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교화?
감각을 차단하는 구속구들을 전부 직접 착용하고나서, 손에 수갑이 채워지는 느낌까지 들고나니 슬슬 이동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눈 감고, 귀 막고, 손 묶은채로 걷다보니 빡세다.
긴 치마가 자꾸 치렁치렁해서 발에 걸리는 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몇번 그렇게 휘청거렸더니 나를 이끌던 목걸이의 사슬로 당기는 감촉이 사라지고 갑자기 몸이 들어올려졌다.
자세를 보아하니 이거 또 공주님 안기다.
이놈 설마 맛들렸나?
"으읍!"
당황스러워서 몇번 버둥거렸더니, 한바퀴 돌려지면서 자세가 바뀐다.
거꾸로 뒤집혀 배에 압박감이 들고, 다리랑 손을 모아쥔 감촉.
이건 어깨에 들쳐메어진 감각이다.
"……으으으으!"
이 취급이 더 심한것 같은데. 그냥 가만히 있을걸 그랬나.
잠시후 녀석이 나를 내려놓고서 수갑이 풀리는 감각이 들자마자, 나는 직접 내게 달려있던 안대, 재갈, 귀마개, 목걸이등을 전부 제거했다.
왠지 더운 느낌이야.
"브에…."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서 잘 닦은 다음에 상자에 담았다.
아무래도 침같은게 안 묻을수가 없는지라, 상당히 더러워 보였으니까.
그러면서 나는 불만을 내뱉었다.
"아까 뭐야!"
"뭐긴, 업기법인데."
"뭐 그딴 업기법이 다 있어!"
"어깨법이라고, 군대 갔다오면 배워. 싫으면 가만히 있던가."
"……."
시발, 미필이 죄다.
근데 가만히 있었으면 공주님안기인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
"그런데 이것들은 다 뭐 때문에 끼는거람."
"글쎄. 일종의 결계 우회방법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써본적이 있어야 알지. 결계는 인간한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그런가…?"
하기사, 전에도 담임목사는 이곳에 들어온 흡혈귀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 같은 흡혈귀 하나를 위해서 전문적이고 세련된 방법을 개발할 이유는 없긴 하지.
뭐, 인식간섭의 결계니까, 아예 감각의 인식자체를 아예 막아버린다는 뭐 그런건가.
보아하니 또 도구 자체에도 무슨 마법적 처리가 되어있기는 한 것같지만.
혈청을 맞은 이후 은근히 예민해진 감각과 능력이 그런 미묘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으음, 이 옷에도 뭔가 미묘한 처리가 되어있는 모양인데."
"저번같이 싸구려 수녀복이 아니라, 이번엔 진짜 제대로된 물건이니까."
"그럼 나한테 위험한거 아닌가?"
"난 모르지. 넌 어떤데?"
"일단 힘이 쭉 빠지네."
조금 어질거리기도 하고, 배도 살살 아픈것 같고….
특히나 힘도 잘 안 들어간다.
마치 개목걸이 물리저해 도구를 찬 느낌 비슷한데, 미묘하게 다르다.
그건 힘은 빼도 정신적으론 나른한 감각만을 불러왔지만, 이거는 좀더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만드는 느낌이라고 할까.
물리저해는 힘이 제한이 걸린다는 감각이 강했는데, 이건 힘이 빨려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그걸 입고있으면 네가 흡혈귀란걸 쉽게 들키진 않을거라더군."
"그런 건가?"
"특히 그 베일이 상당한 물건이래."
"그렇구나."
나는 내 얼굴을 슬쩍 가린 반투명한 베일을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흐음, 이게 그런 용도란 말이지….
"아하, 안녕하십니까. 수녀님. 오늘같은 날이라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예상이 맞았군요?"
"아, 하하…. 네, 안녕하세욧…."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옆에서 들려오는 생글거리는 목소리에 흠칫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역시나 그때 병원에 불을 질렀던 사제가 있었다.
역시나 깔끔한 가르마에, 인상좋은 웃음을 흘리는 갈색빛 감도는 머릿칼의 중년 남성.
저번처럼 테크웨어를 사제복 위에 덧입지는 않고, 그냥 정갈하게 하얀 사제복만을 챙겨입은 채였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그닥 컨디션이 좋지 않아보이시는군요. 무슨 일이라도?"
