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80화.
팬텀스피드 위에서 큰 움직임 없이 아슬란이 발사한 검기를 막고 또 튕겨냈다.
가네샤의 느린 몸이라면 뛰어난 검술이 있어도 아슬란의 검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네샤의 검술에 이블 나이트의 움직임까지 가지고 있으니 아슬란의 공격을 충분히 막고도 남았다.
“이럴 수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 방진을 뚫지 못하였거늘! 한낱 망자 따위가 내 방진을 막는단 말인가!”
[약한 놈만 사냥했나 보구나.]
나는 아슬란의 움직임을 포착해 검기를 날렸다.
두 자루의 검으로 동시에 검기를 날리며 공격하자 아슬란 역시 감당이 안 되었는지 결계를 밟고 지상으로 내려갔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아슬란에게 손을 뻗어 헬파이어를 발사했다.
빈틈을 정확히 노렸으나 아슬란은 당황하지 않고 톱날처럼 생긴 검으로 헬파이어를 막았다.
다크 토네이도가사라진 것처럼 헬파이어 역시 사라졌다.
[역시 마법은 통하지 않는 건가.]
검기가 아닌 검으로 막은 것을 보면 아슬란의 검이 마법을 지우는 것이 확실하다.
[이빨을 깎은 것 같은 검에 저런 사기적인 효능이라면…. 마법의 지우는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무기일 가능성이 높겠네. 그것도 다 자란 성체의 이빨.]
네빌의 지식에 따르면 다 성장한 에이션트 드래곤은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고 검기만 통하는 마법사의 천적이었다.
마법 이뮨이라는 특수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드래곤이 마법의 창조자여서 그렇다는 견해도 있었다.
“흥! 내게 마법은 통하지 않는다! 날 이기고 싶거든 검술로 승부를 보아라!”
헬파이어를 지운 아슬란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나는 그 기대에 따라 아래로 이동하며 검술을 펼쳤다.
가네샤의 검술에 내 힘을 더한 파상공세였다.
“이, 이놈!”
아슬란은 잘 방어하는 듯했지만, 검술에서도 검기에서도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그는 실력도 신체능력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낼 수 있는 검기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어 방어에만 급급했다.
게다가 나와 싸우고 있는 무대는 지상이 아닌 공중!
날개 없는 사자가 설 무대는 없다.
“젠장! 나도 저런 말만 있다면!”
이를 가는 아슬란을 검으로 후려쳐 다시 아래로 떨어뜨렸다.
갑판에 있던 그의 부하들이 결계를 만들어서 끝까지 추락하지 않고 공중에서 멈췄지만, 결계에 금이 간 것이 언제라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끝을 내지.]
아래로 떨어진 아슬란을 보며 희각의 날개를 소환했다.
반짝이는 푸른색 날개가 아닌 검은색의 날개가 나타났다.
암흑 오라로 만든 것이다.
팬텀스피드보다 마력 소모가 훨씬 심하지만, 그 대신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나는 희각의 기억에서 하늘을 나는 요령을 떠올린 후 그녀처럼 속도를높인 후 아슬란에게 향했다.
결계를 밟고 있던 아슬란을 검으로 힘껏 후려쳤다.
쿵!
충돌과 함께 충격파가 일어나며 아슬란이 지상에 추락했다.
“크악!”
튼튼한 그는 내 검을 막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밟고 있던 결계는 아니었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다.
그는 바다로 추락했다.
바다로 떨어지자 대포라도 떨어진 것처럼 물보라가 일어났다.
대형 범선도 크게 휘청이더니 선수가 부서진 채 배가 가라앉았다.
서서히 가라앉는 대형 범선.
“아슬란님!”
갑판에 서 있던 수인족들은 바다에 잠긴 아슬란을 찾기 위해 물로 뛰어들었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아직 멀쩡한 대형 범선으로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바다에서 수룡이 일어나 내게 날아왔다.
바닷물로 이뤄진 수룡은 총 아홉 마리로 여덟 마리가 날 노리며 공격을 가했고, 나머지 한 마리는 가라앉는 배를 받치고 있었다.
