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5화 〉24화. (25/83)



〈 25화 〉24화.

검은색을  검기가 블랙홀처럼 주위의 빛을 빨아들이며 날아갔다.

지금까지의 검기와는 비교도 안  정도로 거대하고커다란 검기였다.

지금까지 내가 사용한 검기 중에서 역대급의 크기와 위력을 지닌 검기였다.

“뭣?!”


코브라로 변한 사각은 자신의 덩치만 한 검기가 날아들자 헛바람을 들이키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모래를 끌어모았다.


그리고 내가 발사한 검기를 급하게 끌어모은 모래를 이용해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최후의 발악에도 불구하고 검기와 모래가 닿자 모래가 뜨거운 시럽을 뿌린 아이스크림처럼 검게 녹아버렸다.

마력을 중심에 응집해서 그 형태가 흩어지지 않고 레이저처럼 응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벼운 공격으로는 막을 수도, 뿌리칠 수도 없었다.

녹은 모래가 쇳물처럼 변해서 뚝뚝 떨어지자 사각이 자신의 최후를직감하며 소리쳤다.


“젠장! 이 내가 고작 데스나이트 따위에게…!”


그는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검기에 베였다.

뿔과 몸이 검기에 베이자 코브라로 변했던 사각의 절단 역시 쇳물처럼 변하고, 변한 절단면이 뜨겁게 달궈진 유리알갱이로 뭉쳐서 비처럼 쏟아졌다.

검기가 지나간 자리를 따라서 사각의 몸에서 흘러내린 유리구슬이 레일을 만들었다.

일직선으로된 돌풍에 휩쓸린 것처럼 유리구슬로  길이 생기자 검기에 베이지 않은 모래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흩어지는 모래들 사이에서 깔끔하게잘린 사각의 뿔이 바닥에 떨어졌다.


떨어진 뿔에서 노란 마력이 흘러나왔다.

사막의 모래처럼 황금빛을 띤 마력은 안개처럼 뿌연 모래를 뚫고 나와 몸으로 스며들었다.

하멜 숲에서 처리한 괴이처럼 녀석의 힘도 내게 깃든 것이다.

[사각 놈. 역시 인간이 아니라 괴이였구나.]

머리가 뿔이 달린 것을 보고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인간과 유사한 생김새의 괴이가 있다는 사실과 그 괴이가 인간의 편을 든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다.

내가 그간 배운 괴이에 대한 상식은 하멜 숲의 촉수 괴물처럼 인간과 생명체들을 해치는 놈들뿐이었으니까.

사각의 죽음과 동시에 하늘로 날아간 검기가 먹구름을 갈랐다.

반듯하게 잘린 먹구름 사이에서 빛이 내려와 지상을 비췄다.


빛은 사각이 만든 모래 알갱이들을 비췄고, 하늘은 반짝이를 뿌린 듯 빛이 났다.


비바람이 청소를 마친 것처럼 주위가 아름답게 반짝이자 이어서 사각의 삶이 머리를 스쳐 지났다.


사각의 기억은 길었다.

인간처럼 수십 년을 살아온 존재가 아니라 수백 년을 살아온 괴이라 그가 지닌 기억들이 하나같이 오래된 것들 투성이다.

단편 영화처럼 눈앞에 나타난 괴이, 사각의 삶의  배경은 사막이었다.

사막 도깨비인 사각은 어린 시절부터 모래를 다스리며 성장했다.

그는 사각이라는 이름을 받기 전 사막의 저주라는 이명을 얻었다.

불길한 이명답게 사막에서 그는 최강이었고, 가장 잔인무도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패배는 찾아왔다.

그를 처음으로 굴복시킨 것은 뿔이 일곱 개가 달린 거대한 칠각룡과 평범한 인간 전사였다.


7개의 힘을 가진 칠각룡에게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용이 가진 7개의 힘 중에 사각과 같은 모래의 힘이 있었는데, 그 모래의 힘마저도 당시의 사각보다 강력했했던 탓이다.

사막의 저주라 불리며 만인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사각은 패배가 처음이었기에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가장 충격 받은 사실은 칠각룡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칠각룡의 옆에 있던 인간조차 이길 수 없던 현실이었다.

칠각룡이 개입하지 않았는데도 압도적인 검술, 압도적인 마력, 압도적인 센스로 그는 사각을 제압했고, 괴이도 아닌 평범한 인간을 이길 수 없다는 현실에 사각은 크나큰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댄디한 사무과장처럼 생긴 평범한 아저씨가 괴이로 100년이나 살며 힘을 쌓은 그를 이기니 억울했던 것이다.