눈은 웃고 있지만, 뭔가 날카로운 감각이 내게 쏘아지는 듯했다.
어쩐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될것 같은 느낌.
나는 그 즉시 '사실'을 말했다.
"아, 사실은 그날이라서요."
내가 흡혈귀인데 이런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힐수는 없으니 다른 사실을 대신 밝힌다.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므로 이 꺼림칙한 감각에 걸리지도 않을테고.
적당히 변명거릴 삼기엔 충분할 것 같네.
"아차, 이런, 실례를. 정말 죄송합니다…. 것 참."
눈에띄게 당황하는 사제. 뭐지? 내가 못할 말을 한건가?
"죄송합니다. 괜한 짓을 했네요. 사과드리겠습니다. 음…. 역시 이 기술은 허투루 쓸 게 아니군요…."
"뭘 했나요?"
"암시를 살짝 걸었죠. 하하, 난처하군요."
"암시요?"
그 느낌이 암시였단 말인가?
느낌으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거짓말을 알아보는 그런 종류의 것이던가, 사실을 이야기하도록 강요하는 종류의 것인 듯 했다.
역시 감이 좋아졌어, 이 몸….
"거듭 사죄드립니다. 잠시…."
당황한채로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를 쏟아내던 사제가 주머니에서 사탕을 한 웅큼 꺼내쥐어 내게 건넸다.
"저희 교회에서 할로윈 축제 이후 남은 사탕들인데…. 사과의 뜻으로 받아주시겠습니까?"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이게 왠 떡이래, 아니 사탕이래?
세찬이한테 못 뜯어낸 사탕을 여기서 얻게 되다니!
나는 그 사탕들을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안그래도 아까부터 단게 계속 땡겼는데 잘 됐지 뭐야.
"하하…. 그럼 이만."
그렇게 말하고 후다닥 자리를 뜬 사제였다.
나를 멍청히 쳐다보는건 아까 슉 하고 가버린 사제뿐이 아니라 이라와 세찬이도 있었다.
"왜?"
"아니다, 후우. 잘 대처한건가?"
그럼 잘 대처한거지. 사제의 유도심문을 간단히 밀어낸거 아니야?
나름 잘 한거 같은데?
"누나는 좀 이상한것 같아요."
"내가?"
"보통 그런걸 당당히 말하진 않는것 같거든요."
"그런가?"
그런가? 뭐 숨길 이유가 있는걸까? 잘 모르겠네. 뭐, 내가 피해를 준것도 아니고….
피 냄새에는 오히려 내가 제일 예민하니까 너희들한테 안 나는 것도 알고있거든.
그리고 내 몸은 고통같은것도 좀 둔감하니까 말이야.
생리 때문에 좀 여러가지로 불쾌한 감정이 들기는 하지만서도.
음, 설마 아까부터 배가 살살 아픈건 이 사제복을 입어서?
흡혈귀적 고통감소효과가 통하지 않아서 그런가?
"아. 생각난김에 화장실 갔다와야지. 사탕좀 들고있어주라."
"…그래."
나는 핸드백을 이라에게 받아들고서 화장실로 스르륵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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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치마는 언제나 화장실에선 불편한 것 같다.
그 치맛단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래서 매번 매번 다 벗어서 처리하고있다.
다른 여자들도 이렇게하는건가? 긴 원피스같은거 입으면 화장실 어떻게 하는거람. 나는 밖에서는 그냥 내키는대로 배변활동 전체를 참아버릴 수 있지만, 평범한 여자애들은 아닐것 아냐.
그런 의미에서 사제복은 귀찮아.
"이 짓거리도 매번 너무 귀찮고 말이지…."
혈류제어는 흡혈귀의 특기이건만, 이 피는 어째서 제어할 수 없는건가. 이미 죽은 피라서?
이제와서 드는 생각인데, 왜 유디라가 이딴거에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알겠다. 세번째로 하는중이라 좀 익숙해져버려서 그런지, 이제는 나도 아깝다.
탈모환자가 자기 빠진 머리털 보고 느끼는 감정이 이런건가 싶다.
대자연의 법칙 앞에 무력한 하나의 생물이여….
허무하구나.
