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8화.
한 남자가 보였다.
금발에 다부진 몸, 주위 사람들의 인망도 좋은 남자였다.
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자경대부터 시작해서 몬스터와 도적으로부터 재산과 인명을 보호했다. 그리고 몬스터로부터 구해준 마을의 여성과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여자와 결혼한 그는 그녀의 내조를 받아 후에 기사 시험에서 합격하였고, 하멜 왕국을 수호하는 기사가 되었다.
기사가 된 후 생활이 안정되자 그는 아이들도 낳았다.
애들을 키울돈이 필요해지자 그는 더더욱 노력해 실력을 키우고 기사단에 들어갔다.
기사단에 들어간 그는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엘리아나의 경호 업무에 투입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나날이 훈련하고, 근무를 서며 짐승과 괴이를 물리치며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
아내로부터 날아온 편지를 부적처럼 간직하다 이따금 나간 휴가에서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삶.
항상 가족과 함께하지 못해서 조금 외롭지만,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볼 때는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고 아들이 성장한 어느 날.
그는 검을 배우고 싶다는 아들의 청에 검을 쥐는 법과 체력을 단련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들은 그처럼 기사가 되기 위해 기사학교에 다니게 되었고, 아들이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거두자 동료에게 아들 자랑을 늘어놓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아내의 체온과 빠르게 커가는 아들을 보며 그는 이 행복이 계속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웃 나라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검과 창을 들고서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맹세대로 엘리아나를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오랜 시간 동료와 갈고 닦은 검으로 적의 방패를 부수고, 창을 부러뜨렸다. 하지만 그가 대적하기에는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적의 검에 동료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그는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며 더욱 악에 받쳐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남자의 몸에도 검이 박혔고, 남자는 두려움에 떠는 엘리아나와 그녀를 보호하려는 동료를 보며 눈을 감았다.
끝을 앞둔 그의 머릿속에는 아내와 아들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시간과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되새긴 그는 아내와 아들이 살아남아 슬픔을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염원했다.
허나, 저물어가는 생명과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다시 눈을 뜬 그의 앞에는 아내와 아들의 시신이 있었다.
창에 찔려 아들을 안은 채 죽은 아내와 그런 아내의 품에서 자신을 찾으며 울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어미 품을 벗어나지 못한 채 울고 있는 아들과 그런 아들에게 다가가는 적국의 기사.
남자는 필사적으로 적들에게 자비를 구걸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곧 적국의 기사가 아들의 가슴을 검으로 찔렀다.
아들은 그렇게 죽었다.
겁에 질린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며 죽어버린 아들의 모습에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려던 남자의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그것은 분노였다.
그와 그의 가족에게 닥친 불행에 대한, 무고한 아내와 아이까지 죽이는 적들의 무자비함을 향한 분노와 복수심이었다.
남자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신 영혼을 건 복수를 다짐했고, 그런 남자를 불러들인 존재가 바로 리치가 되어버린 네빌이었다.
영혼이 타락해 지옥에서 영원토록 고통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복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네빌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를 위해 검을 들었다.
마지막 기억은 육신을 얻은 그가 가족을 죽인 적군의 가슴에 검을 쑤셔 넣는 기억이었다.
몇 번이고 쑤셔 넣어 복수를 완성한 그는 이후 완전히 악의 화신이 되었다.
이성을 잃은그는 가족도 자신의 삶도 잊고 오직 네빌에게 충성하는 존재가 되어 그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망자, 데스나이트가 되었다.
[복수…심인가.]
복수의 마음이 진득하게 담긴 기억을 읽으며 나는 눈을 떴다.
수술대에 오른 것처럼 밝은 빛이 내리쬐며 시야가 트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얼음이었다.
균열이 간 거대한 얼음.
그 안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이 잠들어 있었다.
바로 꿈에서 본 여자, 엘리아나였다.
반짝이는 금발의 머리카락과 자애롭고 아름다운 심성으로 유명한 여인.
후에 성녀로 밝혀져 파문을 일으킨 주인공이었다.
나는 엘리아나를 가둔 얼음을 자세히 보았다.
겉은 얼음이지만 속은 물이었다. 그래서 얼음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물속에갇힌 것처럼 그녀의몸은물결에 따라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를 가둔 얼음의 주위에는 조그만 주홍색 구체가 얼음을 녹이려는 듯 밝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반들거리는 주홍색 빛 아래에는 거대한 방진이 그려져 있었으며, 천장에는 망가진 샹들리에를 대신해 백색의 원형 구체가 빛을 뿜으며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나?]
네빌이 말했다.
섬뜩한 목소리에 얼른 몸을 일으켜 네빌을 찾았다.
