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6화.
방법은 간단했다.
[애들이 들고 있는 술 단지를 깨!]
“술 단지를요?”
[그래. 그걸 깨면 애들이 정신을 차릴 거야.]
“아, 알겠습니다! 다들 들으셨지요?! 단지를 깨십시오!”
아라타가 소리치더니 한 아이의 단지를 빼앗아 힘껏 던졌다.
“어? 여, 여기 어디야?”
“엄마 어디 있어?”
항아리가 깨지자 애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는 아이들.
나는 그 아이들을 두고 멀리서 걸어오는 문지기들을 보았다.
똥싼바지를 입은 채 기절했던 문지기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도 최면이 풀리지 않아서 여전히 침입자인 내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헉! 저, 저 사람들은 어떡합니까?!”
[이렇게 하면 돼.]
나는 검으로 가네샤의 항아리를 베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할 정도로 거대한 항아리에 검을 휘둘러 검기를 쏘았다.
충격파에 휘말려 한쪽 귀퉁이에 굴러가 있던 거대한 술독이 내가 휘두른 검에 잘리자 그 안에 있던 술이 마구 흘러내리며 쏟아졌다.
“켁! 술 냄새!”
궁전에 고약한 술 냄새가 진득하게 퍼지자 아라타가 코를 막고 손을 휘저었다.
한편, 똥 싼 바지를 입고 추적추적 걸어오던 문지기들도 무릎을 꿇고 쓰러지더니 정신을 차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상황을 깨닫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이들과.
“뭐야? 내 바지가 왜 이래?”
“서, 설마 이 내가 똥을 지렸단 말인가?!”
자신이 똥을 지렸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는 이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들 한 실력 하는 절세고수들인데 바지에 똥을 지렸으니, 그 창피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 내가 똥을 지릴 리가 없어.”
괴로워하는 문지기들을 본 아라타는 그들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위로했다.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똥싸개여도 부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봐주십니다. 아미타불….”
“내, 내가 똥…싸개?”
충격받은 무인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위로하는 건지 놀리는 건지 모르겠네.]
나는 아라타와 문지기들은 두고 아이들을 보았다.
여기저기에서 술 단지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부모와 아이들이 상봉했다.
“엄마-!”
“아빠-!”
“울동아! 우리 울동이! 엄마가 미안하다!”
“봉석아! 못난 아버지를 용서해라!”
부모님이 애들을 부둥켜안고서 오열했다.
자식을 지켜주지 못한 애환이 봇물처럼 터져 나와 눈물이 쏟아졌다.
그래서 금지옥엽 키운 자식들이 돌아왔는데도 기뻐하기보다 미안함이앞섰다.
그들 모두 자식을 되찾기 위해상촌에 남은 부모들이다.
자식을 빼앗아간 가네샤를 향한 원망보다 그 자식을 지켜주지 못한 무력한 자기 자신을 향한 원망이더 큰 것이리라.
그렇기에 더 자녀들에게 미안해했고, 자녀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구원받은 심정일 것이다.
“애들이 돌아왔다! 상촌의 미래가 돌아왔어!”
“상촌의 악마가 죽었다! 이제 상촌은 자유다!”
“이 지긋지긋한 술! 이제 더 만들지 않아도 된다!”
가네샤에게 맞서기 위해 농기구를 들고 찾아온 청년들도 이산가족 상봉의 순간을 보며 눈물을훔쳤다.
“이 노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검버섯이 핀 쭈글쭈글한 노인도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뒤범벅되었다.
새어나오는 목소리를 참으며 코를 삼키던 그는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술에 젖은 궁궐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지존님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되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존 두영 만세!지존 두영 만세!”
양 팔을 높이들고 절을 하며 외치는 노인의 모습에 아라타와 마을 주민들까지 합세해 외쳤다.
“두영님 만세!”
아이들을 데려와 무릎을 꿇고 은인이라며 고개를 조아리는 상촌의 주민들.
수백 명의 사람 앞에서 나는 그렇게 지존으로 추앙받았다.
만세 소리와 감격에 겨운 울음 속에서 나는 금은보화를 보았다.
금은보화는 무너진 궁궐 벽에서 흘러들어온 빛에 반짝거렸다.
그 모습이 화려하고 찬란하기 짝이 없었으나, 울음이 그칠 때까지 그 누구도 황금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보람…. 있었네.]
나는 순수하게 기뻐하는 상촌의 주민들을 보며 그렇게 보람을 느꼈다.
