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겜블의 규칙 (4)
여의맨션(汝矣 Mansion)은 여의도의 몇 안되는 호텔 중 하나였다.
물론 호텔이라 하더라도 여느 거주용 아파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허름한 외관과 그에 못지 않은 내부는 폐허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구룡성채의 거주민이 아닌, 드물게 방문하는 외부인을 위한 장소라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그 맨션의 로비에 두 남자가 서 있었다. 삐쭉삐쭉한 머리를 한, 스무살 정도로 보이는 양복 차림의 남자가 하나. 그리고 그보다 더 어려보이는 남자가 하나.
어린 쪽은 눈에 띄게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호흡 또한 긴장감 탓에 고르지 못한 상태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재이."
양복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그도 재이가 초조해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초조한 것은 자신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그의 이름은 수호. 대한민국 정부 중앙안보부 특무국 소속의 요원이었다. 그리고 재이 또한 마찬가지로 특무국 소속의 행정관이었다.
둘이 여의도에 잠입한 이유는 같았다. 마약을 유통시켜 남한을 좀먹게하는 구룡성채를 무너뜨리는 것.
그리고 둘은 그 작전의 선봉 역할을 맡은 것이다. 즉, 이 작전의 성공 여부에 따라 구룡성채를 향한 남한의 대응 방침이 정해지는 셈이었다.
때문에 수호는 재이가 느끼는 부담과 중압감이 어느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국놈은 왜 이렇게 늦어?"
수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빌어먹을, 화장실에서 뱀이 나오더군."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제리 창이 욕설을 내뱉으며 어기적어기적 다가왔다. 얼굴에는 짜증이 한가득이었다.
"네놈들은 믿을 수 있나? 한창 볼일을 보는 와중에 변기 아래에서 뱀이 대가리를 들이밀었다고."
"거 참 안됐네. 뱀이."
수호가 빈정거렸다. 하지만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제리 창은 흥분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떠들었다.
"아무리 작전 중이라지만 이딴 숙소에서 지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야. 이 염병할 동네에는 제대로 된 호텔 하나 없는 모양이군. 아니면 남한 정부가 네놈들에게 쓸 수 있는 돈이 고작 이것 밖에 안 될 정도로 가난하거나."
"시끄럽고, 엉덩이는 괜찮아?"
"오, 덕분에. 그 빌어먹을 뱀 새끼가 물어뜯지는 못했지."
"실망스럽네. 살찐 엉덩짝에 구멍이 두세개 정도로 늘었기를 바랬는데."
수호가 두 번째로 빈정거렸다. 제리 창은 이번에는 그 말을 알아 들었고,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숙소만 문제가 아니야! 이 계획 자체가 전부 쓰레기나 마찬가지일세. 카지노라니 진심인가? 이딴 작전을 진짜로 밀어부치다니, 네놈들 남한 정부수준도 알만하군."
"뭐가 어때서 그래? 나는 재미있던데. 작전 중에 카지노에서 게임을 하는건 흔한 경험이 아니야."
"어제가 괜찮았다고? 고작해야 수십억을 따냈을 뿐이잖나. 이게 큰 돈이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너네 남한 정부의 소꿉장난질에 내가 끌려들어왔다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군. 효과도 없고 리스크만 높은 작전인 셈이니."
제리 창의 말대로, 그들은 이미 어제 한 차례 카지노에 다녀온 후였다. 그리고 확보한 금액이 고작 수십억 원 뿐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끊임없이 새된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는 제리 창의 모습에 수호는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거 참, 더럽게 시끄럽고 겁많은 새끼네."
"뭐라고?"
"아, 미안. 속으로 말한다는게 실수했다."
자신을 향해 눈알을 부라리는 제리 창을 향해 또다시 한 차례 빈정거린 수호는 생각에 잠겼다.
소꿉장난이라고? 그래, 이건 소꿉장난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을 짜증스럽게 괴롭혀온 성채 놈들을 위해준비한 장난.
하지만 동시에, 꽤나 큰 판돈이 걸린 장난이 될 거다. 게임에 질 경우 성채 입장에선 쓰라리게 느껴질 정도로.
