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58화.
분명, 다시 날 설득을 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뜻밖이었다.
혹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한 번 뒤통수를 맞은 적이 있어서 의심스러웠다.
그래도 당당한 걸음걸이를 봐선 예전처럼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해 놓고 또 뒤통수를 칠 것 같지는 않았다.
또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눈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 고맙다.]
아라타의 호의를 받아들이고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먼저 불상 앞까지 도착한 아라타는 그 앞에 서서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있는지 양손을 모은 채로 몸을 돌려날 바라보았다.
“형님. 제가 비급의 위치는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산의 경계를 넘어야 합니다. 생자인 소승과 달리 망자인 형님께서는 제가 서 있는 이 금을 넘으시면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위험? 구체적으로 어떤 위험이라는 거지?]
“광명 목탑은 법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습니다. 형님이 광명 목탑의 안으로 침입할 경우 광명 목탑은 물론, 수미산의 모든 고승과 사천왕 그리고 신수들이 형님의 침입을 알게 될 것입니다. 혹 사람이 되어 무사히 빠져나오시더라도 고승들께 추궁을 받으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되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양반들이 오는 건 얼마나 걸리는데?]
“소승도 경험한 바가 없어 모르겠습니다. 다만, 광명 목탑은 수미산의 바로 아래에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양반들 강하냐?]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입니다. 형님께서 보아온 그 어떤 존재들보다도 강력할 것입니다. 당장 저와 함께 수련을받은 승려들만 해도 법력으로는 가네샤에 비견되거나, 그보다 뛰어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놈들이 오기 전에 잽싸게 비급만 가지고 도망가야겠다. 수미산 영역 밖에서 텔레포트 마법을 쓰면 괜찮겠지.]
“텔레포트라면 이곳으로 단숨에 이동한 서역의 그 술법을 말씀하시는 것이십니까?”
[그래.]
“그, 그렇군요. 확실히 그 술법을 사용하신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순식간에 거리를 벌릴 수 있으니….”
[문제없지? 그럼. 그만 뜸들이고 가자.]
“예. 소승을 따라와 주십시오.”
아라타는 불상에 짧게 염불을 외우더니 커다란 불상의 옆을 지나서 광명 목탑의 작은 입구 앞에 섰다.
이어서 내가 아라타의 뒤를 따르는 순간.
잠들어 있던 8기의 금인장들이 눈을 뜨고 깨어나더니 자세를 잡고 무기를 겨누었다.
[순리를 어긋난 자여. 너는 이곳을 지날 수 없다.]
가네샤를 지키던 금인장들보다 사양이 높은 것인지 광명 목탑을 지키는 금인장은 사람의 말까지 했다.
게거품을 물고 쓰러진 라마 고승과 달리 단번에 내 정체를 간파한 것으로 보아 가진 힘 역시 보통은 아니리라.
[남의 집 살림 망가뜨리는 악취미는 없다만…. 시간이 없으니까.]
나는 검을 소환해 마력을 불어넣었다.
금인장들 역시 각자의 무기를 들고 마지막 경고에 나섰다.
[미련을 버리고 저승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답하지 않았고, 이에 침입자라 판단한 금인장들은 커다란 황금 무기로 공격을 가했다.
[청구서는 나중에 하멜 성으로 보내라.]
검기까지 일으킨 금인장들의 묵직한 공격을 똑같이 검기를 일으켜서 받아쳤다.
최대치로 일으킨 검기가 8기의 금인장들의 검기와 부딪쳤다.
서로 다른 검기들이 힘 싸움을 하는가 싶더니 놈들의 검기가 내 검기에 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내가 검을 몰아치자 내 검기가 금인장들의 검기와 그들의 몸을 댕강댕강 잘라냈다.
[하늘로…, 돌아가….]
[불결한…, 저승으로….]
온몸이 수십 갈래로 베인 금인장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변화를 캐치하지 못한 채 기둥이 망가진 건물처럼 힘없이 무너졌다.
딱딱하고 무거운 금인장들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쿵쿵쿵 소리가 났다.
