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수확제
완전변태.
완전히 변태라는 뜻이 아니라, 곤충의 모습이 유충때와 성충때의 외형 변화가 큰 경우를 이야기한다.
그런의미에서 그는 완전변태였다.
"어머니! 제가 곧 죽여드리겠습니다!"
아니, 정정하겠다. 그냥 완전히 변태라는 뜻도 포함이다.
저 지랄하면서 뛰어오는게 정상일리가 없다.
붉은 거인, 붉을 홍을 써서 홍익인간. 아무튼 그 미친 형상이 쫓아오는장면은 결코 뒤를 돌아봐서는 안되게 하는 압박감이 있었다.
거대한 몸체가 바닥을 박찰때마다 대지가 울리며 나를 흔들지만, 그것때문에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딜 일은없다.
왜냐면 이미 4발로 뛰는중이니까.
나는 미친듯이 달리며 외쳤다.
"왜 흡혈귀들은 다 저딴걸로 변해야 하는거야?"
"내가 알겠냐!"
흡혈귀를 타고 흡혈귀에게 쫒기는 흡혈귀 사냥꾼인 한세찬이 말했다.
그렇게 보니까 세찬이도 참 대단한 녀석이잖아.
흡혈귀 라이더라니, 이게 무슨.
그리고 녀석도 나름대로 내 등에 올라타서 마냥 꿀을 빨기만 하는것은 아니었다.
이따금씩 출수하여 폭발하는 은검으로 견제를 하며 속도를 늦추고는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달리면서 세찬이에게 묻는다.
"저런 괴물은 보통 어떻게 상대해?"
"화력."
"단순하네!"
보통 단순한게 효과적이기는 해.
그런데 그 화력이란게 지금 없는게 문제다.
이번엔 진짜로 무슨 준비랄게 없이 밤산책 나왔다가 이지랄이 난거라.
제기랄, 귀신 피하려다 더한걸 만나버렸구만.
이쯤되니까 귀신얼굴 한번 보고싶다.
저 흡혈귀랑 비교좀 해보게.
콰앙!
나는 내게 날아드는 돌멩이, 아니.
거인 입장에서의 돌멩이고, 내가봤을때는 바위인것을 급하게 몸을 꺾어내 회피하며 다시 달린다.
등에 올라탄 세찬이가 으윽, 하며 내 머리를 세게 쥐어뜯는것이 느껴진다.
"악! 머리 잡지마! 뽑힌다고!"
"잡을데가 없는데, 어쩌라고?"
그래, 그렇긴 하네. 근데 머리카락이 뽑히면서 회복되는 탓에 자꾸 피를 소모하고 있는데. 이러면 오히려 강해진 치유력이 독으로 작용하는 꼴이다.
머리에 혈류를 그만 돌리면 되겠지만, 그러기가 쉽지않다. 애초에 머리로 가는 피를 막으면 뇌가 잘 안돌아가기도 하고.
"그럼 제대로 잡던가, 앞머리까지!"
안그래도 지금 세팅해둔 앞머리가 죄다 끊어지고 재생하면서 시야를 미친듯이 가리고 있었기에 달리는 와중에도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이왕 뒤에서 머리를 손잡이로 쓸거라면, 모든 머리를 다 쥐어서 일부가 뜯기지 않도록 해줬으면 한다.
"알겠다. 젠장."
곧 세찬이가 내 앞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스윽 모아서 뒷머리와 함께 꽉 쥐었다.
고무줄이 좀 많이 무거운 포니테일이구나 싶은 느낌이다.
"후우, 그래. 이제야, 뭐좀 제대로 보이네!"
시야가 트이니 살것같다. 그동안 머리카락에 가려지는 부분은 순간순간 뇌에서 부족한 정보로써 처리하고 있었던건지, 시야가 트이니까 정신도 맑아지는 듯 하다.
이 개같은 앞머리, 앞머리는 좀 잘라도 안자라주면 안돼?
하긴, 머리카락이 죄다 재생되는데 앞머리만 안 자라는것도 웃기긴 하지만.
