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교화?
나는 눈을 부릅뜬채로 졸음과 싸워가며 성경을 탐독하고 있다.
내가 어쩌자고 이러는 중인지 설명이 좀 필요하겠네.
일단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가장먼저, 나는 한 사냥꾼의 오해를 풀지 않았었다.
당시 술먹고 옷 찢어먹어서 그냥 수녀복을 사입은거라고 해명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나를 수녀로 오해하도록 두었다.
어차피 더 볼일이 없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더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사제한테 나를 수녀로 소개한것이다.
그 사제는 나를 보고 흡혈귀같은 느낌을 받았다고하니, 일단 그 부분은 좋게 넘어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이 교회의 행사 비슷한게 있는 날이기에 근처의 성직자들이 성인들을 기리기위해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를 수녀로 생각하는 사제를 또 만났다. 이번엔 교회에서.
나는 돌아갈 수도 있지만 그냥 감수하기로 했다.
점점 강렬해지는 흡혈충동. 그에 걸맞게 먹어야 할 음식이 양이 많은데다, 오늘은 보쌈이 너무나도 먹고싶었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뭐 만드는게 좀 뚝딱거리면 바로 튀어나오는것도 아니고, 만들어진 후에 내게 맞춰서 조정작업까지 마쳐야했기 때문에 오늘이 아니면 한없이 기다려야 할 테니까.
나는 세찬이한테 말했다.
"확실히 오늘은 교회가 조금 붐비네."
"모든성일 대축일이라서 그런게 아닐까. 이 날에 교회에 온것은 처음이라 나도 잘 모르겠군."
날이 날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서 어딜 못 돌아다니겠다.
게다가 여기는 내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들켜선 안되는 교회 아닌가.
그래서 방에 처박히기로 하고선 침대에 누워서 낮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을 두드린것이다. 사제가.
"자매님, 계십니까?"
"무슨 일이죠?"
"별건 아닙니다. 이전의 사과도 할겸,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말이에요."
"선물이요?"
사탕은 선물이 아니었던걸까? 뭐, 준다면야 받는게 좋겠지.
"자, 이겁니다. 자매님은 정교회 소속은 아니신 듯하니, 제가 쓰던 성경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네? 성경이 선물인가요?"
"예. 교인들은 보통 제 소속이 아닌쪽의 성경은 보기 힘드니까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내게 성경을 건네는 사제의 모습에 나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 성경이라는 거…. 상당한 신성력이 느껴지는데, 이거 내가 받아도 되는걸까?
어째든 받지 않는것도 의심을 살만한 행동이니 지금은 받아보기로 했다.
"으음…."
이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
영어공부할때 느꼈던 사전의 무게가 이러했을까?
게다가 들자마자 졸음이 쏟아져오는 느낌이었다.
신성력 효과 확실하구만.
"젊은 세대에게도 잘 맞는 번역본일겁니다. 제가 젊을때 썼던 것이니 말이죠."
"어…. 그런가요?"
근데 사제님이 젊을때면 그게 낡은거 아닐까요?
라는 말은 구태여 입밖으로 내진 않았다.
할 필요가 없는 말이니까.
"다음에 성경이야기라도 같이 하시죠, 자매님. 오늘은…. 크흠. 좀 피곤하신것 같으니."
"예? 아, 네."
그렇게 사제는 훌쩍 가버렸다.
내게 신성력이 가득 담긴 책뭉치를 건넨 채.
잠 안올때 베고자면 딱이겠네.
최고의 수면베개를 얻은 느낌이었다.
마지막 말이 조금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근데 뭐라고? 방금 성경이야기라고 했지?"
"나도 그렇게 들었는데."
세찬이가 벽에 기대서 팔짱을 낀채로 내가 쥔 성경을 보며 말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채로.
"아무래도 너 그거 읽어야 될것같다."
"……."
그래. 그래서 이렇게 된 것이다.
"후후후…. 이런 피로는 정말 오랜만이야…."
D-Day 7일차 수능공부도 이렇게 열심히 안했다.
그래도 내게 탈 인간급의 동체시력과 순간기억능력, 그리고 육체의 스피드가 있었다. 성경의 내용을 기억하는 것은 정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한순간에 주입한 정보가 너무 많은데다, 성경에 들어있는 신성력때문에 자꾸 머리가 지끈거리는것이 문제.
