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겜블의 규칙 (23)
우웅, 하고 전화가 울렸다.
수호는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단검이 코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수호는 욕설을 내뱉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눈 앞에서는 두 명의 살수가 빗나간 공격에 이어 재차 단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한명은 왼쪽에서, 한명은 오른쪽에서. 빈틈을 노리고 번갈아 들어오는 칼날에 수호는 계속해서 뒤를 향해 물러났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뒤를 막아선 벽에 등을 맞댄 수호는 어쩔 수 없이 한 살수의 손목을 잡아 칼날을 막아냈다.
하지만 오른쪽에서 들어온 공격은 막지 못했다.
손등을 베인 수호의 손에서 떨어진 전화가 바닥을 굴렀다. 계속해서 울리는 전화의 화면에는 재이의 번호가 찍혀 있었다.
수호는 눈으로 전화를쫒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고작해야 한 발짝 거리를 두고 벌어지는 싸움. 칼과 주먹이 연이어 교차했다. 세 남자의 발에 이리저리 채이던 전화가, 누군가의 발길질에 차여 저 멀리를 향해 굴렀다.
살수가 역수로 쥔 단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그 팔을 잡아낸 수호는 그대로 꺾어, 살수의 목에 박아넣었다.
자신이 휘두른 단도에 목을 꿰뚤린 살수가 컥컥 하고 피 섞인 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다음 공격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빈틈을 노리고 날아온 두 번째 살수의 단도가 수호의 옆구리에 반쯤 푹 꽂혔다.
큭 하고 신음을 흘리며 수호가 비틀거렸다. 1센티만 더 들어와도 내장이 난도질 되는 거리. 그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막아낸 수호는 양 손으로 단도를 천천히 뽑아냈다. 하지만 살수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단도를 밀어넣었다.
다시 단도가 수호의 몸을 천천히 파고들었다. 수호의 이마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간신히 버티는 수호의 몸에 점점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내장이 멀쩡하더라도 과다 출혈로 죽을 수 있는 상황.
상대가 칼날에 온 힘을 집중한 것을 확인한 수호는 순간 손에 힘을 풀고 구둣발로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완전히 균형이 흐트러진 살수가 맥없이 무릎을 꺾었다. 그 틈에 옆구리에 박혀있던 단도를 뽑아 살수의 뒤통수에 퍽 하고 내리찔렀다.
두개골을 쪼갠 칼날이 뒤통수 깊숙히 박혔다. 마치 감전된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던 살수가 이내 풀썩 쓰러졌다.
"하 젠장......."
몸에 박힌 칼을 뽑아 내던진 수호는 천천히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했다. 아까 떨어뜨렸던 전화기는 하수도에 빠져 이미 떠내려간 후였다.
진짜 끝이 없군.
살수들은 바퀴벌레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골목 틈새에서, 폐가의 문 뒤에서, 불꽃을 튀기며 간헐적으로 깜빡이는 네온싸인 뒤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추격에 쓰러질 법도 하건만, 수호는 용케 지금까지의 습격을 버텨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제리 새끼가 있었더라면."
수호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제리창이 곁에 없다.
협조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불쾌한 놈이었지만, 그는 가치있는 존재였다. 그가 있음으로써 구룡방도 섯불리 자신들을 건들지 못했었으니.
하지만 겜블에서 패배를 확정짓자 제리 창은 떠났고, 패배했음에도 어음에 미련을 끊지 못한 수호는 떠나는 그를 잡지 않았다. 대신 어음을 탈취하는 마지막 도박을 스스로 택한 셈이었다.
때문에 추격자들은 이렇게 거리낌없이 자신을 쫒고 있었다. 마치 무력화된 먹잇감을 뒤쫒는 학살자들처럼.
과연 이곳에 남은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제리 창과 달리, 자신과 재이는 성채를 나가더라도 어음이 없다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하지만 지금, 또다시 눈앞의 인영(人影)을 확인한 수호는 어쩌면 자신의 선택이 조금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그 아래서 누군가가 수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 걸친 그림자 밖으로 드러난 은발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어음을 돌려받으러 왔다."
해무가 말했다. 그 건조한 요구에 수호는 쓴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날 찾아온 이유가 고작 돈 때문이라니, 실망스럽군."
"그럼 뭘 기대했지?"
"글쎄? 남녀 사이의 무언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시선이 수호를 향할 뿐이었다.