"도망치지마라, 네 죽음이 우리들의 구원일지니!"
"내 알바 아니잖아!"
세상천지 죽고싶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아, 생각해보니까 자살하는 사람도 세상에 참 많기는 하구나.
그렇지만 일단 나는 절대 죽고싶은 부류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랬으면 이 꼴이 된 시점에서 자살했지.
나는 숨이 가빠서 폐가 터질것 같았지만, 혈류를 폐로 감으며 강제로 폐활량을 키워서 가까스로 숨을 유지하며 말했다.
"헉, 헉,대체 얼마나 더 헉, 도망쳐야하지?"
"그래도 곧이다. 이정도 충격이라면 결계 외부까지 전해졌을거고, 그럼 이 지랄도 곧 끝나겠지."
그건 듣던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슬슬 힘이 부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까 온힘을다한 주먹질도 있었고, 계속해서 자잘하게 피를 소모해서 피로감이 슬슬 몰려오는 것이 문제. 으으, 목말라. 이빨이 쑤시는것도 오랜만인데.
흡혈충동이 올라오고있다.
"도망치는 꼴이 마치 개와 같구나!"
세찬이가 뒤로 던진 송곳검의 폭발을 견뎌내며 거인이 다시 돌멩이를 쥐어 던졌다.
나는 흡혈귀, 특수처리된 은제무기, 또는 뭔가 마법적인 능력이나 기술에 당한게 아니라면 금새 회복할 수 있고, 고통도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저렇게 쏘아지는 돌멩이에 맞는다면 단순한 물리력으로 온몸에 구멍이 난채 과다출혈로 죽을게 분명하다.
도대체 저런 괴물딱지가 넘치는 세계에서 어떻게 내가 최강이라고 하는건지 알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런 세계에서 릴리스는 도대체 어떻게 최강이었던거냐.
어머니라면서!
어머니라면 따끔하게 훈계를 할 수 있어야지.
이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걸까?
그때, 세찬이가 내 등 위에서 낮게 읊조린다.
"이게 마지막이다."
녀석이 손에 쥔 송곳검, 그것이 마지막이라 하는것이다.
그동안 몇발이고 박아넣었지만 그저 달려오는 기세를 늦출 뿐이었던 공격이었다. 저 한발이 유의미한 결과로 다가오지는 않을테지.
나는 달리면서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괴기스러운 팔을 앞뒤로 흔들며 쫓아오는 붉은 거인, 그가 지나가는 길목의 나무가 죄다 부서지고 뽑히고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한껏 혈류를 감아 공격하는것이 상시 온몸에 적용된다고 봐도 될것이다.
릴리스는 확실히 육체파는 아니었나봐, 몸의 성능은 좀 지나치게 좋은감이 있지만서도.
하지만 녀석도 얼핏보기에 상당히 지쳐 보이기는 했다.
흘러내릴것같던 붉은색이 조금 색이 바랬달까. 아마도 엄청난 VP를 소모했겠지. 이정도 규모의 대 변신이라니.
세찬이가 등위에서 자세를 낮춰 물었다.
"얼마나 더 달릴 수 있겠어?"
"몰, 라. 지금도, 사실은 힘들…."
갑작스런 감각에 급히 옆으로 튀어나가듯이 꺾었다.
이번엔 그냥 집히는대로 한웅큼을 쥐어서 던진 모양이다.
나무, 돌멩이, 가릴것 없이 크기도 제각각으로 흩뿌리며 날아오는 투사체들.
전부 피할수가 있으려나?
감각에 몸을 맡긴다. 심신을 강제로 차분히하고, 정신을 극한으로 집중해서 동체시력과 반응속도를 끌어올린다.
나는 좀 맞더라도 괜찮겠지만, 등 뒤의 세찬이가 맞으면 그대로 리타이어, 탄막게임을 하는 걸 상상해.
나는 몸전체에 혈류를 감고 극한으로 움직여 모든 투사체를 피해내기는 했으나….
"꺄윽!"
"뭐, 뭐야!"
개새꺄, 거긴 약점이야…!
