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2화 〉31화. (32/83)



〈 32화 〉31화.

[우습구나. 자비 따위는 버리기로 했는데, 이렇게 물러지다니.]

네빌이자조하듯이 말했다.

리치에게 인간성이라니.


두영의 존재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그는 인간성이 돌아오는 지금의 현실이 썩 싫지만은 않았다.

실험실에 박혀 엘리아나를 위한 마법 주문을 개발하던 당시.

그의 유일한 취미는 두영의 기억을 읽는 것이었다.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지만, 아직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따뜻한 온정이 살아 있는 발전된 세상.

그 신비로운 세상과 인간 이두영의 삶에 그는 매료되었다.


형사인 두영이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받은 사람들의 감사 인사는 그에게 온정이 무엇인지를 돌이켜 보도록 해주었고.


시민을 구하기 위해 대신 몸을 던지는 강력계 형사들을 보고 정의와 의무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두영의 가족, 아내와 딸이 퇴근한 그를 환영하고 반기는 모습을 보자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기억 속 두영의 모습은 네빌 그가 엘리아나와 함께 꿈꿔온 행복한 삶 그 자체였다.


남이 보기에 특별하지 않지만, 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특별하고 소중한 나날의 삶.


그 삶을 엿볼 때면 그는 자신이 두영이 된 것 같았고, 자신이 행복해지는  같았다.

그래서일까?

불행했던 두영이 점차 자기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본래 누렸어야 할 행복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보면서 일종의 대리 만족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보다 타인의 안위를 더 소중히 여기는 동료의 삶을 볼 때면 진정한 동료애에 감화되어 배신만 당해온 자신의 삶이 부끄러워졌다.

 역시 열심히 살았지만, 두영과 다르게 그는 동료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자신이 섬기던 왕에게 시기와 질투를 받으며 그 충성심까지 모욕당할 정도였으니….

신임을 받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강한 힘은 얻었으나, 결국에는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자신.

강한 힘은 없지만, 절대 배신하지 않을 가족과 동료가 있는 두영.


어떤 것이 더 행복하고 올바른 삶인지는 망자가  그의 눈에도 명확히 보였다.

그는 두영이 부러웠다.

자신이 갖지 못한 행복에 손에 넣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노력할 기회를 잡은 그가.


그는 두영이 존경스러웠다.


그렇게 행복을 되찾길 원하면서도 인간성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아이들을 지키던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나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그런 세상에서 엘리아나를 만났더라면 달라졌을 텐데….]

두영의 세계라고 로서 왕이나 로나스 왕 같은 탐욕스러운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네빌은 새로운 것들과 많은 사람이 뭉쳐서 올바름을 이뤄내는 두영의 세상이 네빌은 부러웠다.


이 세상도 두영의 세상과 같았더라면 자신이 이런 끔찍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에게도 믿을만한동료가 있었더라면, 엘리아나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후회가 그의 복수심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조금만  빨리, 조금만 더 일찍 다른 세상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다른 세상으로 떠날 기회를 알았더라면.]


그는 조금만 더 일찍 두영을 알았더라면, 언데드가 되기 전에 두영과 만났더라면 모든 것을잊고 엘리아나와 함께 그곳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길을 왔기에 네빌은 로서 왕을 찾기 위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최후가 다가오는구나.]

까마귀를 통해 일련의 무리를 포착한 네빌이 혼잣말을 했다.


그의 시야에는 새하얀 옷을 차려입은 전혀 다른 존재들의 모습이 포착되어 있었다.

성기사라 불리는 존재들.

교국의 영웅들이 이끄는 군대였다.


그들은 네빌의 까마귀를 알아차린 것인지 빛을 쏘아 그의 까마귀를 지워버렸다.

그들의 목적은 성녀만이 아니다.


네빌을 비롯한 망자들을 정화하는 것 또한 그들의 목적이다.

그렇기에 추적을 당한 이상 네빌은 저들을 피할 수 없다.


[미안하지만, 너를 괴롭혀 줄 시간은없을  같군. 로서.]

다시 정면을 본 네빌이 눈앞의 인간들을 향해 말했다.


그의 앞에는 비겁한 로서 왕과 그를 호위 중인 이검과 삼검 그리고 친위대들이 뭉쳐 있었다.


“네,네빌? 네빌인가! 네놈이 어째서 여기에?!”

