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화 〉변신 (7) (8/82)



〈 8화 〉변신 (7)

단하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기다렸다.


해무가 뒷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간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하지만 단하의 머릿속에서는 지금이라도 따라들어가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해무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혼자서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하가 해무의 능력을 믿는 것과 별개로, 씻겨지지 않는 불안감이 마음 속 한 켠에 자리하고 있었다. 살수로서 쌓아온 직감이 경고하는 불안감이.

아직까지해무로부터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귓속에 꽂혀있는 통신기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고, 주변에서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교회 주변은 적막했고, 하늘을 빙빙 도는 까마귀가 가끔 울어대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멀리서 먹구름이 몰려오고있었다.


비가올 것 같았다.

비가 오면 위험 요소는 더 늘어난다. 폭우 속에서 모습을 숨기는데는 도움이 될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있어서 이곳은 외지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했을 때 더  위험에 빠지는건 자신들 쪽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일을 마무리 해야 한다.

해무에게 작전 속도를 재촉하려던 단하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굳어섰다.

커다란 디젤 엔진 소리였다.

단하는 무너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엔진의 진동 소리에 땅이 덜그럭거릴 정도였다. 그리고 진동의 정체를 확인한 단하의 입이 벌어졌다.


엔진음의 정체는 BTR-80. 러시아제 차륜형 장갑차였다.

포탑을 제거해 오직 병력수송용으로만 개조한 차량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단하의 머릿속은 온통 경고 알람으로 가득  있었다.

'젠장...... 해무, 대체 뭘 건드린거야.'

화력을탑재하지 않은 장갑차라 해도 군용차량은 일반차량과 급이 달랐다. 차량 자체의 스펙도 비교가 안 될 뿐더러, 무엇보다 더 심각한 점은 상대방 세력이 군용 차량을 운용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해무도 상대가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급히 B지구로 넘어오는걸 다시한번 생각해 봤을테니.


하지만 해무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살수중 그 누구라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끼어든 상대가 장갑차를 끌고올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  테니까.


장갑차는 교회를 향해 직행했다. 거대한 흰색 게이트 사이를 통과해서.

하지만 공터의 요철 때문에 좌우로 출렁이던 장갑차는 게이트 사이를 완전히 통과하지 못하고 한쪽 기둥에 부딛혔다. 게이트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거대한 철골 십자가가 아래로 떨어졌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장갑차가 충격으로 흔들렸다. 주변으로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 먼지가 걷히고 드러난 장갑차의 모습은 멀쩡했다. 아무리 커봤자 철골이었고, 포탄도 견디는 장갑차를 그 정도로 부술 수는 없었다.

잠시 움찔거리던 장갑차는 후진하며 위에 얹혀있던 철골 십자가를 바닥에 쏟아냈다. 그리고 다시 전진하며 그 위를 쓸고 지나가자, 흉물스레 뒤틀린 철골 십자가의 잔해가 장갑차의 바퀴에 깔려 납작하게 찌그러졌다.

차는 물에 젖어있었다. 장갑차의 이동 경로를 보았을 때, 한강에 반쯤 잠긴 서강대교를 지나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놈들이 분명했다.


그 정보를 머릿속에 메모하며 단하는 통신기의 연결 상태를 확인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사실을 해무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해무와의연락은 되지 않았다. 그것이 장갑차의 커다란 엔진 소리 탓인지, 아니면 해무가 통신에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 때문인지는  수 없었다.


결국 지금 당장 해무에게 상황을 전달하는걸 포기한 단하는 상대의 정보 수집에 집중했다.


장갑차가 교회 정문 앞에 멈춰섰고, 잠시 후 해치가 열리며 사람들이 내렸다.


사람들의 반 정도는 군복 차림이었다.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채였다.

하지만 군인들은 아니었다.


단하는 목표물이 어떤 종류의인간인지 구별할 수 있는 눈썰미가 있었다. 그리고  눈썰미는 훈련받은 진짜 군인과, 그저 군복을 입은 범죄자들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놈들의 복장이 완전한 군복이 아니라 사복과 반쯤 뒤섞여 있는 채라는 점도 놈들이 군인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데 한 몫 했다.


놈들의 숫자는 전부 열 다섯명. 열 명이 간신히 탈 수 있는 장갑차에 몸을 잔뜩 구겨넣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무언가 얘기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단하는 생각했다.

움직일 때인가?


아니다. 단하는 부정했다. 아직은 아니다.

