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48화.
상촌 북방(北方) 길목, 중앙 광장.
이곳에서는 대결 준비가 한창이었다.
상촌의 북쪽 땅을 다스리는 당주, 성난 황소 황우(黃牛)와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검은 매 흑조(黑鳥)의 대결이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상촌 북방 땅의 주인이 결정되는 중요한 대결인 만큼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싸움의 무대는 콜로세움과는 그 분위기와 방식이 남달랐다.
정중앙에 마련된 10미터 높이의 강철 원형 탑이 있었고, 가장 큰 탑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에 5미터 높이의 대나무들이 배치되어있었다.
대나무와 탑의 아래에는 크고 작은 죽창들이 꽂혀 있었는데, 높이와 죽창의뾰족함을 생각하면 잘못떨어지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힘들것 같았다.
사람들이 나왔다.
작은 붓을 들고 나온 사람들은 바닥에 꽂힌 죽창의 끝에 붓질을 하며 노란 액체를 발랐다.
[저 사람들은 뭐하는 거냐?]
“저건 혈독사(血毒蛇)라고 합니다. 호신강기마저 녹이는 것은 물론, 살을 썩히고 피를 응고시킨다고 알려진 극독이지요.”
[혈독사?]
아라타의 설명에 따르면 혈독사의 독은 매우 위험한 독이었다.
바위까지 녹이는 극독인데, 그 성질이 독특해 매끈한 대나무는 녹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어지간한 호신강기는 가볍게 지워버리기 때문에 자객들도 애용하는 독이라고 한다.
그런 독을 죽창에 찔렀으니 한 번 떨어져 죽창에 찔리게 되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다.
그 탓에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도전자들은 목숨이 아까워 감히 도전장도 내밀지 못한다고 한다.
생명을 경시하는 야만적인방식이었다.
현대인인 내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지만, 상촌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온 전통이었다.
그래서 누구도 이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 목숨 귀한 줄을 모르는구나.]
나는 준비가 끝난 무대를 보았다.
현재 이 야만적인 무대를 사이에 두고 2개의 그룹이대치하고 있었다.
한쪽은 검은 털옷을 입은 흑조의 추종자들이었고, 다른 한쪽은 누런 장삼을 입은 황우의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검, 창, 활 등 각자의 무기를 들고서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인지 다들 눈꺼풀을 감지 않았다.
대화도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현장에는 구경꾼들이 나누는 이야기만 요란하게 울렸다.
구경꾼들은 흑조와 황우의 싸움을 두고 판돈을 걸기 시작했다.
“당연히 흑조지! 흑조는 오늘을 위해서 무려 10년 동안이나 폐관수련을 했다지 않은가! 소문에 의하면 실력이 무려 3배나 늘어났다고 하네. 그가 이길 것이야!”
“3배나? 이거 무조건 흑조에게 걸어야겠군!”
“나도 흑조에게 걸겠네! 아무리 황우라도 흑조의 오금수(烏金手)를 막을 순 없을 테지!”
“예끼! 이 사람들아! 아무리 그래도 황우지! 전에 황우가 30척이나 되는 마한하티를 맨주먹으로 때려눕힌 사건 기억 안 나는 겐가?”
“30척짜리 마한하티를 말이오?! 그게 정녕 사실이오?!”
“작은 녀석도 잡기 힘든데, 그 큰 녀석을 맨손으로?!”
“아. 그렇다니까! 이번엔 날 믿고 황우에게 걸어보게. 분명, 큰돈을 벌 수 있을 게야.”
“이보게! 나는 황우에게 걸겠네! 상촌에서 오래 굴러먹은 평방댁 보따리장수 광 씨 말을 못 믿으면 누굴 믿겠나!”
“나도 황우에게 걸겠네! 광 씨 자네만 믿겠네!”
“나도 황우에 한 표.”
“나도 걸겠네!”
사람들은 흑조와 황우의 대결에 앞서 승자를 판단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업적을 들먹이며 판돈을 걸었다.
승률은 30척짜리 마한하티를 맨주먹으로 때려눕혔다는 황우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보따리장수 광 씨의 증언의 영향이 가장 컸다.
내기라 그런지 일확천금을 노리고 흑조에게 돈을 건 사람들의 수도 적진 않았다.
