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인연
사범님을 오랜만에 뵌것은 반가운일이었다.
비록 서로 몸땡이가 멀쩡한 상태는 아니긴 했지만, 악수정도는 할 수가 있었다.
팔 하나 없는데도 조금 긁혔다고 표현하는 허세란, 예전에 전신부상으로 입원하셨을때도 살짝 굴렀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다 늙어서 그렇게 구른거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뭐, 도장에 안가서 좋기는 했다.
나는 옛날 생각에 웃음이 비집어나오는걸 참을수가 없었다.
"푸흡, 허세 부리시는걸 보면 살만하신가보네요."
사범님의 주름진 얼굴이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웃음엔 역시 전염성이 있다니까.
"흠, 그래. 아까까지 네 이야기를 좀 하던 중이었다. 그, 지혜라는 애도."
"그래요? 지혜는 어땠어요?"
"아주 엉망이지. 네 11살때보다 못해. 2주만에 그만뒀다."
"아하하. 걔는 여자애잖아요."
평생에 운동한번 제대로 안해본 여자애가 아무리 사범님이 가르친다고해서 좋아질리가 없었다.
게다가 사범님의 가르침 방식은 조금 거칠기도 하고.
2주면 그래도 꽤나 버틴 셈이다.
"내가 가르쳐준 묘리는 잘 기억하고 있느냐? 내 비록 너를 계속 가르칠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11살에 파란띠 정도면 꽤나 소질이 있었던 거다."
"하하하…."
소질은 무슨, 맨날 형한테 두드려 맞았는데.
그리고 묘리가 뭔지 기억도 안나.
기억분리때문인가?
어찌어찌 정권지르기 정도는 기억하지만.
"그러고보니 저 다닐때 그 형은 어떻게 됐나요?"
"아, 서민이 말이냐? 뭐…. 죽었다."
"예?"
"한 일년 됐다. 흠, 나름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가버리다니. 세상일 알 수가 없는 법이구나. 사냥 중에 죽었다고 하더구나."
사범님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이야기했지만, 내게 다가온 사실은 가볍지가 않았다.
분리되었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옴에 따라서, 같이 도장을 다니던 서민이형의 모습 역시 희미하게 떠오르고 있었던 차에 들은 부고소식은 가슴에 무언가 무거운 쇳덩이가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시체는 찾았다는 거지. 무덤도 있다. 가볼테냐?"
"그런가요……. 나중에 한번 가요, 그러면."
박서민, 어릴때 가끔 문방구 앞에서 같이 게임을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사실 난 그때 그다지 게임을 못해서 동전만 축내곤 했지만, 그래도 형은 같이하는게 재밌는 거라면서 계속 동전을 쌓아주곤 했다.
날 보면 자기 동생이 떠오른다고 했던가?
그의 시원하고 허탈하게 웃는 모습을 더이상 볼 수가 없다니, 안타까움에 어쩔줄 모르겠다.
아직 내가 알고있는 사람들중에 죽은 사람은 없어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익숙하지가 않다.
어머니의 죽음 같은건 너무 예전이라 기억도 안나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어색한 시간이 잠시간 이어졌다.
"아, '권황제'님, 의수 조정 끝났어요. 장착은 지금 바로?"
의사가 컨테이너 창문을 열며 외쳤다.
"아. 그런가? 바로 가도록하지.
"네. 그럼 준비해둘게요. 들어오세요."
"그래, 그래."
일련의 대화내용속에, 나는 굉장히 이상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미묘한 표정으로 웃음을 삼키느라 애쓰는 중이었다.
사범님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기위해 옆의 세찬이에게 숙이라는 제스쳐를 보냈다.
내 표정을 보고는 알만하다는 듯이 허리를 굽혀 귀를 조금 내리는 세찬이에게 소근거렸다.
그 와중에도 웃음을 참느라 애쓰는 중이었다.
"궈, 권황이라구?"
"그래, 너도 알겠지만, 이름이 황 제자, 권자이시잖냐. 나도 웃기는 별명이라 생각해. 헌터네임을 자기 본명에서 따오는것도 정상은 아니고."
"푸흐흡…."
"시발. 귀에대고 침튀기지 마."
세찬이가 기겁하며 귀를 닦아내며 나를 쏘아보는 모습에 나는 더욱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름이 황제권이라서 권황이래. 하하하!
정말 '권황제'잖아?
