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인연
얼척없는 방식으로 사념이 보내진 이후.
와인트리가 자꾸 이상한 사념을 보내싸는통에 영 기분이 찜찜하고 요상했다.
'엄마, 엄마에요?'
내가 낳지도 않은 녀석이 엄마타령하는게 아주 낯설고 불쾌한 것이 이유였다.
음…. 근데 내가 애를 낳을 수 있긴 한가?
생리같은거 하는걸보면 시발, 가능하기는 한것같은데.
개같다. 그리고 또 슬슬 그거 할때가 됐네.
"엄마 아냐, 미치겠네."
"갑자기 왜 그래?"
"얘가 저더러 엄마라는데요."
"푸핫, 그래? 재밌는걸."
연구자를 한대 때려줄까, 하다가 뭔가에 집중하는 연구자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
"뭔데요?"
"음…. 뇌파가 상당히 안정됐어. 좋은데?"
"그게 뭐가 좋아요?"
와인트리가 뇌파가 안정되든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내가 와인트리같은 다큰 남자의 엄마가 되는 수치심의 댓가가 겨우 이놈새끼의 뇌파 안정이면, 그딴거 필요없다고 외칠것이다.
"그동안 상당히 불안정한 뇌파반응때문에 녀석을 다루는데 꽤 애를 먹었거든. 그때 있었던 VP폭발도 그런 불안정의 연장선에 있던것 같고…."
"흠."
"그래서 그걸 안정시키려고 꽤 많은 약물을 쓰느라 힘들었지. 가주급은 처음이라 투약량도 모르고.
그렇다고 너무 많이 투약했으면 VP손실에 오염도까지 증가할테니까, 그럼 모처럼의 가주급 흡혈귀의 값을 제대로 못 받았을거야."
"그랬어요?"
제값을 못 받는건 큰일이지. 돈은 많을수록 좋은법, 벌수 있을때 최대한 벌어야하는 것이다.
그런 고충이 있는줄은 몰랐네. 내가 물어보진 않았으니까….
알아서 잘 할거라고 생각했지.
사실 뭐 아는게 있어야 물어보고 했을게 아닌가?
나는 사실 연구자가 뭘 연구하는지도 잘 모른다.
들어도 뭐 이해 못하겠고.
"그래서 지금 뇌파 안정은 상당히 좋은 징조야. 높아지던 오염률도 자체적으로 낮아지고있고, VP도 조금이지만 회복되었는걸?"
그 말에 나는 '물은 답을 알고있다'라는 유사과학을 떠올렸다.
물에 대고 좋은말을 해주면 얼음결정이 예뻐지고 나쁜말을 하면 얼음결정이 못생겨진다는 헛소리 따위였는데, 그게 무슨 과학자 같은 사람 입에서 나오니까 굉장히 이상하다.
음, 이 경우 물이 아니라 피이고, 결정같은게 아니라, 뇌파니, VP니 오염도니 하는 꽤나 친숙한 개념이었지만 말이다.
"이왕 이렇게된거, 수혈하는동안 좀 대화를 해보는게 어때?"
"끄응…."
나는 머리에 손을 대고 신음했다.
여러가지로 머리가 아팠으니까.
아까부터 계속해서 사념이 쏘아지고 있다.
사념이 무슨 머릿속에서 울리는 메가폰 비슷한것 같다.
대체 뭐때문에 이렇게 선명하게 전달이 된단 말인가, 혹시 이새끼 피가 나랑 패턴이 비슷해서?
그럴만도 하지, 얘가 처먹은 내 피가 몇리터였더라.
내가 사람이었으면 그대로 과다출혈로 죽었을 정도로 빨아먹었으니까….
'엄마, 어디있어요. 여긴 너무 어둡고 추워요. 혼자 두지 마세요, 제발….'
점점 강력해지는 사념이 머릿속을 휘젓는통에 생각을 못하겠다.
아까 내가 사념을 어떻게 보냈지? 최대한 감정을 실어서, 속으로 외치는듯이….
'그만 해!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그러는거야, 사내새끼가!'
'하, 하지만… 이곳은 너무 추운걸요. 저는 대체 어디 있는거죠?'
된것같다! 반응이 있어!
이런 식으로 보내는 거구나, 사념이란건.
나는 이렇게 또 흡혈귀의 능력을 하나 깨닫고 말았구나, 젠장.
그러고보니 이거 감각이 조금 사냥꾼의 증표랑 비슷한것도 같네, 역시 증표를 통한 통신도 흡혈귀의 그런 능력을 기반으로 만들어낸걸까?
녀석은 캡슐의 형태로 내가 잘 안아들고 있었다.
