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9화 〉78화. (79/83)



〈 79화 〉78화.

새벽 무렵, 보물창고에서 가져온 금화가 바닥남과 동시에 아라타의 기억 읽기가 끝났다.

혼자서 수천 명의 기억을 읽고 분류한 아라타는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으아어으아어아…. 머리가 아픕니다.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정신을 놨군.]

아라타는 두통을 호소했다.

너무 많은 기억을 읽은 탓에 정신력이 바닥난 것이다.

“두 번은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마귀와 싸우면 싸웠지, 기억은 이제  읽을 겁니다! 아주 지긋지긋합니다!”

[새끼, 엄살은.]

“엄살이 아닙니다! 형님! 진지하게 앞으로 노예가 또 오면 그냥 돈 주고 보내도록 하십시오! 또 기억 읽으면 소승의 머리가 폭발할지도 모르니!”

[알았으니까,  숙소로 들어가서 좀 쉬어라. 일이 있으면 깨울 테니.]

“으으…. 알겠습니다. 오래 잠들 수도 있으니, 다른 분들에게 작별 인사 좀 부탁합니다. 형님.”

피로를 견디지 못한 아라타가 숙소로 향했다.

그가 숙소로 들어가자 마지막 사람이 식당을 나왔다.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마차에올랐다.

마지막 승객까지 마차에 탑승하자 그곳에 탄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웨일 산맥으로 향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위해 스켈레톤 나이트로 구성된 호위부대를 붙여주었다.

아침까지는 몬스터의 공격을 받지 않고 스켈레톤 나이트의 호위를 받아 무사히 이동할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사람들뿐이구나.]

마차를 보낸 후 나는 남은 사람들을 보았다.

뒷정리를 위해 남은 사람들.

마차를 수배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여행 물품을 마련하는  적잖은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아라타의 심사를 통과해 엄선된 이들로 이후 애들을 다음 마을까지 데려갈 보호자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뒷정리를 끝내자 모닥불 앞에 앉았다.

그리고 마른 육포와 산나물을 끓인 수프를 먹으며 추위를 달랬다.

나는 그들 중 앤디를 안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미네트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아라타를 도와주던 활기찬 사람이었다.

[받으세요. 여러분의 몫입니다.]

나는 미네트를 비롯해 다른 노예들에게 미리 준비한 금화를 꺼내 주었다.

 사람에 5개씩, 백금화를 지급했다.

백금화 5개면 500골드, 엄청난 금액이었기에 돈을 받은 사람들도 적잖이 당황했다.

“1인당 500골드라니!”

“이렇게 많이 주셔도 되는 겁니까?”

[그냥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라타에게 들었겠지만, 지금 주는 금화 중 4개는 여러분이 돌봐야 할 아이들의 몫으로 주는 것입니다. 보호자로서 책임감 있게 돌봐주라는 의미로 주는 것이니 사치 부리지 말고  필요한데 아껴 쓰기 바랍니다.]

아라타가 그들과 한 약속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는 것.

실제 구조한 아이중에는 나이가  자리도  되는 애들이 많았다.

스스로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어리기 때문에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주고 돌봐  보호자가 필요했다.

500골드면싸게 먹히리라.

“우리가 돈만 받고 도망치려면 어쩌시려고 이렇게 큰돈을 덜컥 주시는 건가요?”

미네트가 앤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진지하지 않은 장난기 어린 말투였다.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믿을만하니까 주는 겁니다.]

아라타가 식사시간마다 내게 그들의 사연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지금 남은 사람들의 사연을 대충 알고 있었다.

약초를 채집하다납치를 당해 노예가  사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인자가 된 사냥꾼.

귀족의 눈 밖에 나 억울하게 누명을 쓴 용병.

가족의 약값을대기 위해 스스로 노예가 된 청년.

평범한 소작농이었으나, 전쟁에서 패해 노예가 된 사람들.

하나같이 밑바탕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믿음이 가는 것은 미네트와 그녀와 같은 아너스 왕국 출신 노예였다.

네빌과 작별한 그날, 아너스 왕국이 망하면서 노예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지간한 노예들보다 훨씬  믿음이 갔다.

기본적으로 아너스 왕국의 백성은 의리와신의가 두터운데다가  번 받은 은혜는 절대 잊지 않는 민족으로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그 어느 왕국 백성보다 신뢰가 갔다. 게다가 그들은 노예 생활도 그리 오래 하지 않았다.

