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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화 〉인연 (92/101)



〈 92화 〉인연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길.

뒷자리에 앉은 나는, 창문이 있는  옆을 피해 가운데 좌석에 앉았다.
이라를 내 왼쪽에, 세찬이를 오른쪽으로 좌우를 차지시켜서 앉은 모습이다.
택시가 자외선차단이 별로네. 다음엔 이정도 거리라면 지하철을 타야겠어.


난 세찬이 때문에 조금 좌석이 비좁아 이라와 한 좌석을 공유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래도 녀석이 앉은 자리에서 들어오는 햇빛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내는 덕분에 오히려  편이 편했다.
하지만 택시기사 아저씨는 그게 좀 불편해 보였는지 한마디를 했다.

"거, 아가씨 편하게 남자분이 앞쪽에 앉으시지."
"전 괜찮아요."
"흐음, 그려?"


내가 대충 괜찮다고 말하니까 택시기사도 별로 더 말하진 않았다.


실버를 부르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하필 오늘 지명의뢰가 들어온 모양이었다.
실버도 꽤나 실력있는 사냥꾼이었으므로 찾는 분들이 많은가보다.

실력있는 사냥꾼에겐 이런식으로 특정해서 의뢰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슨 사냥꾼이 출장서비스냐 싶네.


나도 겨우 교회에 가는 길인데 위험 할 것 같지도 않고, 세찬이도 있으니까 상관 없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궁금해져서 세찬이쪽으로 머리를 숙여서 작은 목소리로 속닥이듯이 말했다.
택시기사도 있으니까.

"너도 이런 지명의뢰같은거 받아?"
"아니."
"왜?"
"할 필요가 없으니까."

쿨한놈일세, 뭐 강제로 시키는건 아닌 모양이네.
근데 세찬이는 정말 강한건지 약한건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동안 만난 녀석들 수준이 너무 들쑥날쑥이라 그런가 싶고.
뭔가 확실하게 준비된 상황에선 강한 것 같은데, 준비가 모자라면 그대로 위태로운  같고.


뭐, 됐어. 나도 이제 지켜지기만 하는 입장은 아니니까.
 능력은 아직도 쓸줄아는게 없지만, 그래도 뭔가 신체능력빨로 찍어누른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신체능력 얘기하니까 말인데, 이녀석 평소에 헬스하는게 맞나? 요즘 운동하는것 같지는 않던데.

"너 요즘도 운동 해?"
"근손실 없을 정도론 하지."

 눈에 안 띈거지 하기는 하는 모양이다.
근손실은 너도 신경쓰는거였냐?
나름 체계적으로 몸을 만들던 모양.
그래서 나는 헬창들의 최대 관심사를 물어보았다.

"3대 몇?"
"안 재봤는데. 의미도 없고."
"엑? 왜? 그거 잴려고 헬스하는거 아닌가?"
"내가 파워리프터도 아니고, 역도선수가 되려는것도 아니잖아."
"그래? 그렇구나…."


흠, 나는 인터넷같은데서 아무한테나 3대 몇?하는걸 들었다보니까 다들 하는줄 알았지.
난 헬스 안해봤거든.

"그래도 3대 500은 넘지?"
"그정돈 당연하지."
"역시 대충이라도 재보긴 했나보네?"


나는 숨죽여 웃었다.
암, 이 새끼가 3대 500도 못칠리가 없지.
허세는 아닐것 같은게, 지금 좌석에 앉은 허벅지의 근육이 상당히 탄탄하게 바지를 터트릴것마냥  모습을 뽐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바깥쪽 허벅지 너머로 느껴지는 감각도 엄청 딱딱하고.




조물조물.
내가 만지자 순간 힘을 준건지 더욱 딱딱해지는 허벅지였다.
그러고보니 예전에 업었을땐 이정도로 안딱딱했는데. 힘준게 분명하다.
남자였던만큼 나도 그런 허세가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다. 원래 근육은 힘 빼면 말랑하지.

"뭐, 뭐해, 미친놈아."
"음…."


