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6화 〉교화? (96/101)



〈 96화 〉교화?

어디 영화볼만한 곳이 교회에 있긴 하느냐고 물었더니, 소강당에 있는 빔프로젝터를 이용해 영화를 볼 수는 있겠으나, 교회 내부의 공간은 전체적으로 사용중이란다.
오늘같은 행사에 비는 곳이 있을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맞는 말인것 같았다. 솔직히 사람이 너무 많더라고.
그래서 방구석에서 휴대폰으로 영화를 봐야 할 기세다. 이거 참.

"무슨 영화가  질질 짜게 만들  있을까."
"난 영화를 안본지 오래돼서  모르겠다."
"나도 그런건 잘 모르는데…."

그렇게 한동안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으로 영화를 찾고 있었다. 뭔가 껴안고 있고 싶은데….
요즘 맨날 이런때에 이라를 안고 있어서 속이 허하다.
그런데 이라는 아직 내 옆으로 오려고 하질 않는다.


"삐졌어?"
"……."


손을 내밀어봐도 침대로 올라오려고 안하는 대형견. 만져주려고해도 계속 손길을 피한다.
내가 그렇게 세게 쥐었나.
녀석은 분명히 스스로 꽤나 튼튼하다고 말하며 자부할 정도였지만, 혈청때문에 슈퍼 흡혈귀가  나의 근력은 감당하기 힘들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전에도 난 힘 조절같은거 상당히 못했다고 생각이 들지만, 단지 이라가 튼튼해서 받아 줄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균형이 무너진 듯 하구나.

 슬프네.

그렇더래도 울적할뿐이지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야.
이런걸로 눈물이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귀찮게 영화 같은거 안 봐도 되고.


세찬이도 옆에서 제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을 해보는 중이었다.
그렇게 내게 표지를 몇개를 보여주며 내 의견을 묻는다.


"이건 어떤데?"
"난 사극은 몰입이 안되더라."
"그럼 이건?"
"평점이 별론데."

그렇게 몇번 후보군을 내치자, 세찬이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귀찮은 놈. 그냥 아무거나 틀지. 지금 눈물이 가장 필요한건 너 아니었나?"
"그래도 이왕이면 재밌는걸 보는게 좋잖아."

게다가 별 이상한 영화보고 울었다고 놀림받기도 싫었다.
그래서 생각한건, 아예 세찬이도 울만한 영화를 보면서 같이 즙짜면 좀 덜 쪽팔리지 않을까?였다.
그렇다면 아마 녀석의 메마른 감수성도 만져줄 수 있는 우주 명작을 보아야하는게 당연하지.

그렇게 무슨 영화를 볼지 고민하던 때였다.

"안에 계십니까?"
"네, 잠시만요."

밖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얼른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담임목사의 부하직원 느낌의 여사제가 날 찾아왔다.
조금 깐깐한 표정을 짓고서.


"저기, 지금 귀하께서 상태가 안 좋으신것은 알겠지만, 교회에서  의상을 입고서 이성분과 그렇게 가까이 하는것은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예?"

대체 무슨말을 하는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묻자, 여사제가 문제를 짚는다.

"아까 업혀서 이동하셨지요?"
"네, 그렇긴 한데요…."
"그 모습이 신고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시, 신고라고요?"

뭐, 설마 내 종족이 흡혈귀라는 사실이 들켰단 말인가? 대체 무슨 방법으로? 지금의 나는 VP 측정기조차 속일 수 있다고 세찬이가 그랬는데?
혹시 그 사제가?

"그런게 아니라 제령의식을 해야한다며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제령이요?"
"다른 수도자들이 아무래도 귀하의 모습을 보곤 오해한것 같네요. 보통 수도자들은 이성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지 않는데다가, 그 지금 그 모습이시라면 아무래도…."
"제가 지금 어떤데요?"

여사제가 나를  아래로 살피더니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한마디로 비현실적이시죠."

아. 그건 그래.

나는 별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을 통해 본 나는 확실히 독특하고도 비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은발적안의 여자가 새하얀 수녀복을 입고, 엄청 큰 남자한테 업혀서 이동하는 모습은, 확실히 교회에서 볼만한 장면은 아니다.

불쾌한 골짜기라는 말도 있잖아.
음, 그게 이런 느낌으로 쓰이는 단어는 아니었던가?

"그래도 그렇지, 제령이라니…."