언데드 대군과 네빌을  로서 왕이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이검과 삼검은 무기를 들고 로서 왕의 앞으로 나섰다.


겁 많은 자신들의 왕을 지키기 위해 네빌의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들은 두영이 처음 만났을 적의 일검처럼 그들은 은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표정도 무표정한 것이 아무런 감정이 없는 로봇 같았다.

이검은  자루의 검을 쥐고 있었고, 삼검은  손에는 이검과 같은 검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창처럼 길쭉한 쌍날검을 들고 있었다.

칼날이 앞뒤로 달린 검으로 봉처럼 중앙을잡아 휘두르는무기였다.

전투 자세를 잡는 이검, 삼검의 모습에 네빌이 말했다.

[너희도 이 녀석처럼 어리석은 왕을 섬기는 멍청한 짓은 그만두는 것이 어떤가?]


일검처럼 정신 차리라는 말이었다.

그가 일검을 가리키자 두 영웅이 그럴 순 없다는 듯이 검기를 일으켰다.

일검 역시 하나뿐인 검을 들어 검기를 일으키더니  영웅을 노려보았다.

“일검…! 네놈이 기어이 날 배신하였구나! 이 빌어먹을 배신자 놈!”

두꺼운 검기를 일으키는 일검의 모습에 로서 왕은 이를 갈았다.


그는 이어서 네빌과  뒤에 있는 언데드 대군을 곁눈질했다.

‘제길, 하필이면 지금 같은 상황에 나타나다니! 어쩔  없지! 보물은 포기하는 수밖에!’

결심한 로서 왕이 명령을 내렸다.


“선택받은 기사들이여! 다들 검을 뽑아라! 날 지켜라!”


“기사들이여! 전하를 지켜라!”

“전하를 보호하라!”

“아너스 왕국을 위하여!”


그의 명령에 보물들을 나르고 있던 친위대가 검을 뽑아 검기를 일으켰다.


[왕국을 버리고 도망치는 왕에게까지 충성을 맹세하다니, 헛된 명예에 눈이 멀었구나. 한심한 놈들! 다 사라져라!]


네빌의 명령에 뒤에 포진하고 있던 4마리의 본드래곤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가슴부터 시작된 녹색 불이목을 타고 올라가 입으로 맺히는 순간, 초록색 불꽃이 로서 왕과 그의 군대를 노리고서 발사되었다.


“히익! 나, 날 보호하라!!”


로서가 소리쳤다.

다급한 그의 목소리에 친위대에 소속된 술사들이 마법 장벽을 쳤다.

이검과 삼검도 로서 왕의 앞에서 강력한 검막을 펼쳤다.

마력을 잔뜩 들이부은 두 영웅의검막에 본드래곤의 브레스는 막혔고, 보물을 챙기던 친위대 일부가 장벽이 깨지면서 브레스에 녹아내렸다.

“끄아악!”

[부질없는 짓이다! 허튼 발악은 그만두고 이제 그만 너희가 믿는 탐욕스런 왕과 함께 사라져라!]


네빌의 말에 2, 3, 4, 5호가 주둥이를 더 크게 벌리며 출력을 높였다.

그렇게 두 영웅과 로서 왕에게 집중된 브레스가 밀물처럼 불어나는 순간!


서걱!

두 줄기의 섬광이 로서 왕의 뒤에서 뿜어져 나왔다.


섬광은 정확히 십(十)자 형태를 취한 채 2호와 3호의 목에 적중했고,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끄떡도 않을 본드래곤들의 목이 잘려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구냐!]


브레스를 가르는 것으로 모자라 2호와 3호의 목까지 베어버린 강력한 공격에 네빌은 깜짝 놀라며 새로운 적을 확인했다.

곧이어 마차 뒤에서 두 영웅과 같은 디자인이지만, 색상만 빨간 갑옷을 입은 영웅이 2개의 쌍날검을 무장한 채 나타났다.

“사, 사검! 그래! 사검이라면!”

독수리 같은 투구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새로 나타난 인물의 정체는 바로 사검.

아너스 왕국에서 이번에 개발한 최고 성능을 가진 영웅이었다.

[사검? 새로운 영웅을 만들고 있던 것인가.]

“사검! 저놈을 죽이고, 나를 보호해라!”


네빌의 말에 로서 왕이 다시 외쳤고, 그의 명령을 받은 사검이 움직였다.


