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인연
축복받은 기름.
성유를 처먹은 흡혈귀.
그래, 나다.
내가 병신이다.
성유는 보통 사람에게 사용하면 치유 효과가 듣는듯 하지만, 흡혈귀에겐 정 반대로 고통을 주는 효과가 있나보다.
컨디션이 바닥을 치는것 같지만, 누굴 탓하냐.
베이컨이랑 계란을 성유를 두르고 요리한 내 잘못이지…
아니, 이건 라벨을 안 붙여둔 세찬이 잘못 아닌가?
집에 흡혈귀가 있는데 말이야.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집에 있는데 애들 손 닿는데다가 락스같은 유독물질을 아무렇게나 놔둔거랑 같다.
비록 내가 응애거릴 시기는 한참 지나긴 했다만.
지금은 정말 애처럼 울수 있을지도.
나는 배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아우 쓰라려."
"쓰라린 정도로 끝난다는것도 놀라운거다."
"그러셔."
뭐, 정말 성유로 음식을 만들어서 먹어본 병신같은 흡혈귀가 나 말고 더 있으려나 싶긴 하지만, 어떻든간에 성유역시 흡혈귀에게 유효한 공격 수단이기도 하니까.
그런걸 직접 섭취해놓고서 배가좀 쓰라린 정도로 끝난다면 나름대로 신기한거겠지.
어쨌든 우리들은 미용실 앞에 도착했다.
어제 말한대로, 오늘은 미용실에서 세찬이의 머리를 다듬을 것이었으니까.
물론 저번에 갔던 그 미용실은 아니었다. 꽤나... 아니, 엄청 많이 잘랐는데, 보통 사람의 머리카락이 하루에 1센티씩 자라는게 아니라면 지금의 머리길이를 설명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외모가 평범한 수준도 아니니 기억에 남지 않았을리도 없고….
자의식과잉을 걱정하는 나지만, 이건 솔직히 외모…. 뭣보다 캐릭터 과잉이다. 알비노환자같은 머리색과 눈색도 눈에 띄는데다, 객관적으로 상당히 예쁜 모습이니까. 애초에 알비노라는 것도 희귀한데, 거기다 외모까지 예쁘다는건 매우,매우, 희귀하잖아.
뭐, 외모는 사실 여동생의 것이긴 한데.
솔직히 내 감상으로봤을때는 검은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내 여동생이 더 자연스러워 보여서 예쁘다.
지금 내 모습은 왠지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이라고 할까.
이게 흡혈귀가 되어서 꼭 티를 내는걸지도 모르겠다.
엄마의 인상을 보니까 엄마는 외국인이었던 것 같은데. 그럼 난 혼혈이었던건가?
우리가 도착한 미용실은 저번같은 동네미용실이 아니라, 전문적인 수준을 갖춘 커다란 미용실이었다.
어젯밤에 내가 엄한 영상만 봤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나름대로 검색도 해본 것이었다.
특히 남성컷트 전문점으로 찾아봤다고.
저 살인자의 관상을 머리로 덮으려면 왠만한 기술이 없으면 안될 테니까.
"어쨌든 들어가자."
"그래."
대답한 세찬이가 먼저 앞서서 자동문을 열자 인기척을 느낀 미용사들이 '어서오세요'하고 일제히 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았으니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겠지.
이런 서비스정신은 흡혈귀에게도 도움이 되는데.
미용실 내부는 아침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이라서 그런지 손님이 꽤나 있었다.
그만큼 실력이 있는 미용사들이 있단 말이겠지.
난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예약하지 않았으면 큰일날 뻔했군.
하루종일 의자에 앉아있을 뻔.
그러고 있으니 곧 미용사중 한분이 다가와서 물었다.
"예약하셨나요?"
"어…. 인터넷으로 했는데요. 릴리라는 이름으로요."
"아, 여기 있네요. 바로 하시겠어요?"
"제가 아니라 이 친구를 하려구요."
나는 내 옆에 선 세찬이의 등을 팡팡 치면서 이야기했다.
내 손길을 세찬이는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내 알 빠는 아니었다.
일종의 복수다. 성유에 라벨을 붙이지 않은 것에 대한.
"아, 이쪽 분이요?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시겠어요?"
"넹."
