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7화 〉인연 (87/101)



〈 87화 〉인연

나는 사범님과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나중에 몸이 나으면 연락해서 자세라던가, 전투기술같은걸 봐주기로 했다.
나로써는 아무래도 쓸 줄도, 있는줄도 모를 특수능력같은걸 단련하는것보단 직접 몸을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난 와인트리의 피를 수혈받은 이후, 몸은 상당히빠르게 회복하는중이었다.
뭐랄까. 맡겨둔 돈을 찾은 느낌이라고 하나, 은행적금을 하나 깬 기분이었다.
실제로 42억이나 벌기도 했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지은 이름값을 하는것 같다.
피도 주고, 돈도주니까.

대신에 녀석이 날 엄마라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모르겠다.
42억원짜리 아기라면 대충 눈감고 한번 엄마 해주지 뭐.
내게 와인트리는 자식이라는 개념보단 비상식량, 체력회복포션 같은것에 가깝지만.




세찬이랑 반으로 나눠서 21억이나 손에 들어온 나는 이제 정말 집을 구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 강남까진 몰라도 아파트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아?
그럼 이제 실버에게 신세지면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가질 필요가 없다.

문제는 내 신분인데…. 신분등록을 한다는게 꺼려질 수밖에 없지.
애초에 등록이 된다는건 결국 존재가 노출된다는건데….
흡혈귀나 사냥꾼이 어떻게 노려올지 모르는 내 입장상 함부로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당장에 며칠전만해도 흡혈귀가 노려오는통에  난리도 피웠으니.

그래서 일단은 세찬이가 돈을 갖고있기로 했다.
내 통장에 갑자기 그런 큰 돈이 들어오면 솔직히 은행에서도 이상하게 볼게 뻔하니까…. 뭐, 내가 제대로된 사냥꾼이라면 들키든 말든 상관 없을테지만, 하필이면 흡혈귀인 탓에. 심지어 사냥꾼사이에 등록된 흡혈귀도 아니다. 흡혈 박탈도 하지 않았고, 기타 구속시술도 받지 않았다. 그래서 위장으로 사냥꾼 등록을 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으로 사냥꾼인거지, 통장 같은건 아직 시기상조다.


갓 사냥꾼을 달은 신입이 그런 거액의 임무를 갑자기 해냈다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나.
주목은 피해야지.
흡혈귀인게 공식적으로 걸리면 결국 등록을 해야하는데, 난 구속시술이나 흡혈박탈은 받기 싫으니까.

유디라는 몸에 그런 여러가지 제약이 걸려있어서, 실버와 멀리, 오래 떨어질 수가 없는데다, 제대로 된 힘을 내려면 상당히 복잡한 술식을 해제해야하며, 감시자의 명령에 복종해야하고 뭐, 그런 자잘한 간섭부터 심각한 구속까지 전부 매달고 있는것이다.

게다가  다른건 몰라도 명령복종은 조금 무섭다.
만약 세찬이가 내 명령권을 잡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등록된 흡혈귀가 그런 주먹구구식으로 배정되는게 아니라고 하니까….
무슨 따로 전문적인 조교사나 시설같은게 있는 모양이다.

모르는사람이  조교한다고?
말도 안되게 소름이 돋는다.


이렇게보면 아빠가 나에게 해뒀던 물리력저해 정도는 정말 최소한의 조치였구나 싶다. 내가 자신의 아들일거란 사실에 올인한것과 마찬가지.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 고마워지는데.

"그러고보니  아빠 생일이네."

생일선물은 뭐가 좋을까, 나중에 세찬이랑 고민해봐야겠다.
그동안 아빠한테 빌린돈은 전부 갚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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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어느정도 회복되니까 그날이 왔다.
짜증나네, 왜 남자인 내가 이런걸 겪어야하는건지….
피가 흐르는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그냥 기분이 나빠지는게 짜증난다.
짜증이나서 짜증난다는게 무슨 느낌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끔찍해. 내가 아니게 되는것 같아.

