가는 미장부라, 그 미색이 여우도 홀릴 만하였다 하지 않은가. 나도 어릴 적에 그를 본 적이 있었는데 실로 오싹하리만치 아름다운 사내라 혼이 다 나갈 뻔했다네. 그 딸이니 오죽 아리땁겠는가. 가란 공주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 가는 미녀일 수도 있네.”
“그따위 헛소리를 지껄일 거라면 내 그 쓸모없는 입, 친히 찢어 주지.”
“하하하, 자네가 그런 말을 하면 하나도 농담 같지가 않네.”
물론 농담일 리가 없다. 자현이 어디 허튼 소리하는 인물인가? 그런 재주가 있다면야 왕 앞에서 뻣뻣하게 굴다 이런 수치는 당할 일은 없었겠지. 비령은 희번득 빛나는 자현의 눈을 바라보다 푹,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어찌할 텐가? 가문에 무슨 해악이 오든지 말든지 달려가 바락바락 따지고 볼 텐가? 아니면 궁궐에 쳐들어가 가란 공주 둘러업고 월담이라도 할 테냐?”
“으득… 이런 배신과 모욕을 당했는데… 뭔들 못 할까.”
“…정말 하극상이라도 일으키려고?”
자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새 잔을 꺼내 술을 따라 마셨다.
어랏, 정말 모반이라도 벌일 참인가 하며 비령은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음모를 꾸미기에 이놈은 너무 단순한 인물이다. 그런 뒷공작을 펼치느니 우선 들이박고 보는 것이 자현이 아닌가. 이놈이라면 너 죽고 나 죽자 심보로 일단 일을 치고는 코웃음 치며 망설이지도 않고 제 숨통을 끊겠지. 너무나 쉽게 머릿속에 그 광경이 그려졌다.
“그는 교묘하게 약조를 깼다. 감히 나를 이용해 먹었어. 이런 모욕을 내 참을 이유가 없다.”
음산하게 읊조리는 꼴이 제 상상이 상상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비령은 식은땀을 흘렸다.
“진정하고 긍정적인 면을 한번 보게나. 정말로 소루 공주가 의외로 좋은 여자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헛소리 작작 해라! 제 놈들도 죽이지 못해 달고 사는 계집이다! 노비들도 귀신들렸다 꺼리는 계집을…!”
“소문이라는 게 원래가 부풀려지기 마련일세.”
“으득, 남의 일이라 이건가?”
“남이라니! 우리가 어찌 남인가. 피까지 섞어 마신 의형제가 아니던가!”
샐샐 웃으며 알랑방귀를 뀌어도 자현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그 계집이 어떤 여자이든 상관없다. 난 이미 왕에게 속아 광대짓 한 어리석은 놈이 되었단 말이다. 노비들도 꺼리는 걸 부인으로 달고 살아야 하는 처지라 자현도 불쌍하게 되었다, 만민이 지껄여 대겠지. 그런 모욕을 당하느니….”
탁상 위에 꽉 움켜쥔 주먹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악문 잇새에서는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살벌하다. 정말로 사달이 날 참인가 보다. 비령은 심각하게 말했다.
“그래서… 왕명을 거역하겠는가?”
“날 배신한 주군이다. 내가 그 작자의 명을 따를 이유는 또 무언가?”
“이유야 많지. 그는 왕이고 자넨 그의 백성일세. 왕명은 절대적이야.”
“약속 하나 지키지 않는 자를 나는 왕으로 인정 않네.”
자현이 단호하게 외쳤다. 정말로 모반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자네가 인정하지 않아도 가륜은 희란국의 왕일세.”
“희란국의 왕일지는 몰라도 나의 왕은 아니다.”
이놈 방자함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나 정말로 안하무인일세. 비령이 생각하기에 내가 왕이라도 이런 놈이 알짱거리면 치우고 싶겠다. 벗 하나 잘못 두어 나날이 근심인 비령, 한숨만 폭 내쉬었다.
“자네, 정말로 여태 고생해온 것을 한순간에 날리고 싶은 겐가?”
