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28화.
[아주 난장판이네.]
이것이 네빌이 만들어준 크리스털 화면들을 시청하면서 느낀 내 첫 감상이었다,
연합군의 강력한 화력에 스머프 같은 파랑이들이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 양상은 연합군의 영웅들이 합류하면서부터 크게 바뀌었는데, 평범한집도 아닌 거대한 성벽이 유통기한 지난 순두부처럼 힘없이 으깨지며 망가지니 그 결과는 보나 마나 당연할지도 몰랐다.
다른 것도 아니고 성벽이 무너지다니.
네빌도 그렇고, 일전에 상대한 칠각보전도 그렇고 이쪽 세상의 영웅이라는 놈들은 아무래도 걸어 다니는 천재지변과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강한 것은 둘째 치더라도 그 강한 힘을 오직 부수는 데에만 사용하니….
평범한 인간의 눈에는 그야말로 괴물이나 다를 바 없다.
[물리법칙 무시하는 것 봐라. 괴물도 저런 괴물이 있나.]
[크크큭! 데스나이트인 네가 말하니 설득력이 없군!]
[…….]
쳐 웃지 마, 니가 제일 괴물이니까.
나는 네빌의 비웃음에 한마디 하려다가 참았다.
또 심기를 잘못 건드려서 땅에 묻히는 것 이상의 굴욕을 당할지 모르니까.
곧이어 성벽이 연속해서 무너졌다.
[오오! 제대로 들어갔군! 응? 잠깐, 왜 적 병력이 아닌 이미 뚫린 성벽에 공격을 퍼붓는 거지? 입구가 좁은 것도 아닌데 쓸데없이 성벽을 부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니! 저런 건 그저 마력 낭비에 불과할 뿐이다! 한심한 놈들! 마력 소중한 줄을 모르는군!]
네빌이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아재들처럼 흥분했다.
마치 자신이 필드에 나가면 더 잘 뛸 수 있다는 식의 흥분이었는데, 실제로 네빌이 저들 개개인보다는 더 강할 것 같아서 나는 감히 딴지를 걸 수 없었다.
곧이어 예쁘장한 영웅이 쏜 화살과 귀여운 영웅이 만든 바위에 힘들게 지은 건물들이 모두 부서졌다.
힘없는 사람들은 휩쓸리고 깔려서 처참한 꼴로 죽어나갔다.
[저렇게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노리다니, 저 나라 국민만 안타깝네. 국왕들 욕심이 이게 다 무슨 꼴이야?]
[쯧쯧! 전쟁이 다 그런 것이다.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만이 살아남지. 지구라는 곳도 이와 같은 전쟁을 수차례 겪지 않았더냐.]
[그건 그렇지.]
맞는 말이라 반박의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래도 안타깝잖아. 저렇게 저항도 투항도 하지 못한 채로죽어나가는 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처지가 안타까웠다.
[감성적인 녀석.]
[난 아직 인간이니까.]
[살점 하나 남지 않은 녀석이 말은 잘하는구나.]
네빌의 팩트에 괜히 마음이 아파졌다.
[그래도, 네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무슨 뜻이야?]
[본래 저 정도 병력 차면 국왕이 용단을 내려야 한다.]
[용단?]
[투항해야 한다는 말이다. 저 정도 병력이 자국을 침공할 경우 참된 왕은 자신의 목을 내놓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 협상을 하는 것이 정상이다. 아너스 왕국 같은 경우 곡창지대가 우수하니까. 그것과 영웅을 내놓는 대신 백성의 목숨을 온존해 달라고 하면 협상을 타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쳐들어온 3왕국도 민간인을 학살하는 취미는 없을 테니, 왕이 대표로 모든 책임을 짊어진다면 자국의 피해나 희생도 줄일 수 있고 여러모로 이득이지. 또한, 투항한 국가의 백성은 승전국의 전유물이 된다. 노동력으로쓰기에 좋지. 그만한 가치가있으니 3왕국도 진짜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로서 왕이 그들이 항복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럼, 로서 왕이 저 살자고 백성을 사지로 내모는 격이 되는 건가? 그래도 그 양반도 살려고 그런 거니까. 그 심경까지 나무라긴 힘들지도….]
[저렇게 3왕국이 마음을 바꿔먹고 쳐들어온 것 자체가 왕이 치세를 잘못했다는 방증이다. 현실적으로 로서 왕이 책임을 지는 것이 이치에 맞다.]
[그래도 저렇게 병사들이 열심히 싸우는 걸 보면 좋은 왕인 거 아니야? 그러니까. 저렇게 목숨까지 걸고….]
[아너스 왕국은 명예의 왕국이다. 기사와 병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도 명예를 중시하지. 그게 저들의 기본 상식이다. 왕이 백성을 위해 먼저 고개를 숙인다면 모를까, 끝까지 투항하라 명령하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도?]
[그래. 그런 민족이다. 네가 사는 세상처럼 독립적이면서도 개인주의가 강하지 않다.]
[명예를 중시하는 백성이라니 뭔가대단하면서도 신기하네.]