소란스러운 현장에서 하늘을 보며 시간을 확인하던 한 노인이 외쳤다.
“시간이 되었군! 다들 조용히 하시게!”
삐쩍 마른 노인이었는데 겉보기와 달리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노인의 외침에 관중이 조용해지자, 마치 그들이 조용해질 타이밍을 노린 것처럼 한 남자가 나왔다.
기름띠로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검은 깃털 망토와 거대한 흑조의 머리통을 투구처럼 쓴 남자였다.
그의 양손에는 세 갈래로 톡 튀어나온 갈퀴손이 장착되어 있었다.
수갑구라는 무기였다.
그는 땅을 박차 깃털로 된 망토를 펄럭이며 10미터 높이의 탑에 올랐다.
“흑조! 흑조!”
사람들은 흑조의 등장에 환호하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마치 유명 아이돌의 콘서트장에 온 것 같았다.
그만큼 관중의 환호는굉장했다.
매처럼 하늘을 비상한 흑조는 깃털 옷을 털며 상대를 기다렸다.
곧이어 흑조가 등장한 진영의 맞은편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우락부락한 몸집에거대한 환도를 든 남자의 정체는 바로 황우!
호랑이 가죽으로 된 반바지에 신발만 신은 차림이었는데 알몸인 상반신은 프로레슬러처럼 튼튼해 보이는 근육질이었다.
보디빌더첢 근육을 뽐내며 등장한 황우는 땅을 박차더니 단숨에 원형 탑의 위로 솟구쳐 올라 묵직하게 착지했다.
히어로 영화의 영웅들처럼 멋지게 3점 착지를 한 그는 큰 몸을 일으키더니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길게 자라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뒤로 넘겼다.
모 샴푸 광고가 생각나는 황우의 우아한 행동에그에게 돈을 건 관중이 걸 그룹이라도 만난 소년처럼 환호했다.
“황우 형님이다! 황우 형님이야!”
“꺄아! 여깁니다! 황우 형님!”
[꺄아?]
열화 같은 관중의 환호성에 황우는 손을 흔드는 등의 쇼맨십을 보였다.
비명을 지르며 반기던 몇몇 남성 관중은 소녀 같은 비명을 질렀다.
황우가 외쳤다.
“기대해, 보이들! 나 황우가 오늘도 멋진 모습을 보여줄 테니까!”
“…역겨운 놈.”
윙크까지 하는 황우의 쇼맨십에 흑조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황우가 다시 머릿결을 넘기더니 흑조를 향해 환도를 겨누었다.
“질투는 좋지 않아. Boy~. 오늘에야말로 널 내 것으로 만들겠어!”
“만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오늘을 네놈의 기일로 만들어주마!”
“후후후! 자신 있는 모습을 보니 흥분되는구나! 좀 더 날 흥분시켜줘! Boy!”
황우는 도발적인 외침과 동시에 환도의 끝으로 누런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징그러운 놈!”
이에 흑조 역시 지지 않고 갈퀴손에 기를 불어넣었다.
갈퀴손에서 회색의 아지랑이가 올라오자 황우가 환도를 높이 들었고, 흑조 역시 이를 막기 위해 자세를 갖추었다.
쾅!!
빠르게 떨어진 황우의 환도!
흑조는 갈퀴손을 교차해 막더니 바닥 차고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검은 깃털로 된 망토를 펄럭이며 솟아오른 그는 공중에서 아래에 있는 황우를 향해 갈퀴손을 휘저었다.
그가 한 번 팔을 휘두를 때마다 날카로운 검기 3개가 발톱 자국처럼 날아갔다.
황우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환도를 화려하게 움직여 흑조의 검기를 모두상쇄하더니 단숨에 흑조가 있는 하늘까지 뛰어올랐다.
코앞까지 날아오는 황우의 모습에 흑조는 놀라면서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공중전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흑조는 하늘을 차더니 마치 새처럼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황우의 공격을 피했다.
황우 역시 흑조가 자신을 피하는 것을 보고는 하늘을 박차 흑조의 뒤를 쫓았다.
저렇게 날아다닐 거면 왜 저 높은 데서 싸우나 싶었다.
황우가 속도를 높여 흑조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흑조의 움직임에 비해 황우의 움직임은 직선적이었다.
