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인연
나는 지혜를 들여주고, 뭐라도 내올까 싶어서 냉장고를 열어봤으나 아무것도 없었기에 관두고 다시 자리에 어색하게 앉았다.
지혜 역시 어색함이라는 감정이 실체화된 것 같은 모습으로 쭈뼛거리고 있어서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하다.
그래서 못참고 내가 먼저 말을 꺼내고 말았다.
"그런데 네가 왜 우….여기에 있는거야?"
순간 우리집이라고 말할뻔 했네.
입 조심해야지, 젠장.
나는 정신을 다잡고 말을 고쳤다.
"음…. 그…. 별건 아니고, 그냥 과제 때문에…."
"……."
이전에도 가아끔 그런적이 있기는 하다. 과제 때문에 우리집에 찾아 온 적이.
그래도 여자애니까 집안에 들이지는 않았지만.
세찬이도 있었고.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
"뭐, 뭐가?"
"너무 연락도 없이 왔잖아. 정말 과제때문이야? 말해줘."
과제는 핑계고, 진짜 목적은 날 확인하려는 것 처럼 보인다.
지혜의 표정도 상당히 굳은 채였고.
그게 단지 내가 한세찬의 팔에 파스를 붙여주던 장면을 봐서 그런건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러자 지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미안, 사실은 널 이용하려고 했어."
"뭘 말하는 거야?"
날 이용할수가 있나?
패밀리어는 너잖아. 이용하는건 내 입장 아닌가 싶다.
"음. 걔가 날 진짜로 싫어하는건가, 그때 내 태도가 너무 안좋게 기억됐으면 어쩌지, 그런 고민을 많이 했거든. 그래서 얼굴이라도 다시한번 보고 얘기하고 싶었어. 걔가 넌 좋아하는것 같아서 따라다니면 한번이라도 볼 수 있을 줄 알았거든."
지혜는 쭈뼛거리면서도 할 이야기를 다 했다.
그게 내 은근한 압박때문이었는지, 단지 더이상 그 이야기를 속에 묵혀두고 싶지가 않아서 그랬던건지는 모르겠다.
지혜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거짓말을 한것이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따지고보면 이 상황, 현실이 더욱 거짓말같다.
실제로 사실대로 말해도 못 믿었잖아.
내가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 상태였다고는 하더래도.
의심정도는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야, 할리가 없나.
너무 많이 변했잖아.
지혜가 아는 나는…. 음, 일단 검은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평범한 남성에, 종족 역시도 완벽한 인간이었으니까.
갑자기 나타난 은발 적안의 흡혈귀 여자가 나 사실 김석주야! 라고 말한대도 믿을 수 있을까?
믿을 수 있을리가 없다.
사실은 그렇게까지 말하고싶지도 않고.
만약 그랬다간 지혜가 날 무슨 표정으로 볼까.
그동안 내가 해온 짓때문에 더욱 내입으로 말하기가 그렇다.
"처음엔 석주가 날 떼어놓으려고 너한테 일부러 그러라고 시킨 줄 알았거든. 그정도로 내가 싫었을까봐. 걔가 다신 내 얼굴 안 보려는줄 알고…."
"뭐?"
그게 무슨 이상한 이야긴가, 머리가 따라가질 않았다.
"나한테서 석주를 극단적으로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았어? 그동안 말이야. 네가 석주 휴대폰도 쓰고 있고, 석주 관련해서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것 같았고, 걔 얘기만 하면 말을 돌리고…. 엄청 수상했던건 알지?"
"으, 응. 뭐, 그건 부정 못하겠네…."
그동안 많이 숨겨두긴 했지.
그 모든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내가 지혜를 따돌리고 멀리 가버렸다고 생각할수도 있었다.
지혜의 입장에선 고백이 거절당하고나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니까…. 으윽, 세찬이를 대역으로 쓰는게 아니었어.
"그치만, 사실을 말해도 못 믿을텐데…."
"역시나 뭘 숨기고 있었던거지?"
나는 입을 달싹였다. 이걸 지혜에게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그게, 사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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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지혜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나는 기껏 차려입은게 아깝기도하니까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했으나 그녀는 둘 사이에 내가 왜 끼냐고 불만을 토했다.
둘사이? 그게 대체 뭔 뜻이지.
지혜를 집에 돌려보내며 손을 흔들던 나를 세찬이가 팔짱을 낀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정말 그런걸로 괜찮냐?"