“헛소리 마라! 왕이 내겐 그 귀한 공주를 보낼 수 없다, 귀신 씐 여자가 딱 네 짝이다, 하고 말한 순간 이미 내 노력은 시궁창에 처박혔다.”
“비록 가란 공주는 얻지 못했지만 자네에게는 전장에서 쌓아올린 공훈이 남아 있질 않은가. 온 백성이 자현을 영웅이라 부르짖고 있네. 거기다 자네를 따르겠다 맹세한 수백 명의 무인들까지…. 자네는 결코 헛고생한 것만은 아닐세.”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지금 내가 병신 중의 상병신이 되었는데! 자네는 나에게 그 굴욕을 참으라 하는 것인가!”
“분을 풀고 싶다면 때를 기다리란 말일세. 자네는 그 성미 때문에 항상 손해를 보는 거야.”
자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원체 사나운 눈매 때문에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용모의 소유자였다. 거기에 분노의 기색마저 더해지자 실로 흉흉하다. 흡사 야차와 같았다. 그처럼 살벌한 꼴을 하고서 자현은 잇새로 험악하게 말했다.
“비령. 나를 구슬려 권모술수를 부릴 생각이라면 집어치워라. 난 장기짝이 아니다. 감히 그 누구도 나를 두고 그렇게는 못 해.”
“내 참, 장기짝으로 다룰 수 있었으면 내 진작 자네를 치워버렸을 걸세. 폭약처럼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것을 끼고 있느니 잘라내 버리지.”
자현은 코웃음만 쳤다. 저놈 속을 제가 어찌 알까? 비령은 뱃속에 능구렁이 열댓 마리는 품고 있는 음흉하기 짝이 없는 놈이었다. 십 년 넘게 붙어 있었지만 도무지 그 꿍꿍이를 알 수가 없는 놈. 그 살살거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지금 이놈이 나를 두고 일을 꾸미고자 하는데 내가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아 구슬리려 하는 게 아니냐, 그런 의심까지 다 들었다. 하긴 나라의 아비라고 하는 작자조차도 신용이 없는데 누굴 믿을 수 있을까. 자현은 회의감에 가득 차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좋다. 모두 가란 공주 얻고자 한 일. 나는 왕의 약조에 내 목숨을 걸었었다. 한데 그가 이제 와 시침을 떼고 있으니 나는 이를 참을 수가 없다. 내일 그와 결판을 내겠어.”
“그리하면 정말로 이용당하고 개죽음당하는 꼴밖에 더 된단 말인가! 자네 불같은 성미는 잘 알고 있으나 이번만큼은 삭히게나. 비록 가륜 왕 농간에 놀아난 꼴이 되었네만 적어도 가륜 왕은 자네에게 이전처럼 함부로 할 수가 없게 되었지 않나.”
“지금 이게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그가 나를 욕보이고 있는데도…!”
“자네가 얻게 될 이점을 침착하게 생각해 보게나. 허울뿐일지라도 자네는 공주를 얻게 되었네. 소루 공주는 비록 폐위된 신율 왕제의 딸이나 선대왕께서 제 딸이라 호적에 올렸어. 족보로는 지금 왕 가륜의 누이가 아니던가. 그 공주를 부인으로 얻게 된다는 것은 왕의 매부가 된다는 것이지. 허울뿐이라 할지라도…. 자네는 왕실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가 있네. 자네가 힘만 갖춘다면 그에 따르는 권한도 행사할 수가 있어. 제가 직접 성립시킨 혼사이니만큼 가륜 왕도 어찌할 수 없지.”
그 짜맞추는 말이 꽤나 그럴듯하나 자현은 어처구니가 없어 코웃음도 안 나왔다. 왕의 매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왕족이되 왕족이 아닌 계집이 소루였다. 귀신 들렸다 모두가 꺼리는 것이 그 소루란 공주다. 선대왕도 불길하다 내 눈앞에서 치워 버리라 하였고, 그것이 되지 않자 천벌을 받을까 두렵다며 마지못해 족보에 올렸다.