매끈한 돌들이 깨지고, 땅이 꺼졌다.
금인장들의 눈이 다시 감기더니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역시 형님…입니다.”
[가자.]
나는 앞장서는 아라타의 뒤를 따라 광명 목탑의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부푼 희망을 안고서.
*
아라타와 두영이 광명 목탑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고요히 앉아 있던 황금 불상이 황금빛 빛을 일으키더니 빛의 기둥을 일으켰다.
하늘 끝까지 솟구친 황금빛 빛의 기둥이 광명목탑은 물론, 수미산 전체를 비췄다.
수미산의 정상 도리천(忉利天).
산의 주인이자 하늘의 주인에 오른 지금의 제석천(帝釋天), 천주(天主)는 솟구친 빛의 기둥을 보더니 고요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맑았던 수미산의 하늘로 먹구름이 몰려오며 강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하늘과 수미산 전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수미산의 각 지방을 관장하는 사방수들이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일어났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광명 목탑과 가장 가까운 산지에서는 화염이 솟구치더니 화염을 머금은 주작이 하늘 위로 비상했다.
주작의 비상하며 수많은 불꽃이 퍼져 반딧불처럼 하늘을 밝히자 불을 머금은 화조들이 하늘 위로 비상하여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북쪽 하늘에서는 용오름 현상과 함께 우박이 떨어져 내리더니 현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해룡들도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울부짖었다.
동쪽 하늘에서는 귀청이 찢어질 것만 같은 천둥이 쳤다.
우뢰가 마구 치는 비구름을 타고 청룡이 괴성을 지르며 거센 폭풍우를 일으키자 먹구름 속에서 비룡들이 나타나 청룡의 뒤를 따랐다.
서쪽 땅에서는 산이 갈라지고 절벽이 무너지더니 용암이 치솟았다.
뜨거운 용암 속에서는 거대한 백호가 나와 산을 호령했다.
그러자 그 뒤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호랑이가 나타나 갈라진 산줄기를 뚫고 나와 송곳니를 드러낸 채 백호의 뒤를 쫓았다.
수련을 하던 고승들도 이변을 느꼈는지 광명 목탑의 앞에서 솟구친 황금색 빛의 기둥을 보았다.
“산에 이상이 생겼다.”
“산에 말씀이십니까?”
“그래. 불결한 존재가 들어온 것 같구나. 그것도보통 위험한 자가 아닌 듯 하다.”
긴 백색 수염에 염주를 든 노승의 말이 말했다.
수미산의 법사 중 한 명 강명 법사였다.
그가 이리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던 승려들은 당황했다.
“법사님. 저희는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법주승들을 부르게. 내가 직접 이끌겠네.”
“법주승을! 그 정도의 사안이란 말입니까?”
강명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법사님.”
그의 말에승려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동분서주하여 법주승들을 불러 모았다.
법사는 수염을 다듬으며그렇게 모인 법주승들과 함께 산을 내려갔다.
바람이 그들을 인도해주었다.
나긋나긋한 그들의 발걸음이 한번 이어질 때마다 땅이 접히며 길을 좁혔다.
그렇게 수미산의 모든 수호자가 광명 목탑으로 향했다.
*
“이쪽입니다. 형님. 저를 따라서 계속 내려와 주십시오.”
[내려간다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예. 아래로 오시면 됩니다.”
아라타는 목탑의 안쪽에서 주홍색을 띤 연등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개화 직전의 연꽃처럼 반쯤 열린 연등은 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마치 밤길을 밝히는 가로등같이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아라타의 손에서 따끔따끔한 빛이 나오는 것을 보면 녀석의 신성력으로 빛을 내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빛도 조금 강했다.
목탑 아래 지하실을 비추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나는 아라타를 따라가며 질문했다.
[이상한데. 보통 이런탑은 아래가 아니라 위로 가야 하는거 아니야?]
“그게 바로 속임수입니다. 꼭 위로 향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역으로 찌른 것이지요. 아둔한 자들이 위로 향하면 결국 비급을 찾지 못할 테니까요.”