내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던 한세찬이 다리에 힘을 주면서 옆구리의 약점을 자극한것이다.
집중이 순식간에 풀리면서, 오른손의 붕대 위로 돌멩이 하나가 맞았다.
"씨벌!!"
존나 아파악!
은으로 당한 상처라 아직 고통이 강한데! 그래서 일부러 손바닥은 바닥에 닿지 않게 했는데!
그래서 그대로 손을 헛디뎠고, 헛디딘손이 자세를 무너트려 얼굴을 그대로 바닥에 처박고 갈려버리며 성대하게 넘어지고 말았다. 4발로 달리면서도 넘어질 수가 있다니.
"크윽!"
나름대로 초인적인 근력을 지닌 한세찬이 버티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관성의 힘이 녀석의 육중한 몸뚱이를 내 등에서 떼어놓는다.
그렇게 떨어진 세찬이의 몸이 앞으로 쏘아져나가며 내 머리카락은 놓지 않아서 나는 녀석과 한 덩이가 되어 굴러가 나무에 받아버리고 만다.
"으,으윽…."
눈앞이 깜깜해지고 좆됐음이 바로 느껴진다.
그동안은 날 죽이려고 하던 흡혈귀가 없었지만, 이새끼는 어떻게 안건지 내가 릴리스가 아니라 릴리스의 거죽을 뒤집어쓴 무언가라는 사실을 안것같다.
음, 거죽이라는말 좀 이상하네. 정확히는 릴리스에게 거죽이라고 부를건 없으니까.
릴리스는 그냥 개념, 아니면 힘 그자체라고 부르는 편이 좋으려나.
오히려 거죽은 내 여동생이지.
잠깐만, 지금 그딴게 중요한건 아니지.
내가 나무에 처박혔다는게 중요한 사실이잖아. 한세찬은 어딨지?
그때, 아랫배에 뭔가 거칠고 오싹한 감촉이 느껴진다.
"끄윽… 무슨…. 뭐야이거."
문질문질.
이새끼는 자기가 어딜 만지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야, 어딜 만져 임마!"
"씹, 뭐야?"
"비켜!"
나는 녀석을 밀치기보단 그냥 빠르게 녀석의 몸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안그래도 지금 옷 상태가 말이 아니다. 원래 조금 펑퍼짐한 잠옷이, 가까스로 회피를 계속 하는도중에 여기저기 다 찢겨서 약해진 상태였다.
거기다 성대하게 굴러제꼈으니, 가슴 밑으론 천이 어디로 떨어져 사라졌는지 알 수도 없는 상태다.
"읏…."
게다가 이건 잠옷이라 안에 입은게 없어서 그대로 속살이 노출되고만다.
그래서 정말 천 하나 사이에 두지 못하고 세찬이의 손길이 느껴졌다는 감각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맨살을 보여지는것과 만져지는것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는것 같다.
나는 거의 걸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가디건을 여몄다.
배 부분만 겨우 가려줄 정도네.
나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한세찬에게 묻는다.
"이, 이제 어,어쩌지?"
아, 말더듬었다. 시벌.
"하아, 할수 있는걸 해야겠지. 다시 도망칠 수 있겠냐?"
"아니…. 이제 힘들어."
응고제를 주사하고 붕대로 감쌌던 부위에서 피가 퍼져나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난 순간적인 신체능력은 어떻게 되더라도, 애시당초에 육체파로 설계된 몸뚱이가 아니다.
지속력은 다른 흡혈귀에 비해서 낫다고 볼 수가 없는데, 단지 한층 높은 '격'으로 압도했을 뿐.
지금도 겨우 피를 돌리며 육체를 손보고 있는 와중이다.
가슴께의 상처도 피만 멎었지 제대로 낫고 있지않으니.
젠장, 몸 상태가 말이 아니네. 더이상 이렇게 싸우고 싶지않아. 잘 되어간다 싶으면 꼭 엎어진단 말이야.
"어쩔 수 없나. 도박을 할 수밖에."
"도박은 나쁜건데."