친부라는 것은 유폐되어 빛을 못 보는 신세에, 모친은 부정을 저지른 대가로 사약을 받고 죽지 않았나. 심지어는 몸종들도 꺼리어 귀신 공주 모시느니 죽겠나이다 울부짖는 판에, 왕의 여동생? 무슨 허울 좋은 소리란 말인가.
“그 세 치 혀로 어떻게든 포장해 보겠다 애쓰는 게 안쓰럽다만, 어차피 그 계집 가까이 두면 죽은 목숨이란 소문이 파다하다. 어차피 죽게 될 몸, 가륜 왕을 길동무 삼겠다.”
“하하하, 자네가 어디 귀신 손에 죽을 인물인가! 아니면 천하의 자현이 설마 저주가 무서워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시시한 도발이다!”
허나 그 시시한 도발이 어지간히 심기에 거슬렸는지 호랑이 같은 자현, 아주 사납게 으르릉거린다.
비령은 신이 나 한술 더 떴다.
“왜 아니겠는가? 나도 골짜기에서 들려온다는 노랫소리를 들어 본 적 있다네. 소문에 의하면 음곡의 요물들이 해질녘이면 부른다지? 희란국 요괴들이 모두 공주를 탐내어 싸웠다는 내용의…. 소루 공주 부인 삼는다면 아마 온 집 안이 귀신 소굴이 되겠지. 자현도 사람인데 꺼림칙하고 살 떨릴 만하네.”
부추겨 보겠다는 심산으로 하는 말인 걸 알겠는데도 부아가 치밀어 올라 자현은 턱을 꽉 다물었다. 이 내가 같잖은 귀신들을 무서워할까? 그리 이를 가는 꼴을 알았는지 이놈 더 신나서 지껄인다. 자현은 도끼눈을 떴다.
“닥치게! 자네 말대로 불길하고 꺼림칙한 계집, 옆에 끼고 살고 싶을까. 애초에 나는 가란 공주를 아내로 맞겠다 하였다. 한데 내가 왜 귀신 계집 따위에게 만족해야 하냔 말이다!”
“그거야 자네가 힘이 없기 때문이지.”
발끈한 자현이 벽에다 술잔을 집어 던졌다.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에도 비령은 태연자약하게 씩 웃기만 한다. 그가 눈가를 가늘게 휘며 유들유들 말을 이었다.
“자네 신분은 가륜 왕 말대로 별것 아닐세. 가세가 기울어가는 무가 출신의 장남. 부마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 그래서 세도가 출신의 귀족들 틈에서 그리 무시당해 온 것이 아니던가. 그 자존심과 특출한 실력만으로 버텨 왔다만 실질적으로 자네에겐 왕명을 거스를 만한 권력이 없어.”
“…….”
“자네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군말 않고 최전방에 선 것이 아닌가.”
자현은 이를 악물었다. 비령의 말이 뱃속을 긁었지만 그 뼈마디 있는 말이 자신을 비아냥거리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화가 치밀었지만 그 정도 분노는 누를 줄 알아야 그래도 나라 제일의 무장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현이 눈만 살벌하게 빛낼 뿐, 아무 소리 못 하는 것을 보며 비령이 히죽 웃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 자넨 허울뿐이라도 왕실의 사람이 되었고, 당당하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할 수 있는 명성도 얻었네. 어디 이제 감히 누가 자현이 별 볼 일 없다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
“…네놈 그 간살스러운 혀 놀림엔 못 당하겠군.”
자현이 돌연 어깨에 힘을 쭉 빼고 중얼거렸다. 부글부글 끓던 속이 진정된 듯 의자 위에 늘어지는 꼴이 더 지껄여 봐라, 나는 듣겠다, 하는 의미다.
비령은 씩 웃으며 자현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었다. 이 폭약 같은 놈이 잠잠해졌으니 차분히 설득하리라. 하나뿐인 죽마고우가 일 치고 뒈지는 꼴은 막아야지 않겠나. 그는 조근조근 말을 이었다.