부처님은 믿지 않지만, 이 욕심 없고 순수한 사람들이 무사히 이 땅에서 살아가기를 기도했다.
그날 밤.
상촌의 지배자가 바뀌었다는 소문과 가네샤의 목이 지존 두영의 검에 잘렸다는 소문이 상촌 전역으로 퍼졌다.
이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만세를 외쳤다.
수십 년간 가네샤의 폭정에 시달려 왔기에 그들은 가네샤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 잔치까지 벌이며 해방의 날을 축하했다.
쉴 틈 없이 가동되던 양조장이 처음으로 휴일을 맞이하면서 저잣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술과 해방감에 취한 사람들은 가네샤의 죽음을 환호하며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며 불을 피우고 노래를 불렀다.
한쪽에서는 가네샤가 모은 황금을 상촌의 주민들이 나눠갖기도 했다.
다만, 황금을 분배하던 도중.
금은보화가 탐이 난 상촌의 사천왕이 부하들을 끌고 찾아와 내게 도전장을 던졌다.
오후에 쓰러뜨렸던, 흑랑, 황우, 흑조 패거리 외에도 남방의 표견 이원이라는 자와 동방의 독사 시독이라는 자들도 끼어 있었다.
표견 이원은 범처럼 날렵한 몸놀림과 호형권이라는 무술을 사용하는 자였고, 독사 시독은 독사라는 별칭대로 독이 발린 암기를 사용하는 자였다.
양쪽 모두 사천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빼어난 실력자들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암흑 오라를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도전장을 던진 사천왕 + 흑조는 단, 1초를 버티지 못해 그 자리에 쓰러져 똥오줌을 지리는 신세가 되었다.
“지존께서 사천왕과 흑조를 패기만으로 일합에 조지셨다!”
“이것이 진정한 지존!”
“그 흑랑과 사천왕이 똥까지 지렸다!”
“괄약근이 풀릴 정도의 패기라니!”
“다 큰 사내가 바지에 똥을 지리다니! 나 같으면 두 번 다시 상촌 땅에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닌다! 하하하!”
술에 취한 주민들이 소리쳤고, 제대로 쪽을 당한 사천왕과 흑조 패거리들은 부끄러움에 상촌 땅에 다시는 발을 디디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떠났다.
아라타가 위로하던 남자들도 그랬지만, 동토인들은 기본적으로 욕심보다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똥싸개들은 그 굴욕을 견디지 못했다.
상촌을 주무르던 왕들이 모두 떠나자 주민들은 달밤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으로 잔치를 이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잔치에 취해 잠이 든 새벽녘.
[빨리 가자.]
“정말 이렇게 가시렵니까?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시는 게….”
[어린 게 발랑 까져서는. 혼나기 전에 빨리 와!]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두영님.”
나는 길잡이 아라타를 데리고 상촌을 빠져나와 광명 목탑으로 향하는 길을 서둘렀다.
아직 갈 길이 멀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라이트 마법의 빛에 의지해 산을 오르던 아라타는 멀어지는 상촌의 모습에 입맛을 다셨다.
“국밥집 아가씨 참 예뻤는데….”
입맛까지 다시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술과 자신에게 반한 여인들과 거사를 치르지 못한 것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명색이 승려라는 놈이 색욕에 빠지다니. 쯧쯧!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굶주려서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는 것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그저 소승은 본능에 충실할 뿐입니다.”
[맞을래? 또 감자 머리로 만들어줄까?]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두영님.”
한 소리를 하자 아라타는 그제야 다시 길 안내를 시작했다.
그렇게 산등성이를 올라 꼭대기에 도착해 상촌 땅이 주먹만큼 작아지자 아라타가 산 아래 상촌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두영님.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불자인 소승이 할 말은 아니지만, 두영님께서는 아깝지 않으십니까?”
[뭐가?]
“상촌의 지배자 자리 말입니다.”
아라타의 말에 나는 가네샤를 처치한 후의 일을 떠올렸다.
노인장을 비롯한 마을의 주민들이 날 상촌의 지배자라 칭하며 부디 상촌을 잘 이끌어 달라고 했다.
약육강식이 기본인 동토의 법도를 따라서, 가네샤를 쓰러뜨린 내가 자연히 상촌의 지배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가네샤가 소유하고 있던 명패를 찾아내 내게 건네었고, 나는 주민들에게서 받은 명패를 어떻게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애초에 노인장에게 들은 상촌의 지배자 자리는 독재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상촌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내가 컨트롤 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군대를 키워 10만에 다다르는 상촌 주민들을 사지로 내몰 수도 있었다.
