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겜블의 규칙 (25)
푸른색 도자기로 만들어진 뱀이 입에서 물을 졸졸졸 뿜어댔다. 가느다란 물줄기가 자그마한 그릇 안으로 뿌려지며 작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릇 안에 또아리를 튼 뱀은 꼬리로 물을 빨아들이고, 입에서 물을 다시 뿜어내기를 반복했다.
해무는 장식장 위에 놓인 도자기 분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수회의 접견 대기실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간이었다. 주변으로는 괘종시계와 도자기 찻잔, 난이 심어진 화분 따위가 무의미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들은 모두 구룡성채라는 곳에 걸맞게 군데군데 고장나거나 이빨이 빠져 있었다.
그저 허상뿐인 공간. 그 구석에 놓인 소파에 앉은 채 해무는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으로는 그저께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페이 롱의 아지트, 도살된 시체로 가득찬 그 장소에서 벌어졌던 일을.
자신과 수호, 그리고 페이 롱 사이에 벌어진사투. 그 과정에서 일어난 폭발로 인해 그곳은 폐허가 되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남아있던 것은 고압 탱크의 파편과 산산조각난 고깃조각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육편 속에서 어렵지 않게 페이 롱을 찾아낼 수 있었다. 너덜너덜하게 잘린 그의 목을.
하지만 그 시쳇더미 속에 수호의 모습은 섞여있지않았다. 남한의 요원은 말 그대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업을 완수한 것일까?
그 무엇도 확실하게 마무리된게 없었다. 남한의 요원은 모습을 감췄고, 어음은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 성공하지도, 그렇다고 실패하지도 않은 그 애매모호한 경계 속에서 해무는 자신의 업이 어떤 판정을 받을지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었다.
잠시 후, 어전에서 나온 시종이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전했다.
접견실 안으로 들어서자 살수회주 주원형이 어좌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왔나."
회주가 무뚝뚝한 인사로 해무를 맞이했다. 해무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업의 결과를 보고하러 왔다."
회주의 옆에서는 담당 관리인 타오 슌이 불쾌함을 띈 얼굴로 해무를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을 거치지 않고 회주에게 직접 보고하겠다는 해무의 억지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원래대로라면 담당 관리에게 업의 결과가 전해지고, 관리가 회주에게 서면 보고를 하는 것이 정식 절차였다. 하지만 해무는 이 절차를 전부 무시한 채 자신이 직접 보고하겠다고 억지를 부렸고,때문에 타오 슌은 업의 전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불쾌한 기분으로 불려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무는 담당 관리의 기분 따위에 신경쓰지 않았다. 대신 비닐에 밀봉된 종잇조각을 품 안에서 꺼내어 내밀었다.
"그건 뭐지."
"어음."
회주의 질문에 해무가 간결히 답했다.
감정 없는 눈으로 물건을 내려다보던 회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어음이라 할 수 없군. 불타고 찢겨져서 인장까지 손상되었는데, 그걸 어음이라 부른단 말인가? 단순히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던가."
해무는 순순히 인정했다. 회주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인장이 손상된 이상, 카지노도 어음의 지급보증을 이행하지 않을 테니.
그 대답을 들은 회주의 입꼬리에 미미하게 분노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네놈은 살수회가 지원한 자금 삼십억을 잃은 셈이로군."
"계산이 틀렸어. 삼십억을 잃은게 아니라, 고작 삼십억을 써서 위험한 상황이벌어지는걸 막은 거지. 이 정도면 아주 성공적인 결과 아닌가?"
애초에 살수회가 해무에게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더라면, 남한의 요원들이 천억원을 탈취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그 점을 고려한다면 삼십억을 잃은 것이 아니라 구백 칠십억을 벌어들인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카지노의 수입이 구룡방의 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럼 결국 돈을 번거나 마찬가지지. 내 계산이 틀렸나?"
해무의 말에 회주의 얼굴이 비틀려졌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지워내며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알겠다. 업의 평결에 참고하도록 하지."
상황을 보면 마치 회주가 해무의 요구를 받아들여준 듯 했다. 하지만 해무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하고싶은 말은 많았다.