녀석은 내 농담을 가볍게 무시하며 검을 지팡이삼아 일어났다.
자세히보니, 녀석의 몸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머리가 찢어진건지, 피가 얼굴로 몇 줄기인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손은 죄다 부르트고 터져서 피범벅이 된 상태였다.
몸 안쪽이 어떨지는 자켓에 가려져서 전혀 모르겠지만, 녀석의 바지가 청바지라 다행이랄까. 청바지는 어느정도 찢어져도 입을 수가 있잖아.
좀 애매하게 찢겨져서 뭐 패션보다는 거렁뱅이 같아 보이겠지만.
저거는 버려야겠네.
세찬이 뭔가를 꺼내서 공중에 발사했다. 총? 폭발에도 멀쩡놈이 권총따위의 화력으로 저지될리가 없다.
"이건 신호탄이다. 스승님이 결계를 뚫었거나 술사를 처리했다면 좋겠는데."
"그래?"
신호탄이라지만 뭔가 아무런 표식도 없는데. 혹시 이것도 흡혈귀한테는 보이지않는 그런건가?
그럴듯해. 어쩐지 사냥꾼들은 흡혈귀를 왕따시킨다고 느껴질 정도니까. 그 예시로 이름도 안알려주고.
"드디어, 멈췄군."
지친 기색의 붉은 거인은 광택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그야 녀석이 가장 강할때 도망만 다녔으니까, 지금은 지속시간도 간당간당하지 않으려나.
언제나 말도 안되는 짓에는 말도안되는 댓가가 따르는법. 세상은 등가교환이지.
에이샤때도 그렇고, 저런 괴물이 싸워달란다고 에너지를 불태우고 있을때는 굳이 싸워주는게 손해다.
"자, 어머니. 당신의 종이 왔습니다. 완전한 육체로 다시 살아나시어, 다시 저에게 안식을 주십시오."
거인이 자신의 크기를 조금 줄여, 몸에서 혈검을 뽑아내었다.
말그대로, 가슴팍에 손을 집어넣고서는 혈검을 벼려낸것이다.
"안식이라니, 그게 뭔데?"
보통 안식이라함은 죽음을 뜻하는 경우가 많던데.
죽음은 영원한 안식이라고들 하니까.
저놈이 대답을 해줄리도 없어서 나는 고개를 돌려 한세찬을 바라보았다. 아니, 바라보려 했다.
"세찬아?"
없다.
이새끼 혼자 튀었나?
갑자기 배신감이 들고, 허탈함과 허무함이 올라온다.
내가 널 어떻게 메고 다녔는데, 이렇게 날 헌신짝처럼 버릴수가 있나?
도박이란게 이거야? 내가 미끼역할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알을 깨고 나오십시오, 당신의 기사가 여기에 왔습니다."
녀석이 크게 소리치며 허리 아래로 늘어트린채 손을 뒤로 뺐다.
한눈에봐도, 그건 나를 찌르려는 모습이었다.
피해야해, 그런데 이제 몸을 가누기가 어렵다.
그동안 혈류를 돌려가며 신체능력을 강제로 끌어올린탓에, 마치 물리력저해를 당한것마냥 몸이 무겁다.
피가 필요해….
잠깐, 혈검이라면 피로 만들어진거 아냐?
피라면 내 식량, 식량으로 만든 칼이라는거냐?
그렇게 따지고보니 저 거인이 손에든게 검이 아니라 설탕을 녹여만든 사탕으로도 보인다.
근데 저거 꽤나 딱딱하던데, 씹을수 있을까.
곧 녀석이 검을 내게 찔러넣으려한다.
내게 다가오는 검의 극단을 마주보며 타이밍을 잰다. 기회는 한번.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혈류를 끌어모아 녀석이 내지를 검면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녀석의 의지대로 조종되는 연검, 연검이라는건 어딘가엔 무른 부분이 있다는거지. 그래야 휘어질테니까.
녀석은 아마 피를 의지대로 조종해 굳히거나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이런짓이 가능하겠지.
검로를 바닥으로 흘려보내자, 노린듯이 검날이 휘어져 내게 쏘아진다.