“고 계집이 정 꺼림칙하거든 부인으로 맞고 어디 멀리 요양이나 보내게. 정실로 들일 것도 없지. 왕이 주겠다고 한 것이니 자넨 받으면 그뿐이란 말일세. 소루 공주를 후실로 들이고 정 탐이 나면 후에 가란 공주를 정실로 들이게. 시간만 있으면 못 할 것이 없지.”
“흥, 말은 쉽군. 왕이 그 귀한 것을 내어 줄 수 없다 하여 이 꼴인데….”
“그거야 되게 하면 그만이 아닌가. 앞으로 시간은 많아. 자넨 힘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권력을 쥐게 될 거야. 전쟁에 참전했던 무장들이 모두 자현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고개를 디밀고 들어오는 판이 아니던가. 곧 자네 집안은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권세가가 될 걸세. 그때도 가륜 왕이 자네를 이리 대우할 수 있나 보라고.”
교묘하게 지껄이는 꼴이 참으로 간살스럽다. 사나운 눈매로 친우를 노려보던 자현은 곧 갈기갈기 찢어진 왕의 서한을 보았다. 이 속에 붙은 불이 꺼진 것은 아니나, 지금은 잠재워야 할 때였다.
그래, 이놈 말처럼 내가 그리 비참한 꼴은 아닌 게야. 두고 보라지.
“이 수치를 잊겠단 말이 아니야. 내가 당한 굴욕, 되갚아 줄 걸세. 나를 가지고 논 대가는 왕이라 해도 톡톡히 치러야 할 거야.”
“뜻대로 하게나.”
잠시 비령을 노려보던 자현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
사방이 먹물에 잠긴 것처럼 새까맣다.
한 치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 침침한 어둠 위에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퍼져가는 피 웅덩이 위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섰다.
웅크린 등. 그의 발밑에서부터 흘러나온 붉은 융단이 넘실넘실 제 발치를 메우고도 모자라 강을 이루며 길게 길게 흐른다.
우적우적. 짐승이 고기를 뜯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뼈를 와그작거리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의 커다란 몸 밑에는 늘어진 시퍼런 손가락이 그 소리에 맞추어 잘게 흔들린다.
그녀는 격한 두려움과 공포, 자책감, 그리고 슬픔에 휩싸였다. 도무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뱃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늪 속에 잠긴 듯도 하고 불 속에 갇힌 듯도 하다.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여 보지만 목까지 찬 말들은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 않는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비명을 지르려 했던가. 제발 그만하라고 고함을 내지르려 하였나. 모르겠다. 망설이는 사이 발밑에 고인 피는 치맛자락을 타고 올라와 제 몸까지 얼룩덜룩 물들였다.
이제는 저도 새빨갛다.
‘나는….’
간신히 토해 낸 신음 소리에 그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쓴 귀물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난다. 검붉은 색으로 얼룩덜룩 젖은 입가. 발치에 흩어져 있는 육편. 가슴에 구멍이 뚫린 처참한 시신을 붙든 채 그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그 말은 소리가 되어 귓가에 닿지 않는다.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후아….”
목까지 찬 숨을 토해 내며 소루는 버릇처럼 눈꺼풀을 매만졌다. 검은 장막 속에서 갇힌 듯 어두운 세상에 희뿌연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린다. 아직도 꿈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는 땀에 젖은 얼굴과 손발을 매만져 한참을 확인했다.
‘최근 들어 계속 꿈자리가 사납다.’
또다시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려는 것은 아닐까.
선득한 예감에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게 식었다. 뻣뻣한 손가락을 주무르기를 몇 번, 물먹은 솜처럼 묵직한 몸을 일으켜 세우자 요를 짚은 손 옆으로 스르륵 뱀 같은 것이 기어갔다. 그 서릿발 같은 찬기에 소루는 몸서리쳤다.
어디선가 그런 제 모습을 비웃는 듯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요한 모습을 보이면 놈들이 더욱 기세등등하여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루는 들리지 않은 척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요를 개었다.
근처를 어슬렁어슬렁거리던 귀물이 재미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멀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그저 잡귀의 기세에 눌린 것뿐이다, 하고 중얼거리며 묘한 불안감을 가슴속에서 몰아내는 데 열중했다.
