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수확제
나는 시체와 잔해들 가운데에 피에 젖은 옥좌에 앉아 다릴 꼰채 앉아있었다.
"어, 어째서…."
완벽히 상하로 절단된 여성이 바닥을 기며 쥐어짜내듯 말한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손짓한다. 그러자 다시 세로로 주욱 찢어지며 완전히 목숨이 끊어지고 만다.
그리고 침묵, 이제 현장에는 지릿지릿할 정도의 혈향만이 남았다.
익숙한 감각, 그래. 꿀 때가 됐지.
이건 꿈이다.
역시, 내 가설이 맞다니까. 이거 주마등이야.
난 흥미 없다는 듯이 턱을 괴고 있다가, 문득 누군가가 저에게 이야기하는것이다.
"여왕이시여, 준비가 되셨나이까?"
"그래. 그대는 날 만족시켜줄 수 있나?"
"최소한 실망은 하지 않으실겁니다."
제멋대로의 대화, 말하는자가 누군지는 궁금했지만 애써 시선을 돌려보려해도 이것은 릴리스의 기억.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내 기억과는 달리, 눈동자 하나 내 의지로 움직일 수가 없었기에.
그저 내 뒷통수에서 말하는 목소리 또한 여성의 것임을 생각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글쎄, 이천년간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하셨군요."
웃음기가 묻어있는것 같은 말투, 나는 거기서 기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옥좌 뒷편에서 뻗어나온 팔.
얼마나 마른것인지, 시야끝에 걸리는 옷자락너머로 느껴지는 팔의 두께가 상당히 얇다.
그 팔이 내게 닿으며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시리고 서늘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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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뜨자마자 엄습하는 고통에 나는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아야야야….."
시간은 오래 지나지 않은걸까, 그렇다면 그건 다행이네. 이번 한정가챠까지 놓쳤으면 진짜 게임 접었을테니까.
"여기는…."
실버의 집 인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내려다보자, 온몸이 미이라마냥 붕대로 감싸여있고, 수혈을 받는 중이었는지, 팔뚝부터 이어진 수혈링거가 주욱 늘어서있다.
아니, 그래도 사람을 관 속에다 눕혀두는건 좀 어떤가 싶은데, 아무리 이제는 내 침대가 관이라지만 말이야. 이미 죽은사람 취급당하는것 같아서 기분이 오묘하다.
"끄으윽…!"
몸을 일으키려했지만, 차마 허리를 굽힐수가 없다.
복부도, 내장도, 등근육도, 척추도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중이라.
"하아,하아…."
고통은 충분한것 같은데 어쩐지 이번엔 기절도 쉽지않네.
그렇게 조금 신음을 흘리고 있었더니, 지혜가 문을 살짝 열어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소리가 나서 들어와봤어. 괜찮아?"
"아. 지혜구나."
내가 겨우 눈동자만 굴려서 지혜와 눈을 맞추며 들어오라고 눈짓하자, 지혜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내게 다가왔다.
"에휴, 일어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이렇게 다쳐서 온거야?"
"그러게…. 그런데 그 꽃은 뭐야?"
"음, 병문안 선물…?"
지혜의 옆구리에는 백합이 몇송이 포장되어서 들려져 있었다.
음, 꽃이라. 병문안선물같은거 받아본적이 있어야 말이지. 먹을걸로 줬으면 좋았을것을….
지혜는 어디 놓을데가 없나, 하고 방을 둘러보다가 그냥 내 옆에 살포시 놓아주었다.
음, 백합이라.
"네 이름이랑 맞는걸로 사왔어. 그, 백합이란 뜻 맞지?"
"아, 그렇구나. 응…. 고마워."
릴리, 음. 그게 백합을 뜻한다는 사실은 나도 뒤늦게서야 알게되었다.
급하게 지어낸 이름인데 그런 뜻이 또 있을 줄이야.
뭐, 내 생각해서 준다는데 거절하기도 좀 그렇다. 애초에 거절할 기력도, 필요도 없고.
꽃향기는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좀 낫다.
기억속에, 그리고 내 몸에 조금 남아있던 세찬이의 체취를 덮는 기분이라고 할까….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향기에 집중하던 그때 드는 생각.
…잠깐만.
"관 속에다 이런 꽃 넣어주는거 보통은 좀 이상하지…?"
"관속에서 자는게 더 이상하지 않아?"
시신을 관속에서 꽃으로 장식하는 장면이 떠올라서 소름이 돋아버렸다.
특히 백합은 그런 쪽으로 훌륭한 꽃 아닌가?
지혜가 혹시 나 맥이나.
젠장, 그래도 향은 좋긴하네….
"끄응…. 다른 사람들은?"
"다들 밖에서 뭘 좀 하나봐. 세찬씨는 있는데. 불러줄까?"
"으응. 음 아니. 됐어."
그냥 잠이나 잘란다.
세찬이 본다고해도 좋을거 없을것 같고.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지지.
지금은 걔를 생각만해도 괜히 조금 부끄러워지는 것 같다.
푹 쉬고 며칠정도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관에 베게와 이불같은걸 쌓아서 몸을 조금 일으켜서 누워있었다.
"수혈 받는중이니까 밥은 필요없잖아."
"그래도 의사가 이거는 먹어야 한대요."
"하으…. 싫어…. 너무 맛없어…. 김치 같은거 먹고싶은데…."
"지금 누나는 마늘 못 먹잖아요."
"하아…. 아니, 진짜."
그리고 이라가 떠주는 미음을 받아먹으며 투덜대고 있다.
전투중에 머리카락이 한두번 뜯어진게 아니라, 머리핀따위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린건지 기억도 안난다.