계속 들고 서있기엔 생각보다 무겁고 컸기때문에 다시 휠체어에 앉아서 무릎위에 올려둔 상태였다.
'어디 있기는, 내가 안고있잖아. 추워서 그래? 따뜻하게 해주면 좀 조용히 할거냐?'
나는 숄을 녀석이 든 캡슐에 덮고 꼭 끌어안아서 체온으로 캡슐을 뎁혔다. 효과는 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겉부분이 따뜻해지긴 한다.
'…….'
녀석의 사념이 더이상 쏘아지지 않는것을 보니까 제대로 한 모양이지.
이제 좀 머리를 쉴 수 있겠네.
나 어쩐지 이거 알 품는 어미새 같아.
--------------
"그래서 팔자에도 없는 애 돌보기 하고있다."
"뭐, 이딴 상태에서도 의식을 잡고 있단 말이냐?"
"그러니까. 진짜 말도 안돼."
난 휠체어에 앉아서 와인트리가 들어있는 캡슐을 안은채 세찬이가 주는 미음을 삼키고 있었다.
"욱, 맛없어…."
정말 맛이 없다.
이래봬도 예민해진 오감엔 미각역시 포함되어있는데, 그런 미각으로 이딴걸 먹고 있다니. 너무나도 고역스럽다.
"회복 가속제라잖냐. 적당히 먹어."
"끄윽, 이런거 안먹어도 낫기는 할텐데…."
몰랐는데, 이 맛없는 미음은 회복가속제였다. 지혜의 마력식으로 만들어낸 프로토타입 약품.
그것의 테스트로, 하필 내가 사용되는것이다.
맛은 좀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데.
그래도 세찬이가 이렇게 먹여주는 경험도 솔직히 언제 해보겠냐.
몇달전엔 내 다리에 구멍내고 틈만 나면 고통을 주려고 하던 녀석인데, 이젠 내 식사겸 치료도 돕고 굉장히 기특해 졌다고 할까.
"아."
"……."
입만 벌려도 숟가락이 들어온다.
이건 꽤나 편하네.
다 나으면 감히 말도 없이 아이기스를 발동시키려고 겁을 준것에 대한 복수로 한대정도 때려주려고 했는데, 그냥 봐줄까 싶다.
"요즘 나한테 뭘 시키는데 너무 거리낌 없어진것 같지 않나?"
"어쩔건데."
"하아, 됐다."
녀석이 한숨을 쉬는꼴이 뭔가 체념한 것 같은 모양새라 괜히 웃겼다.
지가 뭘 체념한건지 몰라도 말야.
"싫으면 니가 이거 안고 있어. 내가 알아서 먹게."
"그래. 그게 낫겠네."
녀석으로써도 날 계속 살펴보면서 입을 벌릴때마다 숟가락을 떠서 미음을 먹이는것보단 그냥 와인트리 캡슐을 들고있는편이 나을거라 생각했는지 순순히 한손으로 와인트리를 받아갔다.
녀석의 캡슐과 내 복부에 이어진 호스가 그리 길지는 않아서 멀리 떨어지게 할수는 없었다. 그래서 세찬인 내 옆에 딱 붙어서서 와인트리를 안았고, 미음을 건네받은 나는 직접 스푼을 떠서 먹고 있었다.
"역시 맛없어."
세찬이가 먹여줄땐 걔가 싫어하는 반응이라도 볼 수 있어서 좀 먹을만 했는데, 직접 떠먹자니 재미도 없고 맛도 없는게 상당히 고문이다.
그래도 이게 효과가 있다면 지혜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 일단 계속 먹어보기로 해야지….
나는 저기 조명 아래서 놀고있는 이라와 설화를 구경하며 딱풀을 녹여만든 괴랄한 맛의 미음의 맛을 잊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설화는 이라의 주변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장난을 쳤고, 이라는 그런 설화를 쫓아다니며 술래잡기를 하는 중이었다. 녀석은 그 또래아이답게 달리기를 좋아하니까, 평소 목숨을 건 달리기는 좀 했지만 저렇게 즐겁게 뛰는건 보지를 못했네.
"이라가 설화랑 사이가 좋네."
"그렇게 말해도 난 걔 안보여."
"아참."
세찬이는 설화를 못 보지.
음, 그건 그렇네, 나만 볼 수 있는 광경이라는게 또 아쉽다. 그 별이 가득히 빛나는 밤하늘도, 지금 이라랑 놀고있는 설화도. 세찬이는 나랑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긴 했지만 여러가지가 나와 달랐다.