 움직임은 범상치 않았다.


잔상처럼  자리에 신기루를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검은 네빌의 코앞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엄청나게  검기가 뭉친 쌍날검을 조금 전과 같이 십(十)자로 움직였다.

[큭! 암흑 방패!!]


놀란네빌이 즉시 손을 뻗으며 검은 방패를 소환했지만, 막강한 사검의 공격에 네빌의 몸이 언데드 군대가 있는 곳까지 밀려났다.

“우오오오!!”


브레스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친위대가 사검의 놀라운 무력에 감탄하며환호성을 질렀다.


“강하구나! 그래!이 정도로 강하다면!!”

친위대의 환호성에 로서 왕도 전율에 휩싸였다.

 정도로 강력하다면 사검이 활로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살 수 있는 희망에 그는 희열에 빠졌다.


[사검이라고 했나. 대체 녀석의 본체는 무엇이냐? 어떻게 이리 강할  있지?]


네빌은 자신의 암흑 방패가 깨진 것은 물론, 마법 장벽에도 큰 충격이 전해지자 놀라며 물었다.


아무리 개조를 받았다고 하지만, 인간에 불과했던 존재가  정도의 무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탓이다.


“후후! 궁금한가?그렇다면 알려주마! 사검은 레드 드래곤의  유적을 보호하던 가디언이다! 마력이 고갈되어 다 죽어가는 녀석에게 마무리를 가하고 정신개조와 더불어 인공심장을 안겨주었지!”

로서 왕이 자랑하듯이 소리쳤다.


[가디언?! 설마, 용의 저주를 받은 땅에 들어간 것인가?]

용의 저주를 받은 땅.

그것은 지금은 사라진 드래곤 유적지를가리키는 말이었다.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던 드래곤의 유적지는 인간이 범접할 없는 존재들이오래전부터 지키고 있으며, 그 강함은 영웅들에 비견되거나 그들을 훨씬 능가할 정도다.

특히나 소유욕이 강한 레드 드래곤의 유적지 가디언은  강함이 다른 가디언들을 보다 2배 이상 우수했다.

그만큼 강한 가디언을 이용해 영웅을 만들었지만, 지금의 강함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다시 보니 외모가 인간과 조금 다르군.]

네빌은 투구에 가려지지 않은 사검의 피부를 확인했다.

턱과 입술 부분에 비늘 같은 것이 있었다.

용의 비늘인지 몰라도 얼굴 피부가 평범한 인간과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 고작 사산아를 부활시켜 만든 네놈의 본드래곤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지! 크하하! 사검이여! 나를 보호하고 네빌과 언데드 대군을 처치해라!”

자만에 빠진 로서 왕이 신나게 떠들었다.


[예상 밖이군. 하지만.]

네빌은 사검의 강함에 온힘을 다해야 함을 느끼며 마력을 개방했다.

폭발적으로 마력을 개방하자 거센 충격파가 일어나며 바닥이 파이고 달이 태양을 가린 것처럼 대지와 하늘이 어두워졌다.

바닥은 그림자가 진  검게 물들고, 주위의 물건들은 시간을 빨리 감은 것처럼 빠르게 부식했다.


[겨우 그 정도로는 나 네빌을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자만하지 마라!]

“망할 놈! 뭣들 하느냐! 어서 놈을 죽이지 않고!”


[언데드 대군이여! 로서 왕과 그 부하들을 모두 지옥으로 떨어뜨려라!]

로서와 네빌의 명령에 남은 기사와 병사들과 언데드 대군이 동시에 움직였다.


사검도 붉은 안광을 뽐내며 움직였다.

[크아아앙!]


4호와 5호가 하늘을 날아올랐다.


머리가 잘린 2호와 3호는 바닥에 떨어진 각자의 머리는 두고서 똑같이 날아올랐다.


머리가 그대로 있는 4, 5호는 브레스를 2호와 3호는 앞다리로 동그랗게 뭉친 화염을 만들어로서 왕의 친위대를 향해 쏟아 부었다.


끝없이 떨어지는 녹색 화염에 이검, 삼검, 사검이 움직였다.


세 영웅은 브레스를 자르며 검기를 발사했고, 친위대는 언데드들과 격돌해 전투를 벌였다.

복수에 눈이 먼 네빌과 탐욕에 눈이 먼 로서 왕의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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