가네샤가 그러했듯이 막대한 양의 금은보화로 주민들을 착취해서 독식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새로운 궁궐을 지은 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가차 없이 참수할 수도 있다.
새로운 도전자에게 자리를 빼앗기기 전까지.
정말 내 마음대로 이 땅을 주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블 나이트가 된 지금의 나라면 아마 동토의 상식이 개변될 동안 상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상촌의 대통령.
아니, 대통령보다도 더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두영님의 능력이라면 상촌을 영원토록 지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상촌만이 아니라 동토의 모든 땅을 지배해 진정한 왕으로 군림하실 수 있으실지 모릅니다! 진정한 지존이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라타는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동토의 모든 땅을 지배하는 진정한 왕.
얼핏 듣기에는 무척이나 멋지고, 대단한 자리 같다.
하지만….
[귀찮게, 그런 걸 왜 하겠냐?]
흥미 없었다.
가족들과 이 땅에 함께 돌아오더라도 그런 자리엔 관심 없었다.
“네? 서, 설마 두영님께서는 왕의 자리가 귀찮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왕이라구요?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고, 두영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수 있는데요!? 왕만 되면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인들과도 매일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고요?!”
내 말에 아라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속세에 찌든 아라타의 모습에 나는 손으로 산을 가리켰다.
[아라타야. 저 산꼭대기 위에서 내가 널 보면, 네가 어떻게 보일까?]
“…그, 글쎄요. 잘은 모르겠지만,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설사 보이더라도 시력이 빼어나지 않다면 조그맣게 보이지 않을까요?”
[반대로 저 산 아래에서 널 보면?]
“마찬가지로 잘 안 보일 것 같습니다.”
[그치? 높은 자리에 있다는 건 그런 거야.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자신의 밑에 있는 건 무엇하나 제대로 볼 수 없지. 아래에 있는 사람들도 높은 사람을 제대로볼 수 없고.]
“그, 그렇습니까?”
[그래. 서로를 제대로 보려면 그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게 나아. 거기다 어느 산이건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발판은좁아져. 나는 높고 좁은 자리에서 남들을 내려다보면서 사는 것보다는 낮은 자리라도 넓은 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한다. 그게 진짜 세상살이 아닐까?]
“…높고 좁은 자리보다, 낮아도 넓은 곳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게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라타는 내 말을 곱씹으며 높은 산을 보았다.
“확실히 높은 자리, 높은 하늘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사는 이 넓은 땅이 더 비옥할진대….”
그는 다시 잔치 중인 상촌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독한 자리보다 만인과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할 터. 고독한 지존의 자리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행복하지 못하거늘.”
산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라타가 갑자기 술법을 사용할 때처럼 몸을 빛내기 시작했다.
전구처럼 밝은 빛을 뿌리는 아라타.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눈이 부시고 얼굴이 따끔따끔했다.
데미지다, 아라타가 신성력을 일으켜서 빛 속성 데미지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구나. 그랬어! 두영님! 소승 이제야 두영님의 깊은 뜻을 이해했습니다! 두영님께서는 즉 만인이 평등한…!”
[새끼가! 눈부시잖아! 불 안 꺼!?]
“컥!”
반짝이는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나서야 아라타의 몸에서 나오던 빛이 사라졌다.
따끔따끔했던 얼굴이다시 멀쩡해졌다.
아라타는 혹이 올라온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바닥을 굴렀다.
“크억! 머리! 내 두개골이!”
[이 새끼가 은근슬쩍 딜을 넣어? 뒤질래?]
“죄, 죄송합니다. 소승이 무심코 깨달음을 얻어서….”
[다음에 또 허락 없이 불 켜면 진짜 죽는다. 알겠냐?]
“예,두영님.”
[좋아. 그럼, 이제 진짜 광명 목탑 좀 가보자. 시간 낭비 그만하고.]
“물론입니다! 소승이 형님을 광명 목탑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형님?]
“소승 이제 두영님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형님! 이쪽입니다!”
[미친놈. 망자라고 잡아먹으려 들 때는 언제고.]
다시 길 안내를 시작하는 아라타.
나는 달빛에 반짝이는 녀석의 뒤통수를 등대 삼으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우리가 산을 넘자 동이 트고 밝은 빛이 상촌에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