‘내가 이 안에서 얌전히 숨죽이고 있는 한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요 몇 년간 조용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리 쉴 새 없이 중얼거려 보아도 좀처럼 마음은 진정되지 않는다. 그런 불안한 심리를 꿰뚫듯 귀물들의 웃음소리는 더욱 짙어졌다.
진절머리 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때로는 차라리 귀도 먹어버렸으면 하였다.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말을 걸어주는 것도 어차피 요물들뿐이었다. 이 깜깜한 세계에 있는 것이라고는 저들의 찬 숨결과 악의에 찬 웃음소리, 그리고 온갖 흉한 조롱뿐이다. 그 차디찬 아우성을 온종일 장승처럼 앉아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정신이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아니, 왜 제가 아직도 제정신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 한줄기 빛도 들지 않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수년을 죽은 시체처럼 살아왔다.
왜 나는 미치지도 못하는 것인가. 짙은 무력감에 잠겨 소루는 무릎을 잔뜩 웅크렸다. 마음을 좀처럼 추스를 수가 없다. 그리 사당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멍하니 있는데 저벅저벅, 귀신 아닌 것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 느릿느릿 무심한 발소리에 그녀는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매일 아침 씻을 물과 식사를 넣어 주는 신녀가 온 모양이었다.
하루 세 번 느릿느릿 다가왔다가 재빨리 멀어지는 그 발소리. 비록 누구 하나 그 문을 넘어 다가오거나 말을 걸어주는 일은 없었지만 사람의 인기척은 늘 그녀를 안심시켜주었다.
소루는 그녀가 겁을 먹지 않도록 등을 돌리고 앉아 숨을 죽였다. 하지만 반만 열린 문틈으로 물건만 밀어 넣고는 후다닥 가버렸을 이가 웬일인지 가만히 문 앞에 서서 자리를 한참 동안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인가 하며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가실 곳이 있습니다.”
설마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기에 소루는 일순 넋이 나갔다. 사람의 목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수군거리는 것이 아니라 지척에서 제게 걸어오는 말소리가 얼마 만이던가.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있자 신녀가 조급하게 채근한다.
“서둘러 주십시오.”
그 싸늘한 음성에 소루는 무슨 일이냐 묻지도 못하고 움찔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녀를 따라 조심조심 문밖으로 나서자 밖에서 대기하고 선 이들이 제 좌우에 서서 따른다. 연행이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혹, 왕께서 드디어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나.’
그 생각에 마음 깊숙이 안도감이 들었다.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삶. 숨 쉬는 일이 얼마나 버겁고 번거로웠던가. 이제 곧 끝이 난다 생각하니 마치 기나긴 노역을 마친 것처럼 속이 다 후련하다.
하지만 곧이어 무언가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당에 신녀 이외의 누구도 발길을 들이지 않게 된 이후 흉흉한 일도 잠잠해지지 않았던가. 왕이 새삼스레 저를 신경 거슬려할 이유가 없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로 저를 둘러싼 이들의 기척을 살폈다. 비록 두 눈은 빛을 잃었으나 감각은 기묘할 정도로 밝아져 그녀는 내뿜는 기운이나 발소리만으로 사람을 가릴 수가 있었다.
자신을 인도하는 무녀는 모두 여섯. 앞서 가는 이가 둘, 좌우에서 따르는 이가 둘, 뒤따라오는 이가 둘. 모두 자신과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인기척을 내어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계단이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단이 열두 개이옵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하는 물음이 목까지 차올랐다. 동시에 무슨 상관이냐,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저다. 제가 향하는 곳이 어디든,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무슨 상관인가. 그런 체념에 잠겨 그녀는 말없이 무녀들의 지시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해 어느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소루는 코끝을 찡그렸다. 습하고 뜨끈한 증기가 얼굴 위로 확 쏟아졌던 것이다. 여기가 대체 어딘가 하며 본능적으로 얼굴을 감싸는데 등 뒤로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더니 맞은편에서 새로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모두 네 명. 그들이 말없이 다가와 제 몸에서 옷을 벗겨내더니 곧 더운물을 끼얹었다. 소루는 소스라쳤다.
