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인연
"여기야?"
"그래."
도착한곳은 한 넓직한 주차장.
뭐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넓은 아스팔트바닥에 흰색선 그어서 자동차 대라고 해둔 단순한 주차장이었다.
뭐가 있을것 같지는 않은데.
"지금은 임시로 쓰는곳이야."
"음…. 그래?"
주차장에서 뭘 한다는건지 모르겠네. 내 표정이 미묘한것을 본건지, 세찬이가 양산을 이라에게 건네고, 내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허공을 몇번 치더니 말했다.
"접니다. 데려왔어요."
옛날이라면 정신이 나갔나, 싶었겠지만 나는 이제는 그냥 또 뭔가 일어나려나 싶었다.
심드렁하게 보고있자니, 허공에 검은색 줄이 생겨나는 듯 하더니, 공간이 우그러지며 열렸다.
"뭐야. 이런데다 결계를 만들어놨어?"
결계가 열리는건 언제 보더라도 신기하다니까.
대체 무슨 원리로 가능한건지.
세찬이가 휠체어를 밀어 결계 내부로 들어가자, 햇빛이 구현되지 않은것인지 상당히 어두웠다.
주차장에는 밝은 빛을 쏘아내는 커다란 조명이 몇개쯤 건물을 밝히고 있었을뿐.
나는 사실 조명이 없더라도 형태를 파악하는데 문제는 없었다만.
일단은 커다란 트럭이 보인다.
엄청나게 높고, 커다란 트럭. 대규모 공사장에서나 볼 법한 그런 트럭이다.
로봇으로 변신할것같이 생겼다.
그래, 예전에 아빠가 몰던 대형트럭이다.
대형트럭기사라는 직업은 위장이었을지 몰라도, 트럭을 소유하고 있다는것 자체는 사실이었으니까.
트럭 뒷편에선 문이 달린 컨테이너가 ㄷ자로 설치되어 있었고, 그 중앙엔 커다란 철제 보관함이 여러 기기와 전선에 연결된채 있었다.
무슨 남극탐험기지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여기선 양산 더이상 들지 않아도 돼."
"네."
세찬이의 말에 이라가 들고있던 양산을 내렸다.
양산을 3단으로 접어서 돌돌 말아 내게 쥐어준 이라에게 수고했다며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깨 전체가 뻐근하게 힘이 들지 않아서 팔이 올라가지 않아 난처해하자, 이라가 고개를 숙였다.
나도 그렇지만, 얘도 머리 쓰다듬어지는거 참 좋아해.
"그런데 대체 왜 이런데다 자리를 잡았어?"
"저것 때문에."
"응?"
세찬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나는 경악했다.
"뭐야저거, 저걸 옮겨온거야?"
"그럼 저걸 아무데나 냅두냐."
붉은 거인의 잔해.
이리저리 옮기기 쉽게 토막쳐놓기는 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붉은 거인의 부분부분이었다.
"저건 얼마나 해?"
"글쎄. 나도 저런건 처음이라."
세찬이가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왔구나, 석주씨. 기다리고 있었다고."
"연구자씨, 안녕하세요. 여기는?"
"임시 거점이지. 일단은 중요한 것만 다 준비해뒀어."
"그렇군요."
나는 고갤 끄덕거렸다.
그런데 연구자의 등 뒤에는 누군지 모를 여자아이가 연구자의 등 뒤에 숨은채로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조금 창백한 피부에 흘러내린 흑발이 눈을 온전히 가릴정도로만 자라있었다. 깔끔히 정돈되어 보이는 인상이 썩 귀여운 머리모양이구나 싶다. 머릿결도 하늘하늘하게 가벼워보이고.
"그런데 걔는 누구에요? 딸인가요?"
"딸? 석주씨, 그런걸 묻기전에 일단 결혼을 했냐고 물어봐주지 않겠어?"
"윽, 죄송합니다아…."
이런 실례를…. 얼핏 20대 후반처럼 보여서 좀 결혼을 빨리 했다면 저런 딸이 있을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해서 그냥 한 말이었는데.
"그런데 딸이라니? 여긴 너 말고는 여자가 없는데?"
"예?"
나는 숨을 삼켰다.
그러나 이라가 연구자의 등 뒤에 숨은 그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다.
"어, 서라다."
"응?"
"응?"
이라의 말에 의문을 표한것은 연구자와 한세찬이었다. 거의 동시에 이라를 쳐다보는 눈길은 서로 달랐다.
세찬이의 경우엔 호기심, 연구자의 경우에는 경악이라고 할까.
"저기, 그게 무슨뜻이니?"
연구자가 조금 사색이 된 표정으로 이라에게 묻는다.
"아저씨한테 업혀있는 애 이름이요. 유서라인데, 병원에서 봤거든요."
"뭐라고?"
연구자는 기겁하며 어깨를 덜덜덜 떨어냈다.
"서라…?"
연구자의 등 뒤에 숨어있던 여자애가 고개를 저으며 입모양을 크게 강조하며 뻐끔거렸다.
'유, 설, 화.'
"이라야, 유 '설화'라고 하는것 같은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설화.
그래, 설화가 맞다는 뜻이지?
"아, 그런가?"
이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
"설화는 누나를 무서워했어요. 그래서 계속 피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왜 누나 앞에 나온걸까요?"
"날 피해?"