결국 사각은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며 물러나는 인간의 뒤통수를 노리는 비겁한 수까지 쓰고 말았다.

하지만 그 공격마저막혔고,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칠각룡은 사각을 ‘어리석은 괴물.’이라 칭하며 그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사각의 공격을 가뿐히 막았다.


그리고 ‘그렇게 분하면 다음에 다시 덤비게나. 친구. 언제든 놀아줄 테니.’라고 말하더니 그를 살려주고 떠났다.

처음 겪는 굴욕에 그는 틈이 날 때마다 기술을 닦고 자신을 연마해 자신을 이긴 인간을 찾아가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번이나 싸워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는 졌다.

지고, 또 지고, 또 졌다.

그리고 그  번이나 반복된 싸움 동안 인간은 사각에게 계속 자비를 베풀었다.

사각은 그 인간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조차 물러날 만큼 그가 자비를 베풀자 결국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말았다.


실력만이 아니라 인품에서도 그를 따라갈 수 없다고.


인간을 인정한 사각은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만큼의 은혜를 갚을 때까지 섬기겠다고 맹세하고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복수를 위해서 그와 싸우던 사각은 어느새 인간을 위해서 싸우게 되었고, 그와 칠각룡과 함께하는 긴 여정 속에서 진각과 경각을 비롯한 다른 괴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남자는 그들마저도 굴복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었고, 그들은 세상을 떠돌며인명을 구제하고 세상을 구원했다.


이후 그를 따라 르나르국까지 건국하게 되었으며, 르나르국의 역사를 세우게 되었다.


그때까지 사각은 행복했다.

지난 100년의 세월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수명이 다한 인간이 오래지 않아 노환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겐 긴 시간이었지만, 괴이인 그들에겐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그 바람에 슬픔을 견디지 못한 칠각룡은 자결을 하기에 이르렀다.


칠각룡은 자결하기 전에 자신의 힘을 일곱 등분으로 나누어 함께 시간을 보낸 사각과 다른 여섯 괴이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세운 르나르국과 그의 핏줄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서 스스로 소멸을 택했다.

칠각룡의 뿔을 받은 일곱 괴이은 이후 칠각보전이라는 이름을 받고 백성의 떠받듦을 받게 되었고, 르나르국을 수호하는 존재가 되었다.


남은 그들은 언젠가 자신들을 이끈 인간이 다시 부활하리라 믿고 칠각룡의 유언대로 르나르국을 지켰다.

그리고 르나르국이 세워지고 400년을 훌쩍 넘긴 어느 날.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왕이 탄생했다.


그의 이름은 로나스.


현재 르나르국을 통치하고 있는 국왕이었다.

칠각보전은 자신들의 주인이자 왕이 환생했다고 여기며 그를 떠받들어 주었다.


비록 기억도 능력도 과거의 그와는 달랐지만, 얼굴만은 똑같았기에 그가 환생한 것이리라 굳게 믿으며 로나스 왕을 섬겼다.

그만큼 칠각보전은 로나스 그의 존재를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다.


그러나 로나스 왕은 인간.

언젠가 과거와 같이 수명이 다할 것이 분명했다.


이 현실을 받아들일  없었던 칠각보전은 다시 그를 잃을 슬픔을 겪을까 두려워졌고, 그와 더 오랫동안 함께할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로나스 왕과 오래도록 함께할 방법들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불로장생의 힘을 가진 요정의 샘과, 광명 목탑의 비밀 그리고 불사자의 힘을 지닌 성녀 엘리아나의 존재였다.

칠각보전은 이 사실을 로나스 왕에게 알렸다.

영생에 눈이 먼 로나스 왕은 칠각보전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요정의 샘과 광명 목탑을 찾으라고 일렀다.


동시에 성녀 또한 확보하려고 엘리아나를 구출하겠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하멜 성에 병력을 보냈다.

그러나 예상보다 강한 네빌의 힘에 연합군 전체가 패퇴하자 비장의 수단으로 르나르 국의 일곱 수호신 칠각보전까지 동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로나스여….”

모래 속에서 사라진 사각의 목소리가 퍼졌다.


그리움에 사무치는 그의 목소리 역시 한 줌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점점 작아지는 그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억이 스며들어온 사이에 시간이 조금 흘렀는지 일검을 노리던 전사들의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어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이제 100 정도. 그마저도 모두 지쳐있었다.


이는 네빌을 상대하고 있는 경각과 진각 역시 마찬가지였다.

몸 곳곳에 얼음의 창이 박힌 진각과  여기저기가 찢어진 경각.

두 칠각보전 모두 힘이 다하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제길,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겠사와요.”


“그러게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안 그래?”