나는 녀석의 허벅지 두께를 재보려고 손을 벌려서 대충 간격을 잰다음에 내 다리에 대봤다.
어우, 이거 허벅지 하나가 거의  두배네.
하여튼 다 커 그냥.
난 오히려 더 가늘어졌는데 말이지.
큭큭, 근데 헬스도 안한 내가 이젠 오히려 녀석보다 더 힘이 세다니. 정말 이상한 아이러니야.


그때, 백미러를 통해 우리를 흘깃 살펴본 택시기사가 말했다.

"어이, 아가씨! 그러려고 뒷좌석에 앉히신겨?"
"예?"
"좋을때긴 헌디. 아가씨가 왜그리 적극적이여."
"아, 그런게 아닌데요…."
"괜찮여. 내가 탓하는게 아녀, 근데 동생도 있는디  자제하는게 어떨가 싶은디."
"앗."


이라가 뭐 어때서, 하고 슬쩍 옆을 보니까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자각했다.
서로 작게 속닥거리다가, 나혼자 킥킥대고, 다리를 주물거린 내가 이라한테 도대체 어떻게 보였을까.
생각해보니 예전에 어두운 병원에서 이라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냥 친구사이야, 어릴때부터.'
'그게 가장 위험한 관계던데….'


이미 이라는 나와 세찬이의 관계에 대해 오해를 강하게 하고 있던 차였고, 방금 내 행동들은 그냥 꽁냥대는걸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는 와중에 이라의 손은 꼭 잡고 있었으니….
아마 시선을 돌리는 것이 녀석의 최선이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까 나의 무신경함이 본의아니게 오해를 자꾸 만드는듯  느낌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만, 나는 쪽팔릴수록 고개를 숙이고 마는것이다.


개쪽팔리네 스벌.


재밌다는듯이 웃으며 운전을하는 택시기사의 모습에 나는 그래선 안되는걸 알지만서도 택시기사의 이름표를 보고 외우고 있었는데, 택시기사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뭔 짓을 하려는 거냐.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참 절묘하게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는 익숙하고도 오래된,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을 노래였다.


변진섭의 희망사항이라는 노래였는데….
그, '청바지가 잘어울리는 여자' 하는  노래 말이다.

왜 절묘하다고 느꼈냐면 듣다보니 내얘기 같아서 그런다.
아니, 그런 여자가 세상에 어디있냐고 묻는 가사가 있는게 킬링포인트네.

노래때문에  이상해진 분위기는 나만 느낀건지, 세찬이는 창문 밖을 보면서 다리를 꼬고 있었다.
뭔가 이제 만지지 말라는 뉘앙스 같은 느낌이라 나도 녀석과 반대로 다리를 꼬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둔채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 교회까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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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어, 드디어!"


어색한 분위기를 끝내기 위해 억지로 텐션을 높여 외쳤다.
실제로 긴 시간 이동하기도 했고, 그동안 드문드문 비쳐오는 햇빛에 살짝씩 괴로웠으니 이렇게 내린채로 양산을 쓰니까 텐션이 실제로 오르기도 한다.
세찬이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뚜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럼 일단 내가 먼저 들어가지."
"그래."

난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따로 준비절차가 있으므로, 그늘진 계단에 들어가 앉았다.
이라도 나를 따라서 계단 옆에 앉았는데, 적당히 녀석을  다리 사이에 앉혀서 쓰다듬고 있으니 이라가 불쑥 말을 걸었다.


"누나는 세찬이형이 좋아요?"
"어?"


조금 당혹스러웠다. 음, 좋냐 싫으냐를 따지면 좋은 쪽이긴 하지. 녀석이 싫을때도 있기야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좋다는 쪽에 가까웠다.
근데 이라가 묻는 말은 뭔가, 남녀적인 그런 관계를 묻는 듯한 뉘앙스였는데. 맞나?


"연애적으로?"
"네."
"그건 좀."