"뭐, 지금으로써는…."
나는 결국 내가 김석주라고 밝히….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쪽이 팔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걸 밝히면 지혜가 무슨 반응을 할지도 무섭고….
특히 지혜가 내 꼬라지를 보고 경멸할거라고 생각하면 오싹오싹하다.
지혜의 그런 모습은 내가 변하기전엔 결코 본적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그냥 평범한 여자애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집착도 심하고, 가끔보면 무섭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결국 다른 거짓말로 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김석주는 놀이공원사건이후 해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중이라고 말이다.
그 위치는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말해줄 수 없다, 이후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지혜는 적당히 납득했는지 아닌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적당한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게 이상하군."
"……그래?"
그렇다. 생각해보면 빈틈투성이인 변명이기는 하다.
난 그때그때 변명하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원래 생각나는대로 뱉는 성격이기도 했으며, 원체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흡혈귀로 변해서 말도안되는 자기회복능력을 얻지 않았다면, 스트레스성 탈모로 대머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정도로 지금 나의 삶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생각할것도 많아지고, 해야할것도 많아지고 말이다.
평범한 일상이라는게 어울릴수가 없는 몸뚱이.
"네가 좀 도와주지 그랬어. 나 이런거 잘 못한단 말야."
"그건 네 자유지. 걔랑 무슨 사이로 남고싶은건지 결정해야할건 너잖아."
"그건 그렇지만…."
나는 머리를 긁어대며 한숨을 쉬었다.
내 관계니, 자신이 관여하지 않겠다. 이것은 일종의 배려였다.
사냥꾼으로써 나를 흡혈귀적으로는 여러가지로 구속하겠지만, 인간적으로는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도 된다는 배려.
그러니까, 녀석은 내가 자신에게 사회적으로는 의존할 수 밖에 없더라도, 인간관계까지 의존하지 않도록 나를 배려하는 것이다.
세찬이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서, 이게 네 답이군."
"그래."
나는 김석주이지만, 이전까지의 김석주는 아니다.
뭐, 부정할 수는 없다. 부정할 생각도 없고.
흡혈귀임을 감추고 설명하면 그저 외형이 크게 변했을뿐이라고, 앞으로 친구들과의 관계는 바뀌지 않을거라고, 나 역시 김석주임은 변하지 않을거라고 굳게 믿었던거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달라진 것이었다.
하물며, 인간도 아닌 흡혈귀라니.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육체만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나 마찬가지다.
몸이 변하며 사고 역시 변했다.
크게는 피 냄새를 맡으면 침이 고이는것과, 작게는 소변을 누기 위해 변기에 엉덩이부터 들이대는것.
그토록 자연스럽게 변해버린 내 모습이 지혜에게 '김석주'라고 인식되어버리는 것이 어쩐지 싫었다.
지혜에게 나는 여전히 남자인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하아."
변한지 반년도 안됐는데, 인간의 적응력이란.
나란 사람은 원래 이렇게....
"머리아프다. 그냥 밥이나 먹으러 가자."
나는 세찬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그래, 어차피 다시 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지혜에게 진실을 말해줄 필요가 없을 거야.
"뭘 먹을건데?"
"돈도 벌었겠다, 회 먹으러 갈래?"
"회?"
지금의 나는 마늘이 들어간걸 못 먹지.
하지만 회는 먹을 수 있잖아.
초밥은 먹어봤지만 회는 아직 안 먹어보기도 했고.
그렇게 억지로 텐션을 높인 나는 세찬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오면서 보니까 일식 횟집 하나 있더라고, 빨리가자."
원래 고민같은건 맛있는걸 먹으면 다 날아가는 법이다.
먹는것만 생각하니까.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누나 천천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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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원래 회 좋아했던가?"
"끄윽. 아니? 근데 생고기가 요새 맛있는걸."
나는 작게 트림하며 든든해진 배를 두드렸다.
돈 생각 없이 시켜먹으니 행복하네. 이게 돈버는 맛이지.
그리고 흡혈귀라 그런가.
얕게 배어나온 생선의 피맛과, 말캉한 살이 이빨을 문지르는 감각이 상당히 좋았다.
이것은 단순한 음식을 먹는게 아니라 내게는 새로운 감각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인간이 된다면 이 맛도 변하게 되려나?"
"난 모르겠다. 너만 알겠지."
"그런가?"
지는 인간이다 이거지.