흑조는 공중을 선회하더니 하늘을 자유롭게 누비며 황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황우는 환도를 휘둘러 그 공격을 막았지만,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하늘에서 흑조의 공격을 제대로 막기란 쉽지 않았다.
발을 디딜 곳이 필요하다고 느낀 황우는 환도로 흑조의공격을 막음과 동시에 그를 밀어내고 작은 대나무 위에 앉았다.
조그만 대나무 기둥에 한 발을 대고 앉은 그는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제법, 제법이야! 흑조! 오랜만에 싸우는 맛이 나!”
극찬이었다.
하지만 무대의 중앙을 차지한 흑조는 불쾌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황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소룡처럼 손을 까딱까딱 거리며 도발했다.
“기분 나쁜 덩어리. 이번에야말로 나의 오금수로 네놈의 더러운 몸뚱이를 찢어발겨 주마.”
도발에 넘어간 황우가 외쳤다.
“후후후! 나중에 내 품에서 울면서 빌게 만들어 주겠다!”
황우가 얼굴을 붉히더니 온몸의 기를 일으켰다.
그가 밟고 있던 대나무의 가지가 아래로 쭉 휘어지더니 활대처럼 다시 올라갔다.
황우는 장대높이뛰기를 하듯이 휘어지고 본래대로 돌아가는 대나무의 탄성을 이용해 단숨에 치솟았다.
환도를 역수로 쥔 그는 흑조의 머리 위로 비상했고, 로켓처럼 날아드는 황우의 공격에 놀란 흑조는 온몸의 기를 방출했다.
역수로 쥔 황우의 대도가 흑조의 노렸다.
흑조는 갈퀴손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다.
쾅!!
힘과 힘이 맞부딪치며 폭발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충격파가 퍼졌다.
일직선으로 세워져 있던 죽창 중 두 사람과 가까운 자리에 있던 죽창은 끄트머리가 부러졌고, 충격을 덜 받은 죽창은 삐딱하게 기울었다.
곧 흑조와 황우가 다시 충돌하며 힘싸움에 돌입했다.
그러나 힘으로는 황우가 흑조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힘에서 밀린흑조는 물러나 좁은 원형판을 빙그르르 돌며 공세를 펼쳤다.
잔기술이 많은 그 공격을 황우는 정면에서 받아치며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공방을 주고받을 때마다 충격파가 사방팔방으로 퍼졌다.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는 것이마치 콘서트장의 우퍼 앞에 선 것 같았다.
“황우! 황우!”
“흑조! 흑조!”
두 고수의 싸움에 전율이 온몸을 관통하자 관중은 내기도 잊은채 환호했다.
이는 옆에 있는 아라타 역시 마찬가지.
누굴 응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박진감 넘치는 그들의 전투에 아라타는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렇게 박진감이 넘치는 혈투는 실로 오랜만입니다!어떻습니까?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당사자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거겠지.]
아라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나 이블 나이트가 된 내겐 흑조와 황우의 혈투는 그렇게까지 멋지거나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면서 대결을 구경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그들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투기는 멋지네.]
뭐랄까.
UFC 같은 대규모 격투기 대회를 기대했는데, 초등부 태권도 경기를 보러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점점 거칠어지는 황우와 흑조 사이에 끼어들어 심판처럼 두 사람을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재미없다. 아라타. 그만 가자.]
“예? 더 안 보시고 말입니까?”
[그래.]
먼저 걸음을 떼며 말하자 아라타는 조금 아쉬워하면서도 냉큼 내 뒤를 따라왔다.
바로 그때.
“억!!”
“잡았다!”
누군가 내 뒤를 따라 걷던 아라타의 목을 뒤에서 밧줄로 휘감으며 외쳤다.
느닷없는 공격에 놀라 밧줄의 주인을 확인하니 건장한 덩치에 얼굴에 흉터가 새겨진 남자와 그의 부하들로 보이는 산적 같은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은 아라타의 목에 올가미를 건 채 힘껏 끌어당겼다.
“잡았다! 하하하! 금화 500냥! 넌 내 꺼야!”
어린 시절 본 모 만화 속 주인공처럼 아라타를 잡고 희희낙락거리는 사내들.
그들의 말에 나는 그간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아참, 얘 수배자였지.]
그렇다.
아라타는 현재 수배 중인 사기꾼, 범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