애초에 남자랑 사귄다니, 생각도 해본적 없고. 세찬이가 그 대상이 되기엔 좀 말도 안되는것 같다.
걘 내가 남자일때도 알고 있는걸.
만에하나, 내가 녀석을 좋아한다고해도 그건 곤란할 뿐이겠지.
이라가 말했다.

"그럼 세찬이형한테 여친이 생기면요?"
"걔 여친 있어?"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이라.

"그냥 있다고 생각해보구요."
"으음…."


세찬이가 여친이 생긴다…. 스벌, 상상이 안가는데. 상상하려 할때마다 존나 큰 바퀴벌레밖에 안떠올라. 그게 한…. 4센티는 넘겼지. 진짜 레전드였는데.


게다가 걔 주변엔 여자도 없잖아.
누굴 대입해야하는지도 모르겠어.
음, 지혜? 나름 어울릴수도 있겠는데. 둘다 능력자이고, 세찬이는 지혜를 지켜줄 정도의 실력도 있으니….

"어때요?"
"글쎄,  모르겠네."

근데 확실한건, 그놈이 나보다 먼저 여친이 생기는건 불쾌하다는 점이었다.
난 이 꼴이 돼서 여친따위는 생각할 수 없게 되었건만, 이렇게 내가 정지해있을때 녀석이 먼저 치고 나가는건 반칙이지.


"일단 기분은 나쁠것 같다."
"그쵸?"

이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소리를 높였다.
난 그런 녀석의 머리를 헝클으며 말했다.

"뭘 그쵸?야. 걔가 나보다 먼저 사귀는게 분한건데."
"예?"


 아마도 아직까진 여자를 좋아할걸?
음,  몸이 되고나선 뭔가 좀 묘하게 되기는 했는데.
아마 다시 남자가 된다면 정상적으로 돌아오지 않겠어?


근데 모르겠다. 어떻게 돌아갈 수 있는건지. 일단 릴리스부터 죽이고 봐야하나.


"그런데 이런건 왜 물어보니?"
"그, 그냥요."


이상한 녀석.
난 이라를 품에 안고선 턱을 녀석의 머리 위에 얹었다.
강아지 냄새…. 내가 강아지 냄새를 맡아본적은 없는데, 이런 냄새가 나는 사람은 없었으니 강아지 냄새가 맞겠지. 뭔가 마음이 진정되는 느낌이야.
나는 그렇게 이라의 뒷머리의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라이칸슬로프라는건 대체 무슨 종족일까.
종족이 사냥꾼의 시초였다니.
악마사냥꾼이 이라의 격을 높이려는덴 뭔가 그런 쪽의 이유가 있는걸까?

"저, 누나?"
"응?"
"……간지러워요."
"아, 미안 미안."


냄새가 너무 중독적이라서 그래. 자칫 잘못하면 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앗, 그럼 안되지. 뭔 생각하는거래. 아무래도 흡혈충동이 조금씩 드는것 같은데, 이따가 뭐라도  먹어야겠어.


"…누나는 근육이 많은게 좋아요?"
"응? 글쎄…."


근육이야 있으면 좋지 않을까? 세찬이도 보면 그 근육을 일상에서  써먹잖아. 힘은 원래 있으면 좋은법이지.
없는거랑 비교하면 있는게 무조건 좋다. 돈이 궁할때 상하차라도 할  있다는게 어디야.


"있는 편이 일단은 좋지 않을까?"
"그런가요?"
"너무 막 많으면 좀 부담스럽긴 하겠네."


아무래도 세찬이는 좀 과하니까 말이야.
운동을 할거라면 적당히 했으면 좋겠어.


"근데 네가 왜 그걸 고민하는거야?"
"아뇨, 아무것도…."


싱거운 녀석. 너도 세찬이가 그렇게 신경쓰였냐?
어린것도 남자아이니까 근육에 대한 로망같은게 있었던거 아닐까.
그 질문 이후로 조용해진 이라를 놔두고, 휴대폰을 꺼내서 잠깐 게임을 했다.
이번 한정가챠를 놓칠 순 없어.


