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77화.
웨일 산맥으로 향하는 황야에 거대한 절벽이 생겼다.
지하수 깊이까지 파인 절벽에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은 겁을 먹고달아났다.
겁을 먹은 것은 희각과 라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 말도 안 돼. 대지에 상처를 남길 정도로 힘이라니….”
“대체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났단 말인가!”
그들도 산맥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생긴 거대한 절벽에 넋이 나가고 말았다.
[그때랑은 다르다. 이젠 나 혼자서도 너희 같은 놈들을 다 상대할 수 있어.]
파이로 대신이 칠각보전 3명을 데리고 왔을 때는 사각을 상대할 정도의 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네빌을 비롯해 많은 괴이의 힘을 흡수해서 이블 나이트가 되었다.
지금의 나라면 혼자서 칠각보전 셋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마력을 꽤 소모한 지금도 희각 하나와 1만의 군대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이런 건 전쟁이 아니야, 학살이지.”
“이대로는 개죽음이다. 도망쳐라. 모두 도망쳐!”
그나마 남아 있던 병사들도 절벽이 생긴 것을 뒤늦게 확인하곤 겁을 먹고 달아났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병사들 사이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괴물이다! 놈은 괴물이야!”
“달아나! 절대 이길 수 없어!”
아직 얼굴의 부기가 덜 빠진 바룸과 켈른 단장이었다.
르나르국의 군대에 합류한 것인지 그 둘은 병사들과 함께 달아났다.
현장에 남은 것은 마차와 말에 묶여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는 노예뿐이었다.
[사절단이 데려온 노예구나.]
나는 겁에 질린 노예들을 두고 언데드 군대로 하여금 도망치는 자들을 쫓게 했다.
그리고 하늘을 날아 몰래 달아나고 있는 라반 관리와 희각을 보았다.
[하늘을 나는 가마라니. 어릴 때 본 만화 동산 속 주인공 같군.]
어릴 적에 본 만화 영화에 알라딘이 양탄자 같은 것을 타고 날아다녔다.
그 양탄자에 무슨 원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가마도 그것과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신비한 마법의 힘이 작용한 것이리라.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땅을 박찼다.
그리고 공중으로 솟구쳐 오른 후 북쪽으로 조용히 달아나는 희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프로즌 스피어.]
얼음의 창 수백 개를 소환해 희각의 뒤를 노렸다.
“빌어먹을 왜 하필 날!”
라반이 아닌 자신을 쫓는 것이 억울했는지 희각이 몸을돌려 깃털을 발사했다.
깃털과 얼음의 창이 충돌하자 빛이 번쩍이며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깃털 역시 꽁꽁 얼어 우박처럼 쏟아졌다.
[놓칠 수 없지!]
나는 유령마를 소환했다.
그리고 녀석을 발판 삼아 도약했다.
힘을 과하게 준 바람에 유령마의 허리가 꺾이며 아래로 추락했지만, 덕분에 희각의 머리 위까지 도약할 수 있었다.
희각의 머리 위까지 쫓아간 나는 그대로 검을 휘둘러 그녀의 날개를 노렸다.
“어딜!”
희각은 공중에서 몸을 돌려 다시 깃털 검기를 날렸다.
갑옷이 깨지고 잘릴 정도로 강력한 검기에 몸이 뒤로 밀리자 그녀가 제비처럼 활강하며 아래로 도망쳤다.
[암흑 오라.]
나는 암흑 오라를 날개처럼 만들어서 그녀를 쫓았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점점 따라잡히자 희각이 다시 깃털을 쏘며 달아났다.
[베리어.]
베리어를 소환해 그녀의 깃털을 막으며 다시 속도를 높였다.
다시 거리가 가까워지자 희각이 이번엔 양손에 빛을 만들어 합치더니 광선 같은 것을 발사했다.
아까의 공격이었다.
[소용없다.]
길쭉하고 굵은 광선에 나는 검기를 일으켜 그녀의 광선을 베었다.
검은 검기가 광선을 반으로 가르며 날아가자 잘린 광선이 지상에 추락하며 도망치던 병사들을 덮쳤다.
광선에 닿은 병사들의 피부가 결정처럼바뀌며 부서졌다.
생체 조직을 광석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상대의 신체를 분해하는 힘이었다.
“저기 꺼져!”
광선을 발사한 희각이 검기를 피하더니 양손에 길쭉한 광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검처럼 길게 만든 광선을 내게 휘둘러 반격했다.
용기를 쥐어짜 회심의 공격이었지만, 그녀의 속도는 내게 견줄 수 없었다.
나는 암흑 오라의 날개를 접어 단숨에 그녀의 아래로 이동해 검을 피했다.
그리고 다시 올라가 날개를 베었다.
“이런!”
왼쪽 날개가 통째로 베이자 희각이 악을 지르며 추락했다.
날개 잃은 비행기처럼 빙글빙글 돌며 추락하는 희각.
[사라져라.]
나는 떨어지는 위치를 가늠하고 검기를 발사했다.