나는 의자에 살포시 앉아선 세찬이한테 시켜볼 머리는 뭐가 나으려나 하고 비치된 패션 잡지를 펼쳐서 모델이 무슨 머리통을 하고 있는지 살폈다.
음, 리젠트라고 하나. 이런걸? 원래 리젠트라고하면 앨비스 프레슬리마냥 웃긴머리를 말하는게 아닌가?
근데 요즘엔 이렇게 짧은 머리를 잘 다듬어서 세우는 모양이다.
모델이 하고있는걸 보니까 괜찮아보이지만, 세찬이가 한다고 생각하면…? 잘 모르겠네. 어울리려나?
잘 매치가 안되네.
나는 잡지를 펼쳐서 세찬이 얼굴의 옆에 대놓고 고개를 갸웃거려봤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상상력이 부족한 탓이다.
"뭐하냐?"
"뭘 시켜볼까 고민중…."
"내가 네 인형인줄 알아?"
"난 뭐 인형이라 전에 그렇게 당했는줄 아네. 조용히좀 해봐."
녀석은 나처럼 몇시간동안 옷 갈아입기 마라톤을 당한적도 없는데 인형같은 소리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인형이 어디있냐? 무슨 공포영화에 나오는 살인인형 같은것도 아니고.
"한세찬님 여기로 오세요!"
"네."
그래도 자기를 부르니까 또 순순히 걸어가는 녀석이었다.
"어떻게 잘라드릴까요?"
"아무렇게나 짧게요."
"네?"
괴상한 주문이다.
저따구로 이야기했으니 그때 그렇게 머리를 잘렸겠지.
"그런 식으로는 곤란한데요…."
근데 나도 녀석의 머리에 얹을만한 뚜껑을 생각하진 못한 차였다.
뭐라고 말해야하나.
"음…. 그냥 저랑 다닐때 쪽팔리지 않게 잘라주세요."
"흐으음, 그게 더 어려울 것 같은 주문이네요. 하하."
미용사는 나를 살피더니 멋쩍게 웃었다.
뭔가 '애초에 둘이 너무 어울리지 않는 한쌍이라서요'라고 하는 듯한.
어쩐지 그런 의도가 비언어적 표현에 뚝뚝 묻어나오는 느낌이랄까.
뭐 그렇긴 하지.
녀석이랑 나랑은 외견상 분위기가 정반대잖아.
원래 남자일때도 둘이 다니면 그런 소리를 자주 듣곤 했다.
너네 둘이는 너무 달라서 신기하다나?
그래도 미용사는 뭔가 생각하는 머리스타일이 있는건지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찬이는 제 머리가 어찌 잘리든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듯이 가만히 앉아있었고, 나 역시 뭐 사실 잘리는 과정을 봐도 별로 재미 없을것 같아서 앉아서 잡지를 다시 펼쳤다.
한동안 사각거리는 가위질 소리가 들려오다가, 미용사가 세찬이에게 작게 묻는 소리를 들었다.
"혹시….여친 분이신가요?"
"예? 미친, 아니요. 그럴리가."
"아. 그런가요?"
너무 격하게 거부하는데.
어이없는 녀석일세.
뭐, 나로써도 녀석의 여친이라는 오해는 별로 받고싶지는 않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부정당하면 기분이 나쁘다.
왠지 고백도 안했는데, 그것도 남자한테 차인느낌이라….
그렇게 내 귀에 그 대화소리가 들렸을때부터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향해 잡지에 모델들이 뭔 자세를 하고 뭘 입고있는지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둘이 만난지는 얼마나 되신거죠?"
"머리 자르는데 그런 질문이 필요합니까?"
"흐음… 그건 아니지만요."
세찬이가 불만스럽게 쏘아붙이자, 미용사는 쫀것같았다.
왠지 불쌍하기도 하고, 더 냅뒀다간 미용사가 세찬이 머리에 화풀이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잡지를 덮고 세찬이 옆으로 걸어가서 말했다.
"10년 조금 넘은것 같네요. 얘랑 친구 먹은지는."
"와, 10년이나요?"
인연이라면 인연이고, 악연이라면 악연이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난 녀석을 가장 오래 봤으면서도 너무 몰랐다.
난 장난기가 돌아서 조금 오해의 소지를 섞어서 이야기했다.
"네, 같이 살면서 볼거 못 볼거 다 본 사이죠."