다른 노예들처럼 몇 년 동안 온갖 구박과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므로 스트레스 역시 상대적으로 적게 받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 다른 노예들보다는 건강한 편에 속했다.

노예들이 흔히 가지는 피해의식과 망상, 우울증 및 스트레스로 비롯된 신체적 정신적 장애도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어서 큰돈도 믿고 맡길  있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흑기사님 아니, 이제 두영님이라고 부르는 게 낫겠지요?”

[편한 쪽으로 부르세요.]

“그럼, 두영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두영님은 언데드이셨을 때보다 지금 모습이 훨씬 멋진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훤칠하고 튼튼해 보여서 아주 남자답습니다.”

[낯간지럽게, 아부해도 금화 더 안 주니까 입에 발린 소리 그만해하세요.]

“이런, 들켰습니까? 하하!”

너스레를 떨며 웃는 사람들, 죽을상을 하고 끌려가던 때보다 확실히 좋아 보였다.

“처음부터 지금 모습으로 구해주셨으면 그렇게 놀라지 않았을 텐데.”

“언데드가 사람을 구해주다니 솔직히 겪고도 믿기 힘들었어요.”

“확실히 처음 두영님을 봤을 때는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싶었지.”

미네트의말에 다른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나도 그때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었지. 근데 누가 알았겠나, 스켈레톤이 우리 밧줄을 풀어줄 줄은.”

“그러게 보통 무시하고 지나칠 텐데 말이지.”

“두영님. 혹시 저흴 구해준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특별한 이유?]

“예. 이를테면 노예 중에 특별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었다거나, 바룸 상단에 원수를 졌다거나. 그런 이유 말입니다.”

[이유가 꼭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역시 뭔가엄청난 계획이 있으신 건 아닐까 해서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나쁜의도의 계획을 말하는  아니라 원대한 포부 같은 그런 계획이 있으신 건 아닐까? 해서 하는 말입니다.”

[원대한 포부라…, 그런 거 없습니다. 그저 노예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뿐이니.]

“노예제도가 마음에 안 드셨다고요?”

“혹시 아는 사람이 노예로 잡혀간 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내 고향에서는 노예제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반감을 갖게 된  같군요.]

“노예제도가 없었다니. 하긴, 두영님께선 우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으실 테니까. 노예제도가 없던 시대에 사셨을 수도 있겠군.”

“확실히  옛날에는 노예제도가 없었다고 배웠었지.”

“불사 전쟁에서 뇌조가 죽은 직후의 시대 말이지?”

“그래.  시대의 인류는 망가진 땅을 재건하기 위해 화합을 했다고 했었지. 뭐, 200년도  지나서 바로 노예제도가 부활했다고 하지만.”

“그 말은 두영님의 나이가 적어도 800살은 된다는 건가?”

“800년 묵은 언데드라니, 두영님이 그렇게 강한 이유가 있었군요.”

“우리보다 훨씬 형님이시군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두영님.”

내가 지구에서 왔다는 것을 모르는 그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추측을 남발했다.

아무래도 내가언데드라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정할까 싶었지만, 아직 20~30대밖에  된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럼, 편하게 물으마. 너희는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목적지는 정한 거냐?]

“목적지 말입니까? 일단, 저희도 웨일 산맥을 넘을 생각입니다. 남쪽 지역은 괴이들이 출몰해 위험하니,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할 계획입니다.”

[북쪽이면 알고르 교국으로 간단 말이냐?]

알고르 교국은 달의 여신 루나를 믿는 종교 국가다.

북쪽 끝에 위치한 혹한의 제국과 인접해 있으며, 태양의 신을 믿는 일리오스 교국과는 쌍벽을 이루는 거대 종교 국가다.

달의 성기사라 불리는 기사단도 가지고 있는데, 일전에 아너스 왕국에서 만난 성기사들 중에도 그들 소속이 있었다.

심판의 성기사 바라그, 네빌과 함께 저승으로  영웅이 속한 국가이기도 했다.

 외에도 달밤의 축제가 잦으며아름다운 결혼식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특히, 알고르 교국의 루나 여신상 앞에서 결혼하면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오래도록 함께한다는 전설이 있다.

미신이겠지만, 네빌은 엘리아나가 깨어나면 방문하고 싶어해서 알고르 교국과 관련된 정보가 많았다.