자신의 역할은 이곳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고 해무를 지원하는 것. 물론 적절한 순간에 적의 병력을 커트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다섯명의 병력과 전면전을 벌이는건 자신의 역할이 아니다.

잠시 기다리자, 항공 점퍼 차림의 남자를 포함한 세 명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남은 것은  두명.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빗줄기였다. 하지만 조금 있으면 굵어질 비였다.

나머지놈들은 교회 정문에서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듯 했다. 명백히 긴장감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인가? 아직도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리고 또 얼마 뒤, 한 팀이 무전기로 연락을 받고는 안으로 향했다. 이제 밖에 남은 것은 여섯 명.


그리고 멀리서 총성이울려왔다.  번.


절대로 착각할 수 없는, 해무의 .44 매그넘이 울리는 거대한 폭음이었다.


지금이다.

단하는 몸을 숨기고 있던 벽을 뛰어넘어 달렸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자동권총의 억누른 총성이 이어졌다.


갑작스런 습격에 여섯 명의 군복 차림 남자들은 우왕좌왕했다. 확실히, 제대로 훈련받은 상대는 아니었다.

곧이어 자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폭음과 함께 AK47이 총알을 흩뿌렸다.

하지만 늦었다. 단하의 근접을 허용한 시점에서 소총 사격은 유효하지 못했다.

첫 번째 적의 총열을 쥐고  비틀었다. 개머리판이 턱을 후려치며 쓰러졌다.


 몸뚱아리를 방패막이 삼아 돌진했다. 두번째 놈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어서 한발, 두발.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던  명을 죽였다.


마이너스 원.


마이너스 투.

그 뒤에 있는 두 명.


 사이로 파고 들자 놈들은 총구를 겨누면서도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하지만 단하는 얼마든지   있었다.

마이너스 쓰리, 마이너스 포.

그것으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아있는건 오직 단하 뿐이었다.

처음 바닥에 쓰러졌던 두 명이 신음을 흘렸다.


단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차례.

마이너스 식스.


쓰러뜨린 적의 숫자를 속으로 세며 단하는 장갑차의 캐빈 안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마이너스 15까지 남은건 총 아홉 명.


탄창을 확인했다. 13발 짜리. 사용한건 여섯 발. 남은건 일곱 발.


총알은 아직 여유가 있다. 다만 시간이 없을 뿐.

숨을 고르며 단하는 다음 행동을 결정했다.


처음 울렸던 네 발의 총성. 의심할 것도 없이 그 총성은 분명 해무의 것이었다. 그쪽에서도 무언가 상황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안으로 진입해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진입해서 해무와 접선하고 탈출해야 한다.


결정을 내린 단하가 정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뒤쪽 멀리에서 또다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와 똑같은 엔진 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멀리 서강대교 위로 BTR-80 두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강을 도하(渡河)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으며 단하는 곧바로 안쪽을 향해 달렸다. 이제는 더이상 망설일 것도 없었다.

단하는 교회 안의 대형 회랑을 달렸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한 문제가 발생했다. 복잡한 구조. 복잡한 동선.

해무를 쉽게 찾을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초조함이 피어올랐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도 찾아야 한다. 120호로 가야한다.

옆에 있는 방은 140호. 여기가 아니다.

단하는 원형 통로를 따라계속해서 달렸다. 136호. 135호.

전력 질주로 숨이 찰 정도였다. 120호까지 도착하는 길은 너무 멀었다. 이대로라면 너무 늦는다.

그렇게 생각한 단하는 통로 앞쪽을 향해 계속해서 달리는 대신, 왼쪽의 쿠션 문을 밀어젖혔다.

안쪽은 거대한 홀이었다. 마치 오페라 공연장 같은 4층짜리 대형 홀.


 예배를 보는 대성전이었다.

단하는 그곳을 한가운데를 달려서 가로질렀다. 반대쪽 문이 눈 앞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날려 열어젖히자 반대쪽 복도로 빠져나왔다.

 앞에 있는 방 번호는 120호.

찾았다.

해무가 갖고 있던 열쇠의 방이었다.

곧바로 단하는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해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는  구의 시체가 널부러져 있었다. 머리통은 수박처럼 터져있는 채였다.

해무의 솜씨였다.


적어도 여기서는 죽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분명 다른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단하는 바닥에 나 있는 발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피로 만들어진 발자국. 분명 해무의 것이었다.