그리고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지금까지 온갖 범죄의 온사 된 성채를 허물고 청소하는 과정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따위 방법으로 성채 놈들에게 타격을 입히려면 적지 않은 돈을 뜯어내야 할 거야. 네놈들은 카지노에서 대체 얼마나 벌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는 건가?"
"그건 우리 리더에게 물어봐야지."
그렇게 말하며 수호는 지금까지 침묵하던 소년을 향해 물었다.
"어때, 재이."
재이는 여전히 얼굴에 초조함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조금 전 보다는 안정된 모습이었다.
"사실, 저 중국놈 말처럼 어제 딴 돈은 기대에 못 미친게 사실이지. 전부 삼십 억 원. 나한테 준다면야 고맙게 받겠지만, 그거랑은 다른 얘기잖아? 짜증나는 성채 놈들을 엿 먹이기에는 좀 부족한 돈이야"
"맞아요.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고작해야 삼십억 원은 실망스럽죠."
"하지만 우리 어린 리더는 할 수 있겠지? 놈들을 엿먹일 정도로 큰 돈을 뜯어내는거 말이야. 전부 얼마나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천억 원."
그렇게 대답하는 재이의 모습은 눈에 띄게 평온했다.
"그 정도라면 이번 출장의 성과로는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요."
"오케이, 천억 원."
재이의 대답에 수호가 만족스런 얼굴로 씨익 하고 웃었다. 뒤에서는 제리 창이 못미더운 기분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수호가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그럼, 오늘도 돈 벌러 가자. 망할 성채 놈들에게 돈을 실컷 뜯어내 보자고."
ㅇ ㅇ ㅇ
뭔가 잘못됐다.
목적지로 향하며 해무는 폰을 꺼내들었다. 낡은 2G 플립폰이었다.
조급함이 발걸음을 빠르게 만들고 있었다. 한손에는 검정색 칩을 쥐고 있는 채였다. 전매청의 마약 공장에서 마주친 남한 요원이 갖고 있던 것이었다.
살수회는 성채에 잠입한 요원들의 목표가 마약이라고 지목했다. 해무 또한 그 생각에 이견이 없었다. 현재 구룡성채가 남한 경제와 사회에 가장 큰 타격을 가하고 있는 원인이 마약 수출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요원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달랐다. 놈들의 행동을 바탕으로 판단하건데, 그들의 목표는 마약이 아니었다. 절대로.
"회주 바꿔줘."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해무가 말했다.
"목소리 들으면 몰라? 해무니까 닥치고 바꾸기나 해!"
핑계를 되며 통화 연결을 미루는 비서관을 향해 해무가 버럭 소리쳤다.
그리고 생각했다.
요원들 중 하나가 공장에 잠입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쓰러뜨리기 까지 했으니.
하지만 바꿔말하자면, 공장에 잠입한 요원은 단 한명 뿐이라는 얘기였다. 심지어 자신이 죽인 상대는 진짜 요원조차 아니었다. 살수회로부터 받은 정보에 따르면, 그는 요원을 서포트하는 전투원에 불과했다. 요원에 비하면 한 급 떨어지는 수준의 전력(戰力)이었다는 뜻이었다.
만약 남한의목표가 성채의 마약 공장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고작해야 전투원 한 명을 잠입시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당연히 다수의 요원급 전력을 투입시켜야 옳다.
이와 같은 정황이 가리키는 결론은 하나였다.
공장은 어디까지나 곁다리일 뿐, 남한의 진짜 목표는 따로 있다.
그렇다면 수호라는 자가 남한이 파견한 전력의 핵심이자 책임 요원일 터. 그가 있는 장소가 곧 남한의 목표일 것이다.
[회주다.]
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수회주 주원형이었다. 해무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당신들 예측이 틀렸어. 남한 요원들은 마약 때문에 온 게 아니야."
[마약 때문이 아니라......?]
"그래. 목표 중 하나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중점 목표는 아니야. 놈들의 목적은 카지노야."