“이대로 죽을 순 없어!”
하나로 뭉쳐서 날아오는 검기에 희각은 남은 날개를 열심히 움직이더니 허공에 광선을 발사해 그 추진력으로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공격을 피한 순간 수십 갈래로 쪼개진 검기가 갑자기 여러 갈래로 쪼개지며 확산했다.
“뭣?!”
놀란 희각은 쪼개진 검기가 새롭게 자신을 노리자 깜짝 놀라 빛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빛으로 방패를 만들어 내 공격을 막으려고 했다.
신성력이 느껴지는 빛이었다.
신성력은 내가 가진 힘에는 상극이라 유리하다면 유리한 기술이었지만, 아무리 유리해도 압도적인 검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꺄아악!”
검기에 팔다리와 옆구리까지 잘린 희각이 피를 토하며 추락했다.
추락한 그녀가 황야에 쓰러져 코와 입으로 피를 토했다.
나는 공중에서 내려가 희각의 머리 위에 섰다.
피를 토하던 희각이 말했다.
“안 돼…, 난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로나스…. 로나스를 만나야 해. 다시 그와 맺어져야 한다고.”
[로나스?]
“이제 겨우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어. 제발, 제발 한 번만 봐줘…. 자비를 베풀어줘. 부탁….”
뭔가 말하고 있는데 살려달라는 것 외에는 무슨 말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궁금증이야 희각을 처리하면 해결될 일.
[구차하게 그러지 말고 명예롭게 사라져라. 헬파이어.]
화염을 소환해 쓰러져 있던 희각에게 발사했다.
“안 돼! 아아악!”
지옥불이 희각을 강타하자 머리부터 완전히 타버린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로나스….”
완전히 죽기 전 그녀는마지막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로나스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뒀다.
그것이 지금의 로나스 부르는 것인지, 과거의 로나스를 그리워하는 것인지는 그녀의 기억에서 알 수 있으리라.
예상대로 희각이 죽자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등에 있던 날개처럼 푸른빛을 띤 마력이었다.
마력은 내게 스며들어 그녀의 기억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가진 힘과 능력에 대한 정보가 마치 기계처럼 입력되었다.
먼저, 희각의 정체는 대붕(大鵬)이었다.
대붕은 9만 리를 난다고 알려진 전설 속의 새다.
희각의 경우 완전한 대붕이 아닌 인간의 피가 섞인 혼혈이었다.
그래서 대붕의 능력을 일부 부여받아강력한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반쪽짜리라 승천하지 못했다.
털의 색깔도 백색과 붉은색이 아니라 푸른색을 띠고 있어서 배척을 받았다.
생김새 역시 닭을 닮아 같은 괴이들은 물론, 인간들 사이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외톨이의 신세로 그녀는 세상을 떠돌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돌던 중 처음으로 건국왕 로나스를 만났다.
그는 희각에게 본래의 모습이 아름답다 말해주며 슬퍼하던 그녀를 위로해 주었고, 진심 어린 로나스의 위로를 받은 희각은 이후 그에게 사랑을 느꼈다.
그 감정을 숨길 수 없었기에 그녀는 그를 따라다니며 열렬히 구애했다.
로나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희각에게 인간과 괴이는 맺어질 수 없다고, 맺어져도 자신의 수명이 다하면 그녀가 큰 슬픔에 빠질 것이라며 거부했지만 희각은 완강했다.
그녀는 천 년 분의 사랑을 지금 나누면 된다는 말을 하며 로나스의 품에 안겼고, 결국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한 로나스 왕은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칠각보전 중에서 로나스왕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탓에 로나스 왕의 사후, 그를 향한 집착도 가장 크게 가졌다.
현재 로나스 왕이 무능한 응석받이가 된것도 그녀의 영향이 지대했다.
점술가를 통해서 로나스가 환생한 것을 안 그녀는 새로운 로나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가 바라는 것은 뭐든 구해주고, 그가 싫어하는 것은 뭐든 없앴다.
그것으로 모자라 로나스에게 불멸의 생을 안겨주자는 아이디어까지 가장 먼저 냈다.
불사자의 비밀과 광명 목탑의 비급 역시 그녀가 로나스 왕을 위해찾아낸 정보였다.
희각이 그렇게까지 로나스 왕을 위해 헌신한 이유는 오직 하나.
환생한 로나스와 다시 맺어지기 위함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영원토록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를 위해 광명 목탑의 비급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을 사용했다.
여기까지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다를 바 없지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희각, 이년 완전 미친년이었구나.]
기억을 읽으면서 욕이 나왔다.
기억 속 희각이 이제 10~12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애의 목에 칼을 겨누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부모를 살리고 싶거든 로나스 왕을 위한비급을 외워라.”
협박에 가까운 그 행동에 부모는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희각은 아이의 부모에 겨눈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아이는 부모를 살리기 위해 비급을 외웠다.
비급을 다 외운 아이는 온몸의 생기를 다 빼앗긴 채 말라 비틀어져 죽었다.