흔적을 따라 도착한 곳은 T자 복도. 하지만 역시 이곳에도 해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총격으로 부서진 대리석파편이 떨어져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화약냄새는 조금전 이곳에서 총격전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해무......."


단하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리고 복도 한쪽 구석에서 익숙한 형체를 발견한 단하의 시선이 움직였다.

바닥에는 해무의 총, 스미스  웨슨의 M29 리볼버가 떨어져 있었다.

멈춰선 단하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무......?"

그러나 단하가 찾는 파트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ㅇ     




방울져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의식을 되찾은 해무는 고개를 들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하지만 완전한 어둠은 아니었다. 창문을 통해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달빛이었다.


시간은 한밤중. 밖에서는 희미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자신은 의자에 묶여있었다. 방 안에 혼자남겨진 채로.

그 상황을 받아들이자 떠오른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실패했다.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성급하게 B지구로 넘어온 결과는 임무의 실패였다.

성급했다는 사실은 이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시간은 촉박했으며, 단서를 얻을 곳은 오직 여의대로를 지나 B지구로 오는 것 뿐이었다.


실제로 오조가 쫒던 놈들에 대한 단서도 확인했으니 틀린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도 실패할 이유는 없었다. 길을 찾느라 헤메고, 도탄에 맞아 출혈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탈출이 충분히 가능했다.

다만 예상치 못한 요소가 있었을 뿐.

갑작스런 흉통. 원인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고통이 한창 임무 중에 의식을 빼앗고 쓰러지게 만들 정도였다는 것은 알았다.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상황.


하지만 최근들어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못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핑계를 대 봤자 결국 스스로의 책임인 것이다.

"그아......."

몸을 비틀자,자신도 모르게 악문 이빨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옆구리가 피에 축축하게 젖어있는 것이 느껴졌다. 도탄을 맞고 흘린 피였다. 다행이 출혈은 멈춰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된다면 오래 못가 죽을 것이다.

해무는 소리를 질렀다. 어떤 소리라도 좋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보려 해도 쉬어버린 신음만 흘러나올 뿐. 의미를 담은 소리는 커녕 비명을 만들어내는 것 조차실패했다.

이유를 알  없는 실신으로부터 정신은 차렸으나 몸은 아직 회복하지  한 상태인 탓이었다.


소리지르는 것을 포기한 해무는 반쯤 몽롱한 정신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곡면의 벽으로 둘러싸인 방. 그렇다면 아직 그 교회 안일 것이다.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단하와 함께 여의대로를 건넌 것이 오전 중이었는데 지금은 밤이었다.

설마 하루가 넘게 지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적게 잡아서 8시간. 길게 잡아도 12시간 정도일 것이다.

어쨌건 탈출이 우선이다. 해무는 뒤로 묶인 손을 꼼지락거리며 밧줄의 매듭을 찾았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밧줄이 꼼짝 못할 정도로  묶여있는 것이  이유였고, 손가락의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는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의자에 묶인 밧줄을 풀어낼  없다면, 의자와 함께 탈출한다.

해무는 곧바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드르륵.


바닥에 의자를 끄는 소리가 어둡고 적막한 방에울려퍼졌다.

 과정을 몇 차례 반복했을까.

고작 오 미터가량을 이동하는 것 만으로도 숨이 찼다.

하지만 거의  왔다. 한 번만 더 끌어당기면 문에 닿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해무가 마지막 힘을 끌어모으는 찰나ㅡ


문이 열렸다.


앞에 서 있는 것은 군복 차림의 남자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 얼굴은 까마득히 높이 있었다. 앉아있는 자신의 시점에서  정도 높이라면 키가 족히 2미터는 될 것이다.

물론 2미터 짜리 상대라고 해서 해무는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자신이나 단하같은 살수에게 있어서 상대의 키와 체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열세인 몸뚱아리로도 표적을 죽이는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 남자를 쓰러뜨리기에 지금의 해무는 의자에 몸이 묶여있었고,이마에는 열이 펄펄 끓었으며, 정신이 실신으로부터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했다.


"크......아......"


해무는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털썩 떨구었다. 남아있는 것은 피로감 뿐이었다.

남자는 해무가 묶여있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안쪽을 향해 질질끌고 들어갔다. 해무가 원래 처음 묶여있던 곳으로.

장장 십분간의 사투끝에 해무가 이동한  미터가 허망하게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커다란  같은 남자는 팔짱을 낀 채 해무의 옆에 섰다.


이제는 감시까지 붙어버렸군.

