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81화.
르나르국, 지하 제단.
마법진이 새겨진 중앙 제단과 아래로 수많은 해골이 쌓인 이곳에 왕을 수호하는 전사가 한 아이를 이끌고 내려왔다.
이제 10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와 로나스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년이 무릎을 꿇자 제단의 중심에서 피처럼 붉은 곤룡포를 입은 로나스 왕이 말했다.
“꼬마야, 술법을 제대로 외웠느냐?”
“예, 전하.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주문을 외우고 네 왕에게 충심을 보여라.”
로나스 왕의 요청에 아이는 한쪽에 가득 쌓인 해골을 보더니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전하. 소인이 주문을 외우면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미 들었을 텐데? 혹시 듣지 못한 것이냐?”
“아닙니다. 들었습니다. 하, 하지만 전하의 확실한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과연, 전사들의 말은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말이구나. 허허! 의심이 많은 아이로다.”
“죄송합니다. 전하.”
로나스의 말에 아이는 움츠러들었다.
그가 언제든 자신의 목을 칠 수 있는 폭군임을 아는 탓이다.
하지만 로나스는 평소와 다르게 윽박지르거나 화내지 않고 차분히아이가 바라는 답을 해주었다.
“그렇게 바라면 다시 알려주겠다. 네가 주문을 외워 충성을 맹세하면 내 너희 집안을 위해 친히 르나르국에 헌신할 기회와 영광을 내릴 것이다. 재화를 줄 것이고, 관직을내릴 것이다. 그 누구도 너와 네 가족을 업신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마.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이제 되었느냐?”
“예.”
“그래. 좋다. 그렇다면 술법을외워 충성심을 보이도록 하라! 주문만 외우면 너와 너희 가족은 나의 일부가 될것이다! 함께 세상을 호령하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잡을 것이다!”
“왕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나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신명을 다할 것입니다(국궁진췌 사이후이 鞠躬尽瘁 死而后已).”
아이가 조심스레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조금 긴 주문을 조금씩 또박또박 외우자 아이의 발아래에서 붉은 기운이 올라왔다.
기운은 점점 더 짙어졌고, 기운이 짙어질수록 아이의 혈색이 나빠졌다.
생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눈에는 총기가 사라지고, 피부는 가뭄이 든 농지처럼 쩍쩍 갈라졌다.
목소리의 힘 역시 빠지고, 머리카락 역시 하얗게 시들며 쓰러졌다.
아이는 늙고 있었다.
생명력을 잃고 늙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힘겹게 주문을 다 외운 순간.
피골이 상접하며 작디작은 아이의 몸이 완전히 말라 비틀어져 힘을 잃고 무너졌다.
피부는 가루가 되었고, 뼈만 남아 바닥에 쏟아졌다.
그리고 소년이 죽으면서 남은 그의 생기는 소년의 앞에 있던 로나스 왕의 주위를 맴돌았다.
로나스는 영롱하게 반짝이는 붉은 생기로 손을 뻗었고, 곧 소년의 몸에서 나온 생기가 그의 몸에 흘러들었다.
“이 힘이다! 바로 이 힘이야!”
로나스 왕은 아이의 몸에서 나온 붉은 기운이 자신에게스며들자 강한 힘과 젊음을 느꼈다.
피로가 가시며 온몸에 기운이 넘쳤다.
그가 흡수한 붉은 기운은 아이에게 허락되어 있던 수명이자,생기의근원이었다.
그것을 취했으니 몸에서 힘과 기운이 넘치는 것이 당연했다.
“역시 아이의 것이 제일 신선하다! 가장 효과적이야! 몇 번을 흡수해도 질리지 않는구나! 하하하!”
로나스는 약에 취한 것처럼 몸을 배배 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온몸에서는혈기를 띤 기운이 넘실거렸다.
광명 목탑의 비급이도착하고, 로나스는 노예와 아이들을 데려와 술법을 외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금은보화와 관리직을 내려준다는 말로 꼬드겨 자신에게 수명을 바치도록 했다.
눈치 빠른 이들은 살려 달라고 빌며 수명을 바치길 거부했지만, 그때는 부모처럼 소중한 사람을 데려오거나 그들을 찾아서 고문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마음을 흔들었다.
비급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주문을 외워야 한다.
헌신의 마음 또한 필요하다.
그 헌신의 대상은 국가, 가족, 왕, 집안을 가리지 않았다.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도 가능했다.