직업, 사고방식, 능력, 신체조건, 종족에 무려 성별까지.
그런데도 이 요상한 관계와 상황이 어쩐지 편안하게 느껴진다.
익숙하기도 하고, 어쩌면…. 즐겁기도하다.
나는 미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흐음, 진짜 이상해."
"뭐가?"
"어느순간, 이런걸 일상이라고 생각하고있는 내가 진짜 이상해."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와인트리를 안고있는 세찬이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얼핏, 아기를 안고있는 아빠처럼 보인다.
"풉, 왠지 아빠같다 너."
"뭐? 개소리 마. 그렇게 따지면 넌?"
"아니, 그건 금기어잖아."
따지지 마. 그냥 네가 아빠같은 분위기를 낸거야.
우린 그냥 친구사이, 선을 넘는 발언이야 그건.
그래서 세찬이는 선을 그었다.
"됐어, 난 남자한테 관심도 없고, 흡혈귀랑 사귈 생각도 없어."
녀석이 인상을쓰면서 눈을 감은채로 말했다.
그런데 저건 좀 웃기는 말이네.
그럼 난 완벽히 후보에서 탈락인가? 안심이라고할지, 약간 허무감이 느껴진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근데 너 인간이랑 사귈 생각은 있었구나."
"당연하지, 새꺄. 나 고등학교때 잊었냐?"
그러네, 여자한테 고백도 한번 하긴 했구나. 내가 쌉조져버렸지만.
음…….
나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래서 누구랑 사귀려고? 사냥하면서?"
그거 좀 위험하지 않나, 사냥꾼이 일반인이랑 연애같은걸 하면 제대로 유지될리가 없다.
그런 의미를 깨달은건지, 세찬이가 대답했다.
"...은퇴하면 찾으려고 했지. 평범한 여자로 말야. 나도 네가 그렇게 말하던 일상이란게 뭔지도 궁금했고."
"흠, 감상적인데? 내가 말하던 일상이 궁금했다고?"
적당한 직업 구해서 적당한 여성과 소개팅이나 맞선으로보고, 적당히 연애하고, 적당히 월급받고, 결혼하고나서 가정을 이루고…. 그런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삶. 그런데 그런 삶이란게 오히려 가지기 어려운 법이지, 그래서 이상향으론 더할나위 없다.
그런데 그런 재미없지만 안정적인 삶은 세찬이랑 안어울릴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다.
의외로 소시민적인 부분이 있었구나 세찬이도?
"그냥 요 몇년 부럽더라고, 그런게."
"너도 그랬다고?"
하긴, 녀석의 일상은 평범함이랑은 좀 거리가 있었을테니까.
음, 12살때도 그랬고, 그후로도 나한테 많이 의지하는 감은 있었다.
나도 녀석에게는 꽤나 도움을 받았던것 같고. 음, 주로 장난 대상이 되어주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런데 뭔가 바뀌었다.
이젠 내 일상은 이런게 되었으니까.
"근데 이제 일상이 다 뭐냐. 쉬면 그게 일상이지."
"그건 동감이다."
진짜 쉴틈이 없었어 정말.
몸 편한게 최고지.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안해지는 법이다.
세찬이가 흘러내리는 와인트리를 다시 잡아 올리며 말했다. 저거 보기보다 무거우니까 말이지.
"그래서, 이런 일상은 어때?"
"뭐, 나쁘진 않아. 나쁘진 않은데…."
나는 한숨을 쉬면서 미음을 삼켰다.
망가져버린 일상 속에서도 인연이 또 이어지고, 내게서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의 농도를 점차 옅게 만들고 있다.
만약 내가 이제와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아무렇지 않게 원래 하던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진짜 일상이 맞을까?
그냥 일상을 연기하는 하나의 인형이 될것같은데. 마치, 친구들 머릿속에 심어둔 '릴리'라는 캐릭터처럼, 그들의 기억속의 '석주'가 되는 것을 연기할 뿐이 아닐까?
그래서 난 온전히 과거로 돌아갈 수가 있긴 한걸까?
조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움을 달래기 위해 미음 한스푼.
맛이 없는게 고민을 덜어내는덴 도움이 되었다.
맛에 신경을 쓰느라 고민따위엔 신경을쓰지 않게 되니까.
결국 다 먹는덴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만큼 고민을 깊이 했단걸까.
설화가 이라에게 웃음지었다.
이라도 설화를 보고 웃었다.
그 모습이 뭔가 나랑 세찬이가 놀던때를 떠올리게 하는 편안함 같은게 묻어져 나오는 듯 했다.
"쟤들도 청춘인가?"
"뭔 소리야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