저 꼬마애가 날 피할 이유가 어딨다고, 내가 애들한테 얼마나 무해한데.
"저기, 김석주씨. 이야기도중에 미안한데, 그 서라인지 설화인지 하는애가 지금 내 어깨 위에 매달려 있단 말이지?"
"네. 그런데요?"
설화는 여전히도 연구자의 어깨에 매달려서 나를 지켜보다가, 연구자가 기겁을하며 어깨를 털어내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려와서 내게 다가왔다.
여전히 기괴한 댄스를 추는 연구자는 무시한채 계속해서 내게 다가오는 여자아이의 모습은조금 싸늘한 인상을 주는것도 같다.
상황에 달관한 느낌이랄까?
"……."
연구자의 등에서 내려와 그녀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겉모습은 약 9~10살정도 되어보이는 작은 어린 아이였다.
머리엔 빨간 머리띠를 다소곳하게 꽂아두고 있었고, 옷은 하얀색 원피스.
검은 머릿결은 누군가 단정하게 잘라준것처럼 잘 정돈되어있었고, 피부는 가까이서 보아도 여전히도 창백했다. 내 피부보다 창백하다니, 핏기가 하나도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려나.
어쩐지 이상한 기운이 자꾸만 느껴진다.
갑작스럽게 여자아이의 외견에 어울리지 않는 위화감같은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목 부근에 선명하게 새겨진 밧줄자국, 눈을 가리는 앞머리 너머로 보이는 검은 동공….
음, 설마ㅡ.
"하하, 이라야. 네가 전에 본적이 있다고?"
"네, 쟤가 비오던 병원에서 저한테 장난칠때 엄청 놀랬었어요."
기괴한 춤을 멈춘 연구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석주씨. 아마도 걔가 관리자일거야."
여자아이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입모양으로 내게 말했다.
'안. 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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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어쩐지 요 며칠 어깨가 뻐근 하더라니…."
연구자가 어깨를 풀며 이야기했다.
나는 눈을 감은채 한숨을 쉬고 있었고.
"난 이런 꼬맹이를 무서워하고 있었던 건가…."
"누누히 말했잖냐, 네가 더한놈이라고."
"정말이네."
그런데 설화는 나와 이라의 눈에만 보이는 듯 하다.
설화는 어쩐지 실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 반응이 시원찮아서 그런걸까, 솔직히 그녀가 그 흡혈귀랑 싸우기 전에 내 눈에 보였다면 아마 설화가 바랐을 반응을 해줄 수 있지 않았으려나, 막 소리를 지른다던가. 바닥을 구르며 지랄 발광을 한다던가.
그런데 지금은 그럴 기력도 없고 무섭지도 않다.
"이런 어린애가 병원 전체를 관리했단 말인가요? 아동학대야."
"그건 지박령이야, 석주씨. 아동이 아니라."
그러나 설화는 그 의견에 불만을 품은 듯 볼을 부풀렸다.
어린애 답다고 할까, 귀여운 모습이긴한데 생동감은 전혀 없었다.
알고나서 보니까 물리법칙이란것도 별로 적용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움직임에 관성이란게 없는 느낌이랄까. 마치 인형처럼 어색한 움직임이다.
"지박령까지 다루는건가요, 사냥꾼은?"
"그래. 도움이 되니까. 일종의 계약을 맺는거야. 우리를 돕는 대신에, 그들은 흡혈귀의 피를 얻지. 피는 좋은 영적 제물이 되거든."
"사람 피는 안 쓰고요?"
"사람피도 쓸수야 있긴하지. 단지 가성비가 별로."
양이 너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라고 덧붙인 연구자였다.
흡혈귀의 피를 다 어디다 쓰나 했더니 그것도 나름대로의 유지비였다.
"비현실적인 가사도우미네요."
설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 지켜본 결과로 보건대, 그녀는 말을 하지 못하는 듯 했다.
목에 난 밧줄 자국때문일까? 목을 졸려 죽은 귀신이기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건가?
"그런데 영체를 볼 수 있는 흡혈귀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늑대인간이 영체를 볼 수 있다는건 처음 알았군."
"그야, 사냥꾼의 시조는 늑대인간이었으니까 말이다."
아빠가 컨테이어너에서 문을 열고나왔다.
"아빠."
난 반가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찾아와주지 않아서 조금 불만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런 시설을 만들고 있었을거라고 생각하니까 별로 불만 가질것도 없었구나 싶어졌다.
그런데 문에서 나온것은 아빠만이 아니었다.
아빠의 등 뒤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이 하나 튀어나왔다.
"이런, 정말 딸이 되어버렸잖나. 김중구. 정말 네 아내를 닮았구만."
"하하. 그래요. 닮았죠."
"어?"
확실히 내 기억속에 있는 사람이기는 하다.
"관장님, 진짜 오랜만이네요!"
어릴적 다니던 태권도장 관장님이었다.
파란띠밖에 못따고 관장님이 그 시골을 떠나셔서 그 후로도 계속 파란띠였다.
그런데 그때랑 달라진것은, 한 쪽 소매가 펄럭거리고 있었다는 점일까.
"그래, 오랜만이구나. 석주야."
"그 팔은…? 어쩌다가 그렇게 되신거에요?"
"뭐, 사냥하다가 조금 긁혔단다. 흐하하하!"
팔한짝 날아간게 조금 긁힌거면, 다치면 큰일나시겠어요. 사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