그저 위해 진심으로 헌신하는 마음만 있으면 됐다.
그런 마음이나 욕망이 없으면 주문을 외워도 효과가 없으므로 마음이 연약한 자들을 데려와 협박하고, 꼬드기면서 강제로 수명을 빼앗았다.
그 대상은 대부분 노예출신이었다.
노예 신분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막대한 금은보화와 집안의 부흥을 약속하겠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만으로 손쉽게 주문을 외우게 할 수 있었다.
때로는 충성을 맹세하는 주문이라고 속이고, 국가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작업이라 속여 수명을 빼앗기도 했다.
일국의 왕인 그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주문을 외우는 사람들 대부분은 주문을 외는 것이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도 모른 채 순수한 믿음과 충성심의 발로로 자신의 수명을 바치고 죽었다.
그렇게 주문을 외우고 죽은 이들의 수명, 생기를 흡수한 로나스 왕은 이렇다 할 훈련도 수련도 하지 않은 몸임에도 불구하고 영웅과 동급 혹은 그 이상의 힘을 갖게 되었다.
벌써 1만이 넘는 생명을 앗아간 덕분이다.
지금은 힘을 많이 쌓아서 그가 그토록 아끼던 칠각보전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비급의 효과가 확실하구나! 이 힘이라면 지금이라면 태산마저 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칠각보전의 호위도 필요치 않다! 혼자 다녀도 문제 없겠구나! 하하하!”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천하가 전하의 발아래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로나스 왕의 말에 아이를 데려온 전사가 아부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로나스는 아직 남아 있는 전사를 향해 소리쳤다.
“부족하다! 아직 만족할 수 없다! 짐은 이것으로 끝날 그릇이 아니다! 천하를 호령하려면 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가라! 가서 더 데려와라! 더! 더! 많은 노예를 데려오너라! 짐이 이 천하를 쥘 수 있도록! 천하의 위에 설 수있도록!”
“예!”
재촉하는 로나스 왕의 말에 전사가 나갔다.
그가 나가자 새로운 전사가 달려오더니 로나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예의를 갖췄다.
“응? 무슨 일이냐?”
“전할 소식이 있사옵니다. 전하.”
“소식? 갑자기 무슨 소식이 있어서 성스러운 의식을 방해한단 말이더냐?”
“라반 관리가 돌아왔습니다. 그가 시급히 전하를 뵙기를 요청하고 있사옵니다.”
“라반이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전사의 말에 로나스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놈이 왜? 놈은 사절단의 임무를 가지고 이국에 향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 새벽에 왕성으로 돌아왔단 말이냐?”
의아했던 것이다.
이국으로 향했을 라반이 돌아왔다는 말이.
전사는 조심스레 답했다.
“그것이…. 실은 희각과 함께 사절단을 대동하고 이국으로 향하던 중, 습격을 받아 돌아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습격? 습격이라고 했느냐?! 대체 어느 왕국의 짓이냐!”
“그, 그것이그제 타국의 소행이아닌 웬 실력자가 갑자기 나타나 망자와 함께 사절단을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라반과 희각이 분전하였으나 희각은 망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고, 사절단 역시 대부분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라반 관리는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가마를 타고 먼저 돌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뭐라? 지금 뭐라고 했느냐! 희각이, 희각이 죽었단 말이냐?!”
로나스 왕의 얼굴이 충격에 물들었다.
그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주먹을 떨 때마다 제단이 덜덜 떨렸다.
굉음과 함께 지하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예…. 그렇습니다. 전하.”
겁에 질린 전사는 두려움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럴 리가. 나의 희각이 죽었을 리 없다. 희각은 강하다! 칠각보전이지 않느냐! 죽었을 리 없다! 죽었을 리 없어! 어서 거짓이라 말해라! 거짓이라 말하란 말이다!”
전사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전사의 침묵에 사실임을 알았지만, 로나스 왕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직접 확인하겠노라!”
그는 제단에서 내려와 어전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라반!”
그리고 라반 관리를 찾았다.
라반은 어전 앞에서 허리와 고개를 숙인 채 땅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그는 로나스 왕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얼른 사죄했다.
로나스 왕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희각이 죽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죄송합니다. 전하! 죽여주시옵소서!”
“똑바로 답하거라! 사실이냐고 물었다!”
“사, 사실이옵니다. 전하.”
그의 말에 로나스는 충격을 받았는지 왕좌에 앉았다.