“그렇사와요. 떠날 때는 아름답고 화려해야 하는 법이와요.”


두 괴이는 번쩍이는 뇌전과 반짝이는 유리파편을 소환해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네빌 역시 한 손을 들더니 거대한 헬파이어를 만들어내며 반격을 준비했다.


[미련한 괴물들이여. 이제 그만 힘의 차이를 깨닫고 흙으로 돌아가라.]

자신 있게 말하고있었지만, 평소 수십 개씩 만들어 아낌없이 쏴대던 헬파이어가 하나밖에 없는 것을 보아 네빌의 마력도 상당히 고갈되었음이 분명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네빌은 다른 사람도 아닌 2명의 칠각보전을 동시에 상대했을 뿐 아니라, 언데드 군대까지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혼자서 칠각보전 둘과 구천 명이나 되는 적군을 막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마지막이다. 가자. 경각.”


“알겠사와요.”


힘을 짜낸 진각이 엄청나게 거대한 뇌전을 만들어내더니 이윽고 뇌전을머금은 거대한 호랑이로 변했다.

그게 괴이인 그의본래 정체였다.

번개를 머금은 호랑이 뢰호, 수백 년 동안 번개의 산 천산(天山)을 호령한 괴이였다.

진각이 변하자 경각 역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거대한 극락조로 변했다.

음산(陰山) 요물인 그녀의 정체는 모든 털이 날카로운 유리로 된 아름다운 새의 모습을  아름다운 괴이였다.

코브라로 변했던 사각처럼 본래의 형태가 따로 존재했다.

그런 정보가 저절로 떠올랐다.

[이런 걸 다  수 있다니. 힘이 강한 괴이들을 잡으면 기억도 더 뚜렷하게 흡수할 수 있나 보구나.]

저절로 떠오르는 정보에 놀라며 네빌에게 향하는 두 괴이를 보았다.

그들은 필사의 각오로 돌진했다.

방대한 뇌전과 빛의 힘을머금고 돌진하는 둘을 본 네빌은 나머지 한 손도 머리 위로 들었다.

그리고.



[증폭하라!]

거대한 힘을 품고 다가오는 진각과 경각의 모습에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마법의 위력을 더욱 높이는 비장의 기술이었다.

자동차 만했던 헬파이어가 거의 5층 건물 크기만큼 커졌고, 그가 만든 헬파이어는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어찌나 뜨거운지 그의 몸을 두른 로브마저 열기에 녹아 절로 타올랐다.


[네빌 놈. 마지막 마력까지 쥐어짜 냈구나.]

로브가 마법에 노출되어 불타는 것을 보면 마법 장벽을 유지하던 마력까지 공격으로 돌린 것이 분명했다.

즉, 지금의 네빌은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지옥으로 사라져라! 어리석은 괴물들이여!]


네빌이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 순간 태양 같은 지옥불이 움직이며 진각과 경각과 부딪쳤다.

쾅!!

충돌과 동시에 핵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빛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땅이 갈라지다 못해 무너지고 솟아오를 정도의 강력한 충격파가 퍼지더니 모래 먼지가 마구 흩날렸다.

그리고 흩날리는 모래 먼지 속에서 충돌로 흩어진 지옥불과 뇌전 그리고 녹아내린 유리파편이 마구 퍼졌다.

모래 먼지들이 사방으로 마구 흩날렸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뼈마디가 다 저릴 정도였다.

뜨겁고 짜릿한 통증과 칼날로 살을 긁는 것 같은 고통도 전신에 퍼졌다.

[괴물들 같으니라고!]


충격파와 파편에 휩쓸린 병사들의 시체와 스켈레톤은 재가 되어 사라졌다.

파이로 대신을 비롯해 목숨이 붙은 적들은 충격파의 범위를 벗어나기 위해 도망쳤다.

격한 전투로 만신창이가 된 일검 역시 위험을 느꼈는지 방어하는 것을 포기하고 충격파를 휩쓸린 채 범위 밖으로 도망쳤다.


잠시 후.

충격파가 잠잠해지고, 충돌로 인한 번쩍임도 사라졌다.


네빌의 마법과 경각, 진각이 맞붙은 자리는 학교 운동장 이상으로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뜨겁게 달궈진 땅에서는 온천수라도 터진 것처럼 수증기가 올라와 희뿌연 안개를 사방팔방으로 뿌려댔다.

불어오는 바람에 수증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아직  있는 존재는 네빌뿐이었다.

진각과 경각은 알몸의 재가 되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들의 이마에난 뿔은 그 마지막 빛을 잃은 채 재로 변해 불어온 바람에 흩날렸다.