어째서 현장에 을종들을 보냈냐고 따져 묻고싶었다. 그 놈들 때문에 계획이 틀어지면서 오히려 상황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이 감당했어야만 했다. 어설프게 을종을 투입한 것은 명백한 살수회 측의 실책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페이 롱도 있었다. 이미 자신에게 배정된 업에 다른 갑종살수를 개입시키는 것. 그것은 명백한 방해 공작에 속했다.
하지만 해무는 따져 묻지 않았다. 더이상 입씨름을 하기에 해무는 너무 지쳐 있었다.
"당신들이 내 보고를 잘 알아들었다면, 내 평가 기록에 이번 업이 성공이라고 기록해야 할 거야."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해무는 발걸음을 돌렸다.
"조급하군."
회주의 말에 어전을 떠나려던 해무가 멈춰섰다.
"네 말대로라면 업은 끝났다. 그런데 뭐가 그렇게 네놈을 다급하게 만드는거지?"
"그야 재미없는 영감탱이와 까칠한 담당관리 앞에서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보다는 빨리 주점에 가서 잔뜩 취하고, 창관에서 여자와 질펀하게 뒹굴고 싶거든. 문제 있나?"
"거짓말을 하고 있군."
회주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의 눈이 짐에게 거짓이라 고하고 있다.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 살수. 아직 끝내지 못한 업이 남아있는가?"
"......요원의 시체를 확인 못 했어."
고민 끝에 해무가 실토했다. 업이 완벽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대답이었다. 회주가 불호령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회주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놈이 살아서 성채 안을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다고. 당신들은 이게 아무래도 좋은 일인가? 놈은 적국의 요원이야. 심지어 동료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고 있지. 그런 놈이 성채 안에 머물고 있으면 당신들도 편히 발뻗고 자지 못할텐데?"
해무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구룡성채라는 좁디좁은 울타리. 그 안에 갑종 급의 무력을 지닌 적이 숨어있다. 목 앞에 칼이 들어와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돌아온 회주의 반응은 냉담했다.
"상관없다. 놈이 뭐가 됐건, 결국 성채의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고 말 터."
"하지만ㅡ"
"우리가 재물을 잃었는가? 그들이우리를 무너뜨렸는가? 혹은, 그들이 아직건재한가? 이 안에서 성채를 무너뜨릴만한 여력이 있는가?"
휘몰아치는 회주의힐문에 해무는 대답하지 못했다.
"놈의 상처입은 육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체류 기간을 어긴 외지인들을 공안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도 않을 테지. 그들이 처리하게 내버려 두어라."
살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자들이며, 갑종 살수는 프로중에서도 프로다. 프로는 돈을 위해 움직이며, 쓸데없는 감정과 개인적인 목적 따위는 철저히 배제한다.
그러니 남한 요원들의 처분이 공안들에게로 넘어갔다면, 남의 일에 쓸데없이 끼어들지 않는 것이 진정한 프로의 자세이다.
"그러니 그대의 업은 이걸로 끝이다. 더이상 경거망동하며 집착하지 말라, 어린 살수여."
회주의 경고, 동시에 축객령이 내리자 해무는 더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이를 악문 채 접견실을 나섰다.
살수회의 명으로 남한 요원들의 자금 탈취를 막아내고, 잠입한 요원들을 쫒아내거나 사살했다. 남아있는 자도 있었지만, 그 또한 어딘가에서 자연히 죽을 것이다. 그리고 회주가 업이 완료되었음을 공언했다. 해무의 업이 달성되었음을 확정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만족했다. 해무 자신만을 제외하고는.
ㅇ ㅇ ㅇ
"어디 가."
살수회 본관을 나온 해무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단하가 불러세웠다.
"일 하러. 형은?"
"회주 만나려고 왔는데,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더라."
해무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하는 해무의 얼굴에 드러난 미묘한 기색만으로도 회주와의 대화가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너 때문이지?"
"그새낀 병신이야."
"너 때문 맞네. 어쨌든,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나중에 만나려고."
"그러던가."
해무는 대충 대꾸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단하는 순순히 해무를 보낼 생각이 없었다. 해무의 조급한 발걸음 뒤로 단하의 발걸음이 뒤따랐다.