[흠…. 그 말은 내가 아둔하다. 뭐 그런 말이냐?]
“헉!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때리지만 마십시오!”
[녀석. 호들갑은. 안 때릴 테니까, 안내만 잘해라.]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형님!”
아라타가 연등을 들고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자 연등에서 나온 빛이 벽면을 비췄다.
벽면에 그려진 음각 문자들이 밝은 빛을 받아 반들반들 빛을 냈다.
목탑의 벽면에 새겨진 문자들은 한문 시간에 배웠던 한자들과 그 모양이 비슷했다.
[한자 같네.]
상형 문자가 토대여서 그런지 지구나 여기나 도긴개긴이었다.
“아가마라고 부르는 문자입니다.”
[아가마 문자?]
“예, 아가마는 전승, 성전 등으로 풀이되는 말이자 하나의 문자 체계입니다.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매우드물고 희귀한 언어이지요.”
[그래?]
“문자의 수가 엄청나게 방대할 뿐 아니라, 체계도 매우 복잡하여 수미산에서도 배움이 깊은 고승들이 아니면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언어와 문자에 통달한 고승들이나 겨우 읽고 해석할 수있는 옛날 옛적의 문자이지요.”
[흐음….]
아라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글이 복잡해 보이긴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아가마 문자에 관한 정보는 네빌의 기억에도 전무했다.
백과사전 같은 놈의 기억에도 없는 글이라면 엄청나게 오래된 문자가 분명했다.
그렇기에 본래는 나도 이 글을 읽을 수 없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벽면에 적힌 문자들을 골똘히 보자 조금씩 해석이 되었다.
나는 머리에 떠오르는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해서 읊어보았다.
[행자가 걷는 그 길이 곧 새로운 길이리니, 행함은 곧 나아감이리라.]
아가마 문자를 읽은 것이다.
지구에 있을 때 한문 수업을 열심히 들어서 해독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 아가마 문자를 읽을 수 있는 이유는 동명과 상촌에서 마괴 교룡과 괴이 가네샤를 처치하면서 그들의 마력과 언어에 연관된 기억을 얻었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가네샤와 교룡은 수백 년을 산 괴이들이었고, 오랜 시간을 살아온 만큼 동토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이곳 수미산의 스님들이 수련한 문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금 난해해도 천천히 읽으면 해독할 수 있었다.
[혼백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행자이니. 죽음이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리라. 참됨과 바름을 행한 자는 밝고 선한 눈을 지녀 더 나은 세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거짓과 그름을 행한 자는 맹자처럼 눈이 멀어 지옥으로 떨어지리니. 우리네 인생은 곧 자신의 영혼을 갈고 닦는 것 그 자체이니라. 행자는 새겨들어라. 그대의 다음을 위해 지금의 그대를 고결하게 갈고 닦으라. 그리하면 빛이 그대를 양지로 인도해 계속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눈이 멀고 만다면 어둠이 그대를 집어삼키고 말리라…. 음. 새로운 삶을 말하는 걸 보니 일종의 윤회사상인 것 같네.]
광명목탑의 벽에 적힌 아가마 문자는 윤회사상에 대한 것이었다.
지구에서도 흔히 본 적 있는 내세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렇기에 이 중에는 천륜을 어지럽히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자들이 가는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 내용을 쭉 보면 삼생(三生)의 모든 것은 진정한 자아를 이뤄 입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라 말하고 있었다.
전생과 현생 그리고 이어지는 모든 내생까지 자신의 고결함을 깨달아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삶은 결국, 연어가 산란을 위해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이 인생이라는 고난의 줄기와 고비들을 헤치고 뛰어넘으며 깨달음을 이룩하는 거대한 여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올라가면 비로소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에 지은 죄를 뉘우치고 반성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기회의 여정은 곧 현생.
내세는 이 현생에서 죄를 뉘우치고 더 높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또 다른 여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전생에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다음 생에서는 이 죄를 뉘우치고 만회할 기회가 반드시 주어진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기회를 어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바로 이 다음의 내세가 결정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전생의 죄를 뉘우치고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3선도인 아수라도, 인간도, 천상도에서 다음 깨달음을 얻을 기회와 혜택을 누린다.