그치만 이라도 그 맛은 인정하는 것이었다.
"맛있었지? 다음에 또 올까?"
"네!"
계산서를 확인하자, 한끼 먹었는데 얼마나 먹어댄건지 삼십만원이 찍혀있는 모습이 조금 신기했으나 그냥 긁어버렸다.
후후, 내 통장은 이제 저정도는 출혈도 아니니까.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손에 있으니 말이다.
와인트리가 아니라 골드구스라고 할걸 그랬나.
언젠가 다음에 잡는 흡혈귀는 그렇게 부르도록해야지.
언젠가 존나 비싼 음식점도 가보고싶은걸.
부자들이나 먹는다는 한끼에 백만원 이러는 데도 한번쯤 경험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그럼 이제 실버네로 가는거냐?"
"아니,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귀찮으니까 자고갈래."
우리집에서 실버네 집은 꽤나 거리가 있으므로 걸어가기는 꽤나 멀었다.
힘든건 없지만 굳이 걸어가면서 시간을 쓰고싶지도 않았고, 실버네 가봤자 솔직히 할것도 없는건 똑같기 때문에 차라리 유디라나 실버랑 있는것보단 세찬이랑 있는편이 편하다.
간단히 내일 아침에 먹을 고기랑 반찬을 구매하고, 쌀이랑 나물같은걸 좀 샀다.
집에들어오자마자 꽤나 깔끔해진 모습이 눈에 들어와 기분이 좋다.
음음. 이게 집이지. 평소에도 이러고 살자고, 세찬아.
"내 옷들은 아직 안 버렸지?"
"그래. 너 입던건 아직 그대로 있다."
"그래?"
몸이 갑자기 변한것처럼 갑자기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옷은 따로 정리하지 않았았지.
그럼 목욕하고나서 잠옷으론 그걸 입으면 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미리 옷을 준비하고 핸드백에서 가져온 생리대를 꺼내서 화장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상태가 안좋은 보일러가 가동되며 뜨거운물을 만들어내는데는 시간이 꽤나 걸린다. 그래서 찬물은 따로 받아서 걸레를 빨거나, 손빨래를 하는데 사용했지만 지금은 그냥 흘려보내면서 물이 흐르는걸 바라보고 있었다.
흐르는 물, 그러고보면 흡혈귀는 흐르는 물을 건널 수 없다는 이상한 제약이 있었다.
그동안 목욕하면 느껴지던 나른함의 이유는 이거였나.
흡혈귀가 흐르는 물을 건너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못하게 되었단 말인가.
욕조는 고인물이라서 괜찮았던것 같네.
내일은 교회에 갈거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겠네. 가능한 빨리 머리핀을 새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한번 만들어본것이니 금방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잡다한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드디어 따뜻한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후우, 거지같은데 또 안심이 되네.
불편함이 오히려 익숙하기때문에 안심이 된다.
익숙하다는건 변한 내게 있어서 오히려 특별함이다.
아직도 모든것이 새로운데, 거기서 내게 익숙한건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제는 이 몸에 별다른 욕정조차 들지 않는것이다.
새로워야 할 것이 익숙해졌다.
이것도 내게 주어진 변화겠지.
거의 다 쓴 샴푸통이 가볍다.
음, 그냥 비누를 싸야겠네.
그렇게 목욕을 대충 끝낸후에 미리 준비한 수건과 옷을 전부 갈아입었다.
내가 처음으로 입었던 남성용 티셔츠다.
이건 마치 수미상관.
처음으로 입던 옷을 이제와서 다시 입게 되다니, 감회가 새롭다.
"흐아, 정말 오랜만이다. 이거. 이제와서 다시 입자니 뭔가 부끄러운데."
그치만 확실히 여성복으로 설계되고 디자인된 옷들이 지금의 내 몸에는 더 잘 맞고 편안한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입은 남성복은 오히려 어색하기도 하다.
"어때?"
난 팔을 T자로 벌려 녀석의 앞에 섰다.
녀석은 시선을 맞추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별 관심이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보라고 하는데 눈을 피하는게 뭐하는건가 싶다.
"뭐가 어떤데?"
"남성복 마지막으로 입어본지 엄청 오래된것 같은데. 그때랑 지금 비교하면 어떻냐고."
그렇게 말하자 세찬이는 그제서야 나를 슬쩍 스쳐보고는 말했다.