"나한테는 뭐 없어?"
"뭐가?"
"내가도와줬잖아. 을종 새끼들한테서 빠져나오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알아? 그 새끼들은 약하면서 끈질기고 숫자도 많다고. 최악이지."
"수고했어."
"......그걸로 끝?"
"형이랑 나 사이잖아? 서로 돕고 사는거지."
해무의 대답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단하는 아무래도 자신이 요즘 손해보고 있는 것 같다면서, 계약을 갱신해야겠다고 투덜거렸다. 물론 둘 사이의 협력이 명시적인 계약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불만을 표시하기 위한 말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뭐 하러 간다고 했지?"
"말 했잖아. 일이 남았다고."
"끝난줄 알았는데?"
"마무리가 허술한게 싫거든."
"니가 그렇게 성실하고 열정적인 노동자였는줄 몰랐네."
해무가 무책임한 사람은 아니지었만, 그렇다고 일에 필요 이상으로 성실한 사람도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의 사적인 시간을 들여서까지 살수회와 구룡방에 헌신하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어진 업을 끝내면 해무는 술을 마시고, 여자를 안고, 그리고 받은 돈을 사치와 향락에 탕진했다. 대부분의 살수들이 공유하는 생활 양식이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단하의 얼굴은 미심쩍어하는 기색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래서, 놈을 찾으러 가는거야?"
"......."
갑작스레 핵심을 찌르는 단하의 질문에 해무는 침묵으로 답했다.
"왜? 이미 나갔겠지."
"그럴 수도."
"그러면 왜 가는건데?"
"안 나갔을 수도 있으니까."
지난한 대화가 오갔다.
단하는 해무를 동료이기 전에 형제라고 생각했다. 잔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감정적이 되는 동생을 위해 해야할 일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해무, 감정을 가라앉히고 머리로 생각해. 네 업은 끝났어. 남한 놈들이 돈을 탈취하는걸 막아낸다, 그게 네게 내려진 명령이었잖아. 분명 네 입으로 그렇게 말했지."
"......그래. 내 업은 끝났어."
"그럼 전부 잊어버려. 끝난 업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내가 쓸데없이 잔업을 하는게 그렇게 맘에 안 들어? 좋아, 그럼 바꿔 말할께. 이건 개인적인 일이야. 공적인 일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일."
"너, 감정적이네."
그 말에 해무는 멈춰섰다. 그리고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감정적이라...... 뭐, 형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기분 더러운건 뭔지 알아? 그게 마치 내가 계집이 되어서 성격이 더러워 졌다는 것처럼 들린다는 말이지."
"이것 봐. 또 감정적이잖아."
하마터면 해무는 단하의 얼굴을 후려칠 뻔 했다. 하지만 간신히 분노를 삼켜넘기고는 입을 열었다.
"좋아, 무슨 얘기를 듣고싶어?"
"니가 왜이렇게 열정적인 노동자가 됐는지. 그리고 어째서 이미 다 끝난 업에 집착하는지."
"간단해. 내가 놈을 죽이지 않는다면 살수회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몰라."
"계집의 몸뚱아리가 되어서 겁을 먹었다고, 약해졌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나는 다른 살수나 관리 놈들이 그렇게 생각하는걸 원치 않아."
"그래서, 놈들 때문에 굳이 끝난 업에 매달리겠다고? 회주도 업을 끝내라고 했다면서."
"상관 없어. 설령 업을 끝내라는 회주의 말이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살수회에게 보여주겠어. 내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걸."
단하는 더이상 해무를 설득하는걸 그만두었다. 해무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자기 증명이었다.
계집의 몸으로 갑종 살수라는 지위를 유지하는건 쉽지 않은 일이다. 신체적인 능력도 부족할 뿐더러,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 또한 큰 장애물이다.
그러니 성과로 증명한다. 이전보다도 한층 더 완벽하고 논란없는 일처리로, 해무는 여전히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단하는 침묵했다. 생각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한숨 끝에 물었다.
"도와줘?"
"됐어."
일 끝나면 한잔 살께, 하고 단하를 향해 이야기를 남긴 해무는 거리의 사람들 사이로 섞여들어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