그런데 체력을 다 돌릴때까지 게임을 했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 생긴건가 싶다.
음, 가만히 있으려니 계속 입안이 근질거려서 일단 앞에 편의점에서 1리터 우유 한팩과 250밀리리터짜리 우유를 사서 마시고, 같이  밀크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계단에 앉아있었다.
우유랑 초콜릿은 나름 조합이 좋구나. 나중엔 핫초코 같은것도 좋을 것같다.


"아, 근데 이라야.  초콜렛 먹어도 돼? 강아지는 초콜렛 먹으면 안되잖아."
"네? 전 강아지가 아니니까 괜찮은데요…."
"그래? 그렇구나…."

그러고보니 이라 간식은 안샀네. 나 살때 얘기했으면 다 사줬을텐데, 음.
그럼 반만 줄까. 아니, 혹시 모르니까 반의 반만…. 아니, 진짜 조금만 줘야할까….


그렇게 얼마나 잘라줘야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더니 이라가 웃으며 말했다.

"됐어요, 누나 다 드세요."
"어, 진짜? 그래도 돼?"
"네. 전 별로 먹고싶지 않은걸요."
"그래? 알겠엉."



녀석이 그렇게 말하니 사양않고 잘랐던 초콜렛을 전부 입에 집어넣었다.
뭐, 괜히 늑대인간이 먹었다가 배탈이 날 가능성이 없는건 아니니까!
음, 초콜렛 맛있다.
그렇게 초콜렛을 전부 우물거리며 삼키고나서야 저 밑에서 검은색 인영이 올라왔다.
덩치를 보니 무조건 세찬이였다.


"야, 가져왔다."
"오, 고마워. 근데 좀 늦었네?"


세찬이가 조금 지친 표정으로 상자를 건넸다. 이전보다 커진  같은데.
녀석이 건넨 상자를 받아들어 열어보니까 익숙한 구속도구 말고도 뭔가 천으로  것이 같이 들어있었다.


"이거는…. 뭐야?"
"이게 좀 복잡하네. 잊고있었는데, 어제가 할로윈이었지."


음, 어제가 10월 31일 이었나.
할로윈이 그냥 지나가버렸네, 세찬이한테 사탕 삥 뜯었어야했는데. 난 이제 분장 필요없이 그냥 흡혈귀잖아.


"그게 뭐?"
"할로윈이 무슨 날인지 알고있냐?"
"음….분장하고 사탕 받는날?"


사탕 얘기하니까 또 단거 땡기네. 음, 이따가  재갈이 초콜렛으로 만든거였으면 좀더 기쁘게 물 수 있었을지도.

"모든 성인 대축일 전야제. 어제가 그랬으니까 오늘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란 말이지."
"오. 몰랐던 사실이야. 근데 그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거야?"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옷을 입어야하는 이유가 설명이 될테니."
"이거?"


천의 일부분을 집어들어보자, 그 옷은 사제복이었다.
하얀색의 사제복. 아예 베일까지 준비된 모습이었다.
이전에 교회에서 강당에모여 기도하던 사제들이 입던 그거였다.


"엑? 이걸 입으라고? 왜?"

나는 이해가 잘 안가서 말했다.
내가 흡혈귀인거 담임목사는 어차피 알고있잖아?
이런 사제복은 입을 필요가 없지않나?


"모든성인 대축일이라서 그런지 안에 가보니까 사제가 있더라고. 그때 그 병원에서  사제말이야."
"응? 그게 왜?"
"아직도 네가 수녀인줄 알더라고. 뭐라 변명할 거리가 없더군."
"애미."

뭐 그딴 우연이.


"그래서 수녀 행세라도 해야한다는거야?"
"아니면 다른날에 오고."
"…그건 싫어."


벌써 오늘 먹을 저녁은 보쌈으로 정해놓고 왔단말이야.
저녁에 먹을 보쌈을 생각하니까 못할것도 없을 것 같다.


"…… 잠깐 갈아입고 올게."
"그래."

난 근처에 화장실을 찾기 위해서 아까 편의점으로 다시 들어가 화장실의 위치를 물었다.
공중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게 될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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