"하하하하핫!!"
"내가 볼땐 너도 웃을일은 아냐."
"응?"
"네 별명도 상당히 얼빠진게 나올가능성이 높다고. 저분은 자기가 직접 지은거라 별 생각 없으시지만."
역시 직접 지은 별명이란건가?
옛날사람아니랄까봐.
왜 옛날 사람들은 자기 별명에 '황제', '지존', '군림'같은 무협지에 나올법한 단어를 넣는걸까?
게임 닉네임도 그렇던데.
그러고보니 아빠는 또 왜 검은 사신이야?
그런 별명이나 보다가 내 별명이라니, 무슨 이름이든 그것들보단 낫겠지 싶다.
"에이. 그건 아닐껄?"
나는 억지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잠깐. 조금 불안해지는데, 설마?
남들이 별명짓기전에 미리 선수를 쳐야할까. 그런데 내 별명 내가 짓는것도 어떤가 싶은데. 그거 좀 자의식 과잉같고 괜히 부끄럽다.
게임 캐릭터 닉네임도 대충 짓는데, 나 자신의 별명을 어떻게 짓냐?
그냥 릴리로 하면 안돼? 그것도 이미 충분히 부끄러운데.
그런 시덥잖은 생각을 하다보니 박서민형의 죽음을 알게돼서 우중충한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다.
역시 산 사람은 살아야하는거지. 안타깝긴 하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릴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속으로 불안감과 고민을 삼키고있자, 컨테이너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던 아빠에게 세찬이가 물었다.
"그런데 늑대인간이 사냥꾼의 시조라는건 처음 듣네요."
"그야 물어보지 않았잖아. 그동안 늑대인간이란건 있지도 않았고."
"그건 그렇네요."
아빠랑 세찬이가 같이 사냥을 다닌 기간은 약 8년, 그치만 세상에서 사라졌던 늑대인간이 다시 나타난데는 겨우 두세달 정도다.
물어봤을리가 없나.
"원래 흡혈귀는 인간이 사냥할 수 없는 존재였어.
그래서 비슷한 격을 지닌 존재인 늑대인간이 흡혈귀나 괴물들을 사냥했지.
뭐, 그게 사냥꾼의 시초야."
간단한 설명을 듣자, 세찬이가 이상하단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멸종한거죠?"
"결국 흡혈귀한테 진거지 뭐."
아빠도 그냥 그정도로만 알고있는 지식이라 따로 설명할 수 있는게 없다고 한다.
음, 그래도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
그런데 이라가 사냥꾼이라니, 쉽사리 연상되질 않는다.
이 꼬맹이가 흡혈귀를 죽이는 종족이었다고?
오라클은 그런 종족을 대체 왜 다시 만들어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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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깨와 목을 돌려보며 몸상태를 점검했다. 우드득, 두두두둑, 하는소리가 무슨 뼈가 부러지는것 같이 크게 났지만, 오히려 시원한 감각이다.
"으음, 괜찮아졌어요. 확실히 효과가 있네요."
"그래? 다행이네."
내가 수혈받는것은 와인트리의 피였다.
'저를 버리지 마세요, 저를 두고 가지 마세요.'
"으음….."
머리가 울리는 감각에 조금 신음했다.
또 이러네.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와인트리야.
그래, 전에 병원에서 들은 환청은 와인트리가 내게 보낸 텔레파시 같은거였다.
이러니까 내가 나쁜놈같잖아. 내 피를 빨고 쓸데없이 나에게 속한건 너의 의지아니었니.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건데.
"왜 그래? 머리아파?"
"아뇨. 자꾸 이놈이 사념을 보내싸서."
와인트리가 들어간 캡슐을 들고 이야기했다.
현재 시설이 임시시설이라 제대로 된 구속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고, 녀석을 담궈놓을 마약성 진통제들도 충분할정도로 구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를 완전히 분해시켜놓고 회복을 제한하며 정수만 취하고 있기는 한데, 이거 괜찮은가 싶기도하다.
이 캡슐, 말그대로 피주머니가 아닌가.
그것도 의식을 지닌.
마치 에고-블러드백(ego-blood bag)이다.
캡슐과 나를 연결한 호스같은걸 꽂은 후부터 더욱 선명한 사념이 전해진다고 할까.
이 개새끼, 얘 때문에 세찬이 앞에서 지랄하고, 그 알렉스한테 휘말렸잖아.