[저 땅의 민족들이 예부터 그랬다. 그래서 아너스 왕국은 예부터 동맹국도 많았지. 책임감이 없고, 후안무치한 로서 왕이 집권한 후 그 동맹이 유명무실해졌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 탐욕스러운 개새끼에겐 과분한 나라다.]
[만약, 로서 왕이 끝까지투항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 죽겠지. 죽지 않고 살아남더라도 이미 전쟁이 일어났으니. 전쟁노예로 팔려나가는 신세가 될 것이다.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투항했다면 그래도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이미 유혈사태가 벌어진 이상 저들의 운명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대손손 노예로 살게 되겠지. 그들이 복속된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상.]
씁쓸한 이야기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 빨리 투항하고 백성들 살리는데나 쓸 것이지….]
로서 왕을 생각하며 말했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자이지만…, 그가 초래한 일인데다가 한 나라의 책임자이기도 하니 혼자서 책임을 지고 사람들을 살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자꾸 생겼다.
[로서 그놈은 그럴 위인이 아니다. ‘백성이 나라.’라고 생각하는너와 달리 그놈은 ‘왕이 곧 나라.’라고 생각하는 놈이니까.]
[왕이 곧 나라라….]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가치관이었다.
[슬슬 움직여도 되겠군. 두영, 네게 기회를 주겠다.]
[기회? 무슨 기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니 네빌이 ‘두영님 바보.’ 라고 적힌 본드래곤을 보며 다시 말했다.
[저 녀석은 내가 가진 녀석 중 가장 강력한 본드 1호다.]
본드 1호.
[뭐랄까, 착착 잘 달라붙는 이름이네.]
그나저나 본드래곤에게도 이름이 있었구나.
무성의한 이름이지만. 그래도 이름에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이 네빌이 본드 1호와 아너스 왕국을 공격 중인 연합군을 보며 말했다.
[두영 너는 가서 본드 1호와 함께 적 영웅 넷의 발을 묶도록 해라.]
[…네?]
[못 들었나? 가서 본드 1호와 함께 적 영웅 넷의 발을 묶으라고 했다.]
[아니, 제대로 들었어. 근데 이해가 안 돼. 갑자기 왜 날 사지로 내모는 건데? 언제는 손 안 대고 코 풀어서 좋다면서!]
놀라 되물으니 네빌이 혼잡스러운 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을 보고 느끼는 것이 없나?]
[글쎄, 뭘 느껴야 하는 거냐? 혹시 비통함이나 애잔함 뭐 그런 거?]
[한심하긴. 그런 시답잖은 동정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잘 봐라. 아너스 왕국의 군대에는 영웅들과 친위대가 없지 않은가.]
[그, 그러네. 그런데 그게 왜?]
[나라를 수호할 의무를 지닌 영웅과 왕의 친위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나?]
[자, 잘 모르겠는데….]
[멍청한 놈! 도망치는 것이다! 로서 왕은 영웅과 친위대를 이끌고 자신만 살기 위해 나라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것이란 말이다!]
그 말에 나는 무너진 성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설마 그래도 왕이라는 놈인데, 그렇게까지 할까?]
[멍청한 놈. 투항할 생각이었다면 병사들이 희생되기 전에 나왔을 테고, 끝까지 항전할 생각이었으면 성벽에서부터 친위대와 영웅들을 배치해 최대한 버텼을 것이다. 그편이 사기를 올리기 쉬우니까. 그런데 로서 왕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영웅들과 친위대를 이끌고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도망치기 위해 병사들과 기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그, 그렇구나. 그럼, 나더러 본드 1호를 이끌고 영웅 넷의 발목을 묶으라고 한 건…. 내가 발목을 묶는 사이에 가서 로서 왕을 잡고 돌아오겠다. 뭐 그런 거야?]
[그렇다. 네가 영웅 넷을 상대로 시간을 버는 사이 내가 일검과 함께 로서 왕과 영웅들을 처리하고 올 것이다. 로서 왕을 처리한 후에는 연합군 놈들과 그 영웅들까지도 모두를 없애 버릴 것이다.]
[어차피 다 없애버릴 거면, 그냥 지금 쳐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지금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면 연합군의 방해가 들어올 것이다. 이는 로서 왕이 살 길을 열어주는 꼴이 되니 그럴 수 없다. 거기다 아무리 언데드 대군을 이끌고 간다 하더라도 영웅 여섯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적의 병력을 나눌 필요가 있다.]
하긴, 칠각보전 3명을 상대도 쉽지 않았다.
여섯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비록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엄청난 수의 막강한 언데드 군대가 있지만, 상대도 병력의 규모가 엄청나니 특별히 네빌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었다.
[네가 네 영웅의 발목을 제대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나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놈들의 손에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겠지….]
갑자기 네빌이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갑자기 실패를 운운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어진 다음 말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실패하면, 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점을 명심해라.]
요컨대 집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영웅 넷의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면서 잘 버티라는 뜻이었다.
못된 놈, 또 협박하다니.
[하다못해 본드 2호도 얹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1호랑 단둘이서 어떻게 저 괴물 같은 것들의 발목을 잡아!?]