아니 근데 진짜 유령으로 본거냐고.
맘대로 사람 죽이지 마, 진짜로.


그러고보니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공포스러운걸 본 듯한 표정이긴 했다.

그거 틀림없이 세찬이 얼굴 보고 그런줄 알았는데 나를 향한 시선이었구나.
나를 남자 사냥꾼 등에 타고있는 귀신으로 본거였어?
연구자의 어깨위에 업히듯이 매달려있던 설화가 떠오른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그런 느낌으로 본것이려나.

그래도 인식저해는 제대로 둘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 옷때문에 흡혈귀적인 능력이 떨어지면서 옅어졌나보다.
게다가 여긴 다들 사냥꾼같은 거니까 관찰력도 다들 좋을테고.

"모쪼록, 행동에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귀하는 여러모로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여기엔 저희 교회 소속만 있는것이 아니니까 더욱이 말이죠."
"주의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교회인데 유령이 돌아다닌다거나 그런 소문이 퍼지면 좋을일은 없겠지.
음식점에 바퀴벌레가 나온다는 거랑 비슷한게 아닐까.

내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여사제는 인상을 풀고선 무언가 내밀었다.

"이건?"

엉겁결에 받아든 그것은 소형 빔프로젝터와 USB였다.
추가로, 작은 유리병 같은것도 있었다. 여기다 눈물을 담으란 이야기인가?

여사제는 그것들을 품에서 꺼내 내 품에 넘겨주고는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거고, 이것들을 전해드리라고 들어서요. 사실은  취미가 영화시청이랍니다. 그래서 제 취향대로 준비해두었습니다."
"와! 진짜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네!"

그렇게 전달사항과, 전달물품을 전부 전해준뒤에 여사제는 바로 발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할 일이 많은것 같다. 음, 이것참 미안하게 됐네. 나중에 저 분한테도 선물을 좀 드려야겠다.

그나저나, 즐거운 시간 일지는 모르겠다.
어떻게보면 친구랑 영화보는거니까 즐거워야하는건가 싶은데, 지금 내가 영화보며 해야할거는 울기잖아.
요즘 금방 감정이 격해져서 우는데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자 잠시후, 세찬이가 일어나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럼 난 나간다."
"어? 같이 보는거 아니었어?"
"내가 뭣하러? 필요한건  눈물이잖아. 내가 있어봤자 방해겠지."
"어? 방해 아닌데…."

방해라니, 나는 별로 신경 안쓰는데.

"내가 있으면 괜히 오기부린다고 울음 참고 그러는거 아니냐? 그럼 비효율적이고."
"어…….그런…가……?"

넌 나를 너무 잘 안단말야. 음, 사실 좀 그럴 것 같기는 한다만.

"그래도 나 혼자 보면 재미 없단말이야."

영화는 여태껏 혼자서 본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애초에 혼자서 볼 정도로 즐기지도 않은 편이었고, 보고싶은 영화가 생겨도 꼭 친구를 영화관에 데리고 갔었기 때문에.

"재미로 보냐?"
"게다가 너랑 영화보는것도 오랜만이라서 좀 기대했는데…. 중학생 이후로 처음 아니야?"
"기대했다는 놈 맞아?  추천은 네가 다 씹었잖아."
"그, 그건…!"

이왕 보는거 좋은거 보려고 한거지.
왜 그러냐, 삐졌나?

"니가 보잔것중에 안골라줘서 삐졌어?"
"뭔 헛소리야."
"그럼 그냥 같이보자아아."
"아이씨, 앙탈 부리지 마라. 때려주고 싶으니까."
"너 설마 여자애 때리는 남자야? 이게 데이트폭력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내가 살짝 충격받은 표정을 지어내며 놀리듯이 과장된 억양으로 인터넷기사로 스쳐지나가듯  단어를 아무렇게나 지껄이자, 녀석은 몸을 떨면서 진심으로 소름돋는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씨팔, 뭔놈의 데이트? 그리고 너니까 때리지, 내가. 진짜 여자면 때리겠냐?"


그렇긴 하지. 아무리 녀석이 범법자에, 살인자에, 마약중독자에, 준 싸이코패스라지만, 그래도 아무이유없이 여자를 때리는 정도로 나쁜놈은 아니다.