이걸 노렸다. 지금 이 찰나의 순간엔 재질이 연해진게 분명하다. 손으로 느껴지는 딱딱했던 감촉이 살짝이나마 물러진 느낌이니까.
"앙."
내 목을 치러 다가오는 혈검을 이빨로 문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빨랐으면 그대로 뒤졌겠지. 하지만 성공했다. 녀석의 혈검을 입에 넣는데 성공한것이다!
진짜로 이빨이 들어가기는 하네?
그렇다면 씹어서 삼킬 뿐이야.
맛은 정말로 사탕같이 달았다.
"효과 확실하구만…."
이것도 피는 맞는 모양인지, 몸에 활기가 다시 들어찬다.
"ㄱ,기사의 피를 먹다니, 이 무슨 파렴치한…! 이 창녀가!"
"ㅁ, 뭐라고!"
창녀라니! 시벌, 평생에 뭐 하나 넣어본적도 없는 몸이야!
남자일때도 내시경검사한번 받아본적없는 완전 깨끗한 몸이거든?
소, 손가락도 아직 안넣어봤는데….
"웃기지 말라고! 니가 피로 칼을 만든게 잘못이지!"
그렇게 소중한 피라면 좀 아껴서 쓰지 그랬냐?
근데 다른 흡혈귀들은 서로의 피를 빠는게 아니었나?
유디라는 대체뭐지? 와인트리는?
"닥쳐라, 비록 껍데기뿐이라 하더라도 그 본질은 어머니이니 경외를 담아 검으로 최후를 맞게 하려 했건만. 더러운 껍데기에겐 그조차 아까워졌다."
"뭐?"
나 안더러워! 매일 목욕도 한다고!
지금은 좀 드럽긴한데….
그냥 칼 써주면 안될까…?
거인은 거대한 손을 뻗어 내 몸을 쥐었다.
조금 줄어서 4~5미터쯤 된 거인이 160센티미터 안팍의 나를 쥐어내는덴 어떠한 문제도 없었다.
"끄으윽, 허으! 으읍….!"
프레스기에 깔린것같은 압박감이다.
뼈가 으스러지면서 온 내장이 쥐어짜여 납작해지는 듯한 감각, 뱃속의 내용물까지 공간의 압박에 못이겨 역류하고 말았다.
"웨엑, 퀙! 케헥!"
몸이 쥐어짜이면서 몸속의 모든 액체가 녀석의 손에 잡히지 않은 부분으로 옮겨간다. 머리랑 발바닥이 터질것같이 느껴진다. 실제로 수많은 혈관이 터졌겠지, 혈류가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걸 보면.
눈물과 토사물과 혈액 속에서, 나는 순간 혼절할뻔했다.
'알렉스….'
정신줄이 놓아질랑 말랑하던 그 순간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조그맣게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의 환청.
드디어 귀신인가?
제기랄. 꺼져, 이제 너 안무서워. 내 앞에 너보다 더한놈이 있거든.
그런데 대체 알렉스가 뭐야?
"케훅. 알렉,스?"
"……뭐?"
갑자기 눈에띄게 당황하는 흡혈귀.
녀석의 손아귀에 힘이 약해지는게 느껴진다.
"허윽, 카학!"
찌부러들었던 폐부에 급격히 공기가 파고들며 폐포를 열어젖히는 감각이 아프다.
거인이 손에 힘을 빼며 그 몸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머리 앞으로 나를 들어 가져왔다.
"어머니, 이십니까?"
"케흑, 흐억, 허으윽!"
물어봐도 대답할수가 없다. 지금은 숨을 쉬는것만해도 너무 바빠서.
그리고 어머니는 니가 아니라매!
대체 알렉스가 뭔데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거냐?
"그럴리가, 당신은…분명히…. 어떻게 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거인.
녀석의 투구 안쪽의 표정을 알수는 없었지만, 안광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걸보니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리고 잠시후, 나도 녀석이랑 비슷하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한세찬이 거인의 등 뒤에서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으니까.