로브를 입은 리치 네빌이 유일한 입구에 서 있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 아내 엘리아나다.]
[아내라고?]
나는 네빌의 말을 의심했다.
적어도 내가 살던 세계에는 자기 아내를 얼음 안에 가두는 상식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인가?]
[거짓말을 할 이유라도 있나? 다른 세상에서 온 네게.]
[진짜 아내라면 어째서 아내를 얼음 속에 가둔 거지?]
[내가 가둔 게 아니다.]
[…그럼. 누가?]
[그녀와 그녀를 선택한 신이 다가올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구하기 위해 직접 가둔 것이지.]
아리송한 그 말에 나는 다시 얼음을 보았다.
방금 꾼 꿈에서 나온 한 남자의 기억을 통해 그녀가 성녀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기억이 너무 흐릿했기 때문이다.
지금 기억나는 것이라곤 내가 쓰러뜨린 데스나이트의 생전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내가 지키려던 청년과 아이들뿐이었다.
[애들! 애들은 어떻게 했지!?]
네빌은 대답 없이 성녀만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말했다.
[애들은 어떻게 했느냐고 묻잖아!]
[시끄럽다! 아내 앞에서 언성을 높이지 마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네빌이 내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 순간 엄청나게 무거운 중압감이 몸을 눌렀다.
순식간에 머리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팔과 다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코끼리가 깔고 앉은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잠깐 흥분했군.]
네빌은 흥분을 가라앉히더니 팔각형 모양의 백색 크리스털을 만들어냈다.
[어린 인간들의 행방을 묻는 거라면 보다시피 이렇다.]
그 크리스털의 중심부에는 동영상을 재생한 것처럼 망자들과 함께 이동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약속이 다르잖아. 내가 이기면 아이들을 살려준다면서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다시 소리를 지르면 턱을 뽑아버리겠다.]
내 말에 네빌은 경고하더니 손을 젓는 단순한 행동으로 다음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 장면에서는 망자들이 야생동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주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해괴망측한 짐승들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는데, 애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스켈레톤 나이트들이 아이들을 둘러싸 보호하고 있었다.
[망자들의 동행은 보다시피 지켜주기 위함이지. 이제 믿겠나?]
[음…. 이게 조작일 가능성은 없는 건가? 자작극의 가능성도 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의심이 많군.]
[직업병이라서.]
[흥! 망자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저 어린 인간들은 약속대로 살려줄 것이다.]
조금 까칠하지만,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애초에 압도적으로 강한 그가 이런 거짓을 말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기에 나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었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
[이해했나 보군. 좋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우선 아직 자각하지 못한 것 같으니 직접 거울을 보도록 해라.]
네빌은 백색의 크리스털에 나타났던 영상을 없애더니 크리스털을 내 앞으로 보냈다.
공중에 뜬 채로 내 앞으로 날아온 크리스털.
그 안에는 내가 힘들게 쓰러뜨렸던 검은 해골바가지, 데스나이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즉, 크리스털에 비친 내가.
[데스나이트가 된 거다. 좀 더기뻐해도 괜찮다.]
나는 다시 생긴 왼팔의 상태를 확인하며 답했다.
뼈가 까만색으로 바뀌었다.
[괴물에서 악마가 되었는데, 이걸 기뻐해야 하나?]
[우문이로군. 외모는 그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내 기준으로는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추한 몰골이 되어도 상관없다.]
[미안하지만, 난 날 때부터 미남이어서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추해지는 건 사양하고 싶은데.]
[거짓말을 하는 망자라. 흥미롭군.]
분하지만 말싸움에서도 승산은 보이지 않았다.
[잡설은 이쯤하고. 이제 정산을 시작하지. 약속대로 이제부터 너는 내 부하가 되어야 한다. 내 복수가 끝나는 날까지. 내 말에 복종해야 한다. 만약, 내 제안을 거부할 시에는 다시는 네놈의 가족을 만나러 가지 못하도록 네 영혼을 소멸시킬 것이다. 불만 있나?]
불만은 있었다.
거부권이 없을 뿐.
그래도 최소한의 조건은 걸고 싶었다.
[조건이 있다.]
[나는 이미 어린 인간들을 약속대로 살려주었다. 더 이상의 조건은용납하지 않는다.]
[잠깐! 그건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가는 조건이지. 네밑에서 성실히일하는 조건은 아니다.]
[헛소리. 하지만 들어주는 주겠다. 지껄여봐라.]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면 뭐든 할 자신이 있지만, 아까 그 아이들처럼 무고한 자를 해치는 짓은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할 수 없다.]
네빌은 마치 확인을 하듯 내 눈을 보았다.