[괜찮다. 사각을 잡아 강해진 너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내 특별히 너와 1호에게 방어 마법과 영웅들의 정보를 주입해 주도록 하지.]
내 투정에 네빌이 손을 내밀었고, 그의 손에서 다양한 마법진들이 나타나 나와 1호의 몸을 감쌌다.
남다른 변화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함께 마법을 받은 본드 1호의 몸에선 다양한 색상의 빛깔이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마력도 느껴지는 것이 대단한 방어 마법을 걸어준 것이 분명했다.
[방어 마법을 걸었으니 혹시 공격을 받더라도 놈들의 공격을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한 것은 아니니 최대한 몸을 사려 발을 묶는 것에만 힘을 쓰도록 해라. 이번 건만 잘 해결하면, 내게 욕을 했던 것은 내 특별히 용서해주도록 하마.]
[욕을 했다고? 내가 언제? 생사람 잡지 마!]
[흥! 늑돌이라는 몬스터가죽어갈 때 말이다. 날 도촬광이니, 호로 잡놈이니 하며 욕하지 않았느냐? 설마, 발뺌하진 않겠지?]
네빌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 얼굴은 그냥 해골이지만 목소리가 비웃는 것 같았다.
확신에 찬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기억을 더듬다 늑돌이가 죽어갈 때 한 말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너무 흥분해서 그런 말을 한 거 같았다.
단, 직접 한 말은 아니고, 허공에 대고 네빌을 부르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때 네빌은 분명 내 말에 답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혹시 내 기, 기억을읽고?]
[일리나가 잡혀간 이유를 확인하려고 기억을 읽었을 때 함께 알게 되었지. 기억을 읽고 네가 평소에 날 얼마나 씹어대는지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후후후! 그 못난 머리통 박살 내려다가 참았으니, 내 넓은 아량에 감사하도록.]
망할! 제대로 걸렸다.
[쪼잔한 놈 같으니….]
[시끄럽고, 맡은 바 일만 잘 완수하면 그때의 무례는 내 특별히 용서해 주겠다. 그럼. 활약 기대하지.]
말을 마친 네빌의 몸이 검은빛과함께 사라졌다.
네빌뿐만 아니라 나와 본드 1호를 제외한 모두가 사라졌다.
나는 심심한 강아지처럼 날 내려다보고 있는 본드 1호를 보았다.
강아지는 귀엽기라도 하지.
본드 1호는 죽은 드래곤으로 만들어진 뼈다귀라 귀엽기는커녕 꿈에 나올까 싶어 무서울 정도였다.
[이제 어떻게 하지?]
네빌이 한 말을 되새기며 나는 전장을 보았다.
멀어서 잘 보이지않았지만, 엄청난 화력을 뽐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는 영웅들의 모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화면 속에서 화살 대신 단창을 쏴대며 무시무시한 화력을 발휘하는 여성.
로봇 만화의 로케트 주먹처럼 거대한 바위를 막 날려대는 작은 소녀.
그녀들의 주변에서 열심히 유령들을 부려 먹고 있는 캐리비안 출신의 귀신.
사람, 사물 관계없이 창에 닿는 것은 뭐든 폭파시키고 있는 폭탄마.
이렇게 넷이 보였다.
[하…. 어떻게 해야 저 미치광이들의주의를 제대로 끌 수 있을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그것보다도서슴없이 사람을 쏴 대로, 뭉개고, 베고, 터트리는 그들이 무서웠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넷이나 되기에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다.
[1호야, 우리 그냥 같이 도망칠까?]
[크르르?]
본드 1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을 알아듣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같이 싸우라고 했으니, 내 명령을 듣는 게 정상이겠군. 어디 시험해 볼까? 1호! 앞발 들어.]
[크앙.]
1호가 망설임 없이 앞발을 들었다.
얌전한 그 행동에 나는 1호가 내 말을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명령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해봐. 뒷발 들고 김연아처럼 한 바퀴 턴 해봐.]
1호가 뒷발을 든 상태로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녀석이 회전하면서 나무가 깎여 나가고 바닥이 뭉개졌다.
비록 김연아처럼 우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명령을 잘 따라주는 1호의 노력에 첫인상과 달리 그렇게 무시무시한 놈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다 튀잖아! 좀 조심해서 돌아!]
[크르릉….]
1호가 강아지처럼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보니 꼬리도 아래로 축 처져있다.
아무래도 혼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니야. 풀 죽지 마. 미안해. 넌 잘했어.]
[크릉!]
칭찬하자 이번엔 고개와 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완전 강아지네.]
꼬리 끝을 흔드는 1호의 꼬리에 나도 모르게 의욕이 생겼다.
내심 말도 안 통하는 녀석이랑 뭘 하나 싶었지만 이렇게 내 말이 잘 통하고, 명령도 잘 따른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 까짓 거 한번 해보자!]
나는 1호의 머리에 올라타 다시 명령을 내렸다.
[가자! 1호야!]
[크아앙!]
내 의욕에 호응하듯 1호가 괴성을 지르며뼈만 남은 날개를 펼쳤고, 물리법칙 따위 가볍게 무시한 채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표는 때마침 사이좋게 뭉쳐 있는 4명의 영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