음, 근데 늘어놓고보니 이미 충분히 나쁜놈인데 뭐지?
어째든 이유가 있으면 여자애도 때린다는 얘기아닌가?
이렇게보니까 세찬이 나쁜놈 맞잖아.
압도적인 폭력의 대상이 일반인이 아닐 뿐이지, 사실 일반인한테도 살갑게 대하는건 아니다.
그래도 일반인 여성한테는 나쁜짓 안하기야 하지만.
안하겠지? 음, 안할걸.


"세찬아아, 아무튼 같이 보자아아. 나혼자 보면 몰입 안될거같아."
"하아…. 그래, 을긋드."
"프흡. 뭐냐 그거는."

녀석은 내가 계속해서 앙탈을 부리듯이 말끝을 끌었더니 아예 눈을 감은채로 미간을 짚으며 말했다.
결국 저렇게 하면서도 다 내 말을 들어준다.
왜 자꾸 빼려는지 모르겠네, 이게 말로만 듣던 츤데레라는건가?
말이 좀  험한 느낌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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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프로젝터를 쏘아낼 공간이 천장밖에 없어서 침대에 누운채로 영화를 재생시킨다.
영화 제목도 보지 않은채로 나는 영화가 제대로 재생되는걸 확인하고는 바로 침대에 올라가 누웠다. 세찬이 역시 마찬가지로 바로 옆에 누웠고.

같이보자고 떼쓴 주제에, 바닥에 눕힐  없을 것 아닌가.
이라는 바닥에 몸을 말고선 귀만 쫑긋거리고 있다.
안보는 척 하지만, 소리는 듣겠다는 모양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조금 진행되자, 이거 멜로 드라마
장르인것같다.
처음 보는 장르인걸.

나는 커다란 팝콘 통 대신에 조그만 유리관을 쥐고서 영화가 재생되는 천장을 쳐다본다. 세찬이는 영화에 별관심이 없어보인다. 뭐, 그래도 나는 다 생각이 있었다. 녀석이 관심이 없으면 관심을 주입하면 되는 일.

나는 영화가 전개됨에따라 재잘거리면서 옆에서 떠들었다.
내가 떠드는건 주로 여주인공이 예쁘고 연기를 잘하네 라든가. 이 장면 좀 야한데? 라든가. 솔직히 어찌되든 별로 상관 없는 집소리들이었다.
그랬더니 세찬이가 그만 좀 하라며 질색하면서 영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에 집중하라는 뉘앙스를 담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알았다고 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진작에 휴대폰 집어넣었으면 좀 좋나.

내용은 일단 남자와 여자가 서로 연인으로 시작을 한다.
그러던중, 곤란한 상황에서 어색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보려고하기도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는 장면이 어쩐지 나랑 세찬이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몰입이된다.

그러다가, 여자 입장으로 영화를 보는건 처음이란걸 깨닫는다. 내가 여주인공한테 이입을 하고 있다니?
게다가 우리 둘이 여태껏 놀았던게 사실 성별이 바뀌어서야 완전히 연애나 다름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이다.


잠시 당황해서 자아성찰을 하고나서는 어차피  생각도 내 몸이 변했기 때문이겠거니, 하고 넘겨버렸다.
겨우 몇개월만에 사고가 변하는게 무섭네.
그래도 이런 생각은 입밖에 내질 않으니 누군가 알아줄 일도 없겠고, 티도 안내니까 세찬이도 내 맘속은 잘 모를것이다.

애초에 나도 내 태도를 확실히 정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지.
지금은 영화에 집중해야겠다.


이불을 덮고서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있으니, 너무나 편안해서 졸릴 정도다.
사제복 잠시 벗고 싶은데. 이거 입은 뒤로 너무 피곤하단 말이야.

흘끔, 옆을 보니까 세찬이는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는 것 같아 보였기 때문에 나는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면서 적당히 옷을 벗었다.


그래도 속옷으로 가벼운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야한 복장은 아니겠지?
게다가 영화속에선 노골적인 여성속옷차림의 여배우도 나온 참인걸.
이런 성적인어필 하나 없는 의상은 세찬이도 괜찮을거다.
게다가 난 그리 가슴이 크진 않으니까, 녀석 취향도 아닐거고.

어째든 옷을 좀 벗으니까 답답함이랑 피로감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듯해서 영화에 더욱 집중할수가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가, 사랑이란게 뭔지 모르겠다.
내가 그냥 태생 여자가 아니고, 남자였을때의 기억이 너무나 크기때문에 여주인공으로 몰입하다가도 자꾸만 턱턱 막히고만다.