그러고보니 아까부터 아슬아슬하게 흡혈충동이 들던것도 이거 때문인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보니 세찬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면서 서있었다.
무방비하군.
나는 어슬렁어슬렁, 살금살금 걸어가서 녀석의 뒤를 잡았다.
그 도중에 이라가 날 발견했지만,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가면서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보내자, 고개를 끄덕인다.
완벽한 자리를 잡고나서.
어깨를 치면서 소리친다.
팍!
"트릭 오어 트릭!"
"뭐냐?"
"사탕 달라고. 눈치가 없네."
할로윈은 어제긴 한데.
그래도 세찬이는 사탕이 있고, 나는 수녀 분장 비슷한걸 했으니 조건도 충족했다.
실제로 안주면 더 장난칠 예정이기도 하고,
아주 적절한 농담이 아닌가?
근데 별로 놀라질 않으니 흥이 식는다.
너무 무뚝뚝해졌단 말이지.
어떻게 해야 얘가 놀랄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더니 세찬이가 주머니에서 한웅큼 사탕을 꺼내서 내게 돌려준다.
손이 참 커. 내가 두손으로 건네준걸 한손으로 다 쥐다니.
"옛다."
"감사."
받자마자 곧장 사탕을 몇개 까서 그대로 입에 넣었다.
아, 이거 박하사탕이었네.
어쨌든 흡혈충동을 잊을 수 있어서 좋기는 하다.
나는 남은 사탕을 핸드백에 담고선 입 안의 사탕을 굴리며 말했다.
"으음, 근데 담임목사는 어딨대?"
"뭐 미사 준비중이라던데. 그래도 좀 기다리면 담당 사제가 올거다."
"그래?"
그럼 좀 기다리지 뭐. 나는 적당히 복도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을 꺼냈다.
게임의 체력은 이미 계단에서 전부 돌렸고, 모아둔 가챠나 돌려볼까. 이번 한정캐릭터는 꼭 뽑아야 해.
왜냐면 캐릭터가 나를 닮은 느낌이라서, 어쩐지 동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발적안 흡혈귀 미소녀캐릭터라니, 이건 나를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닐까? 흡혈도 좋아서 하나 뽑아두면 두루두루 사용되는 캐릭터라고하니까 성능까지 흠잡을 데 없다.
… 그러나 운빨좆망겜답게, 30개 조금 넘게 모아둔 가챠를 전부 질렀건만 뜨질 않았다.
이거 확률 주작아닐까.
나는 운이 없는게 분명해.
하긴, 애초에 운이 좋았으면 흡혈귀로 변해서 이 고생을 안했겠지. 젠장.
내가 실시간으로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더니, 이라가 옆에서 내 휴대폰 화면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누나, 왜 그래요?"
"으으, 내가 얻고싶은 캐릭터가 안 나와서 그래."
"얻고싶은 캐릭터요?"
"그래. 음…. 뽑기같은건데, 내가 노리고 있는게 안 나오네."
이번에도 천장 찍어야 나오려나 싶다.
대체 얼마나 더 해야하는 거냐고….
"뽑기? 저도 한번 뽑아볼래요."
"응? 그래. 잠깐만…."
윽, 이미 내가 다 돌렸는데.
그런데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시선을 무시할수가 없다.
이미 티켓은 전부 써버렸지만, 출석으로 모아둔 다이아를 사용해서 티켓 몇개를 만들어냈다.
"자, 한번 이걸 눌러봐."
"네!"
녀석이 손가락으로 '소환'버튼을 누르자….
-나는 밤의 여왕 세피르, 인간들은 내게 피를 바쳐라!
"뭐?"
이 목소리는?
나는 이라에게 건네준 휴대폰의 화면을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았다.
그곳엔 역시 내가 뽑으려했던 그 흡혈귀 캐릭터가 있었다.
이라가 휴대폰을 가리키며 꺄르르 웃었다.
"하핫! 이거 왠지 누나 같네요?"
"……."
세상엔 될놈이 있었고, 이라는 될놈이었다.
"이라야. 나 그냥 게임을 접을까…?"
"네? 왜요?"
난 가챠를 몇십번을 돌려서 못 먹은걸, 단 한번에 뽑아버리면 내가 뭐가 되니….
뭔가, 한야를 피해 얻어낸 내 안식처마저 빼앗긴 기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