수호는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이건 더 쉽지 않겠군.
어음을 빼앗긴 해무가 순순히 물러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결국 지금 상태로 그녀와 일전을 벌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지금까지 상대한 살수들보다 훨씬 위험한 저갑종 살수를 상대로.
수호는 오른쪽 옆구리에 대고 있던 손을 떼어 확인했다. 손 아래에서는 번져나온 피가 옷을 끈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직 심각한 정도는 아니다. 일단 안전한 장소로 피한 다음, 적당히 지혈만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다.
저 여자를 따돌릴 수만 있다면 말이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수호가 입을 열었다.
"당신도 내가 그냥 어음을 넘겨줄 거라 생각하고 찾아온건 아니겠지? 원한다면 직접 가져가 봐."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수호의 모습. 그러한 모습을 응시하던 해무가 적막을 깨고 말했다.
"너, 어음이 없군."
대답하지 못하는 수호를 향해 해무가 이어서 말했다.
"어음도 없고, 동료도 없이 혼자 적들과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분명 어음은 다른 쪽에게 있겠군."
"확신할 수 있어? 괜히 어음을 눈앞에 두고 시간만 날릴 수도 있을텐데."
"상관없다. 너와 네 일행. 둘 다 찾으면 그만이야."
"나는 몰라도 재이를 잡기에는 늦었어. 이미 한참 전에 출국했지."
"그럼 너는 왜 따라나가지 않고 나를 막고 있는 거지?"
수호는 대답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능글맞게 굴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해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뭐, 내 일행이 검문소로 갔으니 곧 알 수 있겠지."
그렇게 말하며 해무는 생각했다. 여기까지 수호의 흔적을 따라 음직이며 확인한 시체들. 대충 세어본 것만 해도 스무 구 이상이었다.
성채의 뒷골목에서 쫒기면서 살수들 스물 이상을 쓰러뜨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만큼 저 녀석은 필사적인 상태다. 자신의 일행을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악에 받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적을 상대하는데는 큰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해무도 수호도 섣불리 먼저 움직이기 어려운 상황. 상대방을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한 시선만이 오가며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둘 사이를 가득 채운 적막 사이로 전화의 진동음이 울렸다. 해무는 수호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고정한 채로 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받았다.
[해무, 나 검문소에 왔어.]
전화 너머에서 단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놈들은 없어.]
"출국 기록은?"
[알잖아. 공안 놈들은 우리한테 협조 안 해. 뭘 물어봐도 대답도 없더군.]
그렇게 대답한 단하는 이어서 말했다.
[하지만 못 나갔을 거야. 시간상으로 빡빡해. 먼저 떠난 CIA 놈이라면 모를까, 다른 한 녀석이라면 분명 못 나갔을 거야.]
"좋아. 알겠어."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을종 놈들이 나한테 서운한게 많은가봐. 자꾸 귀찮게 구는군.]
그렇게 말하는 단하의 목소리 사이로, 주변을 둘러싼 인파의 인기척이 섞여 들어왔다. 어음의 관계자들을 뒤쫒고 있던 을종들에게 포위당한 모양이었다.
[이자식들 전부 처리하고 가려면 시간 좀걸릴 것 같은데, 괜찮겠어?]
"괜찮아. 수고했어. 나머지는 알아서 할께."
그렇게 말하고 해무는 통화를 끊었다.
"어떻게 생각해?"
눈앞에서 자신의 통화를 묵묵히 지켜듣고 있던 수호를 향해 해무가 물었다.
"네 일행, 나갔을 것 같아? 아니면 이 성채 안 어딘가에 몸을 숨긴채 너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미 말했다. 나갔다고."
"그래? 내가 방금 들은 얘기랑은 다르군."
그렇게 이야기하며 수호의 얼굴을 확인한 해무는 확신했다.
이제초조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놈이다.
놈에게는 이제 자신과 싸울 시간적인 여유조차 없다. 시간이 갈수록 놈의 동료는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어진진다. 놈이 지금 가장 원하는건 자신을 뿌리치고 동료를 찾으러 가는 것이리라.
그렇게 상대가 초조해질수록 자신은 유리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든 부분에서 해무가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여유로운 상황은 아닐텐데."
초조함을 억누르며 수호가 말했다.
"이래봤자 우리 둘 다에게 도움될 건 없어. 나만 물고 늘어지면 당신이 어음을 되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해?"