특히 서로 껴안거나, 키스를 하거나 하는등의 스킨쉽 장면이 그랬다.

키스, 키스라.
그러고보니 한번도 해본적이 없네.
보통의 가정에선 첫 키스의 대상은 보통 어머니가 되겠지만, 내 경우엔 안계셨으니까.


입술을 매만져보니 생소하고도 익숙한, 모순적인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나한테 달려있긴한데 낯선. 그런 감각이었다.
몇번이고 식사, 의사소통등에 사용된 곳에 다른 입술이 닿는건 무슨 느낌일까.
내가 이 모습으로 누군가와 키스 할 리는 없겠지?

여자는 그래도 동성애자가 아닌이상 안 해줄테고, 남자는 내쪽에서 거부감이 든다.
'그런거 신경 안쓰는'유디라라던가, 미소녀에 환장하는 의사라면 해줄지도….
그래도 단순한 호기심으로 해보기엔 아직 거부감이 너무 세다.


포옹역시 가장 오래 같이다닌 세찬이한테도 안해본 행동이었다. 여성이랑은 더더욱 하지 않았고. 음, 기회가 아예 없었다고 할까.
초등학생때는 왕따 비슷한거였는데 중학교는 남중이었고.

아무래도 나랑 세찬이 관계가 제대로 된 사이도 아니고, 얘가 날 이성으로 볼 일도 없고, 나도 얘를 이성으로 볼 일은 없을텐데.

어쨌든 영화는 곧 결말로 다가갔고, 슬픈 영화라서그런지 결말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해피엔딩을 좋아했고, 그래서 액션영화나, 권선징악이 확실한 범죄영화같은것을 좋아했지.

내심 이런 영화는 보고싶지가 않았다.
계속 찜찜하단 말이야.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어야만 하는걸까, 이미 정해진 수명이라는것은 왜 이렇게 가슴이 아리는걸까.

영화속에서 여주인공은 불치병이었다.
남주인공은 여주인공 없이는 죽고 못사는 사람이었는데, 결국 여주인공의 죽음 이후로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다가 추억을 회상하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는 뻔하고도 슬픈 이야기였다.

"흐극, 시벌…. 아, 뻔한데 흑,왜 눈물이 나냐…."

그래도 눈물을 뽑는것은 성공했네.
으으, 이따가 액션영화도 봐야겠다. 너무 찜찜해.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떳다 하면서 쥐어짜서 유리병 안에 담았다.
몇방울 뿐이긴 하지만, 애초에 유리병 역시 그리 크지 않기도하고, 상식적으로 눈물로 이걸 가득 채울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적당히 희석해서 쓰는 그런 종류인거겠지.

엔딩크레딧이 나오면 잔잔한 음향이 재생된다.

불치병이라.
근데 나도 불치병이면 어떡하지.
뭐 나의 경우는, 수명이 걸린건 아니지만 이러다간 정말 죽을것 같은데.
병으로 죽는게 아니라 흡혈귀와 사냥꾼한테 살해당할  같단 말이지.

나는 그렇게 잠깐 누워서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에 나오는 이름들을 보면서 감정을 추스른 후에 입을 열었다.

"후우, 재미는, 없네."
"……."
"세찬아?"

얘가 왜 대답을 안하지 해서 옆을 보니까 그놈은 눈을 감은채 자고 있었다.

"허."

나는 인상을 찌푸리면서 몸을 일으켰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피곤했나…."

뭐, 그렇게 이른 아침부터 녀석을 닥달하기도 했고, 여기서도 딱히 쉰것은 아닌데다, 나도 녀석을 좀 부려먹었고, 지금 시간도 꽤나 늦었다.
녀석도 이것저것 하느라 피곤했을텐데 너무 부려먹기만 한거 아닐까.
같이 봐달라고 떼를 쓴것도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던거 아닐까.
좀 떼쓰면  해준다고 말이야.

이라는 뭘 하는가 해서 보니까 이라도 어느새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여기서 영화 끝까지 본건 나뿐인가?
…뭐, 낮잠이라도 잔건 나뿐이니까. 다들 피곤했나봐.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옆에서 자는 세찬이 얼굴을 바라봤다.

평소 녀석이라면 내가 한밤중에 키보드를 작게 두드리는 소리에도 깨어서 불만을 토로하던 녀석이다.
소음이 적게 나는 키보드인데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편안하게, 옆에서 한숨을 쉬든 말을 건네든 아랑곳않고 편안히 자고 있는것이다.
아침에도 본 모습이지만 정말 신기했다.