그리고 뭣보다 안좋은건, 욕조를 쓸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요즘 욕조를 안쓰면 목욕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단 말야. 하도 많이 써서 그런가.
맞다, 실버한테는 그동안 미안해서 5천만원 정도를 계좌로 입금했다.
내가 보냈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돌려준다곤 안하겠지.

거실 쇼파에 누워서 개 상태로 자고있는 이라를 베고 있다가 유디라의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이럴때마다 대체 어떻게 하는걸까, 그리도 몸에서 피가 흐르는걸 끔찍히 생각하는 유디라라면, 피가 나오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을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유디라가 생리하는걸 본적이 없었다.
궁금하네, 정말 방법이 있나?
유디라를 바라보니 역시 밤이라서 그 요상한 월광욕인지 뭔지를 하고 있는 차였다.
내가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있으니 시선을 느낀건지 유디라가 내게 물어왔다.

"응? 왜. 너도 월광욕에 관심이 생긴거지?"
"아뇨, 그건 아니고."

속옷만 입고 베란다에 누워있는다니, 여전히 좀 부끄럽고 이상한 기분이라 거절한다.
그리고 이젠 가을이라 좀 춥잖아. 일정이상의 추위에도 흡혈귀는 저체온증같은거에 고생하지 않지만, 나는 그냥 추운걸 싫어한다.
여름보다 겨울이 좋은 이유는 추운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추우면 껴입을수 있으니까 좋아한거고.

나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이야기했다.

"유디라, 대체 당신은 이걸 어떻게 해결해요? 저도 좀 알려줘요."


유디라가 알만하다는 듯이 선글라스를 치우고 내게고개를 돌려 눈을 맞췄다.
나도 누워서 거꾸로 보이는 유디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알고싶냐는 표정이었고, 나도 정말 알고싶다는 표정을 만들어보였다.

"뭐…. 간단해."
"간단해요?"


간단하면 나도 해야지.
매달 이러고있는것도 솔직히 질린다.
이짓도 한두번이지, 앞으로 몇번이나 더 겪을지 모를 일이다.

유디라가 자신의 아랫배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더니 가위질을 하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잘라내면 돼. 싹둑."
"뭐를요?"
"피가 나오는 부분. 그러니까, 자궁말야."
"……."


나는 말문이 막혔다.
간단하다면 간단한데, 그건 해답이 간단하단거지 절대 과정이 간단한게 아니었다.

남자로치면, 정자가 나오는게 싫다고 불알을 자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게 말이 돼? 애초에 그래봤자 회복하지 않나?
내가 조금 징그럽다는 표정을 짓자, 유디라는 재밌다는듯이 더욱 자세히 이야기했다. 아예 몸을 일으켜 내게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설명을 한다.


"이쯤을 절개해서 그걸 도려내. 흡혈귀니까 죽을걱정 없이 통채로."

그녀는 자신의 배꼽에서 조금 아래 부분을 살짝 누르며 이야기한다.

"그리고 회복하지 못하게 기구를 삽입하지…. 여기쯤에? 요렇게 생긴 뚜껑같은걸 덮어서 고정시켜."

그리고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누르고있던 부분에 배와 수직이 되도록 댄다.

"으으으…."

그 모습에 나는 조금 질려서 머리에서 핏기가 가시는게 느껴진다.
신체 내부에 장기를 잘라내고 덮어서 씌운다니, 징그러워.
심지어 그게 다른곳도 아니라 생식기라니? 너무나 끔찍하다.


"그럼 다시는 재생하지 않지, 피도 흘리지 않고. 대신에 가끔 따끔거리고 간지럽기는 해. 은으로 만든 기구거든."
"심지어 은이라고요."
"영구적인 회복력 저해에는  만한게 없잖아."
"으윽, 대단하시네요. 유디라."