‘대체 뭐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손길에 절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머리 위로는 꽃향기가 나는 기름이 쏟아졌고 등이며 어깨에는 부드러운 수건 같은 게 문질러졌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대체… 무얼 하는 게냐.”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몸에서 물기를 닦아내는 손을 붙잡아 물었다. 오랜만에 낸 꽉 잠긴 음성이 제가 듣기에도 으슥하게 들린다.
손을 붙잡힌 이가 두려움을 느낀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모, 몸치장을….”
“사당 안에서만 지내는 내가 치장을 해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호, 혼례식을 치르려면… 서, 성장(盛粧)을 하셔야 하기 때문에….”
소루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혼례?”
저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듯한 단어에 일순 정신이 멍하여졌다. 방 안에 불편한 침묵이 감돈다.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저를 둘러싼 이들 모두 손을 멈춘 채 눈치만 보는 기색이었다.
한참을 잠자코 있던 소루가 이윽고 입을 열어 물었다.
“…오늘, 나의 혼례식이 있느냐?”
“…예.”
“상대가 누구인가?”
“자, 자호 가문의 장남… 자현이옵니다.”
호라 함은 무가의 뒤에 붙는 칭호. 무관인가.
“그는 대관절 무슨 죄를 지은 것인가.”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선 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영웅이시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분께서 대왕께 공주 전하와의 혼례를 청하셨다 합니다.”
“공주와의 혼례를 청해?”
하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그 말에 단박에 상황이 이해되었으니, 내가 공주인가? 누가 저를 공주라 생각하던가. 그가 달라고 청한 것은 공주이니 나는 아닐 것이다. 영웅이란 자가 탐낼 만한 공주가 누구인가. 왕의 첫째 딸은 시집간 몸이오, 둘째 딸은 정혼자가 있으니, 그가 원한 것은 가륜 왕의 금지옥엽 막내딸 가란 공주일 것이다.
거의 평생을 사당 안에서만 갇혀 지낸 소루도 궁궐 일은 대강 알고 있었다. 귀신들은 천지 사방 일에 관심이 많고, 말이 많아 하루 종일 쑥덕대기를 좋아한다. 그들의 시답잖은 잡소리를 온종일 듣고 있다 보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게 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가란 공주 미모가 작약 같고 모란 같으며, 그 자태가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 가륜도 제 딸이라 하면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귀애한다지 않던가. 그 사내는 아마 가란 공주를 청했으리라.
허나 가란 공주가 누구던가. 궁궐에서 가장 귀한 처자라. 위로 두 왕자와도 우애가 돈독하고 정이 두터우며, 가륜 왕도 제 막내딸을 물고 빨고 한다지 않다던가. 그런 것을 탐을 내었으니 그 불쌍한 사내가 왕에게 단단히 밉보여 나 같은 혹을 붙이게 생겼구나.
‘영웅이라 불리는 이에겐 참으로 부당한 대우다. 가륜 왕은 도량이 좁은 자로구나. 자현이라는 자가 영웅이라 불린다면 합당히 대우하여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이득이건만, 어찌 사감에 치우쳐 이리 박대하는가. 허긴, 그 속사정까진 내 모를 일이다만.’
문뜩 공주는 웃었다.
‘남 얘기 하듯 할 게 아닌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혼례라니….’
더군다나 상대도 원치 않을 게 분명한 혼인이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시비들의 손길이 번거롭지 않게 조심하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허울뿐인 혼인으로 끝날 것이 자명했다. 자현이라는 자가 곁에 두면 화가 된다는 계집을 끼고 살진 않을 것이다. 아마 식을 치른 뒤에는 어디 멀리 절간에나 보내겠지. 차라리 그편이 소루로서도 더 마음 편했다.
‘더 이상은…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누구도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 그저 조용히 그리고 가능하면 빨리, 이 생을 마치고 싶었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업이 깊어질 뿐이다.
그 업이 더 깊어지길 원치 않으면, 우리에게 몸을 내어 주시오.