"흐응…."

녀석에게 향수처럼 풍겨오던 식물 탄 냄새, 그러니까 담배냄새가 더이상 나지 않는것을 확인하니 괜스레 기특해졌다.

그러고보면 한달넘게 금연당한 훈련소에서도 못 끊는다는  내가 좀 뭐라고 했다고 끊었다는거 아냐?
아직 몇달 안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말을 요즘 너무 잘 들어주는 것 같아서 고맙고 미안하고 그러네.

나한테 더 매정하게 대할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마약  하지말라고 울면서 지랄했을때도, 솔직히 바로 끊을거란 생각을 못했었다.
몇번  지랄을 해야겠지, 하고 내심 생각을 했었는데.

이라가  만지게 못하니까 대체제라고할까, 세찬이의 머리를 살살 만져본다.
이라같은 부드러움은 없지만, 억센 머릿결이 느껴진다.
이것도 나름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마약을 그리 쉽게 관둘  있었을까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그만큼이나 의지력이 강한 녀석이었다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녀석도 나름 힘들었겠지, 듣기론 금연도 상당히 힘들다던데.
아무튼 오래 살아야지 않겠어.

난 사냥꾼에 대해서도, 흡혈귀에 대해서도 좆도 모르는데, 얘는 남자일적 나를 포함해,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다.

그동안 가장 오래 붙어있었으니까.
아빠도 자주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지만, 세찬이는 꼭  곁에 있어줬다.


왜였을까?
단지 친구라서?

혹시 어릴적 내가 얘를 구해줬던 그 기억이 녀석한테 부채감으로 남아있는건가?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는데.
오히려 그때는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을 수습 한 것에 가까웠는걸.

"흐음…."

언젠가.

내게 융합되어버린 여동생과 릴리스를 떼어내고, 다시 남자로 돌아가서는 '아 정말 그땐 좆같았지.'라며 농담처럼 떠들날이 올 수가 있을까?

지금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건지 궁금하네.
그래도 아직 친구인거지?

내가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딜 나갈때마다 너한테 '이성'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신경써서 수수하고 담백한 코디를 하는것은 모르겠지.

일부러 기분나쁘라고 이것저것 장난을 치면서 내가 남자였단 사실을 상기시켜주는것도 알려나?

또, 만약 이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변하지 않아 이대로 평생을 살아가야한다면, 그땐 진짜 어떻게 해야할지 너무 불안해서 언제나 쓸데없는 생각으로 덮고,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을 한다는걸 알까?

그런 생각들은 역시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겠다.

괜히 부끄럽고, 너라면 이런 말을 해봤자 금방 받아넘기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얼굴보니까 괜히 또 좆같네."

그러니까 나는 계속 너한테 장난을 칠거야.

우린 전부터 그래왔으니까.

이런 장난이 바로 너와의 관계는 아직 바뀌지 않았음을 과시하는 행동이니까.


"감히 잠을 자?"

평소라면 내 혼잣말을  듣고 일어났을테지만, 녀석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걸' 해볼 수 있겠군.

'그걸' 하고나서 잠시후.



"야, 이제 일어나."
"음…. 아. 깜빡 졸았나."
"아주 자알 자더라구요. 당신."
"윽, 뭐야."

세찬이가  여성스런 말투에 기겁했다.
으흐,  싫어하는 반응이 매번 너무 재밌단 말이지.
고맙기도 하고.

"그나저나 눈물은? 뭐, 눈이 빨간거 보니까 우는데 성공하긴  것 같은데."
"뭐. 내눈은 원래 빨개."
"더 빨개졌다고."
"윽."

나는 잠깐 눈가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울었으니까 빨개진건 당연한거겠지만.
나는 세찬이가 내가  짓을 눈치채기전에 얼른 외쳤다.

"그럼 빨리 목사한테 가자!"
"알았다. 일어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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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아아, 아무튼 같이 보자아아. 나혼자 보면 몰입 안될거같아."

'이새끼, 사실 언령 쓰는법 아는게 아닐까.'

고민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절묘하게 자꾸 언령을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게다가 그정도는 그리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 쉽지않다.
아, 미약한 언령으로 미약한 부탁이라니.
환상적인 콤보로군. 이건 반칙이지.
그러니 저런 무자각의 허접한 언령조차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하아…. 그래, 을긋드."
"프흡. 뭐냐 그거는."