"뭔가 처음이랑 느낌이 다른것 같기는 하네."
"그치, 역시 너도 그렇게 느껴지지?"
역시 어색한 느낌은 나만 느낀게 아니었다.
난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뭐가 변한거지?
외모는 크게 변한게 없는데.
"뭐가 변한걸까?"
이상한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이라가 말했다.
"처음 봤을때랑 달리 분위기가 정돈된 것 같아요."
"분위기?"
분위기란건 좀더…. 추상적인 개념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들은 세찬이가 날 자세히 보면서 곰곰히 생각하더니, 뭔가 떠오른듯이 말했다.
"그런가. 왠지…. 여성스러워진것… 같네."
그것은 조심스러운 어투였다.
"엥?"
그제서야 뭐가 변했는지 알것만 같았다.
난 이전엔 옷 같은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었지, 그땐 그냥 몸만 가리면 될거라고 생각한채 단지 걸쳐입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흘러내리진 않을까하고 은근히 신경쓰고 있었으니 행동에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렇게 자잘한 행동이 결국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그 변화가 위화감으로 느껴진 것이겠지.
"음, 그런가…?"
"뭐야, 반응이 별로 시원찮네?"
세찬이는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내가 그 말을 들으면 방방 날뛰면서 한바탕 생지랄을 떨어댈거라고 생각했나?
그럴 가능성도 있을 수 있겠지.
근데 지금 나의 감정은 놀랍게도 고요하다.
그래, 특별할게 있나?
"솔직히 별 생각 안드는데.
몸이 변하면 행동도 변하기 마련 아닌가.
당장에 너도 근육 키우고나서 팔이 벌어졌잖아.
너도 예전이랑 달리 근육때문에 등짝에 팔도 안닿아서 효자손으로 긁지?"
녀석이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알면서 자꾸 등을 치는거냐?"
앗, 들켰네.
사실 요즘들어 녀석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쳐대는 행위는 그런 속뜻이 담긴 장난이었다.
녀석이 손댈수 없는 곳을 나는 댈 수 있다는 우월감?
그런것도 좀 있고.
난 팔짱을 끼고는 몸을 돌렸다.
웃음기를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럴수도 있는거지."
뭐, 그렇게 생각한다.
오히려 행동같은건 내가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했던 부분이기도 하니까.
언제까지고 이 꼴로 남자처럼 행동할 수는 없을 것 아냐, 내가 여성으로써의 삶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동생의 몸임을 자각하고 난 후에는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행하던 행동들이 어느새 몸에 배여버렸다.
따지고보면 내가 받아들였다기보단 치인거다.
내 의사랑 상관없이 교통사고가 나면 차에 치였다고하지, 차에 받아들여졌다고 하지 않잖아.
"그래도 뭐. 기분이 이상하긴 하네."
난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손을 쥐었다 편다.
언젠가 여동생이 원했던것처럼 걔를 내 몸에서 빼내고나면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어떤 방식으로 꺼내 줄 수 있는지는 아직 감도 안오고.
그렇게되면 난 어떻게 되는건지도 잘 모르겠고.
아직은 실마리조차 붙잡지 못했다고 할까.
마력식으로 융합된것이니, 다시 마력식으로 떼어낼 수 있는걸까?
그치만 이런 융합같은 개념의 마력식은 유사한 전례가 없는만큼 '쓴다'는 개념역시 생소할 수밖에 없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흡혈귀의 씨앗이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두 존재를 섞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그동안 뭔가 했다는 감각역시 느낄수가 없었고.
아마 이 능력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했을때가 태어나기 전이었을텐데, 그건 정말이지 기억이 날래야 날 수가 없을 때다.
혈청을 한번 더 맞아봐야할지도.
다시 여동생을 보러 가봐야 할 것 같다.
걔랑 다시 만나면 뭘 보여 줄 수 있을지도 생각해봐야하고…. 선물도 없이 갔다가 삐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현실세계에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만큼, 정신세계에선 걔가 나보다 세니까.
"아참, 내 정신좀 봐라."
"왜?"
여동생한테 줄 선물하니까 떠오른건데, 세찬이 줄 선물을 사둔걸 까먹고 있었다.
"이건 선물이야."
"갑자기?"
녀석에게 사각형으로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를 내밀었다.
갑작스런 선물에 당황하는 모습이 웃겼다.
"이게 뭔데?"
"열어보면 알겠지."
"나한테 왜 주는거야?"