그 속엣말을 엿들은 듯 사방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득키득. 틈을 살피는 듯한 붉은 눈알들이 어둠 속에서 시뻘겋게 빛난다. 세상에 난 이래로 단 한 순간도 제 곁을 떠난 적이 없는 수십 쌍의 형형한 눈알들이 섬뜩하게 가늘어진다.
소루는 몸서리쳤다. 왜 눈이 멀었음에도 저것들만큼은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먹을 테면 먹어라. 어째서 보기만 하는가.’
소루는 반발하듯 중얼거렸다.
요괴들은 왁자지껄 웃어댈 뿐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는다. 왜 곁을 얼쩡얼쩡거리기만 하고 해치지는 않는 것인가. 차라리 내 몸을 쥐어뜯어 주었으면 하건만, 주변의 인간들에게만 분풀이를 해댈 뿐 요괴들은 자신에게 쉽사리 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탐심에 절절 끓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곁을 빙글빙글 맴돈다. 잠시도 제 곁을 떠나지 않고서 호시탐탐 그 탐욕에 찬 시선을 보내온다.
“이리 나오십시오.”
물기를 닦아낸 몸에 속치마와 저고리를 입혀준 시녀의 말에 소루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술렁거리는 격한 울분과 슬픔을 추스르고서 그녀는 그들의 경직된 손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또 다른 방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머리며 얼굴에 치장을 해주기 시작한다. 소루 공주는 인형처럼 앉아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분주한 그들의 틈 사이에 섞인 귀신들은 계속해서 낄낄 불길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피안(彼岸)과 차안(此岸)이 혼잡하여 어지럽다. 소루는 미간을 모았다. 귀신 공주의 혼례를 구경 나온 귀물들이 사방에 드글드글해 사람의 기척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시면… 식이 시작될 때 모시러 올 것입니다.”
치장을 끝낸 여종이 조심스레 말했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냉큼 방을 나간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둘러싼 잡귀들이 사방에서 어지럽게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소루 공주의 낭군은 보름도 못 살고 죽을 것이다.
천지 귀물들이 이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지.
소루 공주를 노리던 요괴들의 심사가 뒤틀리었으니….
오늘 많은 장사가 치러지겠구나.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소리에 귀가 다 먹먹해진다. 사방에서 너울너울 어둠이 소용돌이쳤다. 이리 많은 귀신들이 작정을 하였으니 조용히 끝나진 않을 것이다. 또다시 통곡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는가.
그녀는 처연한 얼굴을 하였다. 제게는 막을 힘이 없다. 그저 덩그러니 서서 가만히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괴롭게 하면서까지 숨을 이어가는 이유는 대관절 무엇인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제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이 무의미한 삶을 왜 이어나가고 있는 것인지…. 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는 괴롭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귀신들은 제 몸이 천고에 다시없는 영약이라 하였지만 소루는 세상 천지에 나같이 해로운 것이 또 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무구한 이들에게 해를 끼치고 괴로움과 공포만을 주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인 제가, 어찌 약이란 말인가.
누구도 저와는 닿지 않으려 하고 쳐다보지도 않으려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려진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다른 이의 이름을 불러 본 일도 아득했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애물단지. 그게 저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소루는 황급히 소매로 눈가를 눌렀다. 기껏 수고하여 해준 화장이 망가지게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울적한 기분을 추스르려 애쓰고 있는데 때마침 장지문 바깥쪽에서 이리 나오십시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소루는 흠칫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귀신이 부르는 소리인지 사람이 부르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멍하니 눈꺼풀을 깜빡거리기를 두어 번, 소루는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사방에 자욱이 고인 어둠이 기분 나쁘게 일렁거린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어둠 속에 잠겨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피안과 차안이 뒤섞여 어지러운 세계. 캄캄한 암흑이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천지가 붉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방천지가 피에 잠겨간다.
요물들이 보여주는 그 잔혹한 환상에도 그녀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않았다. 그저 신부답지 않은 식은 얼굴을 하고서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나갈 뿐이었다.
소녀는 죄인처럼 푹 고개를 숙인 채 혼례식장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