해무는 숨을 헐떡이며 생각했다.

단하는 어떻게 됐을까.


임무가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시작한지 여덟 시간 가까이 지났어도 이 꼴이다. 성공했다면 이미 한참 전에 탈출했어야 한다.

그리고 뛰어난 살수라면 실패한 임무에 매달려서는 안된다.


단하는 뛰어난 살수다. 그러니 당연히 한참 전에 무사히 탈출했을 것이다. 절대 이곳에 남아 있어서는  된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파트너라 하더라도,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한 상태로 임무를 강행하는건 뛰어난 살수가  짓이 아니다.


그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해무를 감시하던 남자가 문을 열었다. 또다른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후 입에서 피를 뿜으며 바닥으로 털썩 쓰러졌다.

해무를 감시하던 남자가 놀라서 황급히 총을 뽑았으나, 동시에 그도 푸슛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서 뇌수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그 뒤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의 파트너. 단하의 모습이었다.

미친놈. 탈출 안하고 여기서 뭐 해.


그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해무는 목소리가 나오지 못했다.


단하의 몰골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분명 지금까지 계속  B지구 어딘가에서 싸우다 온 것이 틀림 없다.

멍청한 짓거리였다.


하지만 그의 등장에 해무는 안도할  있었다.

살았다. 단하가 있다면 탈출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만 허락한다면 다시 목표를 쫒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던 해무는, 자신을 마주한 단하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뜻 움직이지 못한 채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단하. 동공은 떨리고 있는채였다. 명백한 당황의 증거.


대체 왜......?

그렇게 물으려던 해무의 희미한 목소리는, 문 밖에서 들려오는 한 무리의 다급한 발소리에 지워졌다.

그제서야 단하도 움직였다. 재빨리 해무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을 끊어낸 단하는 해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를 옆구리에 들쳐메고 뛰었다.

"잠깐ㅡ"

해무는 뭔가 말하려 했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그리고 단하가 자신을 간단히 옆구리에 끼고 달린다는 상황도 익숙치 않았다.

방을 빠져나온 단하는 방아쇠를 당겼다. 한 무리의 적들이 복도 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탄창 하나를 다 비워낸 단하는 탈출구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그 옆구리에 안긴 채, 해무는 충격과 고통으로 숨을 헐떡였다.

단하가 비틀거릴 때마다 헐렁한 구두가 해무의 발에서 덜그럭거렸다. 그리고 얼마 못가 결국 벗겨져 바닥을 굴렀다.

젠장, 저거 '노튼' 에서 맞춘건데.


손목에 건 시계도 헐렁이고 있었다. 단하가 선물해준 블랑팡. 다행이 손을 빠져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슨해졌지?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가 흘러내렸다. 아, 저건 안되지. 저건 흘리면 안된다고. 다행이 목걸이는 해무의 길다란 은발에 뒤엉켜서 제 자리를 찾았다.

하마터면 큰일날  했네.

그렇게 생각하던 해무의 생각이 순간 정지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치기 시작했다.

흉통의 전조(前兆)는 아니었다.


뭔가 잘못됐다.

정신을 잃고 놈들에게 억류당했을 때부터 상황은 어딘가 잘못 흘러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보다 한참 더 잘못되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터질 것 처럼 한계를 모르고 펄떡였다. 자신의 시선이 불안감으로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여기저기 방황하는게 느껴졌다.

"잠깐, 형. 기다려봐."


이제서야 목소리가 조금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다른 가느다란 목소리.

하지만 자신을 끌어안은  연신 방아쇠를 당기는 단하에게 그 목소리는 닿지 못했다. 벽 뒤에 몸을 숨긴 단하는 탄창을 바꿔넣고 다시 적을 향해 응사했다.

콘크리트 파편이 튀었다. 총알의 금속 파편이 튀었다.


고막이 터질듯이 폭음이 울렸고, 머리가 깨질듯이 아팠으며, 몸이 녹아버릴 정도의 열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가 바닥에 쏟아졌다.


커다란 유리조각이 해무의  앞에 퍽 하고 박혔다. 폭음과 화약 냄새가 요동치는 한가운데서, 해무의 시선은 유리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창문을 통해 어둠을 비추는 달빛 아래, 유리 속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단하의 옆구리에 안겨있는 자신의 모습이.

길게 자란 은발.

흰 눈썹.

조그마한 소녀의 모습.


단하에게 안겨있는 자신의 모습은, 명백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