나는 배를 받치고 있는 수룡의 머리 위를 보았다.
[찾았다.]
긴 머리카락에 코와 입을 가린 마스크를 쓴 정각이 무사 옷을 입은 채로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공격하라!”
그가 소리쳤다.
우렁찬 그 외침에 나머지 4대의 대형 범선에서 마법이 발사되었다.
화염과 얼음 정령의 형상을 취한 마법들이 수룡의 뒤를 이어 날아왔다.
[잘 가라.]
나는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대형 범선의 절반 크기의 검기를 만든 후 그대로 정각을 노리고 검기를 발사했다.
“뭣?!”
검기가 8마리의 수룡을 가르고 날아갔다.
바다와 파도마저 가르며 나아간 거대한 검기에 사각은 황급히 마력을 방출해 해일을 만들었다.
거대한 해일이 장벽처럼 일어나 검기를 가로막았지만, 내 검기는 그가 만든 해일마저 단숨에 베고 그대로 정각과 범선을 갈랐다.
“끄아아악!”
정각의 비명과 함께 대형 범선이 반으로 갈리며 검기가 바다를 다시 강타했다.
검기에 닿은 바다가 반으로 나뉘며 거대한 물보라가 일어났다.
물보라는 높은 파도를 만들었고, 그 파도는 남은 네 척의 대형 범선을 덮쳤다.
남은 배들이 모두 전복되더니 검기가 만든 소용돌이에 휘말려 파도와 함께 흩어졌다.
나는 운석이라도 맞은 것처럼 크게 휘청거리는 파도를 보며 다시 팬텀스피드를 소환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죽은 정각의 기억을 확인했다.
정각은 해룡의 후예였다.
해룡은 악어처럼 생긴 머리에 드래곤처럼 온몸이 비닐로 덮인 괴이로 서창과 동명 그리고 이국의 사이에 생긴 소용돌이에 위치한 섬의 주인이었다.
섬의 이름은 오륜섬, 다섯 개의 각기 다른 섬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붙은 이름이었다.
하나로 합쳐지기 전 오륜섬은 각각 청섬, 황섬, 흑섬, 녹섬, 적섬이라 불렸다.
그렇게 불린 이유는 각 섬에서 해당 색상을 띤 과일이 났기 때문이었다.
청섬에서는 새파란 블루베리가 열렸고, 황섬에서는 레몬이 났다.
흑섬에서는 새까만 포도가, 녹섬에서는 키위가 자랐다.
마지막 적섬에서는 피처럼 붉은 딸기가 났다.
그래서 오륜섬이라 불리기 전에는 각기 다른 이름이 섬으로 불렸다.
섬과 섬 사이의 간격이멀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나르국 건국 당시 해룡과 칠각룡이 영토를 두고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싸움에서 패한 해룡은 칠각룡에게 죽임을 당해 소용돌이가 치는바다에 가라앉았다.
이후 그가 잠든 소용돌이의 해류는 더욱 세차졌고,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간격이 떨어져 있던 다섯 개의 섬들은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합쳐진 섬들은 지구가 자전하듯이 소용돌이에 의해 하루 한 바퀴씩 회전했는데, 하늘을 날던 칠각룡이 그 모습을보고 마치 인간들의 마차 바퀴가 회전하는 것 같다고 하여오륜섬(五輪剡)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정각은 바로 그 오륜섬에서 해룡을 피를 이은 괴이였다.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해야 했으나, 아버지인 해룡을압도한 칠각룡의 힘과 그런 칠각룡마저 따르는 당대 로나스의 능력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는 칠각룡이 아닌 로나스에게 도전장을 냈다.
칠각룡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로나스 왕을 해치우면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낸 도전장이었는데, 로나스는 압도적인 우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민 도전장을 당당히 받고 정정당당한 싸움을 약속했다.
정각은 인간이 아무리 강해 봤자 인간이라는 생각으로 로나스 왕과 일전을 벌였다.