“이제야 미련을 버릴 수 있겠구나.”

“즐거웠사와요.”


유언을 끝으로 진각과 경각의 몸뚱이 역시 산들바람에 무너지더니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네빌의 승리였다.

입고 있던 검은 로브가 다 타 없어지고 뼈다귀 역시 대부분이 검게 그을렸지만, 네빌은 아직 살아 있었다. 아니, 아직 건재했다.

고개를  네빌은 완전히사라진 진각과 경각의 자리를 보더니 갑자기 외쳤다.

[살아남은 자들은 들어라! 그리고 전해라!  네빌이 르나르국의 칠각보전을 잠재웠음을! 누구든 나의 아내를 노리는 자들에게 나 네빌이 종말을 전하러 갈 것임을! 가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알려라!]


“치, 칠각보전이 죽었다고?”


“그, 그럴 수가!”

칠각보전이 죽었다는 이야기에 생존자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살아남은 자들은 칠각보전이 죽었다는 소식에 좌절하며 꽁지 빠지게 도망쳤다. 하지만 도망가는 무리 사이에는 아직 포기하지못한 자도 있었다.

“네빌!!”

그는 이번 출정의 진두지휘를 맡은 참모 파이로 대신이었다.

파이로 대신은 지옥불과 뇌전에 휩쓸려 몸 곳곳에 화상이 생긴 상태였다.


화재 현장의 피해자처럼 만신창이나 다를  없는 몰골이었지만, 그는 엉망진창이 된 몸을 억지로 이끌며 네빌을 향해 달려갔다.

붉게 타오르는 그의 눈빛으로 보아 죽음을 각오한  같았다.

[아직 싸울 기개가 남은 놈이 있구나.]

파이로 대신은 높이 뛰어올랐다.그리고 날카로운  끝을 네빌의 머리를 향한  떨어졌다.

마치 사냥에 나선 독수리와 같은 그의 용맹한 모습에 네빌은 드물게도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방어마법조차 펼칠 마력도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네빌은 일검을 보았다.


일검은 우장과 좌장을 처치하고 있었으며, 그 거리가 멀어 그를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검을 들고 움직였다.

[암흑오라.]


몸에서 뻗어나온 촉수가 파이로 대신의 옭아맸다.


파이로 대신은 심장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정지한 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끄악!”


나는 암흑오라를 유지하고서 바닥에 떨어진 파이로 대신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끝났다. 포기하고 돌아가라.]

바닥으로 떨어지며 충격을 받은 파이로 대신은 입으로 피를 토하며 말했다.


“일국의 대신이 패잔병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문의 수치! 죽여라! 이제 내게 돌아갈 곳은 없으니!”


파이로 대신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그 어떤 범죄자들보다, 그 어떤 피해자들보다 살벌한 독기가 느껴졌다.


흡사 억울한 누명이라도  사람 같았다.

[원한다면 그래 주지.놈을 죽여라. 두영.]

네빌이 명령했다.


나는 암흑오라에 묶인 파이로 대신을 보며 검을 들었다.

하지만 죽일 듯이 날 노려보는 파이로 대신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마무리를 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각의 힘을 흡수해 더 강해졌을 텐데 손에 쥔 검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목을 치지도, 검을 내리지도 못하는 내 모습에 네빌은 실망한 듯 고개를 돌리더니 어느새 내 뒤로 다가온 일검을 보았다.


일검의 손에는 파이로 대신의 부하 우장과 좌장의 수급이 들려 있었다.

폭발로 혼잡해진 틈을 타서 두 장수의 목을  것이다.

투구가 벗겨진 머리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움켜쥔  걸어오는 것이 저승사자인지 영웅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쓸모없는 놈. 일검! 쳐라!]


돌아온 일검에게 네빌이 명령을 내렸다.

그 순간 일검이 들고 있던 우장과 좌장의 머리를 바닥에 던지더니 바람 같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파이로 대신의 옆으로 이동한 그는 무서운 기세로 검을 내리쳤다.


파이로 대신은 체념한 듯 눈을 감으며 눈물을 흘렸다.

곧 칼날이 그의 목을 베었고, 목이 잘린 파이로 대신의 머리가 공중에 날아올랐다.


얼굴에 남아 있던 눈물이 공중에서 증발하며 눈물 자국만 남은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목과 머리에서 나온 피로 바닥이 붉게 물들자 네빌이 하멜 성 방향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돌아간다.]

일검이 그의 뒤를 뒤따랐다.


나는 엉망진창이 된 전쟁터 한가운데에서 멍하니 서서 주위를 확인했다.

[또 무덤을 만들어야겠네.]

새로 만들어야 할 무덤의 수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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