게다가 글씨는 읽어도 이게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문체가 너무 헷갈린다고 할까.
아마 세찬이가 신을 믿지 않는 이유는 성경을 읽기 싫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을정도로 못 읽겠다.
신성력은 늑대인간에게도 조금이지만 영향이 가는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읽는 성경이 재미가 없었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어서 이라는 진작에 침대에 눕혀두었다.
솔직히말해서, 그래도 시간내서 읽다보면 재미있는 부분도 있는것 같다.
그리고 창세기 말이지, 무슨 옛날 판타지소설 도입부같았어.
첫 부분이라서 가장 집중해서 봤다.
그런데 읽다보니 그냥 재미가 없어서 다 빠르게 넘겨버리고 마지막 부분이나 제대로 읽어보는 중이다.
근데 읽다보니까 이거 성경맞나 싶다.
"근데 이거 결말이 좀 지랄맞네."
"그러냐?"
바닥에 앉아서 구매한 장비들을 정비하던 세찬이가 대충 대답했다.
몇시간정도 성경을 읽으면서 웃긴 부분이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이야기하면서 조금 귀찮게 한 터라 이제는 별로 대답에 성의도 없다.
"무슨 세상이 멸망할거라는데 무조건 일어날 일인것마냥 써놨어. 그런데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지옥에 떨어질거라고 하잖아. 그럼 우리 지금이라도 하나님 믿어야 하는거 아냐?"
"너 네가 진짜 수녀라도 된줄 아는거냐."
"아멘, 저 새끼는 지옥에 떨어지려나 봅니다. 주님, 저는 살려주십시오."
"지랄은."
일단 뭐, 읽기야 읽었으니까 성경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이제 대응할 수가 있겠지.
아님말고.
이왕이면 창세기랑 요한묵시록중에서 얘기해줘.
"하암, 그래도…. 나름 재밌었어…."
달성감과 함께 몰려오는 수면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그대로 성경을 덮어서 머리를 쳐박고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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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참."
나는 성경에 머리를 처박고 골아떨어진 흡혈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장난삼아 읽어야 할것 같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굳이 읽을 필요는 없었다는걸 알 수 있었을거다.
어차피 지금 하는건 알량한 연기일 뿐이고, 사제랑은 사석에서 다시 볼 일이 또 언제 올지 알 수 없는것이었다.
나는 정비하던 장비들을 대충 창고차원에 정리해 넣은뒤, 의자에 엎드려 자고있는 녀석을 침대로 옮겨 눕혔다.
성경은 대충 서랍에 넣어둔다.
그래도 완전히 쓸모없는 일은 아니었다.
신성력은 흡혈귀의 마력과 상반되는 힘을 가져서, VP측정기조차 속일 수 있는 수준으로 외부로 노출되는 VP의 잔향을 줄여주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종교인들 사이에서 언제 한번 성경이야기나 좀 하자는 말은, 그냥 '언제 밥한번 먹자'같은 말이나 다름 없는 법이다.
이건 내 말이라면 의심조차 안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려나. 오히려 그런 입장은 나인데.
이름이란건 자신보다 높은 위치의 존재가 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곧 종속의 선언이 된다.
그러므로 사냥꾼들은 흡혈귀에게서 이름을 숨기는 것이고.
그래서 녀석이 이름을 부르며 내린 명령은 언령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지금껏 허세와 거짓말과 뉘앙스로 숨겨왔지만, 지금도 무의식적인 언령을 사용하는 중이라, 명령을 거부하기가 쉽지않다.
녀석이 이 사실을 제대로 안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안그래도 녀석의 판단력이나 정신연령이 점점 어려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던 차인데, 그런 능력이 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단지 이름을 부르며 '죽으라'고 말하는 것 만으로도 일반인들은 기꺼이 목숨을 버릴 능력이다.
자각하고 사용하는 언령과 자각하지 않고 사용하는 언령은 큰 차이가 있어서, 아직까진 말에 그 정도의 힘은 없지만 말이다.
능력을 자각하게 된다면 일상으론 당연히 풀어놓을 수 없을테고, 당장 지금의 아슬아슬하게 대등한 관계도 단숨에 뒤집어지고 말겠지.
내가 제 취향에 맞춰서 이것저것 부려먹히는건 기본일테고.