그러나 한낱 인간이라고 여긴 로나스 왕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고, 패배와 죽음이 두려웠던 그는 로나스 왕을 자신이 유리한 바다로 유인해 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으로 모자라 마법 물품까지 활용해 약속을 어기고 비열한 싸움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 어떤 방식의 싸움으로도 그는 로나스를 꺾을 수 없었고, 단어 그대로 참교육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시인하고 로나스왕에게 목을 내밀었다.
하지만 로나스 왕은 그의 목을 베지 않았다.
오히려 영역 싸움이라고는 하나 해룡을 죽인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그에게 오륜섬의 통치를 맡겼다.
르나르국의 어민들을 다신 약탈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말이다.
강인함, 자비로움, 의로움을 모두 갖춘 로나스 왕의 성품에 감탄한 정각은 그만 그에게 반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진정한 군주로 섬기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그는 오륜섬의 자치권을 포기하고 르나르국에 복속되기를 청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뒤로하고 로나스 왕에게 충성까지 맹세했다.
그리고 르나르국을 위해, 로나스 왕을 위해 적과 싸우고 괴이를 무찌르며 로나스 왕에게서 군주의 덕을 배웠다.
그에게 있어 로나스 왕은 진정한 군주의 표상이 되었다.
그렇기에 로나스 왕의 수명이 다해 죽었을 때도 그를 위해 르나르국을 열과 성을 다해 지켰다.
그리고 죽은 당대 로나스 왕과 똑같은 생김새를 가진 로나스 왕의 환생이 태어나자 그는 희각, 사각처럼 다시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 꿈은 다시 한 번 로나스 왕과 함께 세상을 제패한다는 희망이었다.
강성했던 옛날의 르나르국의 모습을, 제국 못지않은 영광을 꿈꿨다.
하지만 군주 그 자체였던 과거의 로나스와 달리 현대의 로나스는 형편없었다.
게으르고 방탕할 뿐 아니라 여색을 밝혀 군주로 어울리지 않았다.
따끔하게 혼을 내고 가르침을 주려 했지만, 한마디 하려고 하면 희각, 사각, 경각 등이 눈을 부라리니 차마 혼을 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정각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로나스 왕이 철이들 것이라고, 과거의 로나스 왕처럼 위대해질 것이라고 여겼다.
다른 칠각보전이 로나스 왕의 영생 계획을 발표했을 때, 찬성한 것 역시 현대의 로나스 왕이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즐기면 진정한 군주로 거듭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기억 속 로나스 왕은 진정으로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군주로 자리매김했기에 그 마음이, 헛된 미련이 바뀌지 않았다.
[희각과 정각이 마지막으로 만난 건, 보름 전이었나.]
나는 정각과 희각이마지막으로 만난 기억의 접점을 떠올렸다.
희각이 비급을 가지고 서창에 들렀을 때였다.
르나르국의 병사들이 경각, 진각, 사각의 사망 소식과 함께 이국과의 화평 전갈을 주었다.
본래 르나르국은 이국과의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
이국의 수인들이 북해도를 오가는 어선들을 자꾸만 공격하고 사람을 납치해 혼을 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파이로 대신과 칠각보전 셋이 죽으면서 국력이 격감하고 말았다.
도저히 이국과 전쟁을 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나스 왕은 이국의 정탐에 나선 정각에게 평화 협정 체결을 제안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정각은 로나스 왕의 명령대로 자신이 직접 키운 르나르국의 범선 선단을 이끌고 이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국의 왕 강철 날개 신조(神鳥) 가루다 5세에게 로나스 왕의 친서를 전달했다.
로나스 왕이 작성한 친서에는 이국의 개발에 쓰일 노예 3천 명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어민들을 다신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적혀 있었다.
이국에서 나는 해주석(解呪石)의 교역과 군사적 동맹 제안도 있었다.
나는 정각의 기억에서 해주석에 대한 정보를 찾았다.
[역시 드래곤이구나.]
해주석은 마법과 주술을 푸는 돌로 불리지만,그 실체는 이국땅에 묻힌 에이션트 드래곤의 뼈를 깎아 만든 것이었다.