그리고 아이의 몸에서 나온 생기는 옥좌에 앉아 있던 로나스 왕에게깃들었다.
로나스 왕의 얼굴에 있던 조그만 기미까지 모두 사라졌다.
피부 역시 반질반질해졌고, 눈에서도 총기가 나왔다.
이것이 바로 광명 목탑에 숨겨져 있던 비급의 정체였다.
타인의 수명과 힘을 빼앗아 다른 이에게 넘기는 주술.
술법을 외우는 당사자의 생명을 타인에게 바치는 희생 마법!
누군가에게 목숨을 빼앗는 주술이 바로 비급의진짜 정체였다.
승려들은 이 비급을 위험성을 알고 광명 목탑에 숨겨두고 있던 것이다.
이 희생 술법은 본래 대적할 수 없는 마괴가 나타났을 때, 수미산의 승려들이 자신들을 목숨을 바쳐 마에 대적하기 위해 만든 술법이었다.
진정으로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선 사람들이 영웅을 위해, 세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 보탬이 되는 희생 술법인 것이다.
술법으로 생명력을 받은 대상은 수명이 늘어나며, 힘과 능력 역시 희생자가 지닌 생기만큼 쌓을 수 있다.
불사자의 저주처럼 영원한 삶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비급의 주문을 외울 사람만 있으면 그에 근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 속 희각은 이미 천 명이 넘는 아이들을 희생시켰다.
살날이 창창한 애들을 무려 천 명이나 희생시켜서 로나스 왕의 힘을 키우고 수명을 늘렸다.
애들의 몸이 비쩍 말라 죽어나갈 때마다 희각은 환희를 느꼈다.
로나스와 더 오래, 더 길게 함께 하고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망할 것. 진짜 구역질 나는구나.]
새파랗게 어린 애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로나스 왕과 함께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희각.
그 삐뚤어진 사랑에 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구역질하고 싶었다.
너무 끔찍하고 역겨워 흡수한 희각의 힘과 기억을 도로 토해내고 싶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곱게 죽이는 게 아닌데! 이렇게 쉽게 죽이면 안 됐는데!]
나는 이미 불타 죽은 희각의 몸을 짓밟았다.
짓밟고, 짓밟고 또 짓밟았다.
그때마다 땅이 울었다.
기억 속의 부모와 애들이 지른 비명처럼 처절하게 울었다.
하지만 아무리 땅을 밟아 부숴도 기억에 남은비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도 풀리지 않았다.
부모를 고문하는 그녀의 모습과 애들을 희생시키는 희각의 행동이 끊임없이 반복 재생되었다.
그 탓에 그녀를 너무 쉽게 죽였다는 증오심과 좀 더 고통스럽게 죽여야 했다는 후회가 자꾸만 내 정신을 갉아먹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제길! 뭐가 비급이냐! 뭐가 제2의 인생이냐! 이런 거 사용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쿵!
그치지 않고 계속 짓밟자 바닥이 갈라지며 대지가 치솟았다.
치솟은 대지를 보며 생각했다.
비급을 이용해서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기때문이다.
아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짓 할 수 있을 리 없다.
타인의 수명을 앗아가야 한다니….
그런 짓 할수 있을 리 없다.
나는 차갑고 어두운 땅속에 파묻히고 나서야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빛마저 들지 않는 구덩이 속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비급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비급의 실체를 안 지금 도저히 사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죽으면 죽었지 희각과 로나스 왕처럼 누군가에게 강요해 새 삶을 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뚜렷한 목적은 생겼다.
애들의 생명력을 빨아 강해졌다며 기뻐하는 로나스 왕.
자신의 수명이 늘었음에, 더 오래 방탕한 생활을이어갈 수 있음에 환희하던 그를 벌하는 것이다.
술과 음식 그리고 희각을 비롯한 여자들을 불러쾌락을 탐하며 환락에 빠져 있던 로나스 왕의 모습을 생각나자 나는 살인 충동을 느꼈다.
네빌의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의 발로가 아닌, 개인적인 혐오감에서 비롯된 명백한 살인 충동이었다.
[일단, 인간이 되는 건 나중이다. 먼저, 로나스 왕을처리한다. 비급이랑 같이 없애버리자.]
무너진 바위와 흙을 부수고 나오며 그리 각오했다.
망가진 흑기사의 갑옷들이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이블 나이트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갑옷을 입지 않고 희각의 주술을 사용했다.
그녀가 아름다운 미녀로 변한 기억을 흉내 내서 죽기 전의 내 모습으로 변했다.
빛을 다루는 술법으로 내가 바라는 심상을 투영하는 주술이었다.
진짜 인간처럼 식사가 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겉보기에 인간의 모습을 갖췄으니 이제 갑옷을 입을 필요는 없으리라.
[병사들을 다 죽이고, 노예들은 서창으로 데려와라.]
병사들을 뒤쫓던 언데드 군대를 물리고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모습과 목표를 간직한 채 서창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