얘 때문에 부끄러운일을 너무 많이 당했어.
몸 되돌려놓고 때리는게 벌이될까, 아니면 이대로 냅두는게 벌이 될까.
"야, 사념좀 그만 보내라고."
'여긴 너무 어두워요, 무슨일이 일어난거죠?'
"아. 진짜."
뭐, 무섭긴 하겠지. 이해는 하는데, 그렇다고 자꾸 머리를 울리는 감각이 달가울리가 없다.
그냥 좀 조용히 해줬으면 하는데.
"조용히좀 하라니까. 말 안들려?"
'혼자는 싫어요, 제발….'
"…으으……."
자꾸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쏘아대지 말라고.
죄책감자극인가? 귀가 없어서 그런가, 내가 하는말도 듣지 못하는것 같고. 나도 사념을 보내야 되는건가 싶은데 그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각자 할말만 하는 일방통행이다.
그리고 분명 제정신일땐 꽤나 어른스럽게 미친놈인줄 알았는데, 지금 하는 말들은 애들이나 할법한 투정으로 들린다. 그 놀이공원에서 수백명에게 몹쓸짓을 한 흡혈귀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할까.
"얘 지능이 퇴화한거같아요."
"뭐, 그동안 약을 너무 많이 넣어서 그런거 아닐까? 나름 조절한다고 하긴 했는데, 가주급은 처음이라 조금 과했을지도 모르겠네."
"아, 그러셔요."
미치겠네.
나는 캡슐에서 보내는 사념을 정신 한켠에 던져버리곤 연구자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기 앞에다 내놓은건 뭐에요?"
ㄷ자로 배치된 컨테이너 중앙, 발전기 몇대와 기계같은게 어지럽게 연결된 철제 보관함을 말하는것이다.
"아, 저거? 그 흡혈귀가 썼다는 연검이랑 혈검을 분석중이었어. 둘이 구성성분이 비슷한 부분이 있더라고? 흥미롭지않아?"
"음, 그런가요? 조금 신기하긴하네요."
철이랑 피랑 구성성분이 비슷하다고 그러면 신기한 일이지.
음, 피로 철을 만들수도 있는걸까. 피에도 철분같은게 있다곤 하니까.
근데 철분이 그 철 맞나?
"한번 보겠어? 흡혈귀가 보면 뭔가 다른게 있지 않을까."
"봐도 잘 모를걸요. 싸우면서 많이 봤는데도 몰랐는데."
"그래?"
나는 캡슐을 안은채로 휠체어에서 일어섰다.
조금 삐걱거리긴 하지만, 와인트리의 피로 회복되는중이라서 걷는것 정도는 무리없이 가능한것 같다.
음, 와인트리 그지같은 사념만 아니면 적당히 체력회복용으로는 괜찮은것도 같은데.
나 대신 약물 부작용을 받아서 피를 만들어내는 정수기 비슷한 역할로 쓸수 있지 않을까?
20억짜리 정수기라니. 너무 비싼가.
"아차, 그녀석 장기랑 육체같은거 정산금은 세찬이 통장으로 보내놨어. 물론 수수료는 한 5퍼센트정도 떼었는데 괜찮지?"
"엑, 수수료 떼나요?"
"연구할 시간 할애해서 팔아주는데, 그정도는 용돈으로 해주지 않을래?"
생각해보니 5퍼센트 정도면 나쁘지 않구나 싶다.
음, 내가 직접 발품팔러 다닌것도 아니고, 해체한것도 내가 아니라 의사랑 연구자였으니까. 그리고 이 사람들도 사생활이 있을텐데, 돈은 벌어야겠지.
"그래요. 그럼. 그래서 얼마나 나왔는데요?"
"요즘 가주급 공급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상당한 돈이 됐어. 석주씨. 준비됐어?"
"뭘 준비까지야……."
대체 얼마에 팔았길래 뜸을 들이시나.
20억도 나에겐 큰돈인데, 그정도 벌었으려나?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크흠, 얼만데요?"
연구자가 의기양양하게 조금 덥수룩해진 턱수염을 바스락바스락 긁으며 말했다.
"42억이야."
"헉…!"
기존 예상액의 두배…!
나는 와인트리를 껴안은채 속으로 외쳤다.
'널 절대 버리지 않을거야….'
'어, 엄마?'
"뭐야."
나 방금 얘한테 사념 보낸거같은데.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