미스릴처럼 튼튼한데다가 마법과 주술의 흐름까지 방해하는 효과까지 지녔다.
그래서 마법을 이용한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그래서 르나르국뿐만 아니라 마법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아르카디아의 대부분 국가에서 바라는 원자재 중 하나로 통했다.
해주석을 녹여서 검과 무기로 만들기만 해도 마법사들의 공격을 손쉽게 막을 수 있으며, 마법의 힘을 지닌 괴이들에게도 더 큰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에 탐내는 것이다.
로나스 왕이 이국과의 전쟁을 준비한 이유 역시 바로 해주석이 탐이 났기 때문.
해주석이 있으면 아무리 네빌이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을테니까.
그것을위해 화평과 해주석의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르나르국은 해주석을 얻고, 이국은 노예를 얻는다.
[서로 손해 볼 거 없는 장사구만. 내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르나르국이 더 강성해졌겠어.]
나는 망가진 범선의 잔해를 살폈다.
그리고 붉은 날개를 펄럭이며 물장구를 치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붉고 긴 머리카락에 같은 색깔의 날개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였다.
이 소녀의 정체는 이국의 왕 강철 날개 신조(神鳥) 가루다의 딸, 효풍(曉風)의 마루나였다.
정각의 기억에 의하면 마루나는 이국의사절단 대표로 르나르국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보디가드로는 아슬란과 수인족 2명이 전부이기에 에스코트는 정각이 끝까지 할 예정이었다.
영웅 급으로 강력한 아슬란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딸린 부하들의 수가 무척 적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이국의 사정이 좋지 않아서라기보다 공주의 입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각이 가루다를 만나 로나스 왕의 친서를 전갈했을 때, 왕은 딸이 아닌 천민을 대하듯이 마루나를 막대하며 사절단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반푼이라도 남자 정도는 홀릴 수 있겠지.”
같은 말을 하면서 말이다.
마치 공주가 아닌 노예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
그 탓에 정각은 가루다 왕이 마루나를 마땅찮게 여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불편한 느낌을 받은 정각은 그 이유가 궁금해졌고, 곧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가루다는 3명의 아내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아내에게서 1명의 아이를 얻었다.
바로 1왕자 천공(天空)의 바루나와 2왕자 비상(飛翔)의 아그니였다.
이 둘은 아버지인 괴이 가루다의 피를 90퍼센트 이상 이어 신조화(神鳥化)가 가능한 어엿한 왕위 계승자였다.
반면, 마루나는 아버지의 덜 받아서 신조화가 불가능했다.
신조화가 가능하고, 전력으로 쓸 수 있는 강한 아이를 바란 가루다는 나약한 공주에게 반푼이라는 의미로 비나타의 첫째 아이 마루나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들들에겐 완전한 신의 이름을 하사했지만, 그녀에겐 실패작에 가까운 이름을 내린 것이다.
[그다지 사랑받는 공주는 아니로구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나는 첨벙거리며 버티는 마루나를 보았다.
다른이들은 부표에 올라 잘 버티는데 그녀는 젖은 날개가 무게 중심을 뒤로 당기는 바람에 헤엄조차 제대로 치지 못했다.
물에 잠겨 허우적거리는 꼴을 보고 있으니 조금 딱해 보였다.
“제발…, 제발. 아버지….”
[아버지라….]
첨벙거리며 버티던 마루나는 힘이 다했는지 더는 헤엄치지 못하고 아버지를 찾으며 가라앉았다.
등 뒤로 자란 붉은 날개부터 가라앉는마루나.
아버지의 애정을 바라는 그녀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느꼈다,
외견도 아라타보다 어려서 솔직히 불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쯧, 하는 수 없지.]
나는 정각의 기억에서 바다를 조종하는 기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기술로 물기둥을 일으켜 마루나를 끌어올렸다.
[데스나이트, 저 여자를 챙겨라.]
유령마를 탄 데스나이트를 소환하고, 물 위로 올라온 그녀를 챙기도록 했다.
[그래도 공주, 쓸모가 있겠지.]
나는 마루나를 챙겨 다시 서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