대답하지 못하는 해무를 향해 수호가 계속해서 말했다.
"오히려 우리가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수록, 다른 놈들의 손에 어음이 들어갈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겠지. 당신도 이미 알고 있잖나. 을종들이 어음을 쫒고 있다는걸. 그 뿐만이 아니지. 심지어 다른 갑종과도 마찰이 있는 것 같더군."
"......."
"그래서, 지금 이렇게 나랑 설전이나 버리며 시간을 낭비할 셈인가? 아니면ㅡ 나와 협력해서 어음을 되찾을 건가."
"나보고ㅡ 네놈과 협력하라고?"
"못할 것도 없지."
살수와 요원이 협력한다. 불가능한 소리다. 애초에 살수와 요원은 함께할 수 없는 관계다. 설령 협력한다 하더라도, 되찾은 어음을 반반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지금 이렇게 여기서 시간을 낭비한다면, 어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자신이 아닌 을종들, 혹은 페이 롱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자신이 어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짧은 고민끝에 해무가 입을 열었다.
"나는ㅡ"
ㅇ ㅇ ㅇ
성채의 좁은 골목 안.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헐떡이는 숨소리가 양 옆으로 서 있는 빌딩 사이로 메아리쳤다. 쉼 없이 달리는 재이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제리 창과 했던 통화의 내용이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 나는 검문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기 중이다.]
[나와 함께 나가면 되겠군.]
개소리다. 재이는 바보가 아니다. 제리 창은 동료를 돕기 위해 자신의 출국을 미루고 기다리기보다는, 동료를 버려서라도 자신 먼저 탈출할 사람이다. 숨길 것도 없는 뻔한 사실이었다. 특무국과 CIA는 서로에게 동료애 따위를 느끼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함정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제리 창이 함정을 파고 자신을 끌어들이기 위해 연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가 말한 장소, 검문소 쪽으로 가는 것은 바보짓이다. 제 발로 함정에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인 셈이니.
그렇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수호와 재합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재이는 전화를 꺼내들어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미연결 통화의 목록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찍혀있는 번호는 수호의 것이었다. 이미 수 차례 시도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재이는 실감했다. 지금 자신이 탈출과도, 수호와 재합류 하는 것과도 시시각각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럴수록 생존률 또한 급감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할 수 있는건, 긴급 집결지로 가는 것 뿐인데ㅡ.
그것이 자신의 유일한 선택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재이는 그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호와 재이, 그리고 제리 창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긴급 집결지를 정해두었다. 하지만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었다. 재이는 제리 창이 배신한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집결지의 위치 또한 유출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수호와 통화 연결이 안되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집결지로 가는 것 뿐이었다. 비록 통화가 연결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다는걸 수호는 알 것이다. 그렇다면 적들이 먼저 도착하기 전에 수호가 먼저 집결지로 오기를 기대하는 수 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품 안에 챙겨둔 물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칠백억 짜리 어음을.
어음은 적들에게 가장 중요한 표적이다. 그럼에도 이걸 자신에게 넘긴다는건, 수호가 자신만 내보내는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조차도 이제는 무의미한 결정이었다. 결국 재이도 탈출하지 못했으니.
겜블의 패배뿐만 아닌 완전한 작전 실패를 실감하며 재이의 머릿속을 절망감이 물들이기 시작했다.
구룡성채의 골목은 복잡하다. 외지인이라면 쉽게 길을 잃는다. 재이는 자신의 기억과 방향감에의지하며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몇차례 길을 꺾고 되돌아오는걸 반복한 끝에, 으슥한 골목 한쪽 벽에 덩그러니 매달린 녹슨 문 하나를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재이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녹슨 문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경첩에서 부스러진 녹이 가루가 되어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안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어둠. 그 어둠의 종류는 완벽한 무(無)와는 달랐다. 불쾌하게 끈적이며 몸에 달라붙는 어둠. 불길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종류의 어둠이었다.
그리고 나쁜 예상은 언제나 틀리지 않는 법이었다.
"이런, 참으로 안됐군. 계속해서 도박이 빗나가다니"
어둠 속에서 빛을 뿌리는 동공이 가늘게 휘며 초생달을 그렸다. 희미하게 드러난 자줏빛 수트는 마치 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쩌겠나. 누구나 다 안풀리는 날 한번쯤은 있는 법이니까."
깊고 짙은 어둠.
그 안에서, 페이 롱이 히죽 웃으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