인명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아이들까지 자신의 제물로 삼는 그지만 칠각보전만은 달랐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희각만은 달랐다.
희각은 그에게 있어 부모와 다를 바 없었다.
딱딱한 친엄마와 달리 그를 진정으로아끼고 귀여워해 줬으며, 그가 적적할 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위로까지 해주었다.
칠각보전 모두 각별하게 느끼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각별하게 여기는 존재가 바로 희각이었다. 그래서 그는처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비애를 느꼈다.
“대체 누가! 누가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냐!”
“마, 망자입니다. 데스나이트로 보이는 망자가 우리를 공격하고 희각을 해쳤습니다.”
“데스나이트? 네 이놈! 나의 희각이 고작 데스나이트에게 당했단 말이더냐!”
“노, 놈은 평범한 데스나이트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언데드 대군을 거느린 것은 물론, 마법까지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지면을 모두 깎아 절벽을 만들 정도의 검기를 구사했습니다.”
“마법을 쓰는 것으로 모자라 검기까지 구사해 절벽을 만들었다고? 기도 차지 않는구나! 지금 내게 그 말을 믿으란 말이더냐!”
흥분한 로나스 왕이 기운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의 일갈에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궁전이 통째로 흔들렸다.
마법과 검술을 양립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상식이었다.
하나만 대성하기도 쉽지 않은데, 양쪽 모두를 대성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정말입니다! 전하! 저를 비롯해 생존한 병사들 다수가 보았습니다! 제발 신의 말을 믿어주시옵소서!”
목을 죄는 것 같은 살벌한 살기에 라반이 황급히 소리쳤다.
“목격자가 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전하! 함께 살아남은 병사들과 노예 그리고 상인과 용병이 있습니다. 신이 그들을 데리고 왔사오니 부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불러와라! 내 직접 들어야겠다!”
로나스 왕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라반이 데려온 목격자들을 불렀다.
함께 참전한 일반 병사와 겁을 먹고 도망친 노예 그리고 상인 바룸과 단장 켈른이 들어왔다.
그들은 왕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예의를 갖추더니 숙인 고개를 제대로 들지 않고 라반의 증언했다.
“그러니까. 망자 두영이라는 놈이 희각을 공격했다. 그 말이더냐?”
“예, 노예 아이 중 하나가 분명 그렇게 불렀사옵니다! 전하!”
“놈이 희각을 공격한 이유는? 사절단을 공격한 이유는 뭐지? 이국과의 동맹을 시기하는 자들의 공격일가능성은 얼마나 되느냐?”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을 때, 망자 두영이 타국과의 접점이 있을 가능성은 낮습니다.”
“그럼,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절단을 학살했단 말이더냐?! 감히 나 로나스 왕의 사절단을?!”
“시, 실은 서창에서 탈출한 노예상인들의 제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길, 이틀 전 밤, 서창의 모든 노예 상인들이 정체불명의 흑기사와 승려에게 공격을 받았다 합니다. 그들은 노예 상인들과 그 조직들만을 철저히 공격했고, 이후 노예들을 해방해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여러 제보를 보았을 때. 흑기사와 망자 두영은 동일인이 분명하며 놈이 노예 상인과 우리 사절단을 공격한 것을 봤을 때 노예 상인에 대한 노골적 혐오감이 있다 판단되옵니다.”
“어처구니가 없군! 놈이 날뛰는 동안서창의 관리는 무엇을 했단 말이냐! 그 무능한 것은 어디 있어!”
“과, 관리는 이미 죽어 그 머리가 도성에 걸렸다 합니다. 그곳의 보물들 역시 망자가 모두….”
“뭐라?”
로나스 왕은 표정을 구기더니 곧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정각이 르나르국의 평화를 위해서 이국의 사절단을 데리고 온다는 사실이었다.
이국의 공주와 함께.
“해주석…. 해주석을 챙겨야 한다! 지금당장 정각에게 기별을 넣어라! 서창으로 가지 말고 우회하여 이곳으로 오라 전해라! 그리고 군대를 모아라! 내 직접 그 빌어먹을 망자를 없애 희각의 복수를 할 것이다!”
이국과의 관계가 틀어질 것을 우려해 급히 명령을 내리는 로나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미 두영이 정각과 그의 선단을 모두 박살 냈다는 것과 이국의 공주 마루나까지 잡아갔다는 것을.
그리고 머지않아서 두영이 자신을 처단하기 위해 찾아오리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