역으로 깨달음을 얻을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끝까지 죄를 뉘우치지 못하고, 다시죄를 짓는 것을 반복한 자들은 6도 중 3악도인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에 떨어져 영원불멸의 고통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이다.
3악도에서 영원한 죽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얻는 여정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늘 영원의 고결함을 간직해야 하며, 이를 증명하는 것을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
그런 내용이다.
[영혼의 고결함이라…. 이 말이 사실이라면,지금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스스로를 증명하는 여정이라는 건가? 아주 지랄 맞네.]
내용을 확인한 나는 서서히 치미는 짜증에 주먹에 힘을 주었다.
결국, 이 말은 내가 이 고생을 하는 이유가 전생의 내가 지은 죄업을 청산하기 위함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내리막길 끝에 도착한 아라타가 걱정스레 물었다.
반짝이는 머리를 하고 멀뚱멀뚱 날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괜히 울화가 치밀었다.
아라타에 대한 분노는 아니었다.
내 분노는 아라타가 믿는 신이라는 작자를 향한 것이자 이 아가마 문자를 쓴 놈들에 대한 분노였다.
나는 다시 벽에 적힌 글을 보며 말했다.
[만약, 정말로 윤회사상이 있다면, 어머니가 죽은 것도 필연이란 말이야?]
“예? 그, 그것은….”
아라타는 쉬이 답하지 못했다.
나는 다시 생각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범죄자에게 죽임당한 어머니가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런 고통을 받았다는 말이 된다고.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깨달으라고, 내 부모님을 그런 끔찍한 놈에게 잔인하게 고통받으면서 죽게 만든 것일까?
그리고 하나뿐인 부모님을 잃은 내게는 또 무슨 시련과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서, 무슨 가르침과 뉘우침을 선사하기 위해서 그런 상처를 내려줬단 말인가?
전생의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나만이 아니다.
이 육도윤회가 사실이라면.
[나는 왜 그 이상한 괴물을 만나서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다시 살아서 돌아가고 싶어했기 때문인가? 그 모든게 내 욕심이라는 말인가? 그럼, 현생에서 받은 모든 고통은 전생의 업이니 그냥 고분고분 받아들이란 말인가?]
내게 닥친 시련,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닥친 고통.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모든 아픔이 미친 사이코 범죄자들의 탓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전생에 지은 업이라서 그렇다는 일종의 운명론으로 귀결된다.
모두 그 사람들이원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편리한 자기해석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들이 도리어 전생에 그래서 그렇다고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개같네.]
피해자가 당한 억울함을 전생에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아가마 문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이 모든 내용이 결국, 죄인의 책임까지 피해자에게 덧씌우는 개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두고 온 내 가족을 다시 만날 자격까지 잃게 된다.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시련이 될 테니까.
내겐 너무 잔인하고 끔찍한 사실이었다.
[뭐가 깨달음이냐. 좆 같은 부처 새끼.]
나는 아라타를 보며 부처를 욕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윤회사상이 있고, 열반이라는 경지가 있다면.
내가 비급을 가져가도 부처란 놈이 아무런 불만도 품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서 사람을 마구 해쳐도, 온갖 사악한 짓을 해도 어차피 내세에서 다 정산될 테니까!
“형님!”
아라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법력을 싣고 소리쳐서 그런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증오와 원망이 다시 사그라지고 정신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안 좋기라도 하신 겁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을 생각했다.
이 감각….
네빌이 처음 언데드가 되고 겪은 감정변화와 비슷했다.
분노와 증오에 몸을 맡기고 그것에 지배당해 자신을 잃을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자신을 잃어버리는 감각이었다.
[갑자기 왜….]
“형님?”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홀린 것처럼 치미는 증오와 원망을 억누르며 나는 다시 아라타의 앞으로 향했다.
내게 일어난 이 변화와 자꾸만 치미는 조바심이 아무것도 아니길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