"뭔 소리야."
세찬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알을 굴려서 나를 쳐다본다.
근데 사실이잖아?
나는 한차례 어깨를 으쓱한다.
"거짓말은 아니잖아?"
"어머, 역시 그냥 친구는 아니었군요?"
"으음…. 그렇다고 볼 수있죠."
더욱 전문적인용어론 부랄친구라고 하기도 한답니다.
"개소리."
"어머, 개소리라니. 소중한 친구에게 말이 너무 심하당."
"소중은 개뿔…."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해서 더이상 자극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한편, 여기서 더 놀리지 않으면 아무래도 끝까지 놀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장난을 칠 생각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오늘 모처럼 데이트하는데 좀 더 공들여주세요."
"뭐? 데이트?"
"아하. 그런거라면 제가 최선을 다해드려야죠."
세찬이가 멍청한 표정을 짓는 통에, 한바탕 웃어버릴 뻔 했다.
어쨌든 미용사에게 직업의식을 불어넣는것도 제대로 된 듯하고, 내 할 일은 끝난 듯해서 우아하게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읽던 잡지를 다시 펼쳐놓고 보고 있었더니, 저쪽에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가 능력이 있나보다."
"그러게…. 무슨 회장 아들이라도 되는걸까?"
듣다보니 어이없네.
세찬이가 회장아들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이런놈이 회사를 물려받으면 그회사 바로 망해.
얘는 경영같은걸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란 말이다.
뭐, 세찬이가 능력이 있기는 해.
말 그대로, '초능력'이라는게 있지. 팔과 다리에 문신의 형태로.
그렇게 몇가지 더 말도 안되는 추측이 오간 뒤에, 마지막을 장식하는것은 음담패설이었다.
"아니면 거시기가 큰가?"
"에라이 미친년아."
그 이야기를 하고는 서로 숨죽여 웃는 두 여자.
…….
으으으음…. 역시 일상에선 귀가 좋으면 불편하네. 이런것까지 들리다니.
...실제로 크긴 하지만…. 근데, 내가 그거랑 무슨 상관이 있어? 쓸 일도 없을텐데!
"누나, 얼굴이 빨간데 아직도 배 아파요?"
"아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당황해서 눈을 꼭 감은채 생각을 멈췄다.
낮이기도 하고, 잠도 자지 않았으므로 금세 잠에 빠질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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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일어나. 끝났어."
"우음…. 뭐야, 벌써 끝이야?"
나는 세찬이가 내 어깨를 툭툭 밀치는 감각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라의 머리에 기대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벌써는. 2시간동안 만지던데."
"뭔 머리를 두시간을 만ㅈ…."
작게 기지개를 켜다가 본 녀석의 얼굴이 뭐랄까…. 인상이 달라진 모습이라 넋을 놓아버렸다.
"왜. 씁, 그렇게 이상하냐?"
녀석이 멋쩍은 듯이 손으로 머리를 긁기에, 녀석의 팔을 붙잡아 내렸다.
방금 머리한놈이 바로 머리를 망치려 하다니.
"왜 그래?"
"가만히 있어봐."
그렇게 말하고선 좀 자세히 녀석의 얼굴을 전체적으로 살폈다.
이녀석 이런 분위기도 낼 수 있었나.
원체 그렇게 긴 머리카락이 아니어서 그런지 좀 세련된 가르마라든가 그런 스타일이 된것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조금 정리한 스타일에서 옆머리와 뒷머리를 밀고, 앞머리와 윗머리는 자연스럽게 펌을 넣어서 조금 풀어놓은 상태였다.
"깡패에서 마피아가 된 느낌이네."
"그거 칭찬인거냐?"
"… 일단은?"
마피아나 깡패나 따지고보면 뭐 똑같은 폭력조직이긴 한데, 분위기가 좀 더 세련된 깡패라고 해야하나? 모르겠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음, 일단 남자든 여자든 머리빨이구나 하는걸 느꼈달까.
이런 새끼도 뭐 정리를 하면 정리가 되는거였나.
근데 입은 옷이 존나 백수건달 차림이라서 여전히 깡패스러움을 지우진 못하는 채였다.
다음엔 옷도 사러가야겠는데.
하지만 시계를 보니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다.
"가자, 이제 교회 갈 차례네."
"말 돌리는거지?"
"무, 무슨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