내가 이를 악물고 대답하자, 녀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닮았다는 수준이 아니라, 똑같다.
내가 죽인 릴리스와.
하지만 그 내용물이 전혀 다르단건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원래의 릴리스는 표정변화라고 할게 거의 없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불타죽기직전에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을뿐, 대개 나른하고 깔보는듯한 시선과 표정이었다.

이 녀석처럼 삶에 집착이랄게 없었기에.

그땐  모습에 진저리를 치며 곁에서 무표정하게 불에타는 릴리스를 바라보던 스승, 김중구에게 말했었다.

'찜찜하군요.'
'불안한가? 하지만 릴리스의 씨앗은 전부 죽었어, 부활같은건 못 하겠지.'
'정말입니까?'
'아마도. 그녀의 정보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보니까, 그녀도 지금같은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영락없이 그녀가 배신한 것인줄만 알고 경계를 했었는데.


하지만 오히려 좋아졌다고 할까, 릴리스 그 자신이 지금 김석주에 환생하여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잖아.

설마 이것도 '계획'의 일부인건가?

하여튼, 영화를 재생시키고 침대위로 올라온 김석주는 내 옆에 누워서 눈을 빛내며 천장에 재생되는 영화를 본다.
저런 생동감있는 표정과, 죽기전 릴리스의 생기없는 표정이 대비되며 겹쳐보여서. 어쩐지 복잡한 마음이다.

이제 어떻게 생각해야할지 모르겠어, 넌 분명히 김석주일텐데,  릴리스가 죽는 장면이 네가 죽는 장면으로 떠오르는건지.
너라면 죽을 때 그렇게 의연한 표정을 지을리 없을텐데 말이다.

분명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겠지.
흠.


녀석이 튼 영화는 멜로드라마다.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걸….
당황스럽다못해 경악스럽군.

장면 시작부터 침대 위라니, 이봐, 여사제.
저런게 왜 당신의 USB에 들어있는거지.

나는 그 장면으로부터 지금의 나와 김석주의 모습도 겹쳐보일것 같아서 황급히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고있자, 녀석이 내게 말을 건넸다.

"보쌈 먹기 참 힘들다, 그치?"
"뭐?"
"아무래도 오늘은 못 먹을 것 같네."

나를 바라보며 쓰게 웃는 모습.
아.
녀석은 온힘을 다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오직 보쌈김치를 먹고 싶단 마음으로 이 모든 짓을 하는 행동력이 경이로운 수준이군.

하긴, 내가 알량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일상을 내던지고 말았을때도, 이녀석은 여전히 나를 일상으로 불러내는 존재였다.
어쩌면, 내가 돌아갈 유일한 집이나 고향 같은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실제로 녀석과 있을때는 마음이 아주 편안했으니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개같은 릴리스자식, 죽어서까지 내게 안식을 빼앗다니.


"너도 얼른  김치먹고싶지?"
"흠."
"그냥 먹고싶다고 말해!"
"그래, 먹고싶다."

왜 자꾸 말을 거는걸까.
나는 대충 대답하면서 별것도 없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도 넌 자꾸 말을 걸어댔다.

툭툭.

"여주인공 예쁘다야."

툭툭.

"야, 저장면 연기쩔지않냐?"

툭툭.

"야,야, 빨리 봐봐. 지금 야한거 나온다."
"하아….알았어. 영화 볼테니까 그만좀 해."

아무래도 휴대폰을 집어넣을때까지 계속 지랄을 할  같았다.
제길, 여자친구도 아니고, 왜 내가 너랑 멜로영화를 봐야하는거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휴대폰을 집어넣었더니 '진작에 그럴것이지'라고 말하는듯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게 웃는 모습에 괜스레 또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린다.

'후우, 제정신이냐 한세찬? 저건 남자라고.'

잠깐 심호흡을 하며 정신방호를 다시 쌓는다.
이건 흡혈귀의 유혹이다.
겉보기 뿐이지만 일단은 여성이 된 네가 나만을 위해 지어낸 웃음은 그정도로 신경을 쓰이게 만들었다.

너도 웃음에 별다른 의미는 없겠지.
넌 원래부터 잘 웃었으니까.
흘끔 녀석을 보아하니 만족한듯이 영화에 집중하는 옆모습이 보였다.