내 등을 좀 타더니, 흡혈귀 등 타는데 선수가 다 됐나.
한세찬이 엄청 두꺼운 와이어를 녀석의 목에 감았다.
그대로 목을 조르려나 싶었는데, 목에 감은 와이어를 세게 묶지는 않은채로 하나 남았다는 그 검을 녀석의 목 언저리에 꽂아넣는다.
은무기라 그런지 들어가긴 하는 모양.
"쿼어어억!!"
녀석이 목을 찔린 고통에 소리치면서 손을 풀었다.
양손중에 한손이 풀려난것이지만 압박감은 훨씬 괜찮아졌다.
진짜 죽는줄 알았는데.
"김석주, 손 내밀어!"
손?
나는 거인의 엄지쪽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왼손을 내밀었다.
녀석이 내 손을 쥐자, 그 훌륭한 근육에서 나오는 근력으로 나를 흡혈귀의 손아귀에서 잡아빼내곤 끌어안는다.
"뭐,뭣."
무슨 수작이지?
난 남자인데, 설마 이녀석 게이라도 되는건가.
평생에 여자를 안아본적이 없으니, 나라도 안고싶은거냐?
그런데 심장이 터질것같이 두근대면서 혈류를 온몸에 공급한다.
무슨 전기충격기라도 쓴것 같네, 왜이렇게 미친듯이 뛰는거지?
"머리 숙여."
녀석이 나를 빈틈없이 껴안은채로 투구 흡혈귀를 등졌다.
딱!
뒷통수에서 핑거스냅으로 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동시에 녀석의 등 뒤에서 강렬한 은색 섬광이 터져나왔다.
세찬이 말대로 고개를 녀석의 품안에 처박지 않았다면 저 폭광에 눈이 멀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저 폭발 자체도 꽤나 치명적이었을테고….
"꽉잡아."
"너, 너어…."
도망친게 아니었구나!
어이어이, 역시 믿고있었다구.
"왜 또 처 울고 그래."
"씁, 아니거든. 이거는 아까 그놈때문에 난거야."
나는 눈물이랑 토사물을 녀석의 쟈켓 위에다 문질러 닦아냈다.
내가 지 쟈켓을 수건 대용으로 쓰는지 어쩐지 알지도 못하고 녀석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녀석의 목에 감았던 와이어를 붙잡아서 착지했다.
발바닥에 땅이 닿자, 한세찬이 한숨을 쉬며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휴우, 안터졌네."
"응? 뭐가?"
혼잣말이라지만 난 들려. 대체 뭐가 안터졌단 말이야?
녀석은 나한테 말따위 하지 않은채로, 와이어의 끝단에 손가락을 튀기고 나를 밀쳤다.
퍼벙, 콰아앙!!
갑자기 폭발하는 와이어, 아니 내가 와이어라고 생각했던건 사실 도폭선이었다!
미친, 도폭선을 타고 내려온거야?
터지면 어쩔 셈이었는데!
나는 엉덩이를 바닥에 박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아야아…. 되게 아프네…."
지금은 사실 온몸의 뼈가 제 위치에 있기만 할 뿐이지, 거의 금가거나 부서진 상태여서 충격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뭔가 서늘한것이….
"!!"
바지, 바지가 어디갔지?
이 시발, 저 홍익인간새끼 손에서 벗어날때 벗겨진 모양이다.
귀여운 호박팬티만이 한장 입혀져있는 아랫도리에 나는 황급히 걸레가 된 가디건을 끌어내려 가리려 했지만, 상의의 꼴도 사실 말은 아니었다. 맨가슴의 밑부분이 슬쩍 드러나는 정도로 찢겨진 잠옷 상의를 붙잡는건 떨어질듯 말듯 매달린 단추 하나 뿐이고, 가디건 역시 제대로 여밀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이제 내 몸 보여주지 말자고 생각하던 중이었는데, 야외에서 이런식으로 노출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오싹거리고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아.
"봐, 봤냐...?"
"……."
녀석은 따로 대답없이, 자신의 쟈켓을 벗어주었다.
시발.