당장에 녀석이 하는 짓궂은 장난에 반항도 못할게 분명하다.
요즘들어 그 불안감때문에 녀석의 장난에 과잉대응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은 들지만….
"흐으음…."
침대를 뒤척이던 김석주가 제 옆에 자고있는 이라위로 몸을 뒤집었다.
잠버릇이 나쁜건 여전한 모양이다.
"윽!"
아래에 깔린 이라가 신음성을 내뱉으며 눈을 떴고, 정작 깔아뭉갠 녀석은 전혀 세상 모른채 잘 자고 있었다.
"누, 누나?"
이라가 녀석을 밀어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꽉 끌어안아버린다.
"흐윽…."
"흐으음……."
깨우는편이 좋으려나.
"야, 일어나."
"으음…."
녀석을 흔들어봤지만 전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밤이라도 샜나? 아니, 흡혈귀는 야행성이니 오히려 낮에 돌아다닌것이 쌓인건가. 거기다가 신성력이 가득한 공간에서 수도복을 입고선 성경까지 읽었으니, 흡혈귀로썬 자기도 모른채 자가봉인을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성해포로 만든 베일은 진작 벗어두긴 했지만, 저것도 한몫을 했겠지.
늑대인간 꼬맹이가 나를 도와달란 눈빛으로 쳐다보았기에, 나는 녀석의 몸을 붙잡고 떼어내려고 힘을 줘 보았다.
그러나 이미 흡혈귀로써 육체능력은 나를 훨씬 상회하는지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모든 약을 끊으란 명령을 당하면서 스테로이드도 금지된터라 힘이 약해진 모양이다.
아니면 녀석이 강해졌던가.
나는 그냥 꼬맹이를 응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못 하겠다. 그냥 잠깐 그러고 있어라."
"네? 어, 잠시만…."
미안, 꼬맹아. 네가 좀 상대하고 있어.
나는 계속 그 방 안에 앉아있기엔 꼬맹이의 눈길을 외면하기 힘들어서 방 밖으로 나갔다.
뭐, 늑대인간인 꼬맹이는 녀석의 물리력에 대응할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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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연을 당해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실내정원에 앉아 멍하니 담배잎을 보던 한세찬의 앞에 사제가 다가와 섰다.
"아, 목수. 자매님께서는?"
"당신이 준 성경읽다가 잡니다."
"하하, 이거 참. 꽤나 신앙심이 깊은 자매님이셨군요."
그렇게 생각하기에도 무리는 아니지, 라며 세찬은 생각했다.
흡혈귀가 사제복을 입고서 성경책을 읽는다니, 이쯤되면 코미디다.
게다가 녀석이 성경을 베고 자는 모습은 누가봐도 열심히 성경독서를 하다가 잠든 수녀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잠깐 떠올린 그는 미간을 긁으며 표정을 풀었다.
"그나저나, 당신같은 사제도 이 교회를 오는군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이단심문관이잖습니까, 당신."
자신이 이단심문관이라는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않았지.
정말이지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야, 그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담피르 사제라.'
흡혈귀의 능력의 일각을 사용할 수 있으면서 흡혈귀를 구분하는 능력까지 지니는 담피르는 사냥꾼으로써 적합한 인재이긴 하다만.
최후엔 제 자신도 흡혈귀로 변화해버린다는 점에서 사냥꾼 사이에서도 꺼려지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그럴 경우 자신의 목숨마저 불태울 준비가 기꺼이 되어있는 광신도.
담피르로 구성된 사제조직의 일원, 그것이 이단심문관이다.
"대체 당신같은 이단심문관이 왜 여길?"
"주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으로썬 알 수 없는 법이죠."
자신은 알려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사제가 날카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 때에 그는 이미 한세찬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터라 세찬의 시선에 그 미소가 닿지는 못했다.
사제가 떠보는듯이 말했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도 상당한 도박을 하는것이 아닌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르시는군요. 하긴, 목수께서는 교인이 아니시지요. 뭐, 불신자에겐 별로 상관 없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렇게 멀어지는 사제의 모습을 보고 한세찬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하여튼, 이 새끼들은 암시를 숨쉬듯이 쓴단 말이야.'
릴리스탓에 과할 정도로 쳐둔 정신방호가 빛을 발했다고 할까.
신은 못 믿어도 교황청의 일처리는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한세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