나는 네빌의 붉고 선명한 안광을 피하지 않았다.
굽히지 않는 내 뜻에 네빌이 다시 말했다.
[상관없겠지. 앞으로 상대해야 할 놈들은 결코 무고한 자들이 아니니…. 조건은 그게 다인가?]
[그, 그래.]
[받아들이지. 그럼. 다음은 나다. 너는 앞으로 내 말에 복종한다. 거부하면 너의 영혼을 지워버릴 것이다. 그러니 거부하지 않길 바란다.]
물러설 곳이 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순순히 네빌의 말을 받아들였고, 이에 네빌은 확인을 하듯 내 머리로 손을 뻗었다.
[좋다. 지금부터 마술 각인을 박겠다.]
네빌의 손에서 다시금 빛을 띤 문자와 방진이 나타났다.
문신을 하는 것처럼 따끔따끔한 통증이 이마에서 느껴졌다.
마술 각인을 끝낸 네빌은 백색의 크리스털을 내게 보내며 말했다.
크리스털을 보니 이마에 물음표(?) 모양의 문양이그려져 있었다.
물음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물음표 아래에 있을 점이 중앙에 있다는 것 정도였다.
[뭐지? 내 정체성이 물음표라는 뜻인가…?]
[네 이마에 새긴 술식은 부하가 되었다는 증거다. 앞으로 네가 어디를 가든 이 증표가 있는 이상 너는 내게서 도망칠 수 없다.]
[일종의 추적기 같은 거군. 전자발찌 같은….]
[비슷하다.]
[불쾌하네.]
네빌은 다시 말했다.
[그럼.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명령을 내려주겠다. 내 아내, 엘리아나를 지켜라. 설사 네 몸이 부서지고, 영혼이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엘리아나를 지켜라.]
성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인지 네빌은 이후에도 엘리아나를 지키라는 명령을 세뇌하듯이 반복해서 주입했다.
[두 번째, 내 명령에 절대복종하라.]
[복종이라면 네가 시키는 일만 잘하면 된다는 뜻인가?]
[내가 죽이라면 죽이고, 살리라면 살려라. 거부권은 용납하지 않는다. 거부하면 네 영혼을 찢어버리고 지워버릴 뿐이다. 특별히 네 요구를 반영해서 무고한 자의 살상명령은 제해 주겠다.]
[알았다. 세 번째는?]
[내 연구대상이 되어라.]
[연구대상?]
네빌은 길게 설명했다.
내가 지닌 가치에 대한 설명으로 정신지배를 저항하고, 마력을 보강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움직이는 원리를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동시에 다른 언데드를 죽이면 그 힘을 흡수하는 것과 인간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도 연구대상이라며 앞으로 시험할 것이라고 했다.
[인간 기니피그가 되란 말이군.]
[비슷하다.네 경우는인간이 아닌 데스나이트겠지만.]
[설마 네 번째도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사항도 있다.]
[많기도 하네. 내가 무슨 로봇도 아니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네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내게 지구에 대한 정보를 넘겨라.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기억이있으니, 지속적으로 기억을 공유해 연구하겠다. 또한, 여기 있는 동안 너는 망자들과 함께 검술을비롯한 무예를 수련해야 한다. 데스나이트를 이긴 것만으로는 엘리아나를 지킬 수 없다. 다소 강해졌다고 해도 칼 쓰는 법 정도는 제대로 배우도록 해라. 언어도 배우도록 하고.]
[공부하란 말인가?]
[그렇다.]
공부는 어렵지 않다.
어차피여기 오래 있어야 한다면 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기억 공유는 다르다.
[기억을 공유한다니. 꼭 해야 하는 건가? 그건 좀 기분이 나쁜데…. 내 기억으로 대체 뭘 하려는 속셈이지?]
[대단한 건 아니다. 그저 지구에 대해 알아보고 싶을 뿐이다. 일종의 호기심이지.]
[끙…. 내키지 않는군. 하지만 거부권은 없겠지?]
[그렇다. 거부하면 강제할 뿐이다.]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아니꼬와도 까라면 깔 수밖에 없다.
[이등병이라도 된 기분이네.]
[대신,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주지.]
[정말이냐?]
[망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알았다.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도 없으니.]
[순종적인 것이 좋군. 그래. 계속 그렇게 주제 파악을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콩고물이라도 얻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움직여라. 크흐흐!]
네빌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묘하게 한국식 표현이 많은 것이 거슬리지만, 아무튼 그의 명령으로 데스나이트로서의 일과가 정해졌다.
딸내미의 여름방학 계획서처럼 아주 꼼꼼한 일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