“예. 알고르 교국은 아너스 왕국을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괴이들의 침략을 막아낼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이기도 하죠.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우리가 아너스 왕국 출신인 것을 들켜도…. 생활에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곳은 초승달 교도가 되기로 서약하고 여신 루나를 신봉하면 신분증이 없어도 백성이 될  있거든요.”

남자의 말에 미네트가 덧붙였다.

나는 그녀의 말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그렇군. 근데 꼭 왕국의 소속이 되어야 하나?]

“네?”

[굳이 서약까지 하면서까지 그곳의 백성이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거다. 굳이 믿지도 않는 신을 신봉하면서까지 그곳의 백성이 되려는 건 상식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일이거든.]

“그렇습니까. 신을 부정하는 두영님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보다 안전한 방법은 없습니다.”

[안전?]

“예, 아르카디아 대륙에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토지와 땅이 많으니까요.”

[그 말은 몬스터와 이종족을 말하는 건가?]

“그것도 있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건 괴이죠.”

괴이라는 말에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하긴, 방금도 남쪽에 괴이가 많다고 했었지.]

“지성이 있고, 말이 통하는 괴이는 그래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괴이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 지나지 않으니…. 놈들에게 대항할 수 없는 우리 평민은 어느 국가의 소속이 되는 게 안전합니다.  마리라도 마주치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니까요.”

“미네트의 말대로입니다. 실력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을 대거 모은다면 모를까, 평민이 괴이를 당해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영웅이 있는 왕국의 백성이 되려고 하지요.”

“그와 관련된 훈련과 기술 개발도 많고요.”

[괴이라….]

괴이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내게 있어서 어지간한 괴이는 그저 신선한 마력 보충제에 지나지 않으니까.

[확실히 괴이가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른다면 영웅의 존재는 필수겠네. 그래서 다들 왕이 폭정을 일삼아도 참고 사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개중에는 영혼마저 먹는 괴이도 있다고 해요. 그런 괴이들에게 걸리면 저승에서도 고통받을 테니까. 다들 두려워하는 거죠.”

아무래도 여기 사람들도 사후세계를 믿는 모양이다.

하긴, 마법과 신성력이 존재하고 실제로 언데드가 존재하니 사후세계를 믿는  이상하지 않았다.

[듣고 보니 그래. 확실히 여러 가지를 따져보면 알고르 교국만큼 적합한 나라도 없겠어. 아니지. 하나  있잖아. 일리오스 교국. 거긴 어때?]

“일리오스 교국도 비슷한 신앙과 교리를 갖고 있지만…. 그곳은 여기서 너무 머니까요.”

[아, 그래. 거긴 좀 멀지.]

미네트의 말에 수긍했다.

나야 마법 한 번으로 이동할 있는 거리지만,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엔 멀기 때문이다.

알고르 교국보다 훨씬 더 멀었다.

[알았다. 출발은 언제쯤 할 예정이지?]

“말씀하신 대로 동틀 무렵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래, 그곳에서는 평범하게 잘 살길 바란다. 앤디도  보살펴주고.]

나는잠든 앤디를보며 말했다.

앤디는 나와 계속 함께하고 싶다고 했지만, 같이다니면 위험할 것이 뻔하다.

미네트와 함께 보내는 것이 현명하다.

“도움이 필요하실  알고르 교국에서 저희를 찾아주세요. 미약한 힘이나마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뭐든 도와드리겠습니다. 꼭 찾아와주십시오. 두영님.

“잊지 않고 기다리겠습니다. 두영님.”

[…그래. 나는 먼저 일어나도록 하지. 너희도 늦지 않게 적당히 먹고 들어가 쉬도록 해라. 그리고 시간이 되면 출발하고.]

“예, 알겠습니다. 두영님.”

“정말 감사했습니다.”

[앤디를  부탁한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부두로 향했다.

바람이 불어와 해안의 반대 방향으로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망자의 눈.]

미리 보낸 까마귀의 시야를 공유해 르나르국의 범선 선단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예상보다 빠르네.]

돛을 올린 범선 선단이 빠르게 오고 있었다.

바람을 제대로 탄 것인지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배웅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구나.]

팬텀스피드를 소환해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초록색의 빛으로 이뤄진 유령마는 마치 살아 있는 말처럼 투레질하더니 두려움이 사라진 눈으로 바다를 보았다.

[가자.]

나는 유령마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에서 맞으며 범선 선단의 마중에 나섰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침몰시켜주마.]

희각을 잡았으니, 이번엔 정각을 잡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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