"그냥, 아빠한테 줄 선물 생각하다보니까. 네가 그동안 도와준것도 있고 고마워서."
첫날엔 날 죽일뻔 했지만 지금와서는 날 지키려고 여러가지로 신경쓰는게 보이니까 뭐라도 보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네가 내 생각을 다 하는구나."
"너만할까."
"무슨 의미지?"
"별 뜻은 없는데?"
너도 내 생각 존나게 많이 하는거 눈에 다 보여.
아까도 내가 여성스러워 졌다는 말에 지랄할거라고 생각하곤 망설인거잖아?
요즘엔 나를 여러가지로 신경써준다는 것도 눈에 보이고. 이를테면 그때 자켓 벗어준거라던가?
녀석도 내 상태가 걱정되는 거겠지.
이대로 영영 변해버릴까봐.
그치만 난 어떻게되든 내 삶의 주체는 나 자신, 김석주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중간에 갑자기 장르가 바뀌어버린다고해서 제목마저 바뀌는게 아니듯이,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해도 난 김석주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세찬이가 포장을 뜯고는 차가운 눈빛을 내게 향했다.
"이 시발, 공구세트?"
"푸흡, 네 별명이랑 딱 맞지않아?"
목수니까 여러가지로?
"오냐, 이걸 너한테 쓰라고 하는거군, 진작에 말해주지 그랬나."
세찬이가 맹렬한 눈빛을 내게 향하며 공구함을 열어제낀다.
그러나 공구함 안에는 걔가 생각하던 것처럼 공구가 들어있지는 않았다.
"뭐야, 잠옷이네."
"내가 입어보니까 이거 생각보다 되게 편하더라. 너도 맨날 런닝에 빤스만 입고 자지 말고 한번 입어봐."
"흐음…."
공구함은 사실 그냥 장난을 위한 이중포장이었고, 내가 선물한 진짜는 잠옷이었다.
내 잠옷이 완전히 걸레로도 못 쓸 천조각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새로 주문하면서 같이 산건데, 면도 부드럽고 땀 흡수같은것도 잘 되어서 일어나면 되게 상쾌하다는 부연설명을 해줬다.
"이런게 나랑 어울릴거라고 생각해?"
"어울리고 안어울리고가 뭐가 중요하냐? 어차피 집에서 입는거."
솔직히 저런 미녀와 야수에 나올 야수 역할조차 위화감없이 소화할 수 있을법한 모습의 녀석이 잠옷을 입는건 조금 언밸런스한 감이 있기는 했다.
그래도 난 괜찮을것 같은데.
지금 세찬이는 예전보다 얼굴에 살도 좀 올랐고, 전체적으로 건강한 기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약이랑 담배를 끊어서그런가?
뭐 극적인 변화랄건 없지만, 그냥 일단 썩은 동태눈에 요즘 생기가 좀 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이거 공구함은 어디서 난건데?"
"아, 그거? 샀는데?"
그럼 훔쳤을라구.
"장난 한번 치자고 돈을 낭비해?"
"너한테 장난치는데 사용된 돈이라면 올바르게 사용된게 맞지."
전에 네 밥에 넣은 캡사이신은 하늘에서 뚝떨어진건줄 아니. 그것도 산거야.
"내 언젠가 꼭 되갚아주지."
"야, 뭔가 말이 이상한데? 내가 너한테 준건 엿이 아니라 선물이다?"
"누가 뭐라나? 나도 선물 주겠단 얘기였어."
"역시 그렇지?"
왜 불안할까.
나는 찜찜한 기분을 안은채 방으로 들어갔다.
이라는 같이 자자고 불렀으나, 거부당했다.
이라가 쌀쌀맞아졌어….
여러가지로 잠이 안오는 밤이라, 오랜만에 컴퓨터게임을 한창 조졌다. 부캐, 핵의심을 몇번이고 받았다.
게임방송이라도 했어야하나? 그치만 양학도 계속하면 질리는걸.
상대 입장에서 양학을 당하는것도 별로 재미는 없을테지.
일종의 민폐다.
-딸깍, 딸깍.
……음, 역시 큰 가슴이 좋은거려나.
어우. 유디라보다 큰 사람은 많네….
그런데 남자중에도 세찬이 정도로 큰 사람은 별로 없는것 같은데?
누가 될 지는 모르겠는데 세찬이 미래의 여친씨는 힘좀 내셔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