대답 대신 침묵이 이어졌다. 분명 회주는 황당함을 느끼고 있으리라. 남한 요원들의 목표가 마약이 아니라 성채 안의 카지노라는 주장은 그 만큼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회주가 말했다.
[이해할 수 없군. 카지노는 주요 경제시설이 아니다. 공장을 공격하여 마약 유통을 중단시킨다면 성채는 큰 타격을 입겠지. 하지만 카지노가 무너진다고 해서 피해를 입지는 않을 터.]
"그게 아니야. 놈들은 카지노에서 돈을 딸 생각이야."
그래. 그것이 해무의 추측이었다. 분명 놈들은 카지노에서 돈을 벌 생각일 것이다.
황당한 소리라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근거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공장에 잠입한 적이 고작해야 전투원 한명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서 카지노에서 쓰는 칩이 나왔다는 것.
고작 그 두개 뿐.
반면 해무의 추측을 반박할 근거는 차고 넘쳤다.
남한의 범죄자들이 마약을 사기 위해 성채에 지불한 막대한 돈. 그 돈을 되찾기 위해 카지노에 잠입한다? 무식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는 계획이다. 성공 가능성은 낮고, 위험은 큰 계획.
그런 멍청한 계획을 남한의 정보기관이 승인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률이 낮은 도박이라 하더라도, 게임에서 이길 수만 있다면 가능성은 곧 현실이 된다.
실제로 현실에는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뛰어난 능력으로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
갑종 살수들 또한 그런 부류에 속했다. 불가능한 암살을 현실로 만들어 사람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자들이었으니까.
그렇다면 분명,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승리로 만들어 막대한 돈을 따낼 수 있는 사람들도 존재할 것이다. 능력에 따라서 수백억 원을, 어쩌면 그 이상도.
구룡방이 체제 유지를 위해 사용하는 예산이 1년에만 3조원 정도 될 것이다. 십억 이십억 정도의 돈이 섬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그저 따끔한 바늘에 찔리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금액이 수십, 수백억을 넘어, 천억 단위에 이르게 된다면? 그저 따끔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 구룡방의 체제가 휘청일 정도의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어리석군. 그래봤자 죽이면 그만이야.]
회주의 말대로였다. 피와 폭력이 지배하는 이 도시에서, 과도하게 많은 돈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부른다. 그리고 놈들이 적당히를 모르고 수십억을 넘어 수백억이나 되는 돈을 따서 남한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놈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것이다.
"하지만 놈들도 바보는 아니야. 돈을 빼돌릴 계획 정도는 미리 세워 놨겠지."
[계획? 이 도시에서? 어리석은 소리. 여긴 계획이 통하는 곳이 아니다. 한때는 자신들의 머리를 믿고 날뛰는 놈들이 있었지. 그리고 전부 죽었다.]
"......."
[신경 꺼라. 만약 네놈이 말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방이 직접 움직일 것이다. 그런 바보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그리고 통화가 끊겼다.
해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회주의 반응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헛소리 취급 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리라. 누가 들어도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할 법한 소리였으니.
하지만 해무는 확신하고 있었다. 놈들의 목표는 분명 카지노라고.
그 추측을 확인할 방법은 간단했다.
하나. 지금 당장 카지노로 간다.
둘. 그곳에 수호를 비롯한 남한 일행이 있는지 확인한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유일한 걸림돌은 회주의 지시였다. 회주는 카지노에 대해서는 신경 끄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카지노 안을 헤집고 다니는건 명백히 지시를 무시하는 일이다. 만약 그가 알게 된다면 분노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점에서, 생각없이 회주의 지시에 순응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남한 놈들이 정말 카지노에서 수백억을 따간다 하더라도 무슨 상관인가. 자신은 그저 회주의 지시를 따랐다고 대답하면 된다. 아무 책임이 없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졌다.
자신은 꼭두각시가 아니다. 갑종 살수는 살수회로부터 지시받는 위치에 있지만, 동시에 현장에서 직접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이 있다.
그리고 자신은 그저 회주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스스로 포기하고 납죽 엎드리는 개새끼가 되지 않을 것이다.
"회주 좆까라고 해."
그렇게 중얼거리며 해무는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당연히, 카지노를 향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