그래서 도로 마늘을 못먹게 되어버린 현실에 절망하고있다.
예의 그 도구를 다시 만들러 가고싶지만…. 그건 만들때마다 내게 완전히 맞춤으로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값도 꽤 비쌌다.
아직 세찬이한테 김치도 못 담가 줬는데.
에휴.
"으으으…."
"누나, 아파요?"
"아니, 괜찮아."
아프기는 한데, 어떻게 하겠냐.
내 몸이 빨리 낫지 않는것은 이것이 같은 흡혈귀에게 당한 상처이기 때문인것 같다.
은으로 지진 정도는 아니지만, 흡혈귀의 능력에 의한 부상이나 상처는 회복력저해가 일어나는 모양이랄까.
미음을 조금 더 받아먹고는 더이상 먹기 싫다는 의미로 고개를 좌우로 젓자, 이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릇을 치웠다.
뭐, 원래 내가 반찬투정을 하는 그런 타입은 아닌데, 식사가 내장을 지날때마다 조금 가슴이 쓰라려서 어쩔수가 없다.
내장이 제상태가 아닌데 이런걸 왜 먹으라고 하는거지? 게다가 맛도 없잖아.
대체 뭘로 만들어진건지, 무슨 딱풀 녹인것을 먹는 것 같다.
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 같은거라니까 목을 넘기기는 하지만…. 아, 진짜 김치랑 같이 넘기면 먹을만 할것 같은데 말이야.
"몸은 어때."
"어…. 세찬이구나."
자꾸 녀석이 날 껴안았던 장면이랑, 야외에서 아슬아슬하게 보여진것이 떠올라서 자꾸 기분이 싱숭생숭하다.
내 몸도 몇번이고 물수건으로 닦아내서 이제 세찬이 냄새는 배어있지 않다는게 다행이랄까.
녀석도 이곳저곳에 밴드를 붙인채라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어째든 나와는 달리 제 힘으로 걸어다니고 움직일수는 있는거다.
"뭐야, 평소엔 필요한 거라면서 그렇게 많이 먹더니. 저건 남긴거냐?"
세찬이가 내가 남긴 미음이 담긴 그릇을 가리키며 물었다.
난 지지않고 대답했다.
"저거 진짜로 맛 없거든. 먹어보면 알아."
"그럼 약인데 맛이 없겠지."
"세찬아. 그럼 한번 먹어보라니까?"
내가 말하자 녀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라의 손에서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한 술떠서 입에 넣는다.
"제길, 진짜로 맛없네."
"그렇지? 내가 만드는 죽은 존나 맛있는 거라니까."
"그건 그렇네."
그리고 세찬이가 다시 이라에게 그릇을 돌려주자, 이라는 눈이 땡그래져서 나와 세찬이를 번갈아본다.
"그, 그거 누나가 쓰던 숟가락인데…. 가, 간접…."
그러자 세찬이가 미음만큼이나 하얀 안색으로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으윽, 제기랄. 그생각을 못했네."
"응……? 이제와서?"
비위생적인건 맞지만, 그러면 평소에 같은 냄비에 끓인 김치찌개는 어떻게 처먹었대.
난 괜히 기분이 나빠지는것 같아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야, 적당히 하고. 여긴 왜 온거야?"
"잠깐 어디 갈데가 있어서."
그러고보니 녀석의 뒤를 보니까 휠체어가 하나 놓여져 있었다.
녀석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는걸 나도 멀뚱히 쳐다보다가 녀석이 먼저 시선을 피하자, 이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했다.
"나 못움직여. 태워줘."
"..…. 아니, 그런거였으면 그냥 말을 하라고."
아니, 눈싸움 하려는건줄 알았지 나는.
평소엔 추리력도 좋은애가 왜 가만히 있었대.
녀석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오금과 허리로 비집어 들어오며 나를 들어올리는게 느껴지자, 난 즉시 외쳤다.
"야, 야! 이건…!"
"어차피 잠깐이잖아. 참아."
잠깐이지만 두번째로 당하는 공주님안기다.
처음 당했던 때의 기억이 오버랩되어서 그런가, 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해서 가슴이 아프다.
전투 후유증은 언제나 힘들구만.
"으흐극…."
"아프냐?"
"으, 아냐. 빨리 옮겨주기나 해."
이라도 있는데, 쪽 팔리기도 하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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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에는 양산같은게 없어서 세찬이가 휠체어를 밀고 이라가 양산을 들어주었다.
"그러고보니 병원은 어떻게 된거야?"
"지금은 철거했지. 사제가 완전히 불태웠어. 깔끔하게."
"음, 나름 정들었었는데."
나는 내 어깨에 걸쳐진 숄을 만지작거리며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가디건조차 입기 힘들었기에 숄을 입은것이지만, 나름 가디건만큼은 따듯했다. 목도리를 온몸에 두른 느낌이 약간 담요를 덮은것 같기도하고. 그러고 휠체어에 타고 누군가 끌어주고 있으니 침대채로 움직이는것 같아서 너무 편안하다.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는건데?"
"가보면 알아."
"뭘 자꾸 안다고만 하는건지 모르겠어."
나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평소엔 그렇게 설명해주기 좋아하더니, 대체 왜 이럴땐 설명해주지 않는거람.
"그냥 보는편이 이해가 빠를테니까."
"그얘기, 전에도 한번 하지 않았어?"
생각해보니 내가 혈청을 맞고 잠들었을무렵, 지혜를 가르친 사람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아서 궁금했는데.
"아, 그 사람도 지금 가는곳에 있을거다."
"그래?"
그럼 조금 참아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