매달 피 안빼겠다고 그런걸 감당하다니.
난 그냥 포기하고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고통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이제와서 생리통같은건 그닥 아프지도 않고 조금 불쾌할 정도인데다 기분이 언짢아지는것 말고는 참을만해서.
저딴걸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후후…. 뭐, 자의로 받은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네?"
"아무것도 아냐. 역시 넌 등록같은거  하는게 좋겠네."
"……."

설마 그런것도 등록된 흡혈귀가 당하는 이것저것중에 하나라는 말인가.
나는 도리질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건, 절대, 안해요."


등록이든 시술이든.
시발, 괜히 들은것같다.
등록하면 고자되기라니, 너무 끔찍하잖아.


잠깐, 남자 흡혈귀면 정관당하나?
진짜 끔찍한 일이다.

한동안 눈을 감고 의미없이 숫자를 세다가, 몸을 일으켜서 이라를 내려다 본다.


이전엔 개 주둥이만 봐도 무서웠는데, 이라랑 같이 살면서 증세가 많이 나아졌다.
여전히 다른 개는 조금 무섭지만, 이전처럼 소리지르면서 도망 칠 정도는 아니게 되었달까. 잠깐씩 움찔거리긴 하지만.


그렇게 녀석을 보고있으니, 끔찍했던 생각이 지워지고 만다.
어릴적 내게 개는 사냥감을 사냥하는 사냥꾼, 그자체였다.
목줄조차 있지 않은 들개들이 사냥감처럼 나를 쫓아오던 그 모습은 내게 조금 악몽같은 기억이 되었으니까.
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 개가 맞나 싶기도 하고. 무슨 늑대 아니었을까? 존나게 크던데.

그러고보니 사냥꾼과 사냥감이라는건 나랑 이라도 비슷한 관계다.
나는 흡혈귀고, 이라는 흡혈귀를 사냥하던 종족이었으니. 음, 이상한 기분이네.

"그런데 유디라는 어째서 실버랑 같이 다니시는거에요?"
"별건 없어. 일단 그렇게 배정받았고, 내 목적이랑 그의 목적이 같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그가 맘에 들었거든."
"오."

맘에들다니, 유디라는 역시 실버랑 그렇고 그런 감정이 피는 그런 사이란걸까?
뭔가 흥미로운데. 흡혈귀와 인간의 로맨스라니.
어딘가 참고할 데도 있을  같고….

"후후훗, 궁금해?"
"음…. 조금?"


나는 뒷통수를 긁으며 작게 말했다.
유디라는 그런 나를 보다가 선글라스를 다시 내린뒤에 씨익 웃는다.


"안알려줄거야."
"엑. 기대하게 해놓고 뭔 소리에요."
"기대했어?"
"네."


좀 흥미롭잖아.
왠지 요즘 이런게 재밌더라.


"나중에 얘기해줄게, 이런건 이야기를 교환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어?"
"네? 무슨 뜻인가요?"
"너한테도 그런 이야기가 생겨야 내가 말할맘이 생긴단거지."
"음…. 진짜로 실버랑 그렇고 그런, 그런거에요?"
"글쎄?"

맛보기라도 들려줘, 괜히 궁금하게 하네?
그리고 나한테 그런이야기가 어떻게 생기냐.
설마 이거 유디라가 나 맥이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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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불타버린후에 잠시 실직자 비슷한게 되어버린 지혜는 가끔 우리집으로 올 정도가 됐다.
주로 가속 마력식을 와인트리에게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추가로 나를 감시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음….

그래도 이렇게 우리집에 오면서는 지혜가 하루살이의 호위를 받아가며 오기때문에 매번 둘의 얼굴을 볼  있어서 좋았다.
지혜는 인간일적의 친구이기도했고, 남자였던 나를 기억하고  좋아해줬던 여성이기도 하니까.
그리고 하루살이에겐 도움받은 일도 많았고. 내가 실수한것도 좀 많았다. 그래서 이런저런 보답이랄까, 하고싶은게 많았다.