침대에 누워서 그런지, 나른한 표정이었지만.
두손으로 작은 유리관을 꼭 쥔채로 영화에 집중하는것이다.

너는 언제나 눈앞에 일에 집중할 수가 있었지, 나는 그런  안되지만.

영화에선 마침 여주인공이 속옷차림으로 전화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남자인지라, 저런 장면에선 자연스레 성적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여배우의 가슴은  컸다.

아, 젠장. 그걸 떠올리니 내 생에 처음으로 본 실물 가슴이 너라는것이 열불난다.
그리고 그게 내 생각보다 예뻤다는 것이 더 화난다.

그래서, 너를 도저히 이성으로 보고싶지 않아서,

아예 자주 보는 동영상의 취향도 바꿨다는걸 네녀석이 알까.
아니, 모르겠지. 몰라야 해.

그때, 옆에서 꼼지락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왜, 옷을 벗는거지? 하필  장면에?

나는 필사적으로 영화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보고싶지 않아. 너를 보고 욕정하고싶지 않아.
그럼 내가 너무 비참할것 같잖아.
 



억지로 시선을 앞으로 향하고 있으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끝나고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자기한테 신경쓰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시선인 것 같아서 일부러 그쪽을 보지 않았다.

젠장, 릴리스가 사냥감 이었을때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건만.
그래. 녀석은 사냥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렇게 생각하기로하고 시야끝으로 살짝 살핀 네 모습은, 조금 부끄럽지만서도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린채였다.

표정따위를 보니까 더 사냥감으로 연상이 되질 않는다.
그동안 흡혈귀들이 지어보인 표정엔 모두 적의, 공포, 유혹을 위해 지어낸 표정들 뿐이었다.

저런 날것 그대로의 표정을 짓는 흡혈귀는 없다.
아니, 애초에 그런 사람이 사냥꾼의 세계엔 존재하질 않았다.
너는 그정도로 이 세계완 어울리지 않는구나.

오죽하면 너는  몸에도 어울리지 않지.

한술 더 떠서, 영화속 주인공들이 서로 껴안고 키스를 시작하자 나는 거기에 나와 네 얼굴을 대입하고 있었다.
이 내가? 여자도 아닌 녀석에게?

'나도 이제 미쳤군.'

나는 이를 악물며 눈을 아예 감아버렸다.
눈을 감으니 또 다르게 사냥꾼으로써 단련한 생생한 감각이 느껴져서 정말로 미쳐버릴 지경이다.
하지만 눈을 뜰수는 없었다.
옆에서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너의 모습을 시야에 담고싶지가 않다.

이미 모든 움직임이  감각에 읽혀 너의 자세, 숨결, 심지어는 감정까지도 읽혀온다.
 감각을 둔화시키던 마약의 부작용도 사라져, 너무 선명하고 깨끗하게 넘어들어온다.

그래서  알고있지만 직접 보고싶지는 않다.

상상력은 인간의 무기가  수 있으나, 지금은  상상력이란것으로 만들어진 무기의 끝이 내 목에 드리워진 느낌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피로에 몸을 맡겨버렸다.
아예 잠을 자버리는편이 편할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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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어땠습니까?"
"제 취향은 아닌데, 눈물은 나더라구요."
"다행이네요."

여사제가 내게서 빔프로젝터와 USB, 그리고 눈물 몇방울을 건네받아서는 품 속에 넣었다.
그리곤 세찬이를 슬쩍 보더니 고개를 갸웃 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저, 세찬님은 왜?"
"쉿, 조용히 해요. 저건 벌이니까."

나는 순간 세찬이가 이상함을 눈치챘을까봐서 후딱 조용히 하라는 말을했다.
그러자 여사제도 대충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흐음, 알겠습니다. 귀하도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으시네요."
"크, 크흠."

귀여운 구석은 잘 모르겠고, 음.
고전적인 장난이기는 하지.

"목사님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아마 형태는 다 만들어졌을테니, 조정만 마치면 되겠지요."
"네."

여사제가 말을 마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실 문을 열었다.

"오, 왔구만. 그런데…."
"쉬이잇…."
"프하핫, 목수. 대체 그게 무슨 꼴인가?"
"아,  이라구요, 증말!"

목사님! 집에 갈때까진 저 모습으로 놔둘 생각이었는데!
다 들켜버리겠어!

"예? 아니 대체 내가 무슨 꼴이길래…."
"아, 안돼!"

나는 거울을 보려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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