"자, 선물이야."

그래서 준비한 물건들이다.
음, 이번에 크게 한탕 하기도 했고, 익숙해지기 위함도 있고, 보답이기도 했다.

그동안 나는 아빠 선물도 미처 챙겨드리질 못했다.
뭐, 집에 있어야 선물을 드릴것 아닌가.
그래서 갑자기 선물을 준다고 하면 내가 괜히 어색할것 같기도 하고, 좀 닭살돋는것도 같고 해서 뭔가 준다는 행동에 익숙해지는게 좋을것 같다는 생각에 아는 사람들한테 일단 선물을 돌려보기로 생각했다는것이 적당하다.

"이게 뭐야?"
"그냥….시계야. 능력에 도움도 될거고. 어때?"

내가 지혜에게 준것은 동전크기의 회중시계였다.


그녀가 가속의 마력식을 각성한 이후, 은근히 자신의 능력을 감당하기 어려워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뭐가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하다가 회중시계를 선물하게 됐다.
몸에 지니고 능력같은걸 쓰면 얼마나 가속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고마워, 네가 내 생각도  하네."
"헤헤…. 뭐, 그야 그렇지."

너 내 패밀리어잖아.
내가 생각을 안할수가 없어.
계속해서 위치 확인같은거 당할거라고 생각하면 아무데나 돌아다니기도 어렵다.


"나도 이런거 생각은 했어, 그런데 싼것중엔 맘에 드는게 없더라고…. 이거 얼마짜리야?"
"별로 안비싸, 이것도."


시계 자체는 10만원 정도다.
그런데 아빠가 가져다준 도구상자에서 꺼낸 아티팩트를 끼워서 개조한거라, 정확한 가격은 모르겠다.
음, 뭐라더라. 정신방호기능이 붙어있다고 들었는데, 패밀리어가 되면서 지혜는 정신방어기제가 조금 약화되기도 했으니, 이런게 있어서 나쁠건 없겠지.


그리고 하루살이는 몸에 지니는걸 줄 수가 없어서 뭘 줄까 생각하다가 카메라를 선물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라 폴라로이드 카메라.
그녀는 여전히 10년 전에 사는 여자다.
그래서 아직도 피쳐폰을 쓰는 정도.


디지털 기기같은거에 약하기도 하고, 쓰기 복잡한걸 줬다간 매일 설명서를 읽기도 힘들테지.
그래서 버튼 한번 누르면 바로 사진으로 인화되는 물건으로 골랐다.

"이건…. 사진기야?"
"응. 그거 누르기만하면 바로 사진으로 나오는거야. 어때?"
"좋아! 정말 고마워! 한번 찍어봐도 돼?"
"그래, 맘대로."

그녀가 우리 둘에게 사진기를 향하자, 적당히 웃음기를 만들어냈다.

-찰칵.


-위이잉.

사진기에서 폴라로이드가 한장 뽑혀나오고, 한야가 그것을 파닥거리며 웃었다.

"이런거 한번 해보고 싶었어."

역시 사진기는 정답이었던걸까, 그녀는 그림같은것에도 소질이 있으니 사진같은걸 찍는것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행히 정답이었나봐.

곧 사진을 확인한 우리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너 왜이렇게 어색하게 웃고있냐?"
"너는  감았는데?"
"프, 플래시가 터질줄은 몰랐지!"


지혜는 어색한 웃음을 지은 상태로 빳빳하게 앉아있었고, 나는 갑작스런 플래시에 시각테러를 당한지라 눈을 감아버린것이다.
나는 사진을 가리면서 말했다.

"다시찍어 다시!"
"이번엔 눈 감지 말고, 찍는다!"
 




그렇게 몇번이나 사진을 찍고는, 폴라로이드를 다쓰면 연락을 하라고 휴대폰 번